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5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희보.강경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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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나온 책들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매일 새롭게 선보이는 책들도 엄청난 상황에서 본다면 책읽기 역시 연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학자, 신학자로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고백록>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백록>은 그가 46살이 되었을 무렵 완성한 13권으로 구성된 자전적 작품으로,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유소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외적인 행적은 물론 내적인 마음의 궤적까지 담고 있는 전반부에서는 방탕한 생활과 생각까지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오랜 방황 끝에 하나님께 귀의하게 된 과정으로부터 그때까지의 방탕한 생활을 뉘우치며 명상에 이르게 되는 과정, 치열한 명상으로 얻은 신학적인 결과물은 물론 천지창조와 창세기,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주해를 담았습니다.

 

<고백록>을 읽게 된 것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제10권 뉘우침 뒤의 명상편에 담긴 기억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10권의 제8장으로부터 13개의 장을 기억에 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유혹을 비롯하여 후각, 청각, 시각 등 감각의 유혹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고 있어 미각에 의하여 기억이 일깨워졌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먼저 하느님을 부르며 찬양하고서, 이 세상에 태어나 열다섯 살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에 지은 죄를 고백하며, 그 무렵 놀이에 빠져 학문을 게을리했음을 고백한다.(21쪽)”라고 서두를 떼고 있습니다.

 

<고백록>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아들이 방탕한 생활과 심지어는 이교에 빠져들고 있음을 지켜보면서 일구월심으로 하느님에 귀의하기를 기도해온 어머니 마리아의 정성입니다. “그때 주님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우셨나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보다 더 심하게 주님을 향해 울었사옵니다.(77쪽)” 다행이었던 것은 결국 아들이 하느님의 품에 드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커다란 슬픔이 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올라왔습니다. 마침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곧 내 눈은 마음의 강력한 명령을 받아 넘쳐흐르는 눈물을 다시 흡수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메마르게 하였습니다.(239쪽)” 어머니의 장례를 통곡과 탄식으로 치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대개 죽은 사람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이 상례이겠지만 어머니는 죽었어도 불행이 아니며 완전한 소멸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픔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기억에 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고 있는 현대의 시점에도 보더라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학문에 의한 기억은 감각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바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기억 속에는 감각으로 터득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고 한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망각 또한 기억 속에 있다고 한 점 역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지 않다면 잃은 것을 찾을 수는 없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에 관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것은 관념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 현대에 들어 축적된 과학적 자료를 접했더라면 그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든 신학적인 해석 부분에 관하여는 저의 앎이 많지 않아 별도로 논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물을 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317쪽)“라고 적은 부분을 보면 솔직한 점에 놀라면서도 과연 그와 같은 설명으로 질문에 대한 답이 될까 싶습니다. 기억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가 될 때 다시 읽어 저자의 심오한 뜻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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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간관리 인생관리 습관
마크 포스터 지음, 형선호 옮김 / 중앙경제평론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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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은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은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중요해보이지 않은 일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서 숨 가쁘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느리게 살기가 화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간에 쫓기듯 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 http://blog.joins.com/yang412/13436681>입니다. 회색신사들의 유혹에 빠져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만,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허덕이고 있는 분이라면 도움이 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마크 포스터의 <스마트한 시간관리 인생관리 습관>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고도 놀 수 있는 시간 갖기>라는 원제목이 더 매력적인 이 책의 저자는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놀 줄도 알아야 일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목표 없이 무의미하게 일하는 것보다 목표를 갖고 집중해서 일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시간을 이용하고 남은 시간으로 개인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우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다는 전제를 세우고, 시간을 관리하는 기법들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법을 넘어 시간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깊이 활동’을 소개합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삶을 잘 관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 관리에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충동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얽매이고, 시간관리 시스템이 없거나 나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등등 원인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시간 관리의 핵심 요령은 ‘No라고 말하기’라고 합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의식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월간 <신동아>에서 ‘차기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특집에서 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67378). 민심을 자극하는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내놓는 지도자를 경계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개인의 삶에서 가치가 낮은 활동에는 ‘No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쉬어가는 페이지에서 동화 한편을 소개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한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동화로부터 시간 관리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선순위, 바로 지금 하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라, 미리 시간을 정하라, 자신이 가장 겁내는 것을 제일 먼저하라, 흐름에 따라가라.(75쪽)”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칙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상황에 맞추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삶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저항과 미루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굳어진 습관을 바꾸는 것을 말하고 미루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당장 해야 할 일을 다양한 이유로 미루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금연이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금연에 성공한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금연이 어렵다는 것은 습관의 저항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큰 저항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법으로 ‘분출’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의 뜻이 정확하게 요약된 단어인지 애매합니다만, 아마도 여러 가지의 일을 섞어서 진행하는데, 일정 시간 단위를 부여하고 일을 마무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나가는 기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실전 연습이 필요한 항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출을 기본 기법으로 하고 깊이 활동을 통하여 심화시키는 것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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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0개의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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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전공을 살린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시장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그때만 해도 막 시작할 때였고, 지방에서는 전무한 상황이어서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었는데, 결국은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고,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되고 말았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옳다고 지금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벨기에 출신 작가 빌렘 엘스호트의 대표작 <9990개의 치즈>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우연히 만난 형의 친구의 소개로 사업을, 그것도 무역업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상거래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이기찬님의 소설 <무역의 신; http://blog.joins.com/yang412/13688742>에서도 맛을 보았습니다만, 지금 다니는 직장도 사업과는 전혀 무관해서 사업에 관한 경험이라고는 전혀없는 평범한 직장인이 과연 사업을, 그것도 무역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이 관점인 것 같습니다.

 

조선소에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라르만스는 우연히 형 친구 스혼베커 변호사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의 변두리를 빙빙도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스혼베커씨는 네덜란드의 치즈회사 사장 호른스트라씨에게 부탁해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총판권을 따게 해준 것입니다. 라르만스는 덜컥 네덜란드로 가서 호른스트라씨를 만나게 되는데, 첫 만남에서 치즈 20톤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즈는 라르만스씨의 뒤를 따라 바로 도착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의 주인공은 치즈를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회사이름 정하기, 편지지 도안만들기 사무실 꾸미기에만 바쁩니다. 당연히 화물 탁송회사에 도착한 치즈를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결국은 탁송회사의 창고에 집어넣고 일부만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때부터 판로를 개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려 20톤에 달하는 9990개의 치즈를 팔아치워야 하기 때문이죠. 누구나 치즈를 먹기 때문에 파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시장조사도 하고, 미리 소매상도 모집을 해야 했던 것이죠. 뒤늦게 대리점을 모집했는데, 적지 않는 대리점 희망자가 나섰지만 그들 역시 치즈판매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라르만스씨가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의문이었지만, 호른스트라가 라르만스씨에게 치즈 20톤을 덜컥 보낸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는데, 스혼베커씨의 저녁모임에 나가면서 허영심이 부풀어오른 라르만스씨의 엉뚱한 해프닝으로 읽혔습니다. 돈키호테적인 도전이 자칫 온 가족을 불행의 늪에 빠트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찍 허황된 꿈을 접는 바람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 빌렘 엘스호트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벨기에 작가로 이 작품 역시 1933년에 발표한 <9990개의 치즈>가 대표작으로 소시민적 삶을 그려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르만스씨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차이가 있어 시대적 배경을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주목거리라 하겠습니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지만 큰 울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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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7-0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보는 책이고 저자입니다. 관심 가네요.

처음처럼 2015-07-02 20:1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처음 만나는 작가입니다.
최근에 다양한 나라의 문학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좋은 일 같습니다.
 
인생의 맛 -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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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논어 위정편에 있는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의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지진 가이위사의)에서 왔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안다’라고 새기는 것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논어, 도덕경 등 다양한 옛 문헌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것은 중국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또한 변모하는 세태에 맞게 해석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서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페드라(Paedra)』의 경우처럼 아무래도 우리에게 소개되는 기회가 많은 문학부문에서 두드러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 『페드라(Paedra)』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후처 페드라와 전처의 아들 히폴리투스 사이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1962년 작품입니다. 학창시절에 유행하던 음악다방에 가면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토카다와 푸가』의 장엄한 연주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면을 OST로 신청해서 듣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는 작업은 이슬람제국의 문화적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제국의 그와 같은 문화 사업은 멸실될 뻔했던 그리스문명의 정신적 산물이 현대로 전해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은 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북소리]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을 소개합니다. 벨기에 태생인 저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졸업 후 문학을 다시 공부하여 2006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 근현대문학을 강의하면서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012년 여름에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 앵테르’의 제안으로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삿갓 북한방랑기」처럼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끼어 넣은 프로그램으로,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몽테뉴의 사상을 밀도 있게 소개하였는데, 의외로 청취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어 방송내용을 책으로 묶어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수상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경우 조롱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40개의 주제를 골라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주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참여’에서 ‘세상의 왕좌’에 이르기까지 모두 40개의 이야기가 원전인 『수상록』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여’를 첫 번째 주제로 정한 것은 몽테뉴의 삶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533년 프랑스 보르도 근처 몽테뉴 성에서 태어난 몽테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라틴어를 먼저 배웠으며, 6살이 되어 고전을 읽을 정도로 라틴어에 유창해진 다음에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르도의 기옌 중학교를 졸업하고 툴루즈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페리괴의 조세재판소를 거쳐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심사관으로 일했습니다. 1568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몽테뉴의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영주자리를 물려받았다. 2년 뒤에는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으로 보내면서 9년여에 걸쳐 『수상록』제1권과 제2권을 저술했습니다.

 

은퇴한 다음에도 가톨릭교도인 앙리 3세의 시종이 되는 등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이 무렵 나바라왕 엔리케와 기즈 공 앙리 사이에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과 종교적 대립으로 시작된 갈등이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몽테뉴의 생애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쟁의 와중에 몽테뉴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내세우면서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하여 에세(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수상록(Essais)』은 라틴 고전에 대한 그의 해박한 교양을 바탕으로 인간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은 시대에 따른 몽테뉴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자화상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금욕주의적 경구를 존경했다. 17세기 사람들은 그에게서 주로 회의주의적이고 '정직한 인간'을 보았고, 장 자크 루소와 후기 낭만파들은 그의 자화상과 자유분방한 문체에 매혹되었다. 19세기의 생트 뵈브는 자연스럽고 독자적인 그의 도덕성에 감동을 받았다. 20세기 독자들은 이 도덕성과 그의 자화상이 갖는 보편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다음 백과사전, 몽테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4408b)

 

‘참여’에서 콩파뇽은 시대적 갈등의 중재자로 활약한 몽테뉴의 삶을 정의하였습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양극화된 세력이 끝이 보이지 않은 갈등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재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대화의 통로는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 제안을 하는 정치인이 계셨는데, 지금은 인용하기에도 적절치 않은 ‘사꾸라’라는 비난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태를 수습하는 중재자를 자임하려는 사람이 등장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갈등의 양측에 걸치고 있는 사람은 때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몽테뉴가 그 힘들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테뉴는 그 까닭을 『수상록』제3권 1장 ‘유용성과 정직성’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갈라놓는 이 거듭되는 분열 속에서 나는 미흡하나마 왕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결과 그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가면으로 그들을 대하는 일은 용케 피했다. (…) 나는 사람을 처음 사귈 때 마음을 터놓는 태도로 상대에게 쉽게 스며들어 상호신뢰를 구축한다. 순박함과 진실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 통용된다.(12쪽)”

 

콩파뇽은 몽테뉴가 유용성과 정직성이라는 문제를 ‘공적 윤리, 목적과 수단, 혹은 국익 우선주의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일단 당시 유행하던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를 부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안정을 최고선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국익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허용되었던 것이 마키아벨리즘입니다. 몽테뉴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만과 위선을 거부했으며, 국익을 위해 개인의 윤리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함과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득이 되는 태도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꼭 같은 무게를 지니는 진리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몽테뉴는 『수상록』의 곳곳에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몽테뉴를 괴롭힌 신장결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콩팥은 오줌을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데 오줌에는 다양한 염류가 녹아있습니다. 무기염류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고체로 변하면서 서로 뭉쳐 돌을 만들게 됩니다. 신장이나 방광처럼 공간이 넉넉한 곳에 생긴 돌은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작은 돌이 요관이나 요도로 내려가다가 걸리면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통증을 가라앉히면서 수분을 섭취하여 돌이 내려가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만, 이와 같은 고식적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과거에는 수술로 돌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약을 먹어 돌을 녹이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요관경을 이용하여 돌을 꺼내거나, 체외충격파쇄석기로 돌을 부수어 나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고식적 치료 방법으로 소변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 맥주를 마시면 돌이 빠져나간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요로결석으로 인한 통증은 고통의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의사에 대한 몽테뉴의 불신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몽테뉴는 이렇게까지 의사를 비난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의료 혜택이 미치는 범위 안의 족속보다 더 일찍 병들고 늦게 회복되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건강은 의학 처방의 속박으로 인해 나빠지고 손상된다. 의사들은 병자들을 관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어느 때라도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건강한 이들을 병자로 만들어놓는다.(134쪽)” 몽테뉴보다 한 세기 뒤에 활동한 몰리에르는 마지막으로 쓴 희곡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Le Malade imaginaire)』에 등장하는 의사를 지식은 있으되 양식(良識)은 전혀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사가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 무렵의 서양의학의 수준, 특히 내과영역에서는 환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서양의학자들이 이롭기보다 해가 되는 치료를 환자에게 시술하여 새로운 재앙을 추가하기까지 했겠나 싶습니다.

 

그 시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볼 때, 의사가 질병을 더 나빠지게 만든다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의사들이 병자를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큼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의사의 도움 없이 참다보니 금방 나았다는 몽테뉴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암과 같은 중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비교적 쉽게 완치가 가능한데, 방치하여 다른 장기로 전이가 생긴 말기에 접어들면 치유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완치에 대한 조급증으로 생기는 치료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환자도 문제입니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키운 중요한 요인 가운데 환자들이 자신의 병력을 속이고 병원을 돌아다닌 행태가 꼽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콩파뇽 역시 “이번만큼은 몽테뉴의 충고를 너무 쉽게 따르지 말자. 오늘날의 의술은 더 이상 르네상스 시대의 어설픈 마법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의학을 믿어도 좋을 듯하다.(137쪽)”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고전의 새로운 해석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화두인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에 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콩파뇽은 키케로에서 차용한 제목 ‘철학, 그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의 한 대목을 뽑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는 죽음이고, 죽음은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필연적 대상이다.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어떻게 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법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리라. (…) 머릿속에 죽음보다 더 빈번히 떠오르는 것은 없도록 하면서, 죽음이 낯설다는 생각을 버리고 연습하고 적응해보자(138-139쪽)”

 

아마도 몽테뉴의 시절 페스트와 전쟁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임의로 연습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백성들의 무심함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이루며 기꺼이 독배를 받아든 소크라테스의 무심함만큼이나 고귀하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앞서 인용한 한 대목에 대하여 저자는 몽테뉴의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합니다. ‘죽음은 끝(bout)이지 인생의 목표(but)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은 삶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리 살다보면 ‘죽음은 홀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몽테뉴의 『수상록』은 수많은 2차 저작물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복잡한 현대의 생활에서도 몽테뉴가 제안하는 삶의 윤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삶의 미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옮긴이의 조언에 따라 『수상록』을 주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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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5-07-01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계시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저는 수상록을 주문할 예정이랍니다.
 
도미노 공부법 - 한 문제를 이해하면 백 문제가 ‘와르르’ 풀리는 가장 단순한 공부 원리
권종철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대입시험을 70년대 초반에 겪었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도 입시가 치열하기는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요즘 대학동기들끼리 만나면 요즘 같은 입시경향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의과대학에 입학도 못했을 거라고 농담을 합니다. 그때도 물론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전해기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문제가 남느냐 내가 쓰러지냐는 식으로 단순 무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전해지는 다양한 공부법들을 보면서 그 옛날 이런 비법을 알았더라면 무엇이라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일단 공부를 마쳤기 때문에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공부하는 새로운 비법이라도 나오면 은근히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버릇 탓인것 같습니다. 권종철선생님의 <도미노 공부법>은 제가 참여하고 있는 서평단에서 추천한 책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색다른 공부법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아이들이 결혼 전입니다만 손주라도 생기면 할아버지가 좋은 공부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젊어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간혹 즐기던 오락도 요즘에는 별로 기회가 없습니다만, 그 동네에는 ‘초반 끝발이 개끝발’이라는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경구처럼 ‘중학교 때까지 공부 잘하던 아이가 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게 되는가?’라는 단순해 보이는 의문에 대한 답을 <도미노 공부법>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추스르면서 칼을 갈았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끈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불안감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절한 열망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도미노에서 찾은 것처럼 공부에 빠져들게 만드는 결정적 한방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 한 방이 바로 ‘깊은 공부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성공을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도미노공부법>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문제를 진단하고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미노게임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도미노를 밀었을 뿐인데 엄청나게 많은 도미노들이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렇든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첫 번째 도미노를 제대로 쓰러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진단하는 과정도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저자는 ‘나를 진단하라’,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라’, ‘성공의 경험을 축적하라’고 하는 세 가지를 첫 번째 도미노에 해당하는 ‘깊은 공부’의 3요소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피기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목표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작은 성공이라고 우선은 성공을 이루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서는 과목별로 깊은 공부를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역시 국어, 수학, 영어의 세 과목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다른 과목들은 이들 세 과목의 방법을 원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깊은 공부에 접근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어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깊은 공부를 시작하기 위하여 우선 세 가지 능력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집중력, 이해력, 응용력입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기초적인 학습능력에 해당하는 이 세 가지 능력을 쌓는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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