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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0개의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전공을 살린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시장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그때만 해도 막 시작할 때였고, 지방에서는 전무한 상황이어서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었는데, 결국은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고,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되고 말았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옳다고 지금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벨기에 출신 작가 빌렘 엘스호트의 대표작 <9990개의 치즈>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우연히 만난 형의 친구의 소개로 사업을, 그것도 무역업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상거래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이기찬님의 소설 <무역의 신; http://blog.joins.com/yang412/13688742>에서도 맛을 보았습니다만, 지금 다니는 직장도 사업과는 전혀 무관해서 사업에 관한 경험이라고는 전혀없는 평범한 직장인이 과연 사업을, 그것도 무역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이 관점인 것 같습니다.
조선소에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라르만스는 우연히 형 친구 스혼베커 변호사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의 변두리를 빙빙도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스혼베커씨는 네덜란드의 치즈회사 사장 호른스트라씨에게 부탁해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총판권을 따게 해준 것입니다. 라르만스는 덜컥 네덜란드로 가서 호른스트라씨를 만나게 되는데, 첫 만남에서 치즈 20톤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즈는 라르만스씨의 뒤를 따라 바로 도착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의 주인공은 치즈를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회사이름 정하기, 편지지 도안만들기 사무실 꾸미기에만 바쁩니다. 당연히 화물 탁송회사에 도착한 치즈를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결국은 탁송회사의 창고에 집어넣고 일부만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때부터 판로를 개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려 20톤에 달하는 9990개의 치즈를 팔아치워야 하기 때문이죠. 누구나 치즈를 먹기 때문에 파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시장조사도 하고, 미리 소매상도 모집을 해야 했던 것이죠. 뒤늦게 대리점을 모집했는데, 적지 않는 대리점 희망자가 나섰지만 그들 역시 치즈판매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라르만스씨가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의문이었지만, 호른스트라가 라르만스씨에게 치즈 20톤을 덜컥 보낸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는데, 스혼베커씨의 저녁모임에 나가면서 허영심이 부풀어오른 라르만스씨의 엉뚱한 해프닝으로 읽혔습니다. 돈키호테적인 도전이 자칫 온 가족을 불행의 늪에 빠트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찍 허황된 꿈을 접는 바람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 빌렘 엘스호트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벨기에 작가로 이 작품 역시 1933년에 발표한 <9990개의 치즈>가 대표작으로 소시민적 삶을 그려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르만스씨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차이가 있어 시대적 배경을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주목거리라 하겠습니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지만 큰 울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