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올 봄에 있었던 부서 워크숍에서 “책은 왜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등에 관한 저의 경험을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94946). 발표를 준비할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저의 독서경험 중심으로 진행하다보니 깊이가 없고 너무 제 자랑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회가 생겼을 때 더 나은 발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독서에 관한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 작가 샤를 린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읽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독서는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위험한 능력이다’, ‘독서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독서는 뇌리에 새기는 문신이다’, 등등의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독서는 □□다”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양한 답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독서를 정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증오의 거품을 무는 천박한 독서’ 등과 같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독서에 관하여 전방위적 정의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 문제는 책이 도구로 전락하면서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0쪽)”라는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만들어진다’가 아니라 ‘만들어져야 한다’로 적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작가보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작가의 일갈에 뜨끔했습니다. 작가가 지적한대로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편견을 굳히려는 생각에서 하는 이기적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혐오스러운 독서에 대한 씁쓸한 추억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틀림없이 맞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책을 읽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dskgdkT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217쪽)‘라고 적은 구절에서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광적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책을 가까이 했던 것,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던 버릇이 지금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글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글쓰기교실에서 만난 김용택시인님께서 많은 독서와 글쓰기가 시인에 이르게 만들더라면서 재능보다는 후천적 노력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4013).

 

옮긴이께서는 “저자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독서가 우리를 구출해줄 구세주’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지도 모른다.(263쪽)”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책읽기는 역시 위대한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과 문학 사이의 줄타기에 대한 글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9.11사건 당시 저널리즘이 보여준 행보가 커다란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테러소식에 즐거워하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의 모습이나 불길을 피해서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추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작가답게 마르셀 프루스트를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할머니가 세비네 부인과 도스토엡스키의 닮은 점을 밝혀낸 점이라거나, 노르푸아를 통해서 ‘빅토리아-니안자 호수의 서안에서 무한성과 관련된 작품’에 관한 말을 했다는 점은 라비슈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등등입니다.

 

또 한 가지, 작가가 적성에 맞지 않는 자신의 법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법대는 내게 최고의 학과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라고 했다는 말을 읽고,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예로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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