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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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서기 위하여 절망 자체를 응시해보라는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작가 에밀 시오랑의 책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은 <태어났음의 불편함>입니다. <태어났음의 불편함> 역시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처럼 사유의 단상을 몇 개의 짧은 문장으로 이어가는 형식입니다.


시오랑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라는 전제 아래 이후는 나에게 너무나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서운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다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삶이란 죽음을 향하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남은 최고의 선이고 죽음은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선각자들이 세운 논리를 주입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시오랑은 역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남이란 그저 우연의 사건에 불과하다고도 합니다. 그런 태어남인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고백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어남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언가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큰 아이는 지금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시오랑 역시 태어남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책을 써야 할 것이다.(48)’라는 대목이 눈에 띄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현자 에피쿠로스가 300편 이상의 글을 썼다는 사실을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지! 그것들이 사라져 전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63)’라는 대목은 글을 써 책으로 남기는 그의 작업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덜 금욕적인 행위이다(150)’라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신에 대한 지식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악마를 불편하게 만들고 마비시킨다. 소크라테스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이유를 우리는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125)”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억에 관한 다음 대목을 두고두고 곱씹어볼 생각입니다. “기억에 구멍이 하나 뚫릴 때마다, 나는 자신이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느낄 것 같은 고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밀스러운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은 그 기쁨을 그들의 어떤 기억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기억이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고 해도 무엇인가가 나에게 말해준다. (70)”


비판적 책읽기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해로운 책들과 그 해로운 힘에 저항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 잘 되찾을 수 있고, 존재에 더욱더 밀착하게 된다. () 교리문답집부터 시작해서 모든 책들은 다르게 읽어야 한다.(136)” 하지만 나는 저자와 책에 나를 동일시하며 독서한다. 그 밖의 모든 독서 태도는 나에게 시체를 해부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157)”라는 대목은 역설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오랑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네 가지 고통 가운데 태어남을 맨 앞에 두는 불교의 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오랑은 불교에 심취한 듯하나 그렇다고 불교에 귀의한 것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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