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퍼 인문 예술 총서 11
브라이언 매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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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으로부터 소개 받기 전까지만 해도 칼 포퍼교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분들의 성명 정도를 익히고 있는 것만도 다행아니냐는 변명으로 가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늦었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공부해나갈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의 철학을 담은 다양한 책들 가운데 겁도 없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7865>, 그리고 <추측과 논박;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을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과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아는데까지 이해하겠다는 각오로 정말 머리카락을 뽑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칼 포퍼를 처음 소개하신 지인을 만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건네 받았습니다. 바로 영국의 중견철학자 브라이언 매기가 쓴 <칼 포퍼>입니다.(중견철학자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 책을 번역 소개할 당시에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30년생이니 원로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그의 과학철학과 사회철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만큼 이 책은 칼 포퍼의 삶과 철학을 요약하고 있어 포퍼교수에게 헌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점이 있는지 포퍼교수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구미 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뜨거운 아이콘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9333>에서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포퍼교수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을 읽으면서 포퍼교수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평가가 양분되고 있다는 소개에 공감하였습니다. 실제로 포퍼교수님의 책을 읽게 되면 매기교수가 소개하는 포퍼교수에 대한 찬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과학자들 가운데 “과학철학에 대한 포퍼의 저술들을 읽고 명상하여, 그것을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기초로 채택하시요”라고 한 존 에클즈라던가, “과학의 방법 이외의 것은 과학에 없으며 포퍼가 말한 것 이외의 다른 과학의 방법은 없다.”고 한 허만 본디 경의 예를 보면 과학계와 철학계에서 포퍼교수의 위치를 짐작케 합니다.

 

포퍼교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세웠던 전통대로 비판을 통해서 지식이 진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새로운 논문을 통하거나 혹은 자신의 저서를 개정하는 과정에 추가하여 발표함으로써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는 없어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태두라 할 플라톤과 근대 철학의 혁명아 칼 마르크스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의 경우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반증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반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반증할 수 있는 예측이 도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종자들이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매기교수의 <칼 포퍼>는 그의 삶과 철학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반증가능성’의 핵심 내용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흄의 귀납적 접근에 의한 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논리적 의미에서 경험적인 일반화는 비록 검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반증할 수는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과학적 법칙은 증명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험될 수는 있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을 반박하려는 체계적 노력에 의해서 시험될 수 있다(29쪽)”는 것이 포퍼교수의 철학의 묘체라 하겠습니다.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에 한걸음씩 다가설 수 있다는 포퍼교수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크라체스 이전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들도 드러내 보여 주지 않았다 태초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찾고 또 찾아 사물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우리는 알 수 있다.(35쪽)”

 

사족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닫힌 용기 안에서는 물이 100℃에 끓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30쪽)”이란 매기교수의 설명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은 번역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닫혀있는 계에서 물에 가온을 하게 되면 압력이 올라가면서 대기압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물은 100℃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시작한다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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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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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음악과 미술분야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할 수준이라서 안타깝습니다. 물론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음악과 미술분야에도 전문가 수준으로 활약하시는 분들이 많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라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박물관 혹은 미술관은 꼭 찾아서 감상하는 것은 나도 그곳에 가보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체면치레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는 평론을 읽게 되면 당연히 ‘그렇구나!’ '아하!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구나‘하고 감탄하게 되니 귀가 얇은 것이라기 보다는 눈아 얇다고 해야 되나요?

 

그런 저의 편견을 깨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입니다. 예술이라고는 번역하였지만, 미술평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판의 정도가 상궤를 넘어 충격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뷰의 제목을 ‘평론을 난도질하다’라고 적게 되었습니다.

 

“능수능란한 글 솜씨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무장한 일부 평론가들의-특히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일부 평론가들의-지나친 정치의식 또는 정치적 의도가 예술 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내버리고 마치 자기네들이 주체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김태호교수님은 추천사에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학구적인 예술사의 본질이 어떤 식으로 점차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연구,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정신분석 등) 학계의 여러 가지 급진적 문화정치의 볼모로 붙잡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명의 거장 화가들과 그들의 걸작들이 오늘날 몇몇 예술비평가와 철학자들에 의해서 터무니없이 재해석되고 진보적 이념의 환상에 끼워 맞추어지는 역겨운 모습이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제초 여지없이 폭로된다.”고 출판사는 요약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는 왜 예술사를 가르치고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답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술에 대해 배우기 위함은 물론이고, 예술이 전개된 문화적 배경에 대해 배우는 것, 예술의 발전에 대해 배우는 것, 그리고 역사의 진행에 따라 예술가들이 어떻게 ‘문제들을 풀어갔는가’에 대해서 배우기 위함이다.(26쪽)” 그런데 “그 예술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입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 대해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책(57쪽)”이라고 저자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여지가 많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의적 해석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특히 대가의 작품을 제멋대로 찟고 발기는 행태는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평론을 평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평론을 평하는 수준을 넘어서 난도질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는 말씀을 숨길 수 없습니다.

 

저자의 감시망에 걸린 평론은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그리고 반 고호에 이르고 있으니 그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쿠르베일까 궁금했는데, 쿠르베의 작품을 평한 존즈 홉킨즈 대학교 마이클 프리드교수는 전방위적인 해석의 왜곡과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이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쿠르베의 작품이 선두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최근에 연재를 마친 칼럼에서 다른 분의 글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따져들어가는 형식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자 역시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어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리드교수는 (…) ‘쿠르베가 연극적인 것을 패배시키기 위해 취해야만 했던 방법들은, 그가 생산했던 예술이 흔히 구조적으로 여성적인었다는 것을 표했다.’고 주장한다.”라고 인용하면서 ‘구조적으로 여성적인 예술’이 도대체 뭐고,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남성적인 예술’은 또 뭐란 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에 대한 저자의 거칠고 날선 비판은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끌어올리는데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읽다보니 참 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사전트의 작품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을 주목할 많한 그림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저자가 이 그림이 바로 보스턴미술관에 걸려있다는 친절한 소개까지 곁들였는데, 불과 몇 주일 전에 방문했던 보스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사뭇 가물가물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이 책을 읽었더라면 사진도 찍고 더 자세히 살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The Rape of the Masters'라는 상식 밖의 제목을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라는 거침없는 제목으로 옮긴 옮긴이의 기발함도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미술 평론 역시 회의주의적 시각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도판을 책 한가운데 모아 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림을 왜곡해서 해설하고 있는 부분에 넣어 쉽게 그림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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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페우스의 영역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수현 옮김 / 펄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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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일본을 여행하면서 색다르다 느끼는 점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잠시 짬이 날 때 꺼내드는 간편한 크기의 책입니다. 페이퍼백이라고 부르는 이런 종류의 책은 대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주제를 주로 다루는 편이지요. 과거 우리도 문고판이라고 하는 작은 크기의 책이 유행을 탄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의 책이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되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 곁을 떠나 사라지고 말았더라구요. 그 이후로 우리 책은 다시 커져서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읽는데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을 수용한 브랜드 <펄프>가 런칭되었습니다. 다루는 영역도 가벼운 장르소설을 주로 다룰 것이라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벼운 읽을거리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고급사양의 종이를 피하고 있어 책값이 비싸지 않은 것도 긍정적인 면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 나온 책 가운데 일본 작가 가이도 다케루선생의 <모르페우스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모르페우스(Morpheus)는 잠의 신인 힙노스(Hypnos, 혹은 솜누스, Somnus))의 아들로서 잠든자로 하여금 온갖 사람의 모습을 꿈꾸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가이도 다케루선생은 외과와 병리학을 공부하고 임상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얻는 영감을 바탕으로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자를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모르페우스의 영역> 역시 인공동면 기술을 둘러싸고 이를 필요로 하는 환자와 의사, 그리고 관료들의 팽팽한 대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고가의 신의료기술인 인공동면기술에 너도나도 매달리게 되면 의료비 등 공적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예상한 관료들의 치밀한 저지대책에 맞서는 역할을 동면자를 돌보는 간병인 역으로 나오는 료코의 독특한 발상의 전환에 극적 반전을 이루어내는 작가의 깔끔한 솜씨에 반하게 됩니다.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완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먼 훗날 의학이 발전하여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일종의 시간여행방법으로 인간냉동법이 개발되었고 이 방법을 적용하여 스스로를 냉동시킨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냉동법이 풀어야 할 문제는 해동(解凍)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체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물이 냉동과정에서 결정을 이루기 때문에 이 결정이 세포 혹은 세포에 있는 미세기관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는 점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동물실험을 통하여 검증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는 해보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인공동면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동면이라고 하면 개구리나 뱀 같은 냉혈동물이 먹이를 구하기 어렵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잠에 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물론 곰과 같은 온혈동물도 동면을 취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해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개발(?)한 인공동면 장비는 인간을 가사상태에 이르게 하여 양수와 흡사한 메듐(medium을 이르는 일본어로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되는 매체를 이르는 단어로 보여 그 조성은 비밀에 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에 잠기도록 하고 하루에 조금씩 온도를 낮추어 4도에 이르도록 하고 동면에서 깨어날 때 역시 하루에 조금씩 온도를 높이고 상온에 이르게 되는 날 메듐을 제거한 다음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소생하도록 하는 신의료기술(?)입니다.

 

5살 때 발병한 망막아세포종으로 한쪽 눈을 잃은 사사키 아스씨는 4년 뒤 다른 쪽 눈에 종양이 재발하여 눈을 잃을 상황이 되자 마침 개발된 인공동면기술을 적용하여 5년간 잠들기로 하였는데, 당시 망막아세포종 치료제가 개발 중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스씨가 인공동면술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암환자를 비롯한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지자 건강보험재정의 파탄을 우려한 후생노동성 관료들은 관련법안 만들면서 아스씨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순간 누구도 인공동면기술을 적용받을 수 없도록 제한을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게임이론의 제왕이라고 하는 MIT의 소네자키 신이치로 교수가 ‘동면 8원칙’을 제안하게 됩니다.

 

인공동면에 든 환자의 경우를 읽다보니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생각납니다.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굴속에는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하도 살기 좋아 잠시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그 잠시 동안에 바깥세상에서는 많은 세월이 지나서 변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잠든 사이에 흘러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은 없는 법이지요. 스텔스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신이치로 교수가 제안한 동면 8원칙에도 틈새가 있었고, 인공동면을 영구히 차단하려는 후생노동성 관료들의 치밀한 계획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허점을 료코가 찾아내게 됩니다.

 

바로 인공수면 중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억소실 소프트웨어인 리버스 히퍼캠퍼스(hippocampus는 해마라고 번역하고 뇌에서 기억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가 핵심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리버스 히퍼캠퍼스는 “역행성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기억을 지우기만 하면 부자연스러운 공간이 남는다. 어떤 시기의 기억이 통째로 빠져버리면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잃는다.(157쪽)”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조작으로 지우고 넣을 수 있다는 발상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IT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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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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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경우를 비유할 때, 흔히 물에 빠져봐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요즈음은 간혹 우리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 오래지도 않은 과거에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얻어낸 감격조차도 기억하는 세대가 이제는 시대의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일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렇기 때문인지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본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이 낯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그리스시대 처음 등장한 민주주의의 원형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피로 써온 민주주의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북미와 남미대륙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등장했다가 스러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부터 영국으로부터 싹튼 민주주의의 씨앗이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을 통하여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고,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가 전체주의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뒤쫓고 있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세상 그림과 조각, 시, 희곡, 소설, 과학 및 기술적 발명품을 죄다 한자리에 모은다 해도 민주주의만큼 인류의 창의력과 혁신적 사고가 빛나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삶을 허용하면서도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계속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다.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민주주의 없는 세상은 암울하다.(16쪽)”라고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형이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 아테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테네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민주주의는 시간적 공간적 공백을 두고 2000여년이 지난 16세기 알프스고원의 그라우뷘덴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나 알프스에서 운용되던 민주주의가 항상 논리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가 민주주의가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고 내세우는 까닭은 흡족하지 않은 점이 많은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살리고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보완하는 움직임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는 늘 공격당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권력을 남용하는 정부뿐 아니라 뿌리 깊은 기득권층과 부유한 기업 및 개인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어막(22쪽)”이라는 점입니다.하지만 민주주의를 오도(誤導)하는 것은 정부나 부를 쥔 쪽 만이 아니리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원형이 어떻게 다져졌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로마시대의 공화정이 성립되고 무너지는 과정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알프스 고원의 사례를 제외하고서 마케도니아가 아테네를 정복한 기원 323년부터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까지의 2100년 동안은 민주주의의 공백기간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도가 아니라 기존의 관습과 관행, 구조와 통념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정치형태라는 점을 고려하여, 민주주의가 태동하기까지의 사회의 변천과정을 중세를 거쳐 근대 유럽사회의 정치형태의 격변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유럽제국들이 신대륙을 경영하면서 신대륙에서 민주주의가 싹터가는 과정,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통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과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식민지배국가의 시각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서술도 없지 않을 뿐 아니라 제3세계에서의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들에서의 민주주의가 성장해온 역사 자체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를 상세하게 다룬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잘 요약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민주주의가 태동한 유럽사회의 변천과정의 기술에 비하면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은 개략적 기술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국가에서는 중국에서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자리잡을까 하는 전망을 내놓은 것 이외에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기술이 생략되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서구식 민주주의가 가정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해온 과정은 반드시 포함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민주주의하면 평화적 정권 이양, 동의에 따른 통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선거, 보통선거권 등의 기본요소가 떠오른다고 적었습니다만,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이양에 있어서 적어도 여와 야가 각각 한차례씩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첫 번째 정권이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정권이양 과정에서 사회적 혼란이 있었던 것은 옥의 티라 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합니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역사만을 단순하게 요약하고 있다기 보다는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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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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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꽃피는 아가씨들’이란 부제의 의미가 후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은 전편의 끝 장면으로부터 2년을 건너 뛰어, 아마도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이라 추측되는 시점에 노르망디 해안가에 있는 발베크로 떠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편에서는 질베르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마음 졸이다가 어느 순간 질베르트의 이질적인 면모에서 생긴 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는데, 아무리 연모하는 마음이 식었다고는 하지만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습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 이유를 기억의 일반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회상이라는 것도 기억의 일반적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기억의 일반적 법칙 자체가 습관의 보다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습관은 만사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망각했던 바로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가장 잘 생각나게 한다. (…) 우리의 눈물이 고갈되어 버린 듯할 때도 역시 울게 하는 것,....(8쪽)” 헤어진 여인을 잊으려 애를 쓰다가도 같이 즐겨 듣던 음악이 들려오면 불현 듯 눈물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경험을 한번쯤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독특한 것은 사랑을 정리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만나거나 아니면 술, 운동, 도박?과 같은 전혀 다른 힘을 빌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별한 무엇없이 마음고생을 다한 다음에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또 다른 사랑을 구하는 모습은 당시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발베크로 떠날 무렵 갑작스런 사정으로 어머니가 동행하지 못하게 되자 불안해진다거나, 발베크에 체류하면서 사귀게 된 생 루에게 할머니의 관심이 옮겨가는 듯하자 투정을 부리는 대목이 나오게 됩니다. “할머니가 내 방을 나가 버리자마자, 파리에서 집을 떠나는 순간에 괴로워했듯이, 나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46쪽)”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진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나 할머니의 애정을 붙들려는 주인공의 정신상태가 집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발베크로 향하는 노정에서 그리고 발베크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만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 기를 쓰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언제 그랬나 싶게 또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옮기는 주인공의 행동은 집착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 아닐 수 없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을 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능력입니다. 스치듯 지나친 여성도 마치 대면한 듯 그려내는 능력은 대단하다 싶습니다. “빌파리지 부인의 마차가 빨리 달린다. 이쪽으로 오는 계집애의 얼굴을 볼 틈이 있을까 말까 하게. 그렇지만-인간의 아름다움은 사물의 그것과는 달리, 의식과 의지를 가진 독특한 생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계집애의 개성....(103쪽)” 이하로 한 문장이지만 장문으로 글로 그녀에 대한 느낌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주인공의 관심은 스쳐지난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마차를 세우고 뒤쫓는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제하는 여성이 드물었다는 점은 주인공의 병적인 관심의 소산에 불과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이라는 부제는 발베크에서 만난 프티 부르주아 계층의 젊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산책을 하는 가운데 조우했던 이 여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해 애태우다가, 언젠가 스완이 말했던 화가 엘스티르의 화실을 찾아가면서 관계를 맺게 되는 실마리를 풀어내게 됩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곳곳에서 엮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엘스티르는 한때 베르뒤렝네 사교모임에서 비슈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사람이고 무명시절의 오데트, 즉 크레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새로운 관계를 내비치고 있어 다음에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기억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논리도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내가 가장 나중에 본 얼굴이, 어째서 나에게 상기되는 유일한 얼굴이 아니었나 하면, 어떤 사람에 관한 우리의 회상에서, 지성이, 우리의 일상의 관심사와 가까운 실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젖혀 버리기 때문이다. (…) 나의 첫인상은 모조리 멀리 멀리 가 버려, 나날이 그 모습이 변형되어 가는데, 그것에 대항하는 힘을 기억 속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424쪽)”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고사를 치루는 요령이라고 할 조언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문제가 나오면, (…) 흥분해 보리지 않고, 먼저 다른 종이에 내 초안을 차근차근 적어 놓지, 첫줄에 문제의 요지, 주제의 서술, 다음에 전개해 나갈 본문의 개요, 끝으로 감상, 문제, 결론. 이렇게 전체의 개요을 적어 두면 논지의 방향을 알게 되지.(375쪽)”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조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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