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인재, 우리는 함께 간다
융합형인재사관학교.김영록 지음 / 티핑포인트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어 학문적 깊이를 더하다보니 전공분야를 벗어나게 되면 일반인보다도 아는 바가 없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아무래도 학문의 발전속도가 빠르다 보니 전공분야의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공부해야 할 분량도 엄청나게 되었지만,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하루에도 쏟아져 나오는 연구성과들을 쫓아가기도 숨찰 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학문에 세분화되기 전에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학문의 깊이를 더하여 시너지효과를 내던 학문의 경향을 되새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의 <통섭; 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은 생소한 ‘융합형 인재’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학문의 벽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결합하여 성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개념처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이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조직이 필요로 하는 바른 인성과 창의성이 뛰어난 인재, 즉 다재다능한 인재를 이르는 것이라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다재다능은 타고나는 재주라서 교육에 의해서도 달성할 수 있겠는가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궁금증이 <융합형인재 우리는 함께 간다>를 통하여 어느 정도 답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재양성의 꿈을 세운 김영록님이 세운 융합형인재사관학교(융합사)를 통하여 “한 분야의 전문성은 물론 다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두루 갖추고 1인 3역을 해내며 특히 ‘인성이 올바른’ 사람”을 키워내는 실험을 시작하여 그 첫 번째 결실로 4명의 융합형인재를 배출하는 과정이 <융합형인재 우리는 함께 간다>에 담겨 있습니다.

 

융합사는 다양한 전공분야를 공부하는 열두명의 대학생을 선발하여 2주에 1회씩 1년에 걸쳐 두 차례의 워크숍을 포함하여 24회의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지원자의 스펙은 선발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으며, 프레젠테이션을 통하여 해내겠다고 하는 의지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교육은 재능기부의 원칙에 따라서 융합사의 설립취지에 동의하신 여러 분야의 전문가 8명이 참여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매 2주마다 열리는 교육시간에는 미리 정해진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이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등록금은 물론 교육비를 내지 않는 대신, ‘사관학교’답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 어기는 사람은 가차 없이 탈락되는데, 12명으로 시작한 1기는 4명만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2기가 선발되어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다양한 전공분야의 학생들이 선발되어 같이 토론하고 활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 융합사의 설립취지에 잘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학문의 통섭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요즘 대학생들은 공부해야 할 엄청난 분량의 전공서적에 압사당할 지경인지라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토론에 참여하는 동급생들을 통하여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토론의 대상이 되는 책을 보면 인문학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 인성을 개발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많은 학생들이 1년에 24권 분량의 독서가 부담스럽다고 한 점입니다. 물론 읽으면서 뜻을 새기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독서 역시 꾸준한 노력과 책읽는 시간을 내려는 의지를 세운다면 보다 많은 분량의 독서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 번 교육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을 진행하는 방식에서 발전하여 관련된 몇권의 책을 읽고 내용들을 종합하여 토론을 진행한다면 보다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화자(話者)가 내내 궁금했습니다. 중도탈락한 것으로 보이는 생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4명의 생도 이름은 처음부터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추론을 해보았습니다만, 생도 각자의 시각으로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김영록님의 시각으로 본 사건도 있어 종잡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융합사와 김영록님의 공저로 하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잡지의 편집장을 하고 있는 박송미님이 중심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어떻든 1기에서 33%가 살아남았지만, 2기에는 보다 많은 생도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신생의과대학에서 교육 및 실습 프로그램을 짜는 일의 책임을 맡았던 경험에 따르면, 첫 해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수월해지면서 레벨업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융합사에서 추구하는 인재양성프로그램이 머지않아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각자의 전공을 살리고 융합사에서 이를 조화시켜 서로에게 시너지효과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래서 리뷰의 제목도 “각자 이룬 성과를 융합하여 시너지를...”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물의 힘 - 상처를 어루만지는 눈물 치유 심리학
강선영 지음 / 아우름(Aurum)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손수건을 지참하고 영화관을 향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컴컴한 극장 안에서는 여성은 물론 남성도 눈물을 흘려도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TV에서 하는 드라마도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드는 슬픈 장면이 꼭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영화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 역시 시청자의 분노를 끓게 만드는 막장드라마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야말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코미디가 한물가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웃음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사라지는 개그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눈물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눈물이 가지는 위대한 힘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

 

심리상담을 통하여 상처받은 이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고 이들을 위로해온 강선영박사가 심리상담을 통하여 경험한 눈물의 치유효과를 <눈물의 힘>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잘 웃는 사람이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얻은 경험을 한번씩은 하셨을 것입니다. 마음에 쌓이는 불안과 욕구 역시 울음을 통해서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울지 않는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눈물이 막히면 마음이 황폐해진다’, ‘눈물 그후, 빛나는 나를 만나다’라는 세 가지 제목으로 나누어 놓은 자신이 살면서 부딪힌 정신적 갈등을 울음을 통하여 풀어낸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담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사례들을 접목하여 눈물의 치유효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어린 시절 저자에게 정신적 상처가 되었고, 그 영향은 자신의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더라는 고백하기 어려운 자신의 성장사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커오면서 눈물흘리는 행위가 죄악인 것처럼 강요받으면서 자랐던 기억 한 자락 정도는 마음 구석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야단을 맞을 적에 울면 당장 그치라는 다그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헷갈리기는 합니다만, 시끄럽거나 꼴보기 싫으니 우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지 눈물을 그치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소리내어 우는 것은 자의적으로 멈출 수 있지만, 눈물을 감정적인 것이라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돌아보니 저는 그나마 눈치를 보는 편이라서 거의 맞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형제들이 어렸을 적에 어머니한테 많이 맞으며 자랐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여쭈어보니 아들만 넷을 키우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만, 형제 중 누구라도 맞는 상황은 온 집안에 공포분위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도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들으면서 코를 훌쩍거리는 정도가지고 사내 녀석이 칠칠맞다고 핀잔을 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눈물이 흔한 편이었습니다.

 

저자는 상담심리치료센터를 찾는 사람들에게 심리치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게 형성되어 있어 정신과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심리치료센터를 찾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자들을 우울증 등 정신질환의 진단을 내리고 심리치료를 해오고 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우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심리상담과 전문적인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일단 정신과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 환자는 정확한 진단과 상담치료 이외의 약물치료 등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과전문의를 만나도록 해야 할 것이라 보입니다만, 그런 과정에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저자는 상담을 통하여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그 아픔을 눈물로 치유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이 구조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최근에 읽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대니얼 샥터 지음,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62617). 그 가운데 상담자의 유도질문이나 암시 등을 통하여 피상담자의 기억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심각한 오류를 낳은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도 혹시 피상담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이런 오류를 범한 사례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자의 추론 가운데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부분도 있었다는 점도 적고자 합니다.

 

집안에 정신과를 전공하신 분이 계셔서 정신과질환의 진단과 치료가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분으로부터 진단과 치료과정에서 실패한 사례가 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눈물의 힘>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례들은 모두 눈물을 통해서 치유에 성공하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일방적인 신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됩니다. 치유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관한 설명도 어떤 사례에서는 단기간에 효과를 보았다는 경우도 있었지만, 몇 년에 걸쳐 센터를 다니는 환자도 있어 치료비용은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정신요양기관을 방문하는 경우는 건강보험이나 정부의 의료부조를 받아 비용부담을 대폭 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모두 울음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눈물이 정신을 맑고 건강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특히 상실의 아픔을 녹이는데 울음만큼 효과적인 치유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아픔을 마음 한켠에 꾹꾹 눌러두면 결국에는 마음의 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의 치료중단 요구와 의사의 생명보호의무 - 경제적 사유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가? 내일을 여는 지식 의학 3
송기민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칭 ‘보라매병원사건’을 기억하십니까? 1997년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 환자처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퇴원을 허락한 보라매병원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물어 의료계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보니 벌써 15년이나 지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거릴뿐더러, 2008년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사건에서는 가족의 경제적 부담이 치료중단에 참작사유가 된다는 새로운 판례가 나와 치료중단을 요구하는 가족을 만나게 되면 헷갈리게도 되었습니다.

 

송기민교수님은 <가족의 치료중단요구와 의사의 생명보호의무>라는 기다란 이름의 책을 통하여 보라매사건의 전말과 법원의 판단에 대한 심층분석을 시작으로 하여, 국가가 응급환자 생명보호책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재로 분류될 정도로 학술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까닭에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의료현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족의 치료중단요구 사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의료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 소개합니다.

 

저는 환자를 직접 대면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응급실근무를 섰던 것이 전부이고, 그것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고, 지방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서는 환자를 모시고 온 가족들에게 보다 큰 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그냥 여기서 최선을 다해달라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정밀검사를 통해서 진단을 결정하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의가 없어 보조적 치료와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지만,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고비를 맞게 되면 퇴원을 요구하는 가족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당시만 해도 집밖에서 죽음을 맞는 객사(客死)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던 때라 가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도 보라매사건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건을 다시 요약해보면, 술에 취해 중심을 잃고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시멘트 바닥에 넘어진 환자는 경막외 출혈이 발생하여 응급후송된 후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회복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환자의 처는 당시까지 발생한 진료비는 물론, 퇴원에 이르기까지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하였고, 의료진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가족의 요구가 완강하여 결국 퇴원에 동의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집으로 모셔진 환자는 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한 다음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환자의 형제 등이 퇴원에 간여한 환자의 처와 의료진을 사법당국에 고발한 것입니다. ‘의료권고에 반하는 퇴원’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던 의료계의 관행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퇴원을 주장하여 결국은 환자가 죽음을 맞게 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환자의 처에게 물어 살인의 죄를 묻는다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퇴원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의료인에게까지 살인의 죄를 같이 묻는다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입니다. 보라매병원이 공공의료기관이므로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최종판단은 환자를 집으로 후송하고 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한 인턴선생님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으나, 환자를 담당한 주치의 2명은 ‘작위에 의한 살인방조죄’로 각각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여 유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의료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오던 일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는데, 자의퇴원이 환자사망으로 이어지는 생명경시의 의료관행에 제동을 걸어 남용을 방지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하지만 의료행위도 크게는 환자 - 혹은 가족을 포함하여 - 와 의료기관 간의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면, 계약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환자 혹은 가족이 계약의 이행을 중도에 포기하겠다고 나섰을 때, 의료기관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은 경제적 이유로 자의퇴원을 요구한 가족의 처벌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이의 남용을 방지하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법정신을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보라매사건의 환자를 병원에 옮긴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집에서 경과를 관찰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면 환자의 처에게 살인죄를 물을 수 있었을까요?

 

저자가 소개하는 이상돈님의 다음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환자의 보호자가 퇴원을 주장한 주된 이유인 치료비부족을 국가가 직접 메워 주거나, 메울 수 있게 하는 의료체계가 기능하지 못한 책임을 왜 의사가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국가가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런 상황에서 감행된 치료중단에 대한 불법성 판단은 정당성을 창출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88쪽)”

 

보라매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 법학자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군인과 의사를 만들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군인은 외적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고, 의사는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국가를 대신하여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금기약물을 처방하고 조제한 의사와 약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을 입법화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국회의 보좌관으로부터 ‘국가가 언제 의사에게 살인면허를 주었느냐’는 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약물을 사용하는데 있어 피치 못하게 금기약물을 사용해야 하는 의학적 판단을 하는 경우도 처벌을 면치 못한다면 그와 같은 제약이 결국은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잃게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설명해도 오불관언이던 그분이 절벽처럼 느껴져 비참한 느낌이 들었던 추억입니다.

 

보라매사건 이후 의료현장에서는 가족들이 요구하는 자의퇴원으로 인하여 환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당한 법적 제제를 피하려는 의료인과 가족들이 갈등을 빚는 사례가 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08년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사건도 생겼을 것입니다.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로부터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여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고, 가족들은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가족의 주장을 병원측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법원의 판단을 구하게 되었고, ‘치료비용이 과다한 경우라면 환자 본인과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뿐 아니라 의료자원의 균형적 배분이라는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그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참작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법원의 판단을 얻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는 치료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시대에 접어들면서는 환자를 만났을 때 소생가능성을 판단하고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치료를 포기하던 고대의 의학윤리에 반대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란 고통받는 환자를 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망없는 환자는 미리 포기하는 것 역시 의학의 목적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의사는 자신의 전문적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을 판별하여 가능한 것들은 하려 하되, 불가능한 것들은 내버려둔다.(반덕진 지음, 히포크라테스 선서, 129쪽)”고 적은 플라톤의 저술에서도 이런 경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보라매사건의 판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종합하여 검토하는데 머물지 않고, 보라매사건의 핵심이 되는 응급의료현장에서 경제적요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입된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라 함은 응급환자 본인 또는 가족이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을 경우, 국가가 의료기관 등에 응급진료비 등의 지불능력이 없는 환자를 위하여 대신 지불해 주는 제도(131쪽)”입니다. 이 제도는 응급진료가 경제적 이유로 거부되거나 지연되는 것을 방지하여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라는 국가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제도입니다. 1995년부터 설치한 응급의료기금을 바탕으로 시행되었으나 낮은 응급의료수가와 청구절차가 복잡하여 실적이 저조했다는 지적도 나온 바 있습니다. 동 제도에 대한 국민과 요양기관의 인지도 역시 낮아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국민을 위한 제도로 시작하였던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는 2000년 관련법령의 개정을 통하여 모든 국민을 위한 제도에서 일부 경제적 빈곤층을 위한 제도로 축소시켰는데, 저자는 이 제도가 경제적 빈곤층을 위한 것이라면 ‘기금’이 아니라 의료급여제도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긴급복지지원제도 등 사회보장제도를 담당하는 ‘국가예산’으로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응급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는 점을 살피고, 이를 실현하기위한 정책으로서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분석하여 개선방안을 제시하고 있어 응급의료현장을 지키는 분들이 주목할 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처럼 2012-02-2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4287
 
슈슈 - 웃음이 주룩주룩 눈물이 꼬물꼬물
김상득 지음 / 네시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슈슈>의 서문에서 저자는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을 빌어 우리네 삶이 복잡해짐에 따라 웃음과 눈물이 같이 하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나 마땅한 방법이 없는 현대인들을 불쌍히 여겨 ‘슈슈’라는 용어를 창제하노니 마구 사용하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슈슈는 웃음(^^)과 눈물(ㅠㅠ)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을 조합하여 만든 신조어라고 설명하였는데, 출판사에서는, “삶의 절박함 속에 우연히 마주치는 어처구니없는 헛웃음, 혹은 소소한 유쾌함은 “웃음이 주룩주룩(^^)”으로, 웃음의 뒷전에 꼬물꼬물 묻어나는 상실과 불안, 절망과 외로움은 “눈물이 꼬물꼬물(ㅠㅠ)”로 표현되고 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표현이라면, 이것을 뒤집어 표현함으로써 부조리한 감정으로 희극화시키고 있다.”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조용필씨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에 나오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랫말 같은 상황을 맞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저로서는 ^^는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편이나 ㅠㅠ는 별로 사용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무식하게 웃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슈슈’가 과연 저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신조어인지 확인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여성들이 머리를 장식하는데 사용하는 악세사리의 한 종류로 ‘헤어슈슈’라는 이름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의장등록 혹은 상표등록이 되어있을 가능성도 있어, 용례를 확대하여 구체적인 해석을 붙인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적법한 일인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부제에 들어있는 ‘눈물이 꼬물꼬물’이라는 말이 필이 꽂혀 구매를 했으나 눈물이 꼬물꼬물할만한 사연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감정이 메마른 탓일까요? 어떻든 이미 다 읽은 책을 도로 물어 달라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는 지라 울며 겨자를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눈물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눈길을 끌었던 대목을 소개합니다. “한반도의 봄은 황사로 온다. 네이멍구와 고비사막에서 발원한 황사는 편서풍을 타고 과민한 내 기관지로 날아온다. 봄날이 찬란하기는커녕 온통 누렇다. 어제는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 귀를 터니 사막이 쏟아져 나온다. 목이 아파 기침을 하니 별이 마구 쏟아지고 눈이 서걱거려 비비니 눈물처럼 전갈이 떨어져 나온다. 바람은 고비사막에 사는 여우처럼 운다.(290쪽)” 정말 대단한 상상이 아니겠습니까? 딱 이 한 구절로 책값이 충분하다 싶습니다.

 

책을 모두 읽고서 남는 첫 번째 느낌은 ‘글쓰느라 참 고생을 많이 했겠다.’였습니다. 저자도 ‘의지박약자의 작심’이라는 글에서 중앙선데이에 연재하는 컬럼을 꼭 마감에 임박해서 마무리한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만, 글내용으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저도 요즈음 주간 컬럼을 두 개의 매체에 내고 있습니다. 각각 200자 원고지 20매 정도의 분량을 쓰고 있는데, 주초와 주말로 나누어 나름대로의 마감일을 정하여 쓰고 있지만, 해당 매체에 마감을 연장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제 경우는 써야 할 글의 전체 윤곽을 잡고 원고분량을 넘기도록 단숨에 써내려간 다음 윤문과 첨삭으로 원고분량을 맞추는 식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는 200자 원고지 6매의 분량에 고전, 영화, 소설 등 저자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엄청난 양의 자료 가운데 비유가 적절한 것을 끄집어내 인용하고 있으니 전체의 틀을 잡는데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한방...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극적인 반전’, 이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아마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쥐어짜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저자는 ‘기억 못하는 남자’라는 제목에서는 이미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을 다시 사서 그것도 재미있다고 읽었다면서 자신의 기억의 오류를 자책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에 담겨 있는 102개 꼭지의 글을 보면 작가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이루고 있으니 어찌 보면 깨알 같고 소소한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서 알뜰하게도 우려먹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헤어졌다는 아들의 여자친구도 두어 차례 등장하는 것 같은데, 그 분이 이 책을 읽었다면 헤어짐으로부터 얻은 상처가 다시 덧나지 않았을까요?

 

리뷰를 마무리하면서 솔직한 제 느낌을 말씀드리면, 글을 참 재미있게 쓰는 저자가 부러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글 곳곳에서 묻어나는 저자의 대책없는 무심함에 입가에 웃음이 슬며시 맺혔으나 주룩주룩까지는 아니었다는 투정도 덧붙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대니얼 L. 샥터 지음, 박미자 옮김 / 한승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혹시 애매한 기억 때문에 누군가와 다툰 적은 없으십니까? 우리 옛말에 ‘서울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서울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에 가보기는 했는데 애매한 기억 때문에 우기지 못하고 있는데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마치 가본 것처럼 큰 소리로 우기는 소리를 듣다 보면 꼭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경험은 없으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 역시 제가 보고 들었던 것들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20년 넘게 기억에 관한 연구에 매달려온 대니얼 샥터교수는 <기억 일곱 가지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번역을 하신 박미자교수님께서 설명하신 것처럼 굳이 죄악이라고까지 할 이유는 없다 싶습니다만, 기억의 오류를 일으키는 이유를 정리하다 보니 일곱 가지가 중요하다고 보여진 까닭에 성서에 기록된 7 가지 죄악(탐욕, 폭식, 분노, 색욕, 나태, 자만, 질투)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먼, 케빈 스페이시, 기네스 팰트로 등이 주연한 영화 <세븐; se7en>에서 데이빗 핀처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7가지 죄악처럼 기억의 오류도 죄악이라고까지 불러야 할까요?

 

저자는 기억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오류로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因),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의 7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억의 오류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며 누구에게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소멸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흐려지거나 손실되는 것을 의미하고, 정신없음은 주의하지 않았을 때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함을 의미하며, 막힘은 기억한 정보가 머릿속을 맴돌며 생각나지 않는 인출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이들 세 가지 오류는 기억을 갈무리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누락이 발생하여 생긴다고 합니다. 한편 오귀인,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 등은 수행오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귀인은 잘못된 출처에 기억을 할당하는 것으로 환상으로 본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이며, 피암시성은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유도질문을 하거나 강한 암시를 주어 기억 자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경우입니다. 편향은 현재의 지식과 믿음이 과거의 기억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며, 지속성은 마음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오류를 죄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성서에 나오는 7가지 죄악이 사실은 생존에 유익하거나 때로는 필요한 특징들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처럼 기억의 오류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과식은 배탈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나타내지만 우리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충분한 음식을 먹어줘야 할 것이며, 빗나간 성충동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지만 개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유전인자를 확산시키려는 본능이 강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기억의 오류 역시 진화의 산물로서 이를 통하여 기억이 가지는 적응적인 강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기억의 불완전한 본질을 탐색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며, 어떻게 기억의 해로운 영향을 줄이고 피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했다(6쪽)”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한 연구는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베일을 벗어가고 있는 분야라서 용어에서부터 개념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에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학문적으로 때로는 문학적으로 접근하여 독자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 서문을 일본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기억의 오류를 주제로 전개하는 단편소설 <유미우라>를 인용하고 있어 첫 번 만남부터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기억의 오류 가운데 ‘막힘’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어에서부터 아프리카어 에스토니아어, 체이엔어까지 다양한 언어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시적인 표현으로는 ‘혀끝에서 반짝거리는’이라고 번역되는 한국어 “혀끝에서 맴돌다”를 들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또 다른 한국관련 인용을 읽으면서 놀라고 당혹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0년 5월 31일자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린 한국전쟁 참전용사 에드워드 달리가 실제로는 참가한 적이 없는 대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을 비롯하여 자신의 전투공적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는 것입니다.(163쪽)” 이 사건은 피암시성에 의한 기억의 오류를 설명하는 사례로 인용되고 있는데, 과거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특정인의 기억이 일으키는 사회적 반향에 조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기억의 신비는 많이 베일을 벗었지만, 아직도 갈길은 먼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이 소멸되는 대표적인 질환, 치매환자가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억의 원리에 관한 연구는 치매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기억의 오류 가운데 지속성의 경우는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경우인데, 이런 사례들을 보면, 기억이 한계가 있다는 점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모든 것들이 기억으로 저장되어 생생하게 끄집어 낼 수 있다면, 쏟아져 나오는 기억의 폭포 때문에 오히려 질식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