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최근 들어 의료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온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 의과대학생들이 출교를 당하게 된 사건으로부터 최신의료시술의 보험급여화 과정에서 의사의 도덕성까지 들먹이고 있는데 의사가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대우가 걸맞도록 충분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카를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는 옛날 의학계에 던졌던 화두를한 세기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야스퍼스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의학이 철학적, 혹은 관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험적 치료법에 의존하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분야와 연계하여 과학적 사고의 틀이 도입되어 근거중심의 치료법을 적용하는 신의료의 틀이 갖추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기술시대의 의사>라는 제목으로 야스퍼스의 저술 가운데 의철학을 비롯한 정신의학관련 저술을 되돌아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6년에 편집된 원본은 모두 다섯 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의철학에 관한 전반의 세 편은 ‘의사의 이념(1953)’, ‘의사의 환자(1953)’, ‘기술시대의 의사(1958)’이며, 두 편의 정신의학관련 저술로는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1950)’과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1954)’입니다.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영역은 저의 아는 바가 제한적이라 깊이 살펴보지는 못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야스퍼스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가 한계가 있다는 점인데, 지금은 신경계통의 기질적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신경과와 신경계통의 유기적 기능의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정신과 영역이 당시만 해도 분리되지 않고 정신과영역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분명 치료적 접근이 달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의사의 이념>에서 “원시 시대의 사제적 유형의 의사,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 전체와 인간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다룬 히포크라테스적 의사, 권위주의적이고 사변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의 의사, 이 모든 유형의 의사가 몇 세기 만에 근대의 자연과학적 의사로 교체되었다.(9쪽)”고 글을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른 의사의 모습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야스퍼스가 살아있다면 21세기의 의사는 어

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궁금해집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의사는 자신의 의료행위를 “자연과학적 인식과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티의 에토스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우게 되는데, 스스로 결정하는 환자의 존엄성과 모든 개별적 인간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망각하지 않는다.(10쪽)”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광범위하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건강보험을 비롯하여 의료부조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로 인하여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누구나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시대와 현재의 의료환경은 기본적으로 격변기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만, 사회적 환경은 분명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가 인식하는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의사를 만나게 되고 치유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알려하기보다는 의사의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며,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이미 마친 상태이며 치료방향까지도 들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환자일수록 환자가 생각한 치료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설명하는데 더 많은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의사의 사명은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직업에서 이성적으로 하는 행동이 의미있다는 점(21쪽)’입니다.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한해 배출되는 의사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난 의학지식을 전달하는 의학교육 역시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 방식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라는 의성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단순히 배우는 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의사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사는 삶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규범 아래서 자신의 의술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가 되는 것은 역시 어렵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실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천착하여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의료환경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웬만한 의사라면 신경이 마를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에서는 질병이 악령의 개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가 깨져 생기는 자연과정이며, 경험적 치료방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식입니다만, 요즈음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 이외의 영역까지도 끌어들인 통합의학으로 나가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야스퍼스 의철학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시대의 의사>에서 논한 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철학을 버리는 의사들이 있는데, 철학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연과학적 의학의 한계에서 잘못된 것을 지배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기술의 진보를 토대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이러한 실천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야스퍼스의 명제는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료 기술자를 양성하는 의학교육보다는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철학을 같이 배우는 의학교육이 되어야 하겠고, 삶의 압박으로부터 여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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