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향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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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일정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활동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의 초기작품인 <산시로>를 읽고서 산시로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에서 <그 후><><산시로>의 후속작이라 해서 읽기로 하였는데 <그 후><>을 순서가 바뀌어 읽게 되었습니다.


산시로의 작품소개를 보면,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과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자 천착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는 곰곰이 생각해볼 인생의 화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소세키는 <그 후>가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의 모두에 있는 역자의 글에서는 “<그 후>에서 도쿄대학을 졸업한 다이스케를 주인공으로 하여, 대학 시절 의협심 때문에 친구에게 양보했던 미치요라는 여성을 천의에 따라 되찾으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라고 하였으며, “<>에서는 천의에 맞지만 사람의 도리에는 어긋나는 사랑을 하게 된 <그 후>의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바통을 이어받은 소스케와 오요네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셋집에서 쓸쓸하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5)”라고 했습니다.


<산시로>의 주인공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여성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두 사람은 손도 잡지 않고 밤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그냥 헤어졌더라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터인데, 그녀가 산시로에게 건넨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는 말을 곱씹어보게 합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산시로를 따라 여관에까지 쫓아온 그녀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그녀는 왜 적극적으로 산시로를 유혹하지 않았을까요? 산시로는 배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순수하지 않았던 그녀야 말로 배짱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 3부작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만, 주인공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산시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명의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비교해본 작품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싶습니다.


<>19103월부터 6월까지 도쿄 아사히신문과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전작이 끝날 무렵 차기 작품을 예고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을 작가가 정하지 않고 문하생들이 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의뢰받은 문하생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춰보고 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을 제목으로 해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니 작품의 얼개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의 의미를 녹여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는 잇소암에 참선을 하러갔다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소스케의 독백에 제목인 의 의미를 새겨 넣었습니다. “나는 나의 문을 얼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4-245)”


문의 주인공 소스케는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일을 숙부에게 맡기고는 내버려 둔 탓에 동생의 학업조차 돌보아줄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런 성격인 소스케가 친구 야스이와 함께 살던 오요네가 여동생이라는 말만 믿고는 결혼해서 살게 된다는 설정도 애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세키를 존경하는 분들은 그의 문체나 이야기의 구성이 빼어나다고 합니다만, 모호한 부분이 많고 마무리 역시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재소설의 경우 회차가 끝날 무렵에 갈등구조를 키워서 독자들이 다음 회차에 관심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전반적으로 이런 구조를 볼 수 없고, 비슷한 상황도 유야무야 정리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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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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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로 친숙한 사뮈엘 베케트의 <프루스트>는 일본근대문학기행 4일째 저녁에 읽었습니다. 얇다는 이유로 골랐지만 내용은 결코 얇지 않았습니다.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던 1930, 그러니까 24살이 되던 해에 낸 첫 비평집입니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세 번 읽었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케트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프루스트 방정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라면서, 프루스트  해석의 다중성을 깊게 살펴보기 위하여 프루스트식 논지의 내적연대를 따라갈것이며, 저주와 구원의 쌍두괴물인 시간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라 합니다. 작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삶이나 그와 관9ㅡ련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고 했습니다.


베케트는 1. 작가 프루스트가 아닌 개인 프루스트, 2. 프루스트와 관련된 주변인들의 증언,3.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 프루스트, 4.  러스킨 숭배자이자 번역가 프루스트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작품과 소설가  프루스트에게 집중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이 작품의 구조가 허술하고 파편적인 소재들을 나열한데 그치고 있다는 평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몇 차례 읽어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케트는 이 작품 속에서 디딤돌을 보았고, 그 위에 다양한 요소들을 쌓아올리고 있음을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중년 이상이 된 화자가 어느 날 프티 마들렌을 차와 함께 마시다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데서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의 시기로부터 장년(아마도 전쟁에 나갔다 온 어느 날일 수도 있겠습니다.)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일은 기억을 회상하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추억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화자와 알베르틴의 관계 역시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르셀이 발베크에서 만난 한무리의 여자 중 하나이지만 마르셀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그녀가 파리에서는 당당하게 나서고 마르셀 또한 큰 관심이 없던 그녀와 동거에 들어가는 상황이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자는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비극적 관계는 실패가 예고된 인간관계의 전형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신분상승을 꾀하는 알베르틴이 끊임없이 속이고, 마르셀 역시 알베르틴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구조에서는 사랑이 배태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베케트는 기억과 습관은 시간이라는 암이 가지고 있는 종양이라고 했습니다. 기억과 습관은 프루스트 소설의 가장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제하는데, 그 작용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억의 법칙은 습관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식물과 관련된 은유가 많이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인간을 식물에 비교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처럼 식물에 관한 은유가 빈번한 것은 도덕적 가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프루스트의 완전한 무관심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셀은 되찾은 시간에 이르러서야 소설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재능이 부족한 것은 관찰능력.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관찰습관의 부재 탓으로 돌렸던 것입니다(56). 사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프루스트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얼마나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해내었는지 놀라곤 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얻었다고 보입니다.


베케트 역시 젊은 시절 프루스트에 대한 비평을 쓰면서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느꼈고, 작가로서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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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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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들  가운데 의미 있는 날이라곤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이 우주에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어보십시오.


일찍이 수영에 재능이 있어 올림픽 대표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지쳐 포기하고 오빠와 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작곡도 해보지만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면서 시들해지고, 도서관 사서의 추천으로 해양학자의 꿈을 키워보지만 꿈에 그치고, 남친의 희망대로 카페를 함께 운영하지만 자신의 꿈이 아닌지라 시들해지는, 하는 일마다 좌절하고 마는 그녀는 키우던 고양이마저도 사고로 죽게 되자 스스로의 삶을 그만두기로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서관입니다. 평소 체스를 함께 두던 사서 엘름 부인이 그녀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자정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시간의 경계에 있는 도서관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후회한 일들이 적힌 책과 그녀가 살아보지 못한 무수한 날들에 관한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녀는 엘름 부인의 권유에 따라 살아보지 못했던 날들을 살아보는데, 그러한 날 역시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한밤중의 도서관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죽음을 맞은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책의 원조는 단테의 신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테 엘리기에리가 베를리오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 그리고 와 짝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의 일내로 천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사서 엘름부인의 안내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워 커다란 나무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닮았다고 설명합니다. 나무의 중심이 되는 줄기가 그의 삶이지만 수많은 곁가지들은 그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삶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런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아가서는 평행우주 이론에 따라 동시에 또 다른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삶이라는 이론도 제기됩니다.


화자인 로라는 엘름부인의 안내에 따라 후회의 책에 나오는 선택하지 않아서 후회했던 삶들을 살아봅니다. 댄과의 동업, 접었던 수영을 계속해서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라 할 수도 있었던 삶들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구과학을 연구하여 북극권에 있는 스발바르제도에 가지만 북극곰의 습격을 받는 순간 살아야겠다는 인식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 죽어야겠다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거기에 존재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곳은 어디일까요?


로라는 심야의 도서관에 들어와서 살아보았던 삶들은 결국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섭니다. 이에 이르자 엘름부인은 "절대 사소한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279)"라고 조언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어느 하나 사소한 일은 없습니다. 살아보고 싶은 삶을 고르기 위해 많은 삶을 살아봐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저 어딘가에 즐길 수 있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일 뿐,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라던 소로우의 말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로라의 원래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의 부재'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결국 사랑이 가득 찬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만, 이번에는 그 삶에 머무르는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 수월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사랑으로 채워진 그런 삶으로 찾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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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장지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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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자료조사를 했을 때 아그리젠토 출신의 루이지 피란델로가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 가운데 우선 고른 작품은 희곡으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한 인연도 작용했습니다.


희곡이면서도 특이하게 서문이 먼저 나옵니다. 주석을 보면 1921년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어렵다는 비평이 이어지자, 1925년 피란델로는 <나는 어떻게 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썼는가>라는 제목으로 극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코메디아에 발표했는데, 이후 출판되는 책에는 이 글이 서문의 형식으로 실리게 됐다고 합니다.


작가의 희곡작품 <역할놀이>를 연습하는 장소에 일가족 6명이 찾아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실은 뒤에 한 명이 찾아오기 때문에 7명이 되는데, 뒤에 찾아온  인물은 작가를 찾는 것이 아니니 제목이 틀렸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찾는 작가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6명의 등장인물은 사실 피란델로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인물들인데, 이들의 사연은 가히 충격적인 탓에 처음에는 이들을 쫓아내려던 연출은 물론 기왕의 작품을 연습하던 배우들까지도 이들의 사연에 빠져듭니다.


6명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연기하겠다고 주장하지만 연출은 자신의 배우들에게 이들의 역할을 맡기게 됩니다. 배우들이 이들이 이야기한 사연을 연기하기 시작하면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실제 모습이나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작가가 시, 소설, 희곡 등을 발표하면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롯이 독자나 연출의 몫이 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희곡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작품의 내용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역시 공연 때마다 수정된 까닭에 초본이 어느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란델로는 자신이 창조해낸 등장인물들이 혼자 스스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 6명의 등장인물들은 극중극의 형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이야기의 기본틀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므로 변조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작가 역시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극적인 효과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실을 변주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6명의 등장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아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이 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어떻게 꼬이게 됐는지 모호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의 관계가 꼬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명의 등장인물들의 개성만큼은 분명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직접 이야기한 것처럼 6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아버지와 의붓딸의 성격이 가장 분명하고 강하게 대립하는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연은 연출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극적인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만, 극이 끝날 때까지 작가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올라갈 수 있을지  여부도 분명치 않습니다. 피란델로의 말대로라면, 이들 6명의 등장인물들은 피란델로가 창조해냈기 때문에 결국은 이들의 이야기가 극중극의 형태로 포함되는 연극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작품이 어렵다는 사실은 피란델로 역시 인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존의 연극이 갖추고 있는 틀을 깨부슨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란 점이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것은 아닐까요?


만약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면 전통극처럼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무대장식을 변경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을 터이니 등장인물 누군가가 무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아야 힌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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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8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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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등단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로쟈 이현우 선생님과 함께 하는 펀트레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첫날 숙소에 들어 자정까지 읽어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근대문학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가지는 위치때문에 이번 여행은 소세키로 시작해서 소세키로 마무리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해주는 화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통은 그리스 극에서 합창단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는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 극의 합창단은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청중의 이해를 돕기도 하고, 심지어는 등장인물에게 조언하는 등, 극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로소이다>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고양이는 극의 진행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고양이의 처지로 인간과의 의사소통이 불가하다는 한계때문입니다.


특이한 점은 고양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치 인간사처럼 설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한 바, 나는 인간이란 참으로 이기적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1)" 이와같은 고양이의 시각은 어쩌면 작가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나쓰메 소세키가 센다기초에 살 무렵 집에 흘러든 검은 아기고양이가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117일 아침에 찾아갈 예정인 소세키 산방이 있는 동네의 거리에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도. 작중의 화자인 고양이가 집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설정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작중의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들은 엄청 다양한  출처에 바탕하고 있는데, 하이쿠를 비롯한 다양한 일본 일본 작품들은 당연한 것이고, 중국의 고사들은 소세키가 한학을 배운데 기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물론 영국을 비롯한 대륙문학은 소세키가 영국에 유학할 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읽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했을 것입니다.


작중의 화자인 고양이는 진화의 결과로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시원치않은 구석이 남아 있는데요. 예를 들면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미묘한 춤을 추게 되어 가족들의 놀림이 된다거나, 평소의 산책길인 울타리를 점령한 까마귀들에 밀려 아래로  떨어지는 볼썽 사나운 모습도 연출합니다. 이런 모습도 사실은 인간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은 잡지 호토토기스에 도입부가 실렸을 때 독자의 호평을 받게  되면서 11회차까지 이어진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과정은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합니다. 1화에서는 "고백하건대 나는 고양이치고 그리 잘난 고양이가 아니다. 키도 그렇고 털도 그렇고 얼굴 생김새도 그렇고, 다른 고양이들보다 잘났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14)"라고 겸양을 떨더니, 다음화에서는 "멍청한 주인은 아직도 모르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중얼거렸다. '올해가 고양이 해인가내가 그렇게 유명해졌다는  것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듯하다.(28)"라고 은근 자랑입니다.


과거 쪽대본을 바탕으로 연속극을 빠듯하게 제작할 때 그랬다거나,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들이 한 회차가 끝날 무렵 긴박하게 이야기의 줄거리가 요동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상당부분이 사전에 제작되기 때문에 이야기긴 사전에 기획된 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편입니다. <고양이로소이다> 역시 연재되던 소설인 탓에 막판뒤집기  식으로 커디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업하는 가네다 집안의 영애와 관련하여 셋이서 작당하여 연서를 보낸 사건도 결말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이며, 영애와 혼담이 오가던 간게쓰가 고향에 갔다가 결혼을 해서 돌아온다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화자인 고양이가 마지막 장면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커다란 물독에 빠져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슬픈 결말인데 이는 지병을 안고 버텨오던 작가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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