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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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처럼 책읽는 버릇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 젊어서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옮겨가더니 최근에는 인문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 책읽기에서 비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기도 합니다.

 

소설쓰기를 지망하시는 분들을 위한 안내서나 교육과정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과문한 탓인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거나 젊어서는 독서회에 참여해서 책을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누는 토론회를 통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소설가>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2008년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은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밝힌 자신의 문학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 35년에 달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은 나의 소설 읽기 경험도 담겨 있지만 대부분 나의 소설 쓰기에 관한 내용입니다.(177쪽)”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읽어도 크게 도움이 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라포르시안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이 엄청난 독서양을 자랑하시는 분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독서의 깊이에 놀라곤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그림그리기에서 소설쓰기로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11쪽)” 그리고 보니 파묵씨의 책읽기와 비교해보면 저의 책읽기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이라는 논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는 여러 개의 비슷한 의미로 번역소개되었지만, 옮긴이는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소개하는 이유는 소설을 읽거나 쓰는 사람을 나누는 파묵의 기준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인식하지 않고, 즉 소설을 쓰는(읽는) 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소박한’ 작가(독자)로 규정하고, 반대로 소설을 읽거나 쓸 때, 소설에 사용된 기법과 독서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면 ‘성찰적인’ 작가(독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20쪽)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저자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공감하십니까? 1. 전체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딘가에 있을 모티프와 아이디어, 의도, 중심부를 찾습니다. 2.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하여 책이 말하는 것을 추적해 갑니다. 3. 소설 속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지 상상인지를 궁금해집니다. 4. ‘현실도 이럴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서와 같을까?’를 궁금해 합니다. 5. 단어와 비유와 문장에 숨어 있는 음악을 음미합니다. 6. 주인공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작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7.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며 작가와 공범 관계를 형성합니다. 8.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기 시작합니다. 9.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습니다.

 

집착적으로 보이지만 순수한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순수박물관>을 발표한 다음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40쪽)”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분명 케말이 소설가 파묵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4300>에서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소설의 기능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파묵은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를 꼬투리로 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박물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소설은 기억을 보완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과 기억의 관계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중국 작가 모옌이 수상했다고 해서 스웨덴 한림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내온 인물이라는 이유라고 하는데,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문학의 독립성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과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묘하게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반(半)폐쇄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61쪽)”

 

소설의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작가는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73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주변 풍경과 사건과 배경에 녹아들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배회하고, 머물고, 한데 뒤섞여 그 일부가 되는 순간,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9422>에 등장시킨 괴테를 빌어 다음과 같이 불멸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불멸, 81쪽)”

 

자존감, 차별화 의식, 정치 등을 화두로 한 소설의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도 공감되는 점이 많습니다. 아마도 소설 <순수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순수박물관 권2, 113쪽)” 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사물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소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작가의 눈으로 통하여 언어의 형태로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은 기획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면 프루스트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물론 살롱에 드나드는 인물들의 의상에서부터 말투 등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 역시 최근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국일미디어판으로 읽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민음사판으로 읽을 기회가 생겨서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 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147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작가가 처음 소설을 쓰도록 이끄는 직감, 사고,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의도하는 중심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그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심부를 일찍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중심부가 옮겨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보르헤스가 쓴 <모비딕>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작가의 대표작 <순수박물관>에서 중심부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순수박물관 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제가 ‘약혼녀가 아닌 여성과의 관계가 순수할까?’라는 리뷰제목을 달 정도로 순수해보이지 않은 케말의 행적을 볼 수 있었다면 <순수박물관 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케말의 지순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퓌순의 마음을 다시 얻는데 성공하지만 소설의 중심부는 다시 반전해서 순수박물관으로 대상이 옮겨간다는 정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뜻을 제대로 읽고, 더 나아가 발전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유념할 점들이 잘 설명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소설 읽는 즐거움을 중심부를 찾는 노력에서 시작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목록을 소개하고 있어 앞으로의 책읽기에 참고할 수 있는 덤을 얻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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