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마뇽 -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현생인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수민 옮김 / 더숲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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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추리소설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3780>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내란으로 어수선한 콩고에 출현한 신인류를 제거하려는 미국정부의 음모를 뛰어난 정보처리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일본의 민간기구를 움직여 저지하고 생존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줄거리입니다. 미국 정부의 이와 같은 음모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 출현. 이 생물이 번식하게 될 경우,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전 인류 멸망이라는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제노사이드, 11쪽)”는 내용을 담은 정보보고를 토대로 현생인류의 멸망을 우려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현생인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출현하게 되면 지구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모든 자원을 공유해야 할 것이므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에서 밀려난 현생인류가 시나브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거나, 더 나쁜 상황을 상정한다면 신인류의 공격을 받아 더 빠르게 멸망하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미래상황을 예견한 미국 정부의 고위층은 신인류를 제거한다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인류는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관심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이브’가 인류의 조상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가즈아키는 아프리카에 사는 현생인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신인류가 출현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의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0862735>에서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현생인류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살아남은 소수의 현생인류는 그때까지 쌓은 문명도 같이 사라지면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엘벡은 이처럼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신인류가 체세포복제기술을 통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예견하였습니다. 현생인류의 시선으로 인공으로 조성된 환경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신인류의 삶을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인류가 과연 현생인류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등장했던 구인류를 현생인류가 대체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초기 현생인류는 물론 고인류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면확하게 재구성하는 것 자체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고고학, 문화인류학, 고기상학, 지질학 등등 다양한 학문영역의 발전에 힘입어 퍼즐놀이를 짜 맞추는 작업에 조금씩 진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브라이언 페이건 교수의 <크로마뇽>은 바로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고인류와 크로마뇽이라고 하는 현생인류가 공존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네안데르탈인은 “강력한 힘과 용기를 가졌으며 가장 단순한 옷차림에 무기를 소지한 원시적인 인류로, 그들은 말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적능력에 한계가 있었다.”고 추측하였습니다. 반면 크로마뇽인은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유럽인으로, 그들은 잘 발달된 뇌와 언어능력, 혁신적인 성향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가진 모든 놀라운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5쪽)”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관계를 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고인류와 관련된 고고학적 흔적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은 탓으로 보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시조라고 할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6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하여 40만~50만년 전에 서아시아 루트를 타고 유럽으로 이주하였는데, 아마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게 된 것이 이유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20만년 전경에는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7만년전 무렵에는 첫 현생인류가 역시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고, 이들은 12~13만년 전의 간빙기 동안에 번성하게 되는데, 7만3천5백년 전에 일어난 토바산의 화산폭발로 많은 인류가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5만5천년전을 기점으로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4만5천년 전무렵에 서유럽에 크로마뇽인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3만년에 걸쳐 이어진 맹추위가 끝난 15만년 전부터 숫자가 늘어나 영국의 남부와 대서양에서부터 벨기에와 프랑스까지,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중앙유럽을 거쳐 흑해의 먼 동쪽에서부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또는 그 너머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른 방대한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만 9천년 전에는 이탈리아의 캄파니아 화산이 폭발하여 역시 많은 생명체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3만년전 무렵부터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이 공존한 시기는 4만5천년 전부터 약 1만 5천년 이상이 되는데 그들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저자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을 바로 공격하여 학살했거나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고 외각으로 내쫓아 서서히 멸망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자가 상상하는 것처럼 두 집단이 서로 거래를 하고 사냥법을 비롯한 기술, 생각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결혼까지 했을까요?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식인풍습을 증거하는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크로마뇽유적에서는 식인풍습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크로마뇽인들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구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고 있는 반면에 네안데르탈인은 그들이 생존했던 오랜 세월을 두고 기술의 발전을 시사하는 증거가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그들 간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발전된 언어가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인류는 영장류로부터 한 단계 발전하여 도구와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현생인류처럼 이런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인지능력은 갖추어지지 못한 존재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용한 사람들인 네안데르탈인들은 일상에서 놀랍도록 인간다운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인류가 수십만 년 전 유럽에서 사냥하던 때부터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원시적인 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짐승을 사냥했고, 그들의 사냥감과 동일한 환경적 영향을 받았으며, 때때로 포식자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그들이 목가적인 평화로운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131쪽)”

 

저자는 현생인류가 고인류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공격적이었을 가능성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원활용에 있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과 현생인류가 고인류에 비하여 유리한 입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류와 현생인류는 대부분 비슷한 사냥감을 사냥했는데 현생인류가 사용하는 무기가 더 가볍고 관통력도 더 좋았다. (…) 이 두 인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오리냐크기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표현이 가능한 언어능력이 있었고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는 모든 인지능력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몸이 구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현생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상상력과 자아인식능력이 부족했다.(206쪽)”

 

저자는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에 따르는 환경재앙으로 식량이 급감하여 생존환경이 급변하였을 뿐 아니라 이어서 닥친 극심한 한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복제작기술의 차이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생존가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인류학의 연구성과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합니다만, 고인류가 갑자기 닥친 환경변화를 고스란히 앉아서 당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생존에 관한 생물체의 반응은 본능적인 것이라 할 수 있어, 사냥감이 부족하면 사냥감을 따라, 추위가 닥치면 따듯한 남쪽으로 이주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말입니다. 저자는 지나치게 유럽이라는 제한된 장소에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집어넣고 생존에 관한 문제를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출현했던 아프리카에 남아있던 네안데르탈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유럽 이외에 서남아시아를 경유해서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은 없었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생인류가 급속하게 많아지면서 생활영역이 확대됨에 따라서 지구상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멸종되는 과정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인류의 쇠망 역시 이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수적으로 우세하던 구인류가 현생인류에게 밀리게 되는 과정에는 두 인류의 능력의 차이에 더하여 기후변화도 기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생인류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커다란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노사이드는 다양한 이유로 지구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념, 종교 문제로도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는데, 생존에 관련된 자원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치열하게 대립하였을 것 같습니다. 태즈메니아 원주민이 멸망하는 과정을 통하여 현생인류의 제노사이드 성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제러드 다이아몬드교수의 <제3의 침팬지>에서 인간에 숨어 있는 제노사이드 본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교수는 “인간의 모든 본성 중에서도 동물의 선조에게서 가장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제노사이드 본성이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크로마뇽인의 유적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먹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로마뇽인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집단학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리스터 카터의 <내 영혼이 따듯했던 날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0284691>에서는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일찍이 터득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현명한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란 말이지...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이런 지혜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세계의 포식자들이 허기를 느낄 때만 필요한 만큼 사냥에 나서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크로마뇽인들은 필요한 만큼만 사냥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냥감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때문에 사냥과정에서 수확을 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냥과정에서 부상을 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이상의 동물을 죽이기 위하여 사냥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비용효과적이었겠는가 싶습니다. “매년 사냥꾼들은 짧은 마구잡이식 살육기간 동안 그들에게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다. (…) 많은 들에서 마치 사냥꾼들이 즉석에서 바로 먹거나 말릴 수 있는 부위만 취한 다음에 수십 마리의 죽은 말들을 그냥 석게 버려둔 것처럼, 돌칼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336쪽)”

 

브라이언 페이건교수의 <크로마뇽>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가늠할 수 있고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는 현생인류의 초기 예술작품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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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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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민석 작가의 장편소설입니다. 그리 두껍지 않지만 묵직하게 남는 것이 많았습니다. 전통과 권위 있는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고 등단하였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하여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야설을 쓰는 삼류 작가인 주인공 ‘남루한’이 한때는 세계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매미로부터 얻었다는 초능력 스티커를 파는 전직 복서 ‘공평수’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되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앙금으로 남는 첫 번째,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촉망받는 신인작가라도 소설집이라도 낼라치면 빨라서 2년 늦으면 4년이나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문학계의 관례라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복싱 프로모터를 하는 남루한의 아버지 남강호가 양정팔이라고 하는 유망주를 한눈에 알아보고 복싱을 시작하도록 권유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탐욕일세(149쪽)”라고 말하는 장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간혹 목표 지향적 인간 중에 눈앞의 푯대를 향해 돌진하는 유형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 푯대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하기도 한다.(156쪽)”라는 비유와 연결되어 요즈음을 사는 일부의 행태와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그 세 번째. “그러니까, 우리는 평가에 목을 매고 평가에 울고 웃는 이상, 줄기차게 평가만 쫓아가게 돼. 그건 너무나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나를 봐. 챔피언이지만, 한 번 진 걸로 영원한 패배자야. 게다가, 링 안에선 이겨 봤다고 쳐. 링 밖에선? 나는 완벽한 패배자야. 그건 모두 사람들이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고, 결과만 기억하고, 땀 흘리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야.(188쪽)” 이 부분은 공평수의 재기전을 두고 코치인 헤드의 자의적 해석이라는 토를 달고 있습니다만, 제가 바로 요양기관의 평가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어 느낌이 별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평가가 진행될수록 기관에서는 평가에 목을 매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공평수는 양정팔과 가진 재기전에서 마지막 12라운드까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대결을 펼쳐 관중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만 그는 그 찬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덤에서 고요히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공평수가 50줄에 재기전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다운이 거듭되는 치열한 대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버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 어떻게 지느냐? 그래, 중요해. 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 초라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상관없어. 헐렁한 트렁크스, 조명, 땀 냄새, 훈련, 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 그걸 기다리는 링.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 위에 있을 때,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217쪽)” 링에서 장열하게 스스로를 산화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복싱인이었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공평수의 애절한 희망이 느껴집니다.

 

작가 스스로 이런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내 정신적 자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 출판되어 당신의 시간과 금전을 쓰게 했다는 점에 깊이 사과드린다.(222쪽)”고 적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변명(?)을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런 그들에게 이 소설은 작은 희망의 촛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로서의 재기전인 소설을 마무리하여 공모전에 나선 남루한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남루한은 공모전 탈락이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공평수가 그랬듯 승부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220쪽)” 승부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이긴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뒷이야기가 무성한 것 같습니다. 후보가 인정한 결과를 두고 세상이 들끓을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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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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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이제는 시간여행의 고전이라고 해도 될 영화 <백 투더 퓨처> 시리즈에서 과거로 시간여행 중인 맥플라이에게 브라운박사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여 운명을 바꾸어 놓지 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티븐 킹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신작 <11/22/63>에서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 출입구를 발견한 앨 템플턴과 제이크 에핑이 과거에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에 개입하여 바로 잡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사건을 바로잡으려는 앨과 제이크의 시도에 대하여 과거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한다는 설정과 토끼굴이라고 표현하는 시간여행을 출입구를 통하여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이전에 개입했던 사건들이 모두 원상을 회복한다는 설정을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편에서 앨과 해리가 막아낸 비극적 사건의 결말이 과연 해피엔딩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점과, 후편의 하이라이트가 될 케네디암살을 저지한 것이 과연 후세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을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하겠습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 상황이 구리게 흘러간다 싶으면 제자리로 돌려 놓으면 돼. 칠판에 적힌 추잡한 단어를 지워 버리는 것만큼이나…(661쪽)”라고 한 앨의 말처럼 토끼굴 출입을 통해서 리셋시키면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독자도 리뷰에서 링컨암살이 아니라 케네디암살을 저지하는 선택을 했을까 의문을 표시했습니다만, 아마도 시대적 배경으로 고려하였을 때 현대에서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적응하기에는 세월의 벽이 두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든 1958년으로 갈 수 있는 시간여행 출입구를 발견한 앨 템플턴이 1963년 11월 22일 달라스에서 일어난 케네디 암살사건을 저지하려 시도했다가 병을 얻어 더 이상 시도할 수 없게 되면서 주인공 제이크 에핑에게 그 일을 부탁하게 됩니다. 케네디를 살린다면, 베트남전이나 세상을 혼란스럽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일들이 사라지고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사실 케네디 암살사건 만해도 리 오스왈드가 범인이라고 합니다만,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물론 앨이 먼저 시도하면서 꼼꼼하게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 번의 시간여행에서 오스왈드의 저격을 막겠다는 시도가 터무니없어 보기기까지 합니다. 007시리즈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남자주인공의 애정행각이 중요한 눈요기가 되기도 합니다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자칼의 날>이라는 영화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자칼처럼, 이런 종류의 임무를 맡게 되면 아무래도 사건에 집중하기 위하여 남들과의 관계를 최소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제이크가 5년여의 세월을 과거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고려했음인지, 아니면 임무수행을 방해하는 과거의 집요한 저항을 고려한 안전장치로 삼기위해서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제이크는 달라스 인근의 작은 마을 조디에서 교편을 잡게 되고 학교에서 새디 호킨스라는 여교사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조디에서 거점을 만들어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오스왈드가 소련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달라스로 들어온 다음의 행로를 따라 미리 감시초소를 만들어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소련의 개입가능성을 넌지시 비치기도 합니다. 물론 뒤에 가서는 리의 배후세력을 지우는 것 같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 도착하는 63년 11월 22일을 앞두고 제이크는 과거의 거센 저항을 받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지만 새디의 도움을 받아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저격했다는 빌딩으로 가기 위하여 나서는데, 그 과정도 역시 순탄치 않습니다. “과거는 바뀌길 원치 않거든요. 바꾸려고 하면 저항을 해요. 변화의 가능성이 클수록 더 심하게 저항을 하죠.” 우여곡절 끝에 오스왈드의 케네디 저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만, 과연 바뀐 과거가 미래에 미친 영향은 저자가 앨 탬플턴을 통하여 그려냈던 환상적인 것이었을까요? 달라스에서 제이크의 개입을 저지하지 못한 과거가 만들어낸 나비효과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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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투자은행 2
구로키 료 지음, 최고은 옮김 / 펄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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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거대투자은행 1>이 1985년부터 1990년 말까지 그리고 있습니다. 1990년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해였습니다. 주가가 폭락하는 가운데서도 지수와 연계한 상품을 판매하여 수익을 내는 사람도 있었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동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후지사키씨는 이런 상황을 ‘암환자에게 모르핀을 주사하는’ 꼴이라고 자조하고 있습니다. 살로먼의 류진은 주가가 폭락하는 장세에서도 전환사채 차익거래로 1000억엔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4막 3장에 나오는 ‘There is a tide in the affairs of men.’(저자는 ‘인생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의미가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는 경구가 아니더라도 잘 나갈 때 별 생각없이 폭주하다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품경제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오르는 과정에서 세계 금융계를 요리하는 큰 손들이 벌인 모럴 헤저드는 결국은 사직당국의 철퇴를 맞고 물러나면서 거품이 꺼지는 단초가 되었던 것인데, 전편에서 도덕성이 돋보이던 금융계 종사자들도 막상 끝없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추악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해서 주인공 가쓰라기의 모습이 대조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상투를 잡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경고는 대부분 무시되면서 추락으로 이어질 결정이 내려진다는 점입니다. 투자의 고수들과 각종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금융계도 보통사람들이 사는 곳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편에서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무대가 뉴욕과 동경이었는데 후편에서는 모스코바, 런던, 아일랜드, 심지어는 동구의 부다페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로 무대를 옮겨가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어렵기만한 금융 이야기 뿐 아니라 레저와 예술,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화제에 올리고 있습니다. 저자의 박학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후편은 1990년 말부터 2003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국내은행에서 근무하던 가쓰라기씨가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 스펜서에서 재능을 펼치다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일본 상업은행 투자업무 담당 상무이사로 영입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는데, 앞서도 인용했던 셰익스피어극의 대사처럼 일은 언제나 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금새 입증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어났던 국제적인 사건을 인용하여 이야기에 변조를 넣던 작가는 9.11사건은 가쓰라기를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빌딩에 보내 사건 현장을 직접 들여다 보도록 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정도를 걷는 가쓰라기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이어져 결국은 모건 스펜서의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상황에서 금융 경제 재정 담당 대신의 요청을 받아 막 국유화한 은행의 CEO를 맡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그 배경에는 가쓰라기의 은사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여운이 되어 남아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자네들은 졸업하면 다양한 길을 걸을 게야. 그리고 다양한 위치에서 여러 가지 판단을 하게 되겠지. 그럴 때 자신의 판단이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항상 생각해 보았으면 하네. 만일 법률이, 사회를 위한 자네들의 판단에 반한다면 법률을 바꾸기 위해 애써야 하네. 그리고 나라를 위해 힘써 주길 바라네.(316쪽)” 가쓰라기 개인의 입장에서는 보수가 많지 않아도 돈과 개인의 경력을 위해 일을 고르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를 위한 봉사의 의미일까요? 치열한 금융계의 부침을 뒤쫓던 이야기는 우아하면서도 조금은 맥빠지는 결말에 이르는 감이 없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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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찍힌놈들>은 극단 내여페가 소극장 ‘내여페 The Stage’의 개관작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조인스 이벤트에서 관람기회를 주셔서 감상하게 되었는데, 마침 공연하는 날 오후 늦게 시작한 회의가 다행히도 개막시간에는 넉넉할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덕분에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붕어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서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정말 아담한 극장은 휴먼다큐팀 PD와 카메라맨이 신세를 논하는 주점이 객석 오른편에 조금 높게 자리하고 있고, 정면으로 밴드악기들이 늘어서 있는 무대는 출연하는 밴드가 연습하는 강당이며, 무대 아래 공간은 기타 등등의 상황이 처리되는 복합공간입니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서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을 수 있어 관객과 배우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무대입니다.

 

스토리는 시사다큐팀에서 징계를 받아 휴먼다큐팀으로 쫓겨난 PD대주는 언젠가 한건 올려 시사다큐팀을 복귀할 속셈인데, 평화소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소년장기수들이 어언 나이가 들어 정규교도소로 이감해야 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뉴스에 착안하여 이들 소년장기수들이 밴드활동을 통하여 교화되는 모습을 담아 감동스토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절도, 폭력, 방화, 살인 등 살벌한 죄목으로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은 대주PD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막내 소민을 꼬이는데 성공하여 일단 밴드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연습은 대주PD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순조롭지 않아 공연일을 맞출 수 있을지 불확실해집니다.

 

 

대주PD는 이들을 개인적으로 자극하여 연습에 피치를 올리는 한편 이들의 개인공간에도 몰래카메라를 설치하여 이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순수한 면을 담아냅니다. 겉돌기만하는 아이들과 대주PD의 마음이 시나브로 연결되고 연습도 궤도에 오를 무렵 살아계실 것으로 믿는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라던가 실수로 죽인 친구의 아버지가 면회를 오면서 이들은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결국은 PD가 두고나간 핸드폰으로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이들의 사연이 사회적으로로 문제가 되어 공연이 취소되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대주PD는 공연대신 음악프로그램을 통하여 이들의 연주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연극은 실제 소년수의 사연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더블 캐스팅으로 되어 있는 출연진 가운데 이날 출연하신 분들은 김대주PD역에 위명우씨, 재강역에 정성윤씨, 윤호역에 민두홍씨, 지성역에 이대희씨, 소민역에 정승욱씨, 그리고 멀티맨역에 신준철씨가 열연해주셨습니다. 무대나 소품 음악 등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앙상블도 아주 훌륭했고, 4인조 소년수밴드의 연주실력도 아마추어 수준은 넘어서는 것으로 연습을 아주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시청률을 의식하고 접근했던 대주PD가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빠져드는 모습이 조금 더 부각되었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연주를 끝으로 공연이 마무리되는 시점이 조금 애매해서 땀흘린 배우들에게 마음껏 박수로 격려할 수 없었던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좋은 앙상블을 만들어내신 배우들과 스태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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