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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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겁 없이 일을 벌이던 40대 무렵에 우아하게 늙어가기를 화두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우아하게 늙어가기70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도 열 꼭지를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늙어가기는 여전히 쥐고 있는 화두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여전히 쥐고 있는 우아하게 늙어가기를 배우기 위한 책읽기였습니다.


요즈음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젊음을 유지하거나, 심지어는 더 젊어 보이는데 집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나이 듦에 관심이 쏠리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저자는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중간 시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인생의 계절에서 가을에 새봄을 꿈꾸고 겨울을 최대한 늦게 맞이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자는 모두 열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포기, 자리,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그리고 영원 등의 주제어를 살펴보면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주제어 포기에서는 포기를 포기하라그리고 두 번째 주제어 자리에서는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여놓은 것을 보면 50대에 들어서도 열심히 살 이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주제어부터는 한계를 인지하고 그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 또한 바람직한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보조식품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는 건강보조식품을 구매하는데 큰돈을 쓰고 말았습니다. 제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 마음이 하나가 된 까닭입니다. 여행 중에 읽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의 다음 대목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릅니다. “은퇴자 중에도 건강보조제로 자기 몸을 챙기는 등 젊은이보다 더 질병에 강한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중산층 이상에 해당하는 이들은 이전 세대 같으면 병석에서 골골댈 나이에도 여전히 거뜬한 신체로 팔팔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56)”


사실은 60을 넘어가면서 여기저기가 삐걱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지만 몸이 젊었을 적 같지 않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걷기와 볼링에 시간을 더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같이 여행한 분들은 모두 60대 이상인 부부 5쌍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가 화제에 오른 날이 있었습니다. 물론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에 관하여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여행을 속히 마치지 마시오.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고 그대는 늙은 뒤에 비로서 그대의 섬에 도착하는 것이 낫소. 글 위에서 그대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읽다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에 집착하는 듯하면서도 여행을 즐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은 신의 뜻에 따라 이미 정해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것보다 여행을 즐기라는 카바피스의 주문이 마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붙여놓은 글에서 마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처럼, 70, 80세에도 황금기를 추가로 더 받아낸 사람처럼, 자기 신체와 정신과 애정에 허용된 능력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303)”는 대목에 크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304)”는 대목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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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7
장 자크 루소 지음, 문경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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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읽었던 우석영과 소병철의 <걸으면 해결된다>에서 추천한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꿈>을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읽었습니다. 최근에 다시 걷기에 관심이 생기면서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꿈><고백록><대화: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와 함께 자서전의 삼부작을 완성한 셈입니다. 교육에 관한 <에밀>을 집필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루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아야 했습니다. 급기야 사교계를 등지게 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고, 프랑스와 고국 스위스에서도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로서 루소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공모하여 자신을 겁박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서전 <고백록><대화: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는 자신이 진실을 밝히면 사람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집필한 것이었지만 사태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꿈>은 자신의 절박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자신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뒤로 쓴 것이라고 합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꿈>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신을 탐구하고 자아를 향유하는 고독의 글쓰기였던 셈입니다. 왜 산책이었을까? 루소는 요로결석을 오래 앓은 탓에 건강을 위해 일찍부터 산책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산책할 기운이 있는 한 나는 삶의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산책은 당대의 사교계에서 유행하던 의례적이고 사치스러운 산책이 아니었습니다. 걸어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고 그 즐거움을 통해 심신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는 일종의 치유였다는 것입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산책하면서 얻은 사유의 결과를 모두 열 꼭지의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책이 자유를 향유하는 고독한 글쓰기였다고는 하지만, 앞 부분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아니 사람들의 버림을 받은 외톨이 신세를 한탄하고 스스로를 변명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이 책을 써내기 전에도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으로부터 명상의 내용을 기록하고, 다시 읽어보면서 기쁨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가 산책 중에 하는 명상에 대한 그의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나의 고독한 산책과, 머릿속을 완전히 자유롭게 두어 그 어떤 저항이나 구속 없이 생각이 마음껏 제 흐름을 따르게 할 때 그 산책을 가득 채우는 몽상을 충실히 기록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19)”라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스스로에 대하여 깨닫는 바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네 번째 산책을 보면, “나 자신을 더욱 세심하고 검토하면서, 내가 기억하기에 진실이라고 말했던 많은 일들이 나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55)”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뉘우치지도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다섯 번째 산책에 이르면 베른 주와 뇌샤텔 주의 경계에 있는 비엘 호수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반짝이는 꽃들이며 울긋불긋한 초원, 시원한 그늘, 시냇물, 덤불들, 그리고 푸른 초목이여, 내게로 와 저 온갖 흉측한 대상들로 오염된 내 상상을 정화해주기를.(119)”를 소워하였습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크지 않은 호숫가에 살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열 번째 산책은 세쪽을 겨우 넘기는 짧은 분량입니다. 각주에 따르면 루소는 1776년부터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집필을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78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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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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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서기 위하여 절망 자체를 응시해보라는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작가 에밀 시오랑의 책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은 <태어났음의 불편함>입니다. <태어났음의 불편함> 역시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처럼 사유의 단상을 몇 개의 짧은 문장으로 이어가는 형식입니다.


시오랑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라는 전제 아래 이후는 나에게 너무나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서운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다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삶이란 죽음을 향하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남은 최고의 선이고 죽음은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선각자들이 세운 논리를 주입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시오랑은 역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남이란 그저 우연의 사건에 불과하다고도 합니다. 그런 태어남인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고백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어남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언가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큰 아이는 지금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시오랑 역시 태어남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책을 써야 할 것이다.(48)’라는 대목이 눈에 띄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현자 에피쿠로스가 300편 이상의 글을 썼다는 사실을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지! 그것들이 사라져 전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63)’라는 대목은 글을 써 책으로 남기는 그의 작업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덜 금욕적인 행위이다(150)’라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신에 대한 지식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악마를 불편하게 만들고 마비시킨다. 소크라테스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이유를 우리는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125)”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억에 관한 다음 대목을 두고두고 곱씹어볼 생각입니다. “기억에 구멍이 하나 뚫릴 때마다, 나는 자신이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느낄 것 같은 고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밀스러운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은 그 기쁨을 그들의 어떤 기억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기억이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고 해도 무엇인가가 나에게 말해준다. (70)”


비판적 책읽기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해로운 책들과 그 해로운 힘에 저항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 잘 되찾을 수 있고, 존재에 더욱더 밀착하게 된다. () 교리문답집부터 시작해서 모든 책들은 다르게 읽어야 한다.(136)” 하지만 나는 저자와 책에 나를 동일시하며 독서한다. 그 밖의 모든 독서 태도는 나에게 시체를 해부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157)”라는 대목은 역설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오랑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네 가지 고통 가운데 태어남을 맨 앞에 두는 불교의 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오랑은 불교에 심취한 듯하나 그렇다고 불교에 귀의한 것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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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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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첫 번째 수필집 <다정한 서술자>를 읽었습니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 그리고 <낮의 집 밤의 집> 등을 읽으면서 참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던 작가입니다. <다정한 서술자>는 글쓰기에 관한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작가 나름의 작가수업인 셈입니다.


<다정한 서술자>는 작가가 노벨상 수상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여섯 편의 수필과 여섯 편의 강연록을 실었습니다. 일단 글의 내용은 문학과 글쓰기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점입니다만, 어렸을 적부터 시작한 엄청난 규모의 읽기가 결국에는 쓰기로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사실을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별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만, 어느 정도(제 경우는 천권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면 글쓰기에 대한 충동같은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글 오그노즈야에서 코로나 대유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의심할 여지 없이 블랙 스완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블랙 스완의 속성이 그렇듯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전염병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34)” 뉴질랜드의 호수에서 블랙 스완을 만났을 때 매우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챠이코스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를 새롭게 해석한 대런 에러노프스키 감독의 브랙스완(2010)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블랙 스완은 맥락이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대학교의 나심 탈레브교수는 2007년 발표한 블랙 스완에서 극히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블랙 스완에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블랙 스완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 매우 개연성이 희박한 사건을 말합니다. 첫째 예측이 불가능하고, 둘째 엄청난 충격을 동반하며, 셋째 일단 현실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뒤늦게 설명을 시도하여 마치 검은 백조가 설명 가능하고 예견 가능했던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책읽기에 관한 내용도 특기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심리학자들은 유익한 독서활동이야말로 건강한 정신의 특징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익하다는 것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느 과정과 관련이있다. 우리는 감정이 동요할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책을 읽지 않는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신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109)”


길지 않은 두 번째 수필 낯섦 연습하기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서양인의 여행관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서양의 여행자는 세상을 온전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월감이라는 거품에 갇힌 채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마치 그림자처럼 자신이 방문한 나라와 문화의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넘나든다.(46)” 이 이야기는 편견에 사로잡히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통하여 편견 없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견지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의 여행자들이 이국적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 매일 무엇을 했는지 사진으로 시시콜콜 알려주는 블로그오 페이스북이 생긴 뒤로 여행을 하고픈 열정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 이야기해 줄게와 같은 유의 책이아 여행을 주제로 한 각종 이벤트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이 책이 저자 자신의 작품론으로 읽히더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작품을 구상하던 이야기는 물론 작품 속 등장인물을 설정하는 과정도 소개하고 있어서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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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사라지다 - 삶과 죽음으로 보는 우리 미술
임희숙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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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시를 만나다>로 만났던 임희숙 시인의 신간 <살다 사라지다>를 읽었습니다. ‘삶과 죽음으로 보는 우리 미술이라는 부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시인 역시 필자처럼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하니 저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우리 미술에 담겨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하여는 저항하기보다는 초월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서 죽음을 초월해보려는 생각에서 도원을 만들고 요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술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예술을 통하여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극복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미술을 삶과 죽음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의 1탄생에서 죽음으로에서는 태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떠난 이의 부활을 기원하는 마음과 죽음을 초월하려는 의지가 예술 행위로 드러났음을 이야기했고, 2소멸에서 영원으로에는 죽음이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인생이 더 아름답고 살 만하다는 생각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1부는 탄생과 죽음에 관하여 우리 선조들이 남긴 유물을 살폈습니다. 탄생에 관한 극적인 유물로는 아기의 출산에 덤으로 나오는 태를 어찌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그 태를 거두어 태실에 묻고, 태실의 위치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동물의 경우는 새끼의 출산과 함께 반출되는 태를 먹어치우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선조는 태를 거두어 묻어주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죽음입니다. 특히 범종과 꽃 그리고 주검과 함께 묻은 부장품으로서의 청자 등을 소개합니다. 세 번째 주제는 부활입니다. 사자를 묻은 묘택에 관한 것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초월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을 다루었습니다. 이상향이라는 도원, 수련 끝에 불사의 경지에 이른 신선, 그리고 천년의 세월이 지나면 도래한다는 미륵 세상에 대한 염원 등을 주제로 합니다.


2부에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인정하되, 죽음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했던 예술인들의 노력을 다루었습니다. 심신수련을 겸하여 경계가 좋은 산천을 두루 주유하는 풍조를 다루었고,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예술작품을 남기려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고 죽음과 벗하듯 유유자적한 예술인, 문인들의 족적을 뒤쫓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공간을 뛰어넘듯 홀연히 사라진 사람들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다 의문이 들었던 대목은 신선과 관련된 그림 요지연도에 대한 해설이었습니다. 동양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명이나 되는 등장인물이 각각 누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일단 요지에서 연회를 연 서왕모나 그녀를 찾아온 목왕은 그렇다 쳐도, 신선들과 심지어는 시인 이태백이나 노자, 동방삭 등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이들어 여행을 즐기고 있습니다만, 조선시대 문인들의 산수유람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군자로서 행하던 수양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논어술이편에 나오는 유어예(遊於藝에 주자가 유자완물적정지위(遊者琓物適情之爲)라고 하여, ‘노닌다는 것은 사물을 좋아하여 마음을 주는 일이라고 했다는 대목을 소개하였습니다. 노닌다는 것은 물상과의 대면에서 이치를 깨닫는다는 뜻에서 여가(餘暇)와 연관되고 문인들의 예술활동과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예에 노니는 것은 수양의 한 방편이며 산수유람 역시 이러한 예의 한 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귀감이 될 만한 대목이 더 있었습니다. ‘허목은 독실하게 옛글을 좋아하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 篤好古書 老而不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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