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베로에스 지음, 김재범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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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코너를 통하여 과학, 비과학 그리고 사이비과학의 경계를 논하는 책을 자주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주의자들의 시각을 소개하다가 과학철학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서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처럼 과학의 영역을 논하는 경우, 경계설정을 위하여 칼 포퍼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반증가능성을 인용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물론 피글리우치교수는 포퍼교수가 제시한 반증가능성으로 사이비과학과 과학을 가를 수 있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포퍼교수의 해법이 복잡다단한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과학철학을 통하여 비판적 사고를 키워가는 것은 사이비 과학자, 언론 또는 정치가, 심지어는 과학자들의 교언에 속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라는 피글리우치교수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최근에 칼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소개하였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1부 ‘추측’편은 과학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포퍼의 논증을 담은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2부 ‘논박’편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 10편을 담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 포퍼교수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카르납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로 ‘논박’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하면 젊었을 적 친구들과 주고받던 농담이 떠오릅니다. 화제가 지나치게 격이 떨어진다 싶으면 ‘이야기가 너무 형이하학적인 것 아니냐? 허리이상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이 난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논하려 드는 제가 마치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는 ‘형이상학’을 “철학적 기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형이상학은 논리학·인식론·미학·윤리학 등 철학의 다른 연구분야와 상호작용한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으로,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즉 형상의 존재와 성격이다.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인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과 정신의 대상인 관념들을 구별한 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추상과 실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 둘 다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더 실재적인지를 해명하려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는 귀납적 접근방식과 과학을 형이상학과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 의미분석을 통하여 형이상학을 ‘제거’ 내지는 ‘전복’시키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루돌프 카르납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은 정합적 연역을 바탕으로 선험적 논증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데, 엄격한 시험과정을 통하여 입증이 가능한 과학의 영역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으나,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철학자는 때로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며 난센스한 사이비 명제로 되어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포퍼교수는 “무의미성의 증명은, 경험과학을 만족시키는 언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무모순적인 언어에 관해서도 타당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세워 형이상학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포퍼교수의 사이비과학은 입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영역과는 달리 거짓이나 입증되지 않는 논리를 적용하는 영역이라고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읽고서 우연히 김재범교수님의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분들에 의하여 해제가 나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아랍철학자가 해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독일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중역한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차라리 번역하신 김재범교수님이 해제하신 <형이상학>을 읽어보는 편이 이해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멸망 후, 오랜 침체기가 있었던 유럽과는 달리 그리스학문을 받아들여 계승발전시킨 아랍철학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라비아 이름이 이븐 루시드(Ibn Rushd; Ibn Roshd)인 아베로에스는 아비세나와 더불어 최고의 아랍 철학자로 꼽히는데, 아비세나처럼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관하여 많은 주석서를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짧은 해설서입니다. 원전을 독일어로 번역한 막스 호르텐은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추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베로에스의 형이상학을 설명하고,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 실체의 본성을 논하는 부분, 있는 것의 고유한 성질을 논하는 부분, 천구운동과 같은 첫 번째 원인의 원리를 논하는 부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은 모든 원인들에 대하여 형상학적인 원인의 앎을 주며, 더 나아가 목적원인에 관한 앎도 준다.”고 하였는데, 요약하면,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근원적 목적은 단지 자연학문들의 앎에 관하여 앎의, 말하자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의 가장 높은 원인에 관한 앎의 완성을 위하여 아직 남아있는 모든 것의 앎을 매개해야만 하는 것에 있다.(41쪽)”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원리를 올바르게 세우고 개별 학문들에 들어 있는 오류를 제거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니, 앞서 논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처럼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운 느낌이 남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성과 보편적 개념을 파악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발전한 과학 등의 학문적 영역에서 밝혀낸 것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있으나 사유의 틀이 동일한 것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수태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씨앗이 자궁에 떨어져 월경의 피와 만나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며, 월경의 피에 포함되어 있는 살을 만드는 요소의 작용이 이어진다는 설명은 현대적 개념의 발생학의 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논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립자를 설명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기술로서의 의학에 관하여 “의학이 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이와 같은 병을 멀리하기 위해서만 병을 안다). 그렇지만 의학은 건강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안다.(188쪽)”라고 적고 있어 대립하는 존재의 정의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문학의 영역에서도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바와는 동떨어진 부분도 있으나, “기초요소들의 연합과 섞여짐으로부터 활동적인 본질형상이,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의 본질형상이, 나아가 또한 인간의 본질형상이 생긴다.(340쪽)”는 설명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본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첫 번째 원인 원리와 정신은 바로 진화론의 묘체를 설명하고 있음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지금처럼 적절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듯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에 관한 조망에서 밝힌 것처럼 학문들은 크게는 둘로 즉, 신학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및 그 학문의 길잡이로서 논리학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 학문에는 변증법, 소피스트 그리고 형이상학과 같은 보편적 학문들과 변화하는 있음을 다루는 자연학(과학의 영역이라고 보입니다)과 양을 다루는 수학과 같은 개별적 학문들이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본서를 통하여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형이상학은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이것들이 우연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형이상학은 마지막 원인에 이르기까지 원인의 사슬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신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세계를 탐구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신의 세계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의 모든 포괄적인 대상들 안에서, 즉 있는 것 자체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탐구한다(21쪽)”고 하였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형이상학을 비과학의 영역으로 몰아넣으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의 주장은 경계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잘 못이 있다는 칼 포퍼교수의 주장이 형이상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타당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어렵지만 나름대로의 책읽기 성과가 있었다는 위로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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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716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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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전 블로그 친구분께서 “교과서진화론 개정 추진위원회”의 압력으로 우리나라의 일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이 삭제된다는 뉴스와 함께 이와 같은 소식이 저명한 과학잡지 네이처에까지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한국이 창조주의자의 요구에 굴복하였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창피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490274). 창조론에서 발전한 지적설계론을 교과과정에 넣기 위하여 부단히도 노력해온 미국사회에서도 진화론과 견줄 정도의 위치마저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지적설계론자들이 입김이 우리사회에서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사진을 교과서에서 삭제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창조론의 입지는 축소되기 시작하였는데, 분자유전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그 부피를 더하면서 대안으로 내세웠던 창조과학마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지적설계론으로 변화를 모색하였지만, 이 역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하여 회의주의자들은 비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우리네 삶과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되면서 과학으로 포장한 비과학이 세인들의 눈과 귀를 가리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하여 태동한 회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표적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의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를 비롯하여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 등을 읽으면서 회의주의적 사고를 키워야 할 필요에 공감해오던 터였습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제목이 주는 묘한 뉘앙스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만, 저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회의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이한 것은 회의주의자들 가운데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 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왕에 나온 회의주의관련 서적들의 번역에서 사용한 용어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등의 용어는 사이비과학과 거의 과학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왕에 소개된 회의주의적 관점의 서적들은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의 논리적 배경을 소개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는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사례를 먼저 소개하고 그와 같은 이론들이 우리 사회에서 발을 붙이게 되는 이유를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미디어의 역할이나, 대중지식인들이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이론을 활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점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왕의 회의주의관련 서적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사례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클 셔머와 같은 경우는 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그리고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제가 최근에 읽은 칼 포퍼교수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던 반증가능성[자연학과 철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추측과 논박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포퍼의 개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은 과학의 본질이 복잡다단해진 현실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단기준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0611>를 인용하여 비판하면서 역사의 일반이론이 적절한 분석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다이아몬드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과학을 통한 검증가능한 예측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칼 포퍼교수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에서 그 논리적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특성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여 해설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를 충분히 개진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국 펜실베니아 도버시의 법정에서 맞붙은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자들 사이의 대회전에 대하여 양측을 대표하는 입장을 각각 소개하고 결국은 정경분리를 규정한 미국수정헌법을 지켜 지적설계론자의 패배를 결정한 존스판사의 결정문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글을 마무리한 점이라거나,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주장이 과장되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주장하는 편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무리 부분에 적은 특정영역에서 누가 전문가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정 영역에서 누군가를 전문가로 볼 수 있으려면 다음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그 사람은 비전문가보다 해당 영역에 관해 옳은 믿음을 더 많이(그리고 틀린 믿음을 더 적게) 지닌다. (2) 그 사람은 해당 영역에서 ‘상당한 양의 진리’를 알고 있다.(436쪽)” 일견해서는 똑 떨어지는 기준같아 보입니다만, 참으로 애매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것이 아닌 앨빈 골드먼이 제안하는 전문가 구분법 다섯 가지 역시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책읽기에 몰입이 어려웠던 점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산만하다 싶은 서술과 특히 본문 중에 작은 글씨로 적어 넣고 있는 주석이 오히려 책읽는 흐름을 방해한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의 주석이 그렇게 중요하였다면 본문에 녹여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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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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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느림>을 받아 들고는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4918 - 네 개의 연작이 나와 있습니다만, 첫 번째 작품에 가장 마음이 끌리는 편입니다.>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떠올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평면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면서 쿤데라가 <느림>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메신저가 다소 충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느림>에서 삶의 엑스터시를 얻는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쿤데라는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안동 한옥마을을 찾았을 적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고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그 옛날의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으로 가던 밀란쿠와 아내 베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만나고 오토바이 탑승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토막 현재의 시간에 매달려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나는 것이 없기 때문(8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작가는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전제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안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방앗간’하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면서 상상의 날개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바로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파리의 고성에 머물게 된 주인공은 2백년 전 작가 비바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연애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스무살이 된 한 귀족이 극장에서 만난 T부인(귀족의 애인인 백작부인의 친구)이 공연이 끝난 뒤 집에 바래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T부인은 정부인 후작대신 젊은 귀족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부인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관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마차의 흔들림에 미처 깨닫지 못한 접촉이 점차 느린 리듬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접촉을 알게 되고 이야기가 엮이게 된다는 전개입니다.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T부인의 남편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만 뚱한 남편은 두 사람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남은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 곳에서 정사를 나누게 되고 성의 밀실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계속하는데,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트릭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일은 없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정사에 이르는 과정을 저는 그저 건조하게 적었습니다만 주인공은 그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상상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본능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졌다.(41쪽)”고 적은 것을 보면, 이미 예정된 결과를 향하는 것이겠지만, 형식적으로는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처럼 남녀간의 사랑이 엑스터시에 이르는 과정이 지루해보일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나름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남녀의 사랑은 빠르지만, 건조한 듯 하다는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이 호텔에서는 지식인 베르크와 뱅상, 체코 학자 체호르집스키가 각자 자존심과 명예, 쾌락을 쟁취하기 위한 긴박한 힘겨루기가 벌어지는데, 뱅상과 쥘리, 그리고 베르크와 임마쿨라타 사이에 정사는 서로의 감정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대립되는 가운에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수영장가도 불사합니다. 이 정사를 체호르집스키가 지켜보는 것은 일부 현대인이 좋아하는 관음증의 일면을 시사하는 점이라 보입니다.

 

네 쌍의 남녀의 관계는 직설적이고 퇴폐적이며 단선적이기도 한데, 저자나 번역자 역시 걸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은 탓에 차마 옮겨 적기가 민망할 것 같은 것은 제가 구식인 탓일까요?

 

사족일 듯합니다만, 표지그림을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쿤데라 전집의 모든 작품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느림>의 표지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피레네 산맥 위의 성」이라고 하는데 매우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는 영화 <아바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03028>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에 떠 있는 바위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상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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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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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PD를 처음 만났던게 언제던가.... 그동안 거의 편식에 가까운 책읽기를 해온 탓인지 그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인사를 나누고서야 그 분의 정체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글솜씨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바꾸는 책읽기>는 처음 읽게 되는 그분의 글입니다.

 

마침, 책읽기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어서인지, 공감의 고갯짓은 물론 때로는 정말 그럴까 하는 고갯짓까지 나름대로의 다양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갑니다. 일단 그녀의 다양한 영역의 책읽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장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와 같이 난해할 수 있는 과학, 철학 부문의 책에서부터 고금을 넘나드는 문학서적은 익히 알려져 있는 작품도 있지만 생소해 보이는 작품까지도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글은 읽은 책을 바탕으로 한 사유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 특성(?)을 활용하여 취재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을 마침맞게 엮어 넣어 감칠맛이 날뿐 아니라 인간냄새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읽기에 관하여 주변으로 흔히 받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2.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3.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4.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5. 책이 쓸모가 있나요? 6.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7.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8.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그리고 보니 저도 역시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서평에 관한 저자의 생각에 눈이 번쩍 떠지는 느낌이 있었기에 옮겨봅니다. “서평은 아마추어의 예술입니다. 서평은 자신의 생각을 써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진실된 마음이 담겨 있으면 됩니다. 서평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서평이 누군가의 맘과 통한다면 너무나 좋습니다. 나와 그 누군가는 친구가 된 셈이니까요.(167쪽)” 아직 주관이 바로서지 못해서 서평을 쓸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읽기’에 대한 저자의 제안은 마침 최근에 제가 경험했던 바가 있어 특별한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바로 대학 신입생때 읽었던 한스 카로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807>을 다시 읽으면서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지만 그래도 기억의 한 구석에 남아있던 부분에 대한 느낌이 다시 강렬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저자의 이념적 배경이 읽히는 생각들을 굳이 적었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만,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74쪽)”고 한 해고노동자의 절절한 이유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평생 직장으로 믿었던 회사에서 거리로 내쳐진 그처럼 저 역시 큰 그림을 그려나가던 직장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직 공무원이었던 제게 인사권을 가진 기관장께서 부르시더니 “당신이 일을 참 열심히, 잘 한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당신의 상사가 당신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상사는 임용과정에서 저와 경쟁하던 분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콕콕 지르는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글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책은 이 사회의 논리 안에서 난 정말 잘 나가고 있어, 라도 생각한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 사회가 이대로 가면 곤란하다고, 이 세상엔 바꿔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해 보려고 정력을 쏟아 부은 것에 가까웠습니다.(106쪽)” 그리고 보니 제가 세상에 내놓은 책들, <치매, 나도 고칠 수 있다>나 <눈초의 광우병 이야기>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로 그런 논리로 쓰기 시작했던 글들이 세상에 빛을 본 셈입니다.

 

끝으로 저자의 말대로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읽을거리를 발견하는 일은 책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와는 다른 해석을 읽게 되면 그 이유를 찾아들어가는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로 삼은 것은 ‘키치’였다고 적었는데, 사실 이 책을 논한 북콘서트에서도 ‘키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고 상당한 시간이 할애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키치’라는 단어를 생경스럽게 느꼈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쿤데라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99쪽)”라고 기치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키치라는 개념은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12쪽)”라는 사비나의 말에 더욱 헷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테레사나 토마시와는 철학이 사뭇 달라 보이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단적으로 정리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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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시리즈로 된 책의 리뷰를 쓰는 일은 참 난감하다. 전체를 읽고 하나로 적어야 하나 아니면 한편씩 적어야 하나 망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묶어서 때로는 각각 적어보기도 합니다만,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각각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라고 말해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스토리가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창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장면 혹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프루스트가 오감을 통해서 느낀 것들을 빠트리지 않고 적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기억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정밀하고 정확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번 이야기에서는 화자가 주인공으로 돌아와있습니다. 주인공이 글쓰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고, 가능성을 따져보는 과정이나, 처음에 호의적이지 않던 부모님이 긍정적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핵심은 지난 이야기의 말미에 맛을 보였던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이 부침을 겪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파리 사교계의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사이에 질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연모하는 마음을 엮어 넣으면서 스완가의 관심을 받게 된 점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질베르트에게 향하는 연모의 정을 스완가의 사교모임에 초대되면서 자연스럽게 키워나가는 과정, 그리고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질베르트의 의외의 모습으로 야기되는 작은 갈등이 확대되면서 절교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지난 이야기에서 스완씨가 오데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극심한 질투와 고통을 겪은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것은 오데트의 감춰진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스완씨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귀띔이 나오고 있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집니다. 즉 주인공은 스완씨처럼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아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이 천식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는 까닭에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성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주인공이 질베르트의 관심을 얻게 되는 지난한 과정을 참을성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녀의 양친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있는지 이야기하자, 질베르트는 (…)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걸!’하고 나서, 내 곁을 물의 요정처럼 스르르 지나치며 까르르 웃어 댔다.(93쪽)” 이렇게 시작한 관계가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다과시간에 초대받는 관계로 그리고 오데트와 개인적인 만남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녀의 육체에 끌리는 나 자신을 느껴 그녀에게 말했다. ‘자아, 빼앗지 못하게 해봐, 누가 기운 센지 내기하자구.’ 그녀는 편지를 등쪽으로 감추었다. 나는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돌려...(97쪽)”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이루어지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녀관계는 예상치 않은 복병을 만날 수 있고, 이런 상황을 넘어야 해피엔딩이 되는 것인데, 눈에 콩깍지가 쓰였을 때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상황이 깨름칙한 무엇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되짚어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의 기일에 오페라의 발췌를 들으러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놀라게 되는데, 평소 주인공의 마음에 드는 것, 양친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시침을 뚝 따고 밀어붙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158쪽, 170쪽) 질베르트의 이런 모습에 대하여 저자는 “질베르트는 확실히 외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질베르트가 있었다. 그 부모의 두 성질은 단지 그녀의 몸 안에 섞여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성질은 서로 다퉈 그녀를 빼앗고 있었다.(200쪽)” 현대 정신의학에서 해리성장애로 정리되는 성격의 단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보입니다.

 

이날 사건은 주인공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구름을 남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 기일에 일어난 사건 이래 나는 늘 마음속으로 물었다. 질베르트의 성격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 아닐까, 남이 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 그 슬기로움, 그 침착, 끊임없는 그 온순함은 오히려 그녀가 자존심에서 억지로 보이지 않고 있는 매우 격렬한 욕망을 숨기고 있어, 그 욕망은 어쩌다가 방해받았을 때 외에는 돌연한 항거로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205쪽)” 이런 의혹이 점차 확대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생기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남녀의 헤어짐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 절절한 느낌을 손에 잡힐 듯이 그리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떨림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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