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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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느림>을 받아 들고는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4918 - 네 개의 연작이 나와 있습니다만, 첫 번째 작품에 가장 마음이 끌리는 편입니다.>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떠올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평면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면서 쿤데라가 <느림>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메신저가 다소 충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느림>에서 삶의 엑스터시를 얻는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쿤데라는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안동 한옥마을을 찾았을 적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고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그 옛날의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으로 가던 밀란쿠와 아내 베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만나고 오토바이 탑승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토막 현재의 시간에 매달려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나는 것이 없기 때문(8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작가는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전제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안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방앗간’하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면서 상상의 날개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바로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파리의 고성에 머물게 된 주인공은 2백년 전 작가 비바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연애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스무살이 된 한 귀족이 극장에서 만난 T부인(귀족의 애인인 백작부인의 친구)이 공연이 끝난 뒤 집에 바래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T부인은 정부인 후작대신 젊은 귀족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부인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관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마차의 흔들림에 미처 깨닫지 못한 접촉이 점차 느린 리듬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접촉을 알게 되고 이야기가 엮이게 된다는 전개입니다.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T부인의 남편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만 뚱한 남편은 두 사람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남은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 곳에서 정사를 나누게 되고 성의 밀실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계속하는데,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트릭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일은 없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정사에 이르는 과정을 저는 그저 건조하게 적었습니다만 주인공은 그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상상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본능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졌다.(41쪽)”고 적은 것을 보면, 이미 예정된 결과를 향하는 것이겠지만, 형식적으로는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처럼 남녀간의 사랑이 엑스터시에 이르는 과정이 지루해보일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나름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남녀의 사랑은 빠르지만, 건조한 듯 하다는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이 호텔에서는 지식인 베르크와 뱅상, 체코 학자 체호르집스키가 각자 자존심과 명예, 쾌락을 쟁취하기 위한 긴박한 힘겨루기가 벌어지는데, 뱅상과 쥘리, 그리고 베르크와 임마쿨라타 사이에 정사는 서로의 감정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대립되는 가운에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수영장가도 불사합니다. 이 정사를 체호르집스키가 지켜보는 것은 일부 현대인이 좋아하는 관음증의 일면을 시사하는 점이라 보입니다.

 

네 쌍의 남녀의 관계는 직설적이고 퇴폐적이며 단선적이기도 한데, 저자나 번역자 역시 걸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은 탓에 차마 옮겨 적기가 민망할 것 같은 것은 제가 구식인 탓일까요?

 

사족일 듯합니다만, 표지그림을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쿤데라 전집의 모든 작품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느림>의 표지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피레네 산맥 위의 성」이라고 하는데 매우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는 영화 <아바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03028>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에 떠 있는 바위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상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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