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무게
애니타 슈리브 지음, 조한나 옮김 / 북캐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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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슈리브의 미스터리소설입니다. 1873년 3월 5일 밤. 뉴햄프셔 해안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쇼울 아일랜드군도의 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이민온 세 명의 여자들 중 두 명이 도끼로 살해되는 참혹한 사건입니다. 바닷가는 아니었지만 사건이 일어난 메인주에는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한적한 시골동네에 있는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움이었는데, 메인주는 미국에서도 아주 시골 느낌이 강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의외라 생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메인 주의 루이스 H.F. 와그너 재판’의 법정증언과 지방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건관련 자료를 토대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중심은 해당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현지를 방문한 사진작가 진과 그녀의 남편 토머스, 딸 빌리, 그리고 남편의 동생 리치와 그의 아내 애덜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묘한 갈등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아내와 남편,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빚어낸 끔찍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소설이라서 스토리를 자세하게 요약하면 책을 읽으실 분들의 재미가 없으실 것 같아 생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살인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작가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인 마렌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런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주인공들-여기서 주인공들이라고 한 것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 마렌과, 그녀의 사건을 뒤쫓는 사진작가 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묘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법경찰의 수사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이는데 현장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진이 취재해서 밝혀낸 자료만으로도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기 어렵다 싶습니다. 사건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되고 재판이 이루어져 무고한 생명이 사형을 당하는 2차 범행의 피해자가 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진의 취재과정에서 확인된 마렌의 고백록이 사건 후 60여년이 지나 대학도서관에서 노르웨이로 보내져 번역까지 되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당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하여 무고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작가가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말았습니다만, 정말 궁금한 것은 죽은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이 사건의 진실을 전혀 몰랐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목인 ‘물의 무게’의 의미를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의 무게에 대한 설명은 두 번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나는 물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것은 과학적인 영역이다. 물의 1입방피트는 62.4파운드이다. 바닷물은 민물보다 3.5퍼센트 더 무겁다. 그 말은 바닷물 1,000파운드에 35만큼의 소금이 있다는 뜻이다. 물의 무게는 깊이를 상승시키는 압력을 발생시킨다. 바다 아래의 1마일의 압력은 제곱인치당 2,300의 압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277쪽)”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종종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에 대해 생각한다.(335쪽)”입니다. 앞서 적은 물의 무게는 과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만, 뒤에 적은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종종’…

두 사건을 모자이크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가족이란 이름만으로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어 충분하지 못하며, 가족들 사이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만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다독이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공이 딸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남편과의 관계도 석연치 않은 애덜린과 사건 이후에 다시 만나 지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있어 시동생과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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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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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의료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온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 의과대학생들이 출교를 당하게 된 사건으로부터 최신의료시술의 보험급여화 과정에서 의사의 도덕성까지 들먹이고 있는데 의사가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대우가 걸맞도록 충분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카를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는 옛날 의학계에 던졌던 화두를한 세기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야스퍼스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의학이 철학적, 혹은 관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험적 치료법에 의존하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분야와 연계하여 과학적 사고의 틀이 도입되어 근거중심의 치료법을 적용하는 신의료의 틀이 갖추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기술시대의 의사>라는 제목으로 야스퍼스의 저술 가운데 의철학을 비롯한 정신의학관련 저술을 되돌아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6년에 편집된 원본은 모두 다섯 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의철학에 관한 전반의 세 편은 ‘의사의 이념(1953)’, ‘의사의 환자(1953)’, ‘기술시대의 의사(1958)’이며, 두 편의 정신의학관련 저술로는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1950)’과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1954)’입니다.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영역은 저의 아는 바가 제한적이라 깊이 살펴보지는 못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야스퍼스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가 한계가 있다는 점인데, 지금은 신경계통의 기질적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신경과와 신경계통의 유기적 기능의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정신과 영역이 당시만 해도 분리되지 않고 정신과영역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분명 치료적 접근이 달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의사의 이념>에서 “원시 시대의 사제적 유형의 의사,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 전체와 인간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다룬 히포크라테스적 의사, 권위주의적이고 사변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의 의사, 이 모든 유형의 의사가 몇 세기 만에 근대의 자연과학적 의사로 교체되었다.(9쪽)”고 글을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른 의사의 모습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야스퍼스가 살아있다면 21세기의 의사는 어

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궁금해집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의사는 자신의 의료행위를 “자연과학적 인식과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티의 에토스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우게 되는데, 스스로 결정하는 환자의 존엄성과 모든 개별적 인간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망각하지 않는다.(10쪽)”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광범위하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건강보험을 비롯하여 의료부조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로 인하여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누구나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시대와 현재의 의료환경은 기본적으로 격변기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만, 사회적 환경은 분명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가 인식하는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의사를 만나게 되고 치유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알려하기보다는 의사의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며,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이미 마친 상태이며 치료방향까지도 들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환자일수록 환자가 생각한 치료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설명하는데 더 많은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의사의 사명은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직업에서 이성적으로 하는 행동이 의미있다는 점(21쪽)’입니다.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한해 배출되는 의사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난 의학지식을 전달하는 의학교육 역시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 방식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라는 의성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단순히 배우는 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의사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사는 삶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규범 아래서 자신의 의술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가 되는 것은 역시 어렵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실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천착하여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의료환경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웬만한 의사라면 신경이 마를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에서는 질병이 악령의 개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가 깨져 생기는 자연과정이며, 경험적 치료방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식입니다만, 요즈음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 이외의 영역까지도 끌어들인 통합의학으로 나가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야스퍼스 의철학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시대의 의사>에서 논한 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철학을 버리는 의사들이 있는데, 철학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연과학적 의학의 한계에서 잘못된 것을 지배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기술의 진보를 토대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이러한 실천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야스퍼스의 명제는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료 기술자를 양성하는 의학교육보다는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철학을 같이 배우는 의학교육이 되어야 하겠고, 삶의 압박으로부터 여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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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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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에 깊은 공감을 가졌던 김열규교수님의 <노년을 즐거움>을 읽었습니다. ‘한국의 키케로’란 별명을 드린 것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3977182>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꼭 이순(耳順)을 얼마 남기지 않은 까닭은 아닙니다만,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 한권으로 기로들이 ‘노당익장(老當益壯)’을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노년에 들어서 당연히 더한층 건장함’을 환갑 진갑 두루 거친 분들에게 선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뿐만 아니라 초로라고 하는 나이, 이를테면 쉰 살에 미칠까 말까 하는 나이, 그리고 그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연령층에게도 장차를 위한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7쪽)”고 하신 김교수님의 바람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데이빗 소로우교수를 스승으로 삼고 계시다는 교수님께서 유학시절 월든호수를 자주 걷곤 했다는 말씀을 읽고서는 월든호수를 읽으면서 얻었던 감동을 리뷰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던 아쉬움이 다시 되새겨집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 그런 탓인지 김교수님이 고향바다에서 얻는 느낌들은 소로우교수가 그려내고 있는 월든호수의 정경을 닮았습니다. “나는 온 데 간 데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무의미해진다. 다만 산의 기(氣)가 풍기, 즉 바람 기운과 함께 햇살 바른, 엄동의 양지에 다리를 뻗고 평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내려다보이는 먼 바다, 바람잡이의 눈에 겨울 아지랑이가 눈부시다.(209쪽)” “하루 두 번의 썰물과 밀물에 따라서 바다의 시간은 들고 난다. 펑퍼짐하던 해면에 문득 열린 물길을 따라서 흐르는 조류. 그 시퍼런 기세에 물고기들에게 가고 오는 시간, 모이고 흩어지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232쪽).”

뿐만 아니라 교수님은 최근 기사에서부터 동서양 고전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자료를 이끌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글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잊고 있던 우리말까지도 적절하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교롭게 ‘쏴! 쏴!’하고 고추바람이 닥칠 때면 옷을 벗으려는 손길이 머뭇거린다.(208쪽)” 

<노년의 즐거움>은 어르신의 예찬일 뿐 아니라 나이든 삶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 낮이 사람의 삶이라고 한다면 일출에 태어나 일몰에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하겠습니다. 일출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일몰의 화려함을 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영화 <노트북>을 보셨다면 황홀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향하여 작은 배가 미끄러져가는 도입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김교수님은 '노(老)의 몰골과 맵시‘라는 부제를 단 <1장 노년의 얼굴들>에서 노년송(老年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위인들의 초상이 노년의 얼굴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표지에 소개되어 있는 7분의 평범해 보이는 어르신의 편한 얼굴들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이렇듯이 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조금 이른 듯싶기도 합니다만, 2장에서는 행복한 노년을 위하여 금(禁)할 점과 권(勸)할 점을 각각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금할 것으로는 ①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 ② 노하지 마라, ③ 기죽는 소리는 하지 마라, ④ 노탐을 부리지 마라, ⑤ 어제를 돌아보지 마라 등이며, 권하는 것으로는 ① 유유자적, 큰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라 ② 달관, 두루두루 관대하라, ③ 소식, 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다, ④ 사색,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라, ⑤ 운동, 자주 많이 움직여라 등입니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현장에서 만난 노년의 진면목’을 부제로 한 <3장 노년의 즐거움>에서는 역사, 예술, 문학, 현실에서 만나는 노익장들의 기개를 소개하고 있고, <4장 내가 걷는 그 푸른 노년의 인생길>에서는 고향에서 보내고 있는 김교수님의 생활에서 얻은 생생한 느낌을 진솔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무연화하는 경향의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다룬 시다마 히로미의 <사람은 홀로 죽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72743>를 읽었습니다만, 김교수님 역시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좀 더 개인적ㅇ니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62쪽)”라는 김원우작가의 말처럼, 그리고 고독함 역시 혼자 자신을 닦고 다지고 굳혀가는 좋은 기회로 삼은 릴케처럼 “돌부처처럼 묵묵하고 진중하게 혼자만의 세계를 누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유연(有緣)이냐 무연(無緣)의 환경을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할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노년의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시퍼렇고 등등하게 살아나야 한다. 솟구치고 떨쳐야 한다. 한 집안의 가장 큰 어른답게, 또 사회의 위대한 장로답게 자신들의 의지며 처지를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적은 저자의 맺음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브라보 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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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홀로 죽는다 - 무연사회를 살아가기 위하여
시마다 히로미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래의창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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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김열규교수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의 리뷰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끄집어내봅니다. “예로부터 높게 쳐준 우리네의 ‘갖추어진 삶’의 조건으로, 나이로는 환갑․진갑을 넘겨 살아야 하고, 자식은 적어도 3남2녀는 두어야 하고, 가장이 부와 귀를 누려야하며, 그 많은 아들․딸들이 빠짐없이 성혼을 하여 손자를 주렁주렁 두어야 하고, 드디어 세상을 하직할 때 고통이 없이 잠시 앓는 듯 마는 듯하다가 안채 안방 혹은 안사랑에서 이른바 ‘와석종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종자리에는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며, 초상은 장중하게 치루어져야 하고 은성해야 하며, 무덤자리가 명당이라야 하고 삼대에 걸쳐 봉제사할 후손이 끊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갖추어진 삶’의 맺음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이렇듯 호사스러운 죽음을 맞는 분들이 적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간혹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죽음에 관한 기사를 신문귀퉁이에서 만나게 되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마다 히로미의 <사람은 홀로 죽는다>는 뉴스에 나오는 이런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10년 1월 말경에 NHK에서 방영되었다는 <무연사회 : ‘무연사’ 3만2천명의 충격>이 집필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사람들의 대단한 독서열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듣습니다만, 이런 독서열에 편승하는 수요 때문인지 가벼운 내용의 책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홀로 죽는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연고없이 사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아내기 위하여 일본사회에서 도시화가 시작된 이후 농촌에서 도회지로 옮겨간 세대가 사라지면서 연고중심사회에서 개인중심사회로 넘어가면서 누군가와의 소통을 끊고 홀로 살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늘게 된 시대적 변천과정을 추적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연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책이 주는 무게는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사회가 연고를 중시하던 풍조가 무연고 성향으로 변하게 된 원인분석도 다소 치밀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하지만 농업중심 사회에서는 땅을 매개로 한 협업과 재산이나 농업기술의 승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반하여 기업사회에서는 회사원으로 지내면서 쌓은 노하우가 자식에게 넘어가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사회구조가 무연사회를 먼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연사회 속에서의 촘촘하게 엮이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과의 관계를 끊고 혼자만의 삶을 즐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소위 무연사, 혹은 고독사라고 한다면 이 역시 죽은이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습니다. 즉 그런 죽음에 대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사람은 혼자 태어나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같이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상을 떠나는 일은 혼자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을 떠나는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작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아직까지는 대세겠지만, 혼자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의 경우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후손이 선조를 기리는 일을 잘 이어간다면 모를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 대부분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독신자가 죽은 다음에 그를 떠올리며 공양해줄 사람이 없어 고독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오지랖이 보통 넓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홀로 살아왔다는 것이 속박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삶에 대한 반대급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홀로 맞이 하는 죽음이 두렵고 쓸쓸할 것이라는 저자의 단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무연사회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저자의 결론은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보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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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인식 - 경술국치부터 이명박 정부까지의 논점 즐거운 지식 61
박석흥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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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백과사전을 보면, 사관(史官)은 “우리나라 역사서의 초고(草稿)를 쓰던 관리”로 정의하고 있고, “사관은 직필(直筆)로 국가의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을 기록해 후세에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도록 한 제도였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하고, 고치지도 못했으며, 사관의 기록행위도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와 힘을 가진 자의 시각으로 쓰이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역사의식을 가진 군주는 있는 사실 그대로 기록하여 후대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관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했던 것이라고 보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는 사초로 인하여 정쟁이 유발되고 사관이 피해를 보는 사태도 생겼기 때문에 사심없이 사초를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격랑의 시대였다고 하겠습니다. 세기말 격변하는 국제사회의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한 까닭에 나라를 잃는 뼈아픈 일이 있었고,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역시 국제정세의 변화로 얻은 독립이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광복 이후, 건국과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동란, 4.19혁명, 5.16군사쿠데타에 이은 신군부에 의한 통치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인식과, 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새롭게 부상한 역사인식은 근본적으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 역사인식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편향성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는 언론인출신인 박석홍교수님의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인식>은 중립적 시각에서 근현대사를 조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초대 이승만대통령의 동상건립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북분단의 원초적 책임이 있고, 친일파를 중용했으며, 한국전쟁 유발했거나 예방에 실패하였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헌정을 유린했으며, 정치군인을 육성하였고, 부정부패와 매판경제를 키웠고, 양민을 학살했으며, 극우반동분자이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정치보복을 하는 증 이승만대통령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것은 악의 유산 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는 것입니다.(77쪽) 하지만 그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형안,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 자질면에서는 당새 어느 정치가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건국에 절대적으로 공헌하였고, 유엔을 통하여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는 등 탁월한 외교능력을 보였고, 강군을 육성하여 북침에 대비하였고, 농지개혁, 경제발전계획수립 등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듬었던 점 등을 강조하여 새롭게 평가할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해임시정부의 고위 인사가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레닌으로부터 거금을 받아왔지만 임시정부에 교납하지 않고 착복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이념이나 사상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분들로 구성되었겠지만, 정책추진과정에서는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양상을 보였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6.25전쟁이 남한 정부와 미국이 음모를 꾸며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가 허구라는 점을 6.25전쟁 발발은 전후하여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 간에 동향 등과, 해제된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하여 입증되었다는 사실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대통령의 집권과정과 경제개발추진과정에서 미국의 역할 등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들을 적고 있어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게 한 분들의 어려운 여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향유해야 했던 많은 권리를 제한했던 점은 분명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 등도 가감없이 정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 집권 당시의 사건들도 그 배경을 요약하고 비판할 내용을 비판하고 수용할 부분을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신체제 구축을 통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은 이승만대통령의 죄과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10.26사태를 기점으로 하여 들어선 신군부의 집권과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과정 그리고 정권교체 과정 등 비교적 최근의 일에 대한 기술은 그 양이 많지 않은 것은 아직은 역사가의 시각으로 평가하기에 이른 감이 있다고 본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승만 박정희시대 재평가뿐 아니라 10.26, 5.18 광주참변, 김대중 정부의 독도 근해 한일공동관리수역 결정의 의혹 및 햇볕정책을 위한 불법 돈거래, IMF처리과정, 노무현전대통령의 자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언론과의 전쟁 등도 재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크게 공감하였다는 말씀을 적습니다. “역사해석은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비판 검증할 수 있는 안목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나 지향해야 할 새 문화 목표 설정은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비판하는 역사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국민 각자가 바른 역사적 신념을 가실 수 있도록 지도층과 지식층이 정치철학과 역사관이 건전해야 한다. (…) 특정 이념과 정치 조직에 복무하는 사람들의 한국현대사 왜곡과 전교조 일부의 역사교육은 사회통합을 해체시키고 미래까지 볼안하게 한다. 피와 땀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체제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는 종북자학사관을 한국 학계가 계속 외면할 상황이 아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우리 국민 각자가 바른 역사적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른 역사적 신념은 특정 이념추종자들의 시각에서 정리된 역사서를 편중해 읽어서는 세울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 서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중립적 시각에서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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