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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맛 -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논어 위정편에 있는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의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지진 가이위사의)에서 왔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안다’라고 새기는 것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논어, 도덕경 등 다양한 옛 문헌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것은 중국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또한 변모하는 세태에 맞게 해석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서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페드라(Paedra)』의 경우처럼 아무래도 우리에게 소개되는 기회가 많은 문학부문에서 두드러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 『페드라(Paedra)』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후처 페드라와 전처의 아들 히폴리투스 사이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1962년 작품입니다. 학창시절에 유행하던 음악다방에 가면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토카다와 푸가』의 장엄한 연주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면을 OST로 신청해서 듣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는 작업은 이슬람제국의 문화적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제국의 그와 같은 문화 사업은 멸실될 뻔했던 그리스문명의 정신적 산물이 현대로 전해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은 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북소리]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을 소개합니다. 벨기에 태생인 저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졸업 후 문학을 다시 공부하여 2006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 근현대문학을 강의하면서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012년 여름에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 앵테르’의 제안으로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삿갓 북한방랑기」처럼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끼어 넣은 프로그램으로,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몽테뉴의 사상을 밀도 있게 소개하였는데, 의외로 청취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어 방송내용을 책으로 묶어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수상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경우 조롱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40개의 주제를 골라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주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참여’에서 ‘세상의 왕좌’에 이르기까지 모두 40개의 이야기가 원전인 『수상록』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여’를 첫 번째 주제로 정한 것은 몽테뉴의 삶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533년 프랑스 보르도 근처 몽테뉴 성에서 태어난 몽테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라틴어를 먼저 배웠으며, 6살이 되어 고전을 읽을 정도로 라틴어에 유창해진 다음에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르도의 기옌 중학교를 졸업하고 툴루즈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페리괴의 조세재판소를 거쳐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심사관으로 일했습니다. 1568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몽테뉴의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영주자리를 물려받았다. 2년 뒤에는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으로 보내면서 9년여에 걸쳐 『수상록』제1권과 제2권을 저술했습니다.
은퇴한 다음에도 가톨릭교도인 앙리 3세의 시종이 되는 등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이 무렵 나바라왕 엔리케와 기즈 공 앙리 사이에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과 종교적 대립으로 시작된 갈등이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몽테뉴의 생애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쟁의 와중에 몽테뉴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내세우면서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하여 에세(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수상록(Essais)』은 라틴 고전에 대한 그의 해박한 교양을 바탕으로 인간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은 시대에 따른 몽테뉴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자화상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금욕주의적 경구를 존경했다. 17세기 사람들은 그에게서 주로 회의주의적이고 '정직한 인간'을 보았고, 장 자크 루소와 후기 낭만파들은 그의 자화상과 자유분방한 문체에 매혹되었다. 19세기의 생트 뵈브는 자연스럽고 독자적인 그의 도덕성에 감동을 받았다. 20세기 독자들은 이 도덕성과 그의 자화상이 갖는 보편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다음 백과사전, 몽테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4408b)
‘참여’에서 콩파뇽은 시대적 갈등의 중재자로 활약한 몽테뉴의 삶을 정의하였습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양극화된 세력이 끝이 보이지 않은 갈등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재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대화의 통로는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 제안을 하는 정치인이 계셨는데, 지금은 인용하기에도 적절치 않은 ‘사꾸라’라는 비난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태를 수습하는 중재자를 자임하려는 사람이 등장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갈등의 양측에 걸치고 있는 사람은 때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몽테뉴가 그 힘들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테뉴는 그 까닭을 『수상록』제3권 1장 ‘유용성과 정직성’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갈라놓는 이 거듭되는 분열 속에서 나는 미흡하나마 왕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결과 그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가면으로 그들을 대하는 일은 용케 피했다. (…) 나는 사람을 처음 사귈 때 마음을 터놓는 태도로 상대에게 쉽게 스며들어 상호신뢰를 구축한다. 순박함과 진실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 통용된다.(12쪽)”
콩파뇽은 몽테뉴가 유용성과 정직성이라는 문제를 ‘공적 윤리, 목적과 수단, 혹은 국익 우선주의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일단 당시 유행하던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를 부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안정을 최고선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국익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허용되었던 것이 마키아벨리즘입니다. 몽테뉴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만과 위선을 거부했으며, 국익을 위해 개인의 윤리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함과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득이 되는 태도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꼭 같은 무게를 지니는 진리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몽테뉴는 『수상록』의 곳곳에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몽테뉴를 괴롭힌 신장결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콩팥은 오줌을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데 오줌에는 다양한 염류가 녹아있습니다. 무기염류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고체로 변하면서 서로 뭉쳐 돌을 만들게 됩니다. 신장이나 방광처럼 공간이 넉넉한 곳에 생긴 돌은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작은 돌이 요관이나 요도로 내려가다가 걸리면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통증을 가라앉히면서 수분을 섭취하여 돌이 내려가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만, 이와 같은 고식적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과거에는 수술로 돌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약을 먹어 돌을 녹이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요관경을 이용하여 돌을 꺼내거나, 체외충격파쇄석기로 돌을 부수어 나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고식적 치료 방법으로 소변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 맥주를 마시면 돌이 빠져나간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요로결석으로 인한 통증은 고통의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의사에 대한 몽테뉴의 불신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몽테뉴는 이렇게까지 의사를 비난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의료 혜택이 미치는 범위 안의 족속보다 더 일찍 병들고 늦게 회복되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건강은 의학 처방의 속박으로 인해 나빠지고 손상된다. 의사들은 병자들을 관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어느 때라도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건강한 이들을 병자로 만들어놓는다.(134쪽)” 몽테뉴보다 한 세기 뒤에 활동한 몰리에르는 마지막으로 쓴 희곡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Le Malade imaginaire)』에 등장하는 의사를 지식은 있으되 양식(良識)은 전혀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사가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 무렵의 서양의학의 수준, 특히 내과영역에서는 환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서양의학자들이 이롭기보다 해가 되는 치료를 환자에게 시술하여 새로운 재앙을 추가하기까지 했겠나 싶습니다.
그 시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볼 때, 의사가 질병을 더 나빠지게 만든다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의사들이 병자를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큼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의사의 도움 없이 참다보니 금방 나았다는 몽테뉴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암과 같은 중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비교적 쉽게 완치가 가능한데, 방치하여 다른 장기로 전이가 생긴 말기에 접어들면 치유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완치에 대한 조급증으로 생기는 치료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환자도 문제입니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키운 중요한 요인 가운데 환자들이 자신의 병력을 속이고 병원을 돌아다닌 행태가 꼽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콩파뇽 역시 “이번만큼은 몽테뉴의 충고를 너무 쉽게 따르지 말자. 오늘날의 의술은 더 이상 르네상스 시대의 어설픈 마법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의학을 믿어도 좋을 듯하다.(137쪽)”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고전의 새로운 해석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화두인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에 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콩파뇽은 키케로에서 차용한 제목 ‘철학, 그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의 한 대목을 뽑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는 죽음이고, 죽음은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필연적 대상이다.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어떻게 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법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리라. (…) 머릿속에 죽음보다 더 빈번히 떠오르는 것은 없도록 하면서, 죽음이 낯설다는 생각을 버리고 연습하고 적응해보자(138-139쪽)”
아마도 몽테뉴의 시절 페스트와 전쟁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임의로 연습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백성들의 무심함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이루며 기꺼이 독배를 받아든 소크라테스의 무심함만큼이나 고귀하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앞서 인용한 한 대목에 대하여 저자는 몽테뉴의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합니다. ‘죽음은 끝(bout)이지 인생의 목표(but)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은 삶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리 살다보면 ‘죽음은 홀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몽테뉴의 『수상록』은 수많은 2차 저작물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복잡한 현대의 생활에서도 몽테뉴가 제안하는 삶의 윤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삶의 미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옮긴이의 조언에 따라 『수상록』을 주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