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클럽 1
매튜 펄 지음, 이미정.장은수 옮김 / 펄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읽을 때 무대가 되는 장소가 잘 아는 곳이면 소설의 흐름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매튜 펄의 <단테클럽>은 1865년 미국의 보스턴을 무대로 하여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을 뒤쫓고 있습니다. 주요 무대가 되는 하버드대학교와 롱펠로우의 집 그리고 시내의 보스턴커먼과 올드 코너 등, 지난 6월에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를 다녀오면서 돌아보았던 장소(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0647)들이 등장하고 있어서인지 작가의 설명이 금새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도 제가 소개하는 보스턴 시가지를 둘어보시면 <단테클럽>에 대한 관심이 커지실 것 같습니다.

 

연쇄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은 사건마다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공통점이 있다거나 심지어는 다음 번 사건을 예고하는 사인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점을 유추해서 범인을 좁혀 들어갈 수 있어야 읽는 재미도 더하기 마련인데, <단체클럽>의 경우에서는 특이한 사건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보스턴 지역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힐리판사와 톨벗목사가 잇달아 살해되는 동안 시인 롱펠로우를 중심으로 하여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 단테클럽과 하버드대학의 집행위원회를 대변하는 매닝교수의 갈등에 대하여 따로 설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경찰이 주도하는 사건수사와 단테클럽이 어떻게 연결되어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도 관전포인트일 수 있습니다.

 

단테클럽은 롱펠로우교수를 비롯하여 번역이 끝나면 출판을 담당할 필즈, 원전해석에 참여하고 있는 단테를 강의하는 로웰교수, 그리고 의과대학의 홈즈교수, 그리고 그린 목사겸 교수 등이 핵심멤버입니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후주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읽어나가면서 후주를 읽는 것이 불편한 독자들은 먼저 후주를 읽어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를 갖추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찰이 오리무중인 범인의 종적을 뒤쫓고 있는 동안 단테클럽은 <신곡>의 번역을 통하여 미국 독서계에 불어닥칠 수 있는 단테열풍을 타고 가톨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질 것을 우려하는 유니테리언계 기독교 인사들이 <신곡>의 번역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그리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이들 가운데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전을 전공하는 매닝교수의 입장에서 현대어란 값싼 모방이나 조악한 왜곡에 지나지 않아서 스페인인이나 독일인과 마찬가지고 이탈리아인들 역시 나사 풀린 정치적 열정과 육체적 욕망, 그리고 타락한 유럽의 도덕성 부재를 대변한다고 여겨 외국의 독이 문학으로 위장해서 미국에 퍼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신곡>의 번역을 중지시키려는 노력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별도의 구조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톨즈목사의 주검에 대한 부검에 홈즈가 참여하면서 그를 살해한 방식이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는 성직매매자에 대한 처벌, ‘발꿈치에서 발끝까지(Dai calcagni a le punte)'을 따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고 결국은 단테클럽이 경찰수사와 별도로 사건수사에 착수하게 되면서 연쇄살인사건이 <신곡>의 지옥편과 연관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연히 범인은 오리무중인 상태라서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부풀리고 있습니다.

 

단테가 지옥에서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목에 따른 콘트라파소(contrapasso), 즉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단테클럽>에 등장하는 희생자들 역시 롱펠로우의 번역이 진행되는 과정과 흡사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는 점이 전율을 느끼게 하는 점입니다. 어느새 살인자는 <신곡>에 나오는 루시퍼로 불리게 되는데, 루시퍼(Lucifer)는 신곡의 지옥편 가운데 가장 깊은 ‘반역 지옥’에 머물고 있는 악마 중의 악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단테클럽은 진행하고 있는 단테의 <신곡>의 번역작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뒤쫓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범인의 그림자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단 1부는 범인의 그림자 끝도 밟아보지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문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데다가, 보스턴 문단과 뉴욕 문단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버드 교양 강의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다음 국어사전에서는 교양(敎養)이란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품성을 갖추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거나,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경로의 교양강좌에서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예과시절에 의학교육에 필요한 필수과목 이외에도 교양과목들을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 되어 몇 가지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국사, 문화사, 철학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해당과목의 일반적인 사항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던 것을 다루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하버드 교양 강의>는 하버드 대학교 문리학부의 교양교육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진후인 1945년 <자유 사회의 교양교육>이란 이름의 책을 통하여 하버드대학은 “앞으로 우리 시민이 될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교육하여, 그들이 미국인이고 자유인이기에 갖는 책임과 혜택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교육목표를 당당하게 선언하였다고 합니다(7쪽).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교양교육과정의 목표에 학부생들이 한국인이고, 자유인이기에 갖는 책임과 혜택을 알도록 명시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유산과 변화‘에 초점을 둔 교육이라고 주로 해석된 교양교육과정은 197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지식에 접근하는 주요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다시 21세기 들어 기술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방법론이 바뀜에 따라 교육의 핵심을 새롭게 정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준비기간을 거쳐 2009년 시작된 새로운 교양교육과정은 “학생들이 하버드 대학교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상아탑 밖에서도 그리고 졸업한 뒤에도 실생활에서 직접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 급변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자질을 심어주고, 스스로를 문화의 산물이자 참가자로 인식하게 하며, 윤리의식을 고취케 하고자 한다.(8쪽)”고 합니다. 이처럼 하버드 대학의 변화는 시의적절하여 학부학생이 시대의 변화에 맞는 품성을 갖추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하버드 대학은 학생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이외에도 대중교육이라는 사명도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학 수업을 들을 능력이 되고 듣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으로 ‘저녁 강의’와 ‘여름 강의’ 외에도 150개가 넘는 온라인 강의를 일부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하버드 대학의 대중교육의 일환으로 교양교육이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인문·과학 분야에서의 주제를 골라 각 분야를 대표하는 교수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글들이 우리 시대의 주요 쟁점을 해박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데, 해당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생각을 아우르며, 저자 나름대로의 판단을 더하고 있습니다. 각 주제의 말미에는 저자가 인용한 자료의 목록 뿐 만이 아니라 관심있는 독자들이 더 읽어 이해의 폭을 넓히고 독자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는데 도움이 될 참고도서의 목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옮긴이는 해당 도서들이 국내 출간정보를 더하는 열성을 보여주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열 개의 주제들 가운데 스티븐 핑커교수의 ‘인간정신’을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정신세계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밝혀져야 할 영역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정신에 이어서 도덕, 지구사, 세계인권, 사이버공간, 진화, 종교, 질병, 에너지 및 환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등의 분야에서의 뜨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당 주제들 모두 독립적으로 다루어도 한권 이상의 분량을 이룰 정도로 논의범위가 방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30~50쪽 정도의 분량으로 요약되고 있어 수박 겉핥기식의 개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강좌의 특성상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들을 개괄하여 독자들은 관심에 따라서 필요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나, 각론에 해당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자칫 놓칠 수 있는 중심줄거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북소리]에 늘어놓는 저의 리뷰가 때로는 넋두리처럼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전체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면 [북소리] 리뷰 원고의 심리적 한계를 넘길 듯하여 <하버드 교양강의>를 읽으면서 저에게 특별했던 주제 몇 가지에 대한 느낌을 적어보려 합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주제가 되는 ‘인간 정신’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스티븐 핑거교수가 쓴 글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에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심리학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실험자료들을 인용하여 기억과 착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의 작동방식에 관한 인간의 심리 가운데 추론, 감정 그리고 사회관계와의 관련 등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은 정신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이 혹은 집단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심리학에 관한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정신’에 이어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두 번째 주제는 철학과 스캔론교수의 글입니다. 금년 말에 있을 대선을 앞두고 ‘도덕성’이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될 것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저자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와 자신의 방식의 계약주의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리주의에서 도덕은 사회 통제체계이며 비공식적 법이라는 공통적인 인식에서 출발하는데, 공리주의가 보편적 선(善)을 근거로 목표가 되고 정당화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계약주의에서의 도덕 기준은 사회 통제의 일차적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고려하지만, 계약주의는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도덕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은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를 통합할 때 가장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82쪽)”는 점을 바탕으로 도덕에 대한 설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보는 인권에 관한 현상과 관련하여 철학 공공정책을 전공하는 마티어스 리스교수의 ‘세계인권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인권에 관한 사회적 현상을 지적하는 저자의 다음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권은 해방을 뜻하는 가장 흔한 말이 되었다. 조직적인 힘이 마땅히 돌봐야 할 사람에게 되레 해를 입힐 경우 그것을 비난할 때,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이나 비판이론 또는 근대화이론이나 종속이론 아니면 ‘인간’의 권리와는 대조적으로 정의니 권리와 의무니 하는 도덕적 표현에 호소하기보다 인권에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다.(124쪽)”

 

저자는 인권운동를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평가하기 보다는 철학에 기초한 인권의 개념을 논하고 있는데, 인권, 즉 인간의 권리 밑바탕에 개인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는 갖는다는 생각이 있고, 따라서 그러한 권리 실현은 개인이 속한 국가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세계적 책임이 된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세계적 책임과 관련하여 도덕 상대주의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있어서,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인권의 상대주의 현상이 이해되지 않는 다는 점을 꼭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도덕 상대주의란 근본적 가치와 윤리적 신념은 문화와 밀착된다는 논리로, 해당 문화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진지하게 개입할 수 없다.(155쪽)”는 것인데 인권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특정집단이 북한 동포의 인권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될 때는 굳게 입을 다무는 현상을 도덕 상대주의로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컴퓨터과학을 담당하고 있는 해리 루이스교수의 ‘사이버공간에서의 자유’라는 제목의 글은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이버공간에 관한 통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열린 공간이라는 특성을 가진 인터넷공간에서 대부분의 네티즌은 자유를 넘어 방종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고 있어 정도를 넘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유를 즐기기 위하여 일정 수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공감할 수 없는 통제도 있다는 점을 꼬집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아이들과 우리 사회를 기술이 만든 악막에게서 보호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두려운 악마를 억누를 목적으로 다양한 법과 규제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그것들은 더러는 정치적이고, 더러는 개인적이며, 더러는 상업적이다.(190쪽)”

 

인터넷을 통하여 일어나는 여론몰이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답을 보면서 2008년 우리사회를 달구었던 제2광우병파동을 떠올렸습니다. 저자가 “여론몰이에서 두려움은 자유보다 잘 먹힌다. 우리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과장한다.(193쪽)”라고 적은 것처럼 2008년 당시, 때로는 괴담 수준의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정부는 아무런 대응없이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전문가들 가운데 일부는 인터넷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부축이기까지 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치닫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필자를 비롯한 소수의 전문가들이 나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로 사태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였고 오랜 노력 끝에 결국 빛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루이스교수 역시 “두려움에는 지식이 약이다. 교육은 장기적으로 공포를 이긴다. 말에는 말로 대응해야 옳다는 것이 궁극적인 결론이다. 나쁜 정보에는 올바른 정보로 대응해야 하고, 거짓에는 진실로 대응해야 한다.(196쪽)”는 말로 정리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리학과의 조너선 로서스교수는 ‘진화의 증거’ 편에서 “나는 진화생물학을 가르칠 때, 세월과 더불어 생물 종이 변해온 실제 기록보다는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시조새의 그림이 빠지는 등, 진화론을 부정하는 특정 종교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교과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에서 참고할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조론과 이어 나온 지적설계론 그리고 이 이론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시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이론의 허구를 비판하고, “우리 주위에 있는 생물의 다양성을 설명할 견고한 대안과학이론은 (진화론 이외에) 없다.(244쪽)”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과대학의 캐린 미셸스교수의 ‘질병의 과학’에 대한 느낌입니다. 19세기 중반 런던에서 발생한 콜레라를 역학조사방법으로 접근하여 확산을 방지한 존 스노우경의 사례를 빌어 역학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구방법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모순을 지적하면서 저자는 건강 과학뉴스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부생을 비롯하여 일반대중이 갖추어야 할 다양한 분야에서의 지식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여 전달하려는 하버드 대학의 노력은 대학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이러한 교양과목에서는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의 제왕 1 (양장) - 반지원정대 J.R.R. 톨킨 시리즈 (일러스트판) 1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번.김보원.이미애 옮김, 앨런 리 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영화는 매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암시 혹은 은유를 통해서 관객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저처럼 감각이 떨어지는 관객은 아무래도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전이 따로 있는 영화의 경우는 원전을 읽어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TV나 케이블을 통해서 지금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판타지 영화를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아이들 덕분에 같이 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원전을 통하여 원저자 톨킨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제대로 새겨보자는 아내의 권유로 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모두 일곱권이나 되는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만, 최근 끝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의 은근과 끈기로 읽어나가 볼 생각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느꼈던 것입니다만, 절대반지가 호빗족인 빌보를 거쳐 프로도의 손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책을 읽으면서 풀렸다는 것입니다. 톨킨의 설명에 따르면 호빗족은 “몸집이 작은 종족으로, 난쟁이보다 작다. 다시 말해 실제로 키가 난쟁이보다 작지는 않지만 체격이 좀 더 벌어진 셈이다 그들의 키는 우리 척도로 60센티미터에서 120센티미터 사이로 일정치 않다.(31쪽) 다투기를 싫어하고 또 살아 있는 생물은 장난삼아 죽이지도 않는 그들이었지만, 궁지에 처하면 담대했고 필요할 때는 무기도 다룰 줄 알았다.(39쪽)”는 것입니다. 넉넉한 몸집만큼 온화한 성품이지만 인내심이 대단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배울만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등장인물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호빗족으로부터 인간, 난쟁이 그리고 요정, 여기에다가 모르도르를 중심으로 하는 사우론의 악의 세력에 속하는 트롤과 오르크 등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첫 번째 이야기는 ‘반지원정대’라는 부제가 달린 만큼 절대반지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동안 숨어있던 악의 세력이 절대반지를 손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그들의 야심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절대반지를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는 간달프의 조언에 따라 프로도와 그 친구들이 반지원정대를 꾸려 고향 샤이어를 떠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간달프는 ‘불의 산 오로드루인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산의 틈을 찾아 그 곳에 던져 버리는 것(148쪽)’이 절대반지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해주는데 절대반지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골룸이나 빌보의 행적을 보면 반지는 그 주인의 소유욕을 끌어올리는 등 다양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프로도 역시 반지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를 없애야 한다는 대의에 쉽게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반지원정대와 함께 가는 길, 특히 톰 봄바딜과 그의 아내 금딸기가 사는 곳은 바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금딸기는 강물의 딸이라고 합니다. 프로도의 노래에서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오, 버들가지처럼 날씬하고, 강물보다 맑은 여인! 오, 흐르는 물가의 갈대, 아름다운 강물의 딸이여! 오, 봄 지나면 여름,그리고 다시 봄이 오는구나! 오, 폭포에 이는 바람, 나뭇잎들의 웃음소리!(278쪽)” 한 장면 더... “바로 그때 그들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물결치듯 귓가에 들여 왔다. 바위 턱 바로 위에서 그녀가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현란한 광채를 띠며 휘날렸고, 그녀가 춤추는 동안 발밑 풀잎들이 이슬방울처럼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300쪽)” 마치 눈앞에 펼쳐진 자연에서 어딘가 특별한 장소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출발과 함께 하기로 한 마법사 간달프가 같이 하지 못하는 바람에 묵은 숲, 고분구릉, 달리는 조랑말 여관이 있는 브리 등지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반지원정대는 톰 봄바딜, 성큼걸이 들이 적적할 타이밍에 등장하여 도와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데... 다음 편에는 또 어떤 어려운 장면이 등장하게 될 지 궁금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도 다양한 시각이 있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는 일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하기도 하고, 각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어떻거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국민들이 풍요한 삶을 즐길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사는 나라는 왜 잘 살고 못 사는 나라는 왜 못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마다 시대에 따라 흥성하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국운이 기울어 어려운 시절도 있는데, 다스리는 집권층은 변해도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이 흩어지는 경우도 있고 멸종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 한 나라의 성패를 결정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제시되어왔습니다.

 

대표적인 이론은 지리적 위치 가설입니다.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의 열대지역에 위치한 반면 대부분의 잘 사는 나라가 온대지역에 위치하고 있대서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최근 빠르게 경제적 성장을 이룬 싱가포르, 보츠와나와 같은 나라에 적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총, 균, 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0611>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륙간 환경자원의 분포 차이에서 국가간 불평등이 기인한 것이라는 일종의 지지적 위치 가설 역시 인접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현상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적 가설이나 무지설 같은 경우는 인종차별적 시각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논의가치가 없다는 반박도 나오고 있습니다.

 

MIT 경제학과 대런 애쓰모글루교수와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제임스 A. 로빈슨교수는<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통하여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나뉘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로마제국, 마야 도시국가, 중세 베네치아,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잉글랜드,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증거를 토대로 실패한 국가와 성공한 국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지리적, 역사적, 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바로 ‘제도’의 차이라는 간결한 답안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도다. 따라서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인데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착취적 경제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결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의 사례들을 통하여 입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우리나라의 발전모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이 경제를 운용한 시기가 있었지만, 당시 착취적 경제제도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운용해왔기 때문에 지속적 발전이 가능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또한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에서 사람들이 사는 형편이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점을 비교하면서 또한 남한과 북한 사람들의 삶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바로 착취적 경제제도와 포용적 경제제도가 보이는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보도를 통하여 야간에 한반도를 찍은 위성사진에서 불빛으로 환한 윤곽을 나타내는 남한과는 달리 어두움에 빠져 있는 북한의 모습이 나타내고 있는 안타까운 사진이 남북한의 경제수준을 극명하게 비교하는 자료로 인용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러시아가 미국과 비교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소위 권위주의 정치제도가 실시하는 계획경제는 일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시기가 있을 수 있으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경쟁이 없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역시 러시아 모델을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성장세가 꺽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지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혁신적 경제운영이 가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복지수준을 달성하기 위하여 경제발전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면 권위적 정치가 아닌 사회적 요인에 의한 착취적 경제제도가 운영되는 결과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복지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704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아주 쉽게 쓰여져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고 이론이 단순하기 때문에 이해가 쉽게 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보면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처럼 책읽는 버릇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 젊어서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옮겨가더니 최근에는 인문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 책읽기에서 비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기도 합니다.

 

소설쓰기를 지망하시는 분들을 위한 안내서나 교육과정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과문한 탓인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거나 젊어서는 독서회에 참여해서 책을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누는 토론회를 통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소설가>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2008년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은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밝힌 자신의 문학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 35년에 달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은 나의 소설 읽기 경험도 담겨 있지만 대부분 나의 소설 쓰기에 관한 내용입니다.(177쪽)”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읽어도 크게 도움이 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라포르시안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이 엄청난 독서양을 자랑하시는 분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독서의 깊이에 놀라곤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그림그리기에서 소설쓰기로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11쪽)” 그리고 보니 파묵씨의 책읽기와 비교해보면 저의 책읽기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이라는 논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는 여러 개의 비슷한 의미로 번역소개되었지만, 옮긴이는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소개하는 이유는 소설을 읽거나 쓰는 사람을 나누는 파묵의 기준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인식하지 않고, 즉 소설을 쓰는(읽는) 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소박한’ 작가(독자)로 규정하고, 반대로 소설을 읽거나 쓸 때, 소설에 사용된 기법과 독서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면 ‘성찰적인’ 작가(독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20쪽)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저자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공감하십니까? 1. 전체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딘가에 있을 모티프와 아이디어, 의도, 중심부를 찾습니다. 2.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하여 책이 말하는 것을 추적해 갑니다. 3. 소설 속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지 상상인지를 궁금해집니다. 4. ‘현실도 이럴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서와 같을까?’를 궁금해 합니다. 5. 단어와 비유와 문장에 숨어 있는 음악을 음미합니다. 6. 주인공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작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7.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며 작가와 공범 관계를 형성합니다. 8.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기 시작합니다. 9.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습니다.

 

집착적으로 보이지만 순수한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순수박물관>을 발표한 다음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40쪽)”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분명 케말이 소설가 파묵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4300>에서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소설의 기능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파묵은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를 꼬투리로 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박물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소설은 기억을 보완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과 기억의 관계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중국 작가 모옌이 수상했다고 해서 스웨덴 한림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내온 인물이라는 이유라고 하는데,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문학의 독립성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과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묘하게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반(半)폐쇄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61쪽)”

 

소설의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작가는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73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주변 풍경과 사건과 배경에 녹아들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배회하고, 머물고, 한데 뒤섞여 그 일부가 되는 순간,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9422>에 등장시킨 괴테를 빌어 다음과 같이 불멸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불멸, 81쪽)”

 

자존감, 차별화 의식, 정치 등을 화두로 한 소설의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도 공감되는 점이 많습니다. 아마도 소설 <순수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순수박물관 권2, 113쪽)” 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사물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소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작가의 눈으로 통하여 언어의 형태로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은 기획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면 프루스트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물론 살롱에 드나드는 인물들의 의상에서부터 말투 등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 역시 최근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국일미디어판으로 읽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민음사판으로 읽을 기회가 생겨서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 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147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작가가 처음 소설을 쓰도록 이끄는 직감, 사고,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의도하는 중심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그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심부를 일찍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중심부가 옮겨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보르헤스가 쓴 <모비딕>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작가의 대표작 <순수박물관>에서 중심부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순수박물관 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제가 ‘약혼녀가 아닌 여성과의 관계가 순수할까?’라는 리뷰제목을 달 정도로 순수해보이지 않은 케말의 행적을 볼 수 있었다면 <순수박물관 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케말의 지순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퓌순의 마음을 다시 얻는데 성공하지만 소설의 중심부는 다시 반전해서 순수박물관으로 대상이 옮겨간다는 정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뜻을 제대로 읽고, 더 나아가 발전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유념할 점들이 잘 설명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소설 읽는 즐거움을 중심부를 찾는 노력에서 시작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목록을 소개하고 있어 앞으로의 책읽기에 참고할 수 있는 덤을 얻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