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 교육 강좌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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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첫날 찾은 일본근대문학관에서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구경하고서 <금각사>와 함께 읽게 된 책입니다. 제목으로 보아 미시마 유키오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작가가 이런 성격의 책을 쓰려면 적어도 기획 의도를 밝히는 글쯤은 앞에 붙어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지만 없었습니다. 다만 문학평론가 오쿠노 다케오가 말미에 붙인 해설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성품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 “(미시마)는 대단히 웅대하고 진지한 장편에만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곳엔 놀이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부도덕 교육 강좌>에서는 미시마의 소설에 나타나지 않은 기지와 역설, 웃음이 충분히 발현되었다. 연재 무대가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둥적인 주간지였던 만큼, 미시마 유키오는 격식을 버리고 마음껏 장난을 친다.(414쪽)”라고 적었습니다.


‘모르는 남자와도 술집에 갈 수 있다’라는 글로 시작해서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까지 모두 67꼭지의 글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34세이던 1958년에 연재되었고, 이듬해 중앙공론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왔으니 지금으로부터 67년전에 쓰인 글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현대(당시)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예술에 대한 동경이 녹아들어 있다.(415쪽)”라고 다케오는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50년 전의 글인데도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다.(416쪽)’라고 하였습니다. 저처럼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전에 <금각사>를 읽었다는 옮긴이는 “혹시 예언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5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1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온통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다.(419쪽)”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요즈음의 세태와 많이 닮은 점도 있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점은 먼 훗날 현실화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에는 제가 지난 해 읽은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사회심리학과의 로랑 베그 교수가 쓴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와 맥을 같이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https://blog.naver.com/neuro412/223688253461>의 경우는 이미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부도덕 교육 강좌>는 지금까지 도덕적이라고 생각해온 명제를 뒤집어 생각해보라는 권고라는 생각입니다.


몇 가지 의표를 찌르는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기로 합니다. 먼저 ‘청년이여, 나약해져라’에서는 체육이 강조되고 영양이 좋아지면서 10대 남녀의 체격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하는 점은 “정치가는 청년의 사상을 활용하는 시늉만 보이지 실제로 이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청년의 육체뿐이라는 사실이다. (…) 그러므로 정치가의 의표를 찌르려면 청년들이 ‘문약’에 흐르고 ‘유약’에 빠져서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흐늘흐늘한 육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119쪽)”라는 주장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노회한 정치가들이 청년들의 참신한 생각을 정책에 반영하기보다는 구닥다리 정치행태를 지키는 행동대원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속셈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하고, 이들의 속셈에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젊은 세대다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매사에 투덜거려라’라는 글에서는 “인생만사 무슨 일에든 ‘지당하십니다’로 일관하면 손해만 볼 뿐 이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358쪽)”라고 일갈합니다. 어수룩한 삶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나는 몹시 화났어”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즐거움이며 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이다.(362쪽)라고 주장합니다. 생각해보면 불평을 털어놓으려면 스스로도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야 합니다. 책잡힐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주장할 것은 분명하게 주장하도록 해야 스스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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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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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첫날 일본근대문학관을 찾았습니다. 도쿄 메구로구의 고마바 공원에 있는 일본근대문학관은 패전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던 과정에서 문학자료의 분산을 막기 위해 1967년에 개관하였습니다. 150명 이상의 현대 일본 작가와 관련된 수십만점의 도서, 서신, 잡지, 일기, 육필원고, 동영상 등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일정에 따라 방문한 일본근대문학관에서는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주면 기념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시회에 나와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어 해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번 여행의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근대작가의 한 명으로 당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 할복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단편소설 156, 장편소설 36, 희곡 및 시나리오 73, 수필 비평, 대담 등 400편 이상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전시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히는 <금각사>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금각사>1950년 교토에 있는 금각사를 불태운 승려에 초점을 맞추어 범행과정의 심리상태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킨가쿠지(金閣寺)라고 하는 교토의 로쿠온지(鹿園寺)는 오사카에서 학회가 열렸을 때 가본 적이 있습니다. 벽을 온통 금빛으로 칠한 사찰건물이 연못에 비쳐 보이는 특이한 풍광으로 기억합니다이 절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는데 1950년의 화재로 불탔던 것을 1955년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방화범 하야시 쇼켄은 조그만 절간의 주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병약하고 말을 더듬어 주위로부터 놀림을 당하였지만, 태연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금각사 주지의 도제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외톨이로 지내면서 성격이 괴팍해져 다른 도제들과 다툼이 잦았다고 합니다. 조서에 따르면 장로는 친절한 듯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데가 있고, 나만을 따돌렸다.’고 했습니다. 방화사건 이후의 정신감정에 따르면 가볍기는 하지만 정신이상증세가 있기에, 분열병질로 진단하여야 할 상태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본 범행은 동증병질에 의 부분현상인 병적 우월 관념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동 사건을 소재로 삼아 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주인공 미조구치의 고백으로 일관되는 1인칭 소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금각사에 유별난 관심과 애정, 심지어는 일체감마저 갖게된 미조구치입니다. 금각사에 대한 이런 감정들은 성장하면서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방해하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금각사를 불태우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미조우치가 작은 아버지 집에 맡겨져 중학에 다닐 무렵 같은 동네에 우이코라는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해군병원의 간호사가 된 우이코 앞에 나섰지만 말을 더듬는 바람에 곤혹을 치루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해군기지에서 병사가 탈영한 사건과 관련된 우이코가 탈영병과 함께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미조구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미조구치가 아버지로부터 말로 듣던 금각사를 처음 보았을 때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꼭대기의 봉황도,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름답기는커녕 부조화하고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29)”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실망을 주었던 금각이 야스오카에서 돌아온 후 나날이 미조구치의 마음속에서 다시 아름다움을 되살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미조구치는 교토의 금각사로 가서 도제가 되었고, 득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득도(得度)는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득도(得道)가 아니라 불교에서 승려가 되기 위한 출가의식을 이야기합니다.


교토의 중학교로 전학을 하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쓰루가와라고 하는 동료 도제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 무렵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했고 금각사가 불에 타게 될 것이라고 미조구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생각이 훗날 금각사를 불태울 생각으로 전이된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심한 안짱다리를 가진 가시와기와 친구가 되는데 그 이후로 미조구치의 행동에 변화가 생깁니다. 수업을 빼먹고 여자들과 어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찾아보겠다고 시도할 때마다 금각이 나타나 관계를 방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시와기의 꽃꽂이 선생과 관계를 시도할 때 역시 금각이 나타나 방해받게 되면서 금각사를 불태우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금각사 주지의 일탈을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난 것도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데 힘을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금각사를 사랑하던 미조구치가 금각사를 불태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어 미주구치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하면서, 과연 그토록 대담한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미조구치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조구치의 치명적인 생각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묘안은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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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향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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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일정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활동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의 초기작품인 <산시로>를 읽고서 산시로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에서 <그 후><><산시로>의 후속작이라 해서 읽기로 하였는데 <그 후><>을 순서가 바뀌어 읽게 되었습니다.


산시로의 작품소개를 보면,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과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자 천착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는 곰곰이 생각해볼 인생의 화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소세키는 <그 후>가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의 모두에 있는 역자의 글에서는 “<그 후>에서 도쿄대학을 졸업한 다이스케를 주인공으로 하여, 대학 시절 의협심 때문에 친구에게 양보했던 미치요라는 여성을 천의에 따라 되찾으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라고 하였으며, “<>에서는 천의에 맞지만 사람의 도리에는 어긋나는 사랑을 하게 된 <그 후>의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바통을 이어받은 소스케와 오요네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셋집에서 쓸쓸하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5)”라고 했습니다.


<산시로>의 주인공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여성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두 사람은 손도 잡지 않고 밤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그냥 헤어졌더라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터인데, 그녀가 산시로에게 건넨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는 말을 곱씹어보게 합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산시로를 따라 여관에까지 쫓아온 그녀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그녀는 왜 적극적으로 산시로를 유혹하지 않았을까요? 산시로는 배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순수하지 않았던 그녀야 말로 배짱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 3부작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만, 주인공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산시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명의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비교해본 작품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싶습니다.


<>19103월부터 6월까지 도쿄 아사히신문과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전작이 끝날 무렵 차기 작품을 예고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을 작가가 정하지 않고 문하생들이 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의뢰받은 문하생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춰보고 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을 제목으로 해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니 작품의 얼개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의 의미를 녹여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는 잇소암에 참선을 하러갔다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소스케의 독백에 제목인 의 의미를 새겨 넣었습니다. “나는 나의 문을 얼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4-245)”


문의 주인공 소스케는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일을 숙부에게 맡기고는 내버려 둔 탓에 동생의 학업조차 돌보아줄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런 성격인 소스케가 친구 야스이와 함께 살던 오요네가 여동생이라는 말만 믿고는 결혼해서 살게 된다는 설정도 애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세키를 존경하는 분들은 그의 문체나 이야기의 구성이 빼어나다고 합니다만, 모호한 부분이 많고 마무리 역시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재소설의 경우 회차가 끝날 무렵에 갈등구조를 키워서 독자들이 다음 회차에 관심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전반적으로 이런 구조를 볼 수 없고, 비슷한 상황도 유야무야 정리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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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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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로 친숙한 사뮈엘 베케트의 <프루스트>는 일본근대문학기행 4일째 저녁에 읽었습니다. 얇다는 이유로 골랐지만 내용은 결코 얇지 않았습니다.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던 1930, 그러니까 24살이 되던 해에 낸 첫 비평집입니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세 번 읽었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케트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프루스트 방정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라면서, 프루스트  해석의 다중성을 깊게 살펴보기 위하여 프루스트식 논지의 내적연대를 따라갈것이며, 저주와 구원의 쌍두괴물인 시간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라 합니다. 작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삶이나 그와 관9ㅡ련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고 했습니다.


베케트는 1. 작가 프루스트가 아닌 개인 프루스트, 2. 프루스트와 관련된 주변인들의 증언,3.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 프루스트, 4.  러스킨 숭배자이자 번역가 프루스트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작품과 소설가  프루스트에게 집중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이 작품의 구조가 허술하고 파편적인 소재들을 나열한데 그치고 있다는 평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몇 차례 읽어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케트는 이 작품 속에서 디딤돌을 보았고, 그 위에 다양한 요소들을 쌓아올리고 있음을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중년 이상이 된 화자가 어느 날 프티 마들렌을 차와 함께 마시다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데서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의 시기로부터 장년(아마도 전쟁에 나갔다 온 어느 날일 수도 있겠습니다.)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일은 기억을 회상하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추억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화자와 알베르틴의 관계 역시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르셀이 발베크에서 만난 한무리의 여자 중 하나이지만 마르셀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그녀가 파리에서는 당당하게 나서고 마르셀 또한 큰 관심이 없던 그녀와 동거에 들어가는 상황이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자는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비극적 관계는 실패가 예고된 인간관계의 전형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신분상승을 꾀하는 알베르틴이 끊임없이 속이고, 마르셀 역시 알베르틴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구조에서는 사랑이 배태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베케트는 기억과 습관은 시간이라는 암이 가지고 있는 종양이라고 했습니다. 기억과 습관은 프루스트 소설의 가장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제하는데, 그 작용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억의 법칙은 습관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식물과 관련된 은유가 많이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인간을 식물에 비교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처럼 식물에 관한 은유가 빈번한 것은 도덕적 가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프루스트의 완전한 무관심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셀은 되찾은 시간에 이르러서야 소설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재능이 부족한 것은 관찰능력.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관찰습관의 부재 탓으로 돌렸던 것입니다(56). 사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프루스트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얼마나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해내었는지 놀라곤 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얻었다고 보입니다.


베케트 역시 젊은 시절 프루스트에 대한 비평을 쓰면서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느꼈고, 작가로서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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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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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들  가운데 의미 있는 날이라곤 없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이 우주에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어보십시오.


일찍이 수영에 재능이 있어 올림픽 대표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지쳐 포기하고 오빠와 악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작곡도 해보지만 그마저도 주목받지 못하면서 시들해지고, 도서관 사서의 추천으로 해양학자의 꿈을 키워보지만 꿈에 그치고, 남친의 희망대로 카페를 함께 운영하지만 자신의 꿈이 아닌지라 시들해지는, 하는 일마다 좌절하고 마는 그녀는 키우던 고양이마저도 사고로 죽게 되자 스스로의 삶을 그만두기로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서관입니다. 평소 체스를 함께 두던 사서 엘름 부인이 그녀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자정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시간의 경계에 있는 도서관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후회한 일들이 적힌 책과 그녀가 살아보지 못한 무수한 날들에 관한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녀는 엘름 부인의 권유에 따라 살아보지 못했던 날들을 살아보는데, 그러한 날 역시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한밤중의 도서관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죽음을 맞은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책의 원조는 단테의 신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테 엘리기에리가 베를리오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 그리고 와 짝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의 일내로 천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사서 엘름부인의 안내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워 커다란 나무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닮았다고 설명합니다. 나무의 중심이 되는 줄기가 그의 삶이지만 수많은 곁가지들은 그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삶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런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아가서는 평행우주 이론에 따라 동시에 또 다른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삶이라는 이론도 제기됩니다.


화자인 로라는 엘름부인의 안내에 따라 후회의 책에 나오는 선택하지 않아서 후회했던 삶들을 살아봅니다. 댄과의 동업, 접었던 수영을 계속해서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라 할 수도 있었던 삶들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구과학을 연구하여 북극권에 있는 스발바르제도에 가지만 북극곰의 습격을 받는 순간 살아야겠다는 인식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 죽어야겠다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거기에 존재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곳은 어디일까요?


로라는 심야의 도서관에 들어와서 살아보았던 삶들은 결국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섭니다. 이에 이르자 엘름부인은 "절대 사소한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279)"라고 조언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어느 하나 사소한 일은 없습니다. 살아보고 싶은 삶을 고르기 위해 많은 삶을 살아봐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저 어딘가에 즐길 수 있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일 뿐,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라던 소로우의 말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로라의 원래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의 부재'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결국 사랑이 가득 찬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만, 이번에는 그 삶에 머무르는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 수월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사랑으로 채워진 그런 삶으로 찾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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