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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치료중단 요구와 의사의 생명보호의무 - 경제적 사유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가? ㅣ 내일을 여는 지식 의학 3
송기민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1년 2월
평점 :
세칭 ‘보라매병원사건’을 기억하십니까? 1997년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 환자처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퇴원을 허락한 보라매병원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물어 의료계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보니 벌써 15년이나 지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거릴뿐더러, 2008년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사건에서는 가족의 경제적 부담이 치료중단에 참작사유가 된다는 새로운 판례가 나와 치료중단을 요구하는 가족을 만나게 되면 헷갈리게도 되었습니다.
송기민교수님은 <가족의 치료중단요구와 의사의 생명보호의무>라는 기다란 이름의 책을 통하여 보라매사건의 전말과 법원의 판단에 대한 심층분석을 시작으로 하여, 국가가 응급환자 생명보호책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재로 분류될 정도로 학술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까닭에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의료현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족의 치료중단요구 사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의료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 소개합니다.
저는 환자를 직접 대면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응급실근무를 섰던 것이 전부이고, 그것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고, 지방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서는 환자를 모시고 온 가족들에게 보다 큰 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그냥 여기서 최선을 다해달라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정밀검사를 통해서 진단을 결정하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의가 없어 보조적 치료와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지만,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고비를 맞게 되면 퇴원을 요구하는 가족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당시만 해도 집밖에서 죽음을 맞는 객사(客死)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던 때라 가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도 보라매사건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건을 다시 요약해보면, 술에 취해 중심을 잃고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시멘트 바닥에 넘어진 환자는 경막외 출혈이 발생하여 응급후송된 후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회복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환자의 처는 당시까지 발생한 진료비는 물론, 퇴원에 이르기까지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하였고, 의료진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가족의 요구가 완강하여 결국 퇴원에 동의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집으로 모셔진 환자는 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한 다음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환자의 형제 등이 퇴원에 간여한 환자의 처와 의료진을 사법당국에 고발한 것입니다. ‘의료권고에 반하는 퇴원’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던 의료계의 관행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퇴원을 주장하여 결국은 환자가 죽음을 맞게 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환자의 처에게 물어 살인의 죄를 묻는다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퇴원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의료인에게까지 살인의 죄를 같이 묻는다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입니다. 보라매병원이 공공의료기관이므로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최종판단은 환자를 집으로 후송하고 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한 인턴선생님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으나, 환자를 담당한 주치의 2명은 ‘작위에 의한 살인방조죄’로 각각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여 유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의료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오던 일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는데, 자의퇴원이 환자사망으로 이어지는 생명경시의 의료관행에 제동을 걸어 남용을 방지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하지만 의료행위도 크게는 환자 - 혹은 가족을 포함하여 - 와 의료기관 간의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면, 계약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환자 혹은 가족이 계약의 이행을 중도에 포기하겠다고 나섰을 때, 의료기관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은 경제적 이유로 자의퇴원을 요구한 가족의 처벌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이의 남용을 방지하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법정신을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보라매사건의 환자를 병원에 옮긴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집에서 경과를 관찰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면 환자의 처에게 살인죄를 물을 수 있었을까요?
저자가 소개하는 이상돈님의 다음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환자의 보호자가 퇴원을 주장한 주된 이유인 치료비부족을 국가가 직접 메워 주거나, 메울 수 있게 하는 의료체계가 기능하지 못한 책임을 왜 의사가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국가가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런 상황에서 감행된 치료중단에 대한 불법성 판단은 정당성을 창출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88쪽)”
보라매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 법학자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군인과 의사를 만들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군인은 외적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고, 의사는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국가를 대신하여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금기약물을 처방하고 조제한 의사와 약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을 입법화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국회의 보좌관으로부터 ‘국가가 언제 의사에게 살인면허를 주었느냐’는 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약물을 사용하는데 있어 피치 못하게 금기약물을 사용해야 하는 의학적 판단을 하는 경우도 처벌을 면치 못한다면 그와 같은 제약이 결국은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잃게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설명해도 오불관언이던 그분이 절벽처럼 느껴져 비참한 느낌이 들었던 추억입니다.
보라매사건 이후 의료현장에서는 가족들이 요구하는 자의퇴원으로 인하여 환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당한 법적 제제를 피하려는 의료인과 가족들이 갈등을 빚는 사례가 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08년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사건도 생겼을 것입니다.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로부터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여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고, 가족들은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가족의 주장을 병원측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법원의 판단을 구하게 되었고, ‘치료비용이 과다한 경우라면 환자 본인과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뿐 아니라 의료자원의 균형적 배분이라는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그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참작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법원의 판단을 얻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는 치료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시대에 접어들면서는 환자를 만났을 때 소생가능성을 판단하고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치료를 포기하던 고대의 의학윤리에 반대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란 고통받는 환자를 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망없는 환자는 미리 포기하는 것 역시 의학의 목적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의사는 자신의 전문적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을 판별하여 가능한 것들은 하려 하되, 불가능한 것들은 내버려둔다.(반덕진 지음, 히포크라테스 선서, 129쪽)”고 적은 플라톤의 저술에서도 이런 경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보라매사건의 판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종합하여 검토하는데 머물지 않고, 보라매사건의 핵심이 되는 응급의료현장에서 경제적요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입된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라 함은 응급환자 본인 또는 가족이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을 경우, 국가가 의료기관 등에 응급진료비 등의 지불능력이 없는 환자를 위하여 대신 지불해 주는 제도(131쪽)”입니다. 이 제도는 응급진료가 경제적 이유로 거부되거나 지연되는 것을 방지하여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라는 국가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제도입니다. 1995년부터 설치한 응급의료기금을 바탕으로 시행되었으나 낮은 응급의료수가와 청구절차가 복잡하여 실적이 저조했다는 지적도 나온 바 있습니다. 동 제도에 대한 국민과 요양기관의 인지도 역시 낮아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국민을 위한 제도로 시작하였던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는 2000년 관련법령의 개정을 통하여 모든 국민을 위한 제도에서 일부 경제적 빈곤층을 위한 제도로 축소시켰는데, 저자는 이 제도가 경제적 빈곤층을 위한 것이라면 ‘기금’이 아니라 의료급여제도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긴급복지지원제도 등 사회보장제도를 담당하는 ‘국가예산’으로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응급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는 점을 살피고, 이를 실현하기위한 정책으로서 응급의료비미수금대불제도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분석하여 개선방안을 제시하고 있어 응급의료현장을 지키는 분들이 주목할 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