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베로에스 지음, 김재범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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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코너를 통하여 과학, 비과학 그리고 사이비과학의 경계를 논하는 책을 자주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주의자들의 시각을 소개하다가 과학철학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서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처럼 과학의 영역을 논하는 경우, 경계설정을 위하여 칼 포퍼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반증가능성을 인용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물론 피글리우치교수는 포퍼교수가 제시한 반증가능성으로 사이비과학과 과학을 가를 수 있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포퍼교수의 해법이 복잡다단한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과학철학을 통하여 비판적 사고를 키워가는 것은 사이비 과학자, 언론 또는 정치가, 심지어는 과학자들의 교언에 속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라는 피글리우치교수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최근에 칼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소개하였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1부 ‘추측’편은 과학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포퍼의 논증을 담은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2부 ‘논박’편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 10편을 담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 포퍼교수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카르납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로 ‘논박’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하면 젊었을 적 친구들과 주고받던 농담이 떠오릅니다. 화제가 지나치게 격이 떨어진다 싶으면 ‘이야기가 너무 형이하학적인 것 아니냐? 허리이상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이 난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논하려 드는 제가 마치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는 ‘형이상학’을 “철학적 기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형이상학은 논리학·인식론·미학·윤리학 등 철학의 다른 연구분야와 상호작용한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으로,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즉 형상의 존재와 성격이다.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인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과 정신의 대상인 관념들을 구별한 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추상과 실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 둘 다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더 실재적인지를 해명하려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는 귀납적 접근방식과 과학을 형이상학과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 의미분석을 통하여 형이상학을 ‘제거’ 내지는 ‘전복’시키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루돌프 카르납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은 정합적 연역을 바탕으로 선험적 논증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데, 엄격한 시험과정을 통하여 입증이 가능한 과학의 영역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으나,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철학자는 때로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며 난센스한 사이비 명제로 되어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포퍼교수는 “무의미성의 증명은, 경험과학을 만족시키는 언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무모순적인 언어에 관해서도 타당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세워 형이상학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포퍼교수의 사이비과학은 입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영역과는 달리 거짓이나 입증되지 않는 논리를 적용하는 영역이라고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읽고서 우연히 김재범교수님의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분들에 의하여 해제가 나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아랍철학자가 해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독일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중역한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차라리 번역하신 김재범교수님이 해제하신 <형이상학>을 읽어보는 편이 이해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멸망 후, 오랜 침체기가 있었던 유럽과는 달리 그리스학문을 받아들여 계승발전시킨 아랍철학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라비아 이름이 이븐 루시드(Ibn Rushd; Ibn Roshd)인 아베로에스는 아비세나와 더불어 최고의 아랍 철학자로 꼽히는데, 아비세나처럼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관하여 많은 주석서를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짧은 해설서입니다. 원전을 독일어로 번역한 막스 호르텐은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추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베로에스의 형이상학을 설명하고,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 실체의 본성을 논하는 부분, 있는 것의 고유한 성질을 논하는 부분, 천구운동과 같은 첫 번째 원인의 원리를 논하는 부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은 모든 원인들에 대하여 형상학적인 원인의 앎을 주며, 더 나아가 목적원인에 관한 앎도 준다.”고 하였는데, 요약하면,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근원적 목적은 단지 자연학문들의 앎에 관하여 앎의, 말하자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의 가장 높은 원인에 관한 앎의 완성을 위하여 아직 남아있는 모든 것의 앎을 매개해야만 하는 것에 있다.(41쪽)”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원리를 올바르게 세우고 개별 학문들에 들어 있는 오류를 제거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니, 앞서 논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처럼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운 느낌이 남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성과 보편적 개념을 파악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발전한 과학 등의 학문적 영역에서 밝혀낸 것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있으나 사유의 틀이 동일한 것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수태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씨앗이 자궁에 떨어져 월경의 피와 만나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며, 월경의 피에 포함되어 있는 살을 만드는 요소의 작용이 이어진다는 설명은 현대적 개념의 발생학의 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논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립자를 설명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기술로서의 의학에 관하여 “의학이 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이와 같은 병을 멀리하기 위해서만 병을 안다). 그렇지만 의학은 건강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안다.(188쪽)”라고 적고 있어 대립하는 존재의 정의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문학의 영역에서도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바와는 동떨어진 부분도 있으나, “기초요소들의 연합과 섞여짐으로부터 활동적인 본질형상이,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의 본질형상이, 나아가 또한 인간의 본질형상이 생긴다.(340쪽)”는 설명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본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첫 번째 원인 원리와 정신은 바로 진화론의 묘체를 설명하고 있음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지금처럼 적절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듯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에 관한 조망에서 밝힌 것처럼 학문들은 크게는 둘로 즉, 신학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및 그 학문의 길잡이로서 논리학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 학문에는 변증법, 소피스트 그리고 형이상학과 같은 보편적 학문들과 변화하는 있음을 다루는 자연학(과학의 영역이라고 보입니다)과 양을 다루는 수학과 같은 개별적 학문들이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본서를 통하여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형이상학은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이것들이 우연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형이상학은 마지막 원인에 이르기까지 원인의 사슬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신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세계를 탐구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신의 세계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의 모든 포괄적인 대상들 안에서, 즉 있는 것 자체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탐구한다(21쪽)”고 하였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형이상학을 비과학의 영역으로 몰아넣으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의 주장은 경계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잘 못이 있다는 칼 포퍼교수의 주장이 형이상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타당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어렵지만 나름대로의 책읽기 성과가 있었다는 위로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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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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