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예쁜 말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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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가 네 명 가운데 하나인 코맥 맥카시의 대표작 <모두 다 예쁜 말들>을 읽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까지 국경연작을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 작품을 가장 늦게 읽고 말았습니다. 특히 <평원의 도시들>에서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모르고 읽었기 때문에 성격을 파악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존 그래디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집을 떠나 샌앤토니오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어머니는 목장을 팔기로 합니다. 소년은 친구 롤린스와 함께 국경을 넘어 멕시코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열여섯 살이라는데 벌써 말을 다루는 솜씨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목장 주인은 그래디의 말 다루는 솜씨에 반하여 목부로 일하면서 야생마를 길들이고 종마와 교배하여 혈통이 좋은 말을 얻기로 합니다.


제목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책의 중요한 화두는 말입니다. 그래디가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와 똑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피가 있고 피에는 열기가 있다. 그의 모든 존경과 모든 사랑과 모든 취향은 뜨거운 심장을 향한 것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변함없을 것이었다.(13)” 그래디와 롤린스의 삶을 꼬이게 만든 것도 말입니다. 멕시코로 향하는 길에 합류한 블레빈스가 타고온 좋은 말을 악천후에 잃었는데 그 말을 멕시코 사람에 차지한 것을 되찾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그래디와 롤린스는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일보 전까지 가게 되지만 구사일생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이 경찰에 잡혀가게 된 배경에는 그래디를 고용한 목장주가 있었습니다. 그래디가 목장 주의 딸 알레한드라와 사귀게 된 것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결국 알레한드라는 그래디와 헤어지겠다고 하면서 그래디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그래디는 알레한드라와 마지막으로 만난 뒤에 목장으로 가서 정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고향으로 가기 전에 자신과, 롤린스 그리고 블레빈스의 말을 되찾고야 말았습니다.


그래디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집안일을 도와주던 아부엘라도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뒤 그래디는 다시 고향을 등지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기다란 검은 그림자는 마치 세상에 유일한 존재의 그림자인 양 말을 바싹 뒤따랐다. 그러다 어두워지는 땅속으로, 다가올 세상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412)” 그래디의 이야기는 <평원의 도시들>로 이어지게 됩니다만, 작가는 초원에서 생활하는 사나이들의 거친 삶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텍사스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전형적인 서부의 풍경과 서부 사나이의 삶을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읽힙니다. 평원을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그린 다음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곧 떠오를 태양을 맴도는 상스러운 위성인 양 기차는 머리 동쪽에서부터 요란하게 짖으며 달려오고, 얽히고설킨 메스키트 덤불을 가로지는 전조등의 기다란 불빛은 지독히도 곧은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울타리를 어둠 속에서 드러내는가 하면 줄줄이 늘어선 철조망과 기둥을 다시 후르르 집어삼켜 어둠 속을 보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수평선 위로 기차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며 어둠을 뒤쫓았고, 소리도 느릿느릿 연기를 뒤따랐다.(10)”


말을 타고 먼길을 가던 중에 야영을 하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그들이 땅이 봉긋 솟은 곳에서 잠잘 준비를 마치자 바람에 갈기갈기 찢긴 모닥불이 어둠을 톱질해댔다.(157)”


옮긴이는 이 책을 꿈을 찾아 용감하게 집을 떠나 온갖 위험 속에서 냉혹한 현실과 맞닥뜨리며 어른이 되어가는 한 소년의 슬프고도 매혹적인 이야기라고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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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집 밤의 집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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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었습니다. 2016년에 폴란드를 여행한 탓에 폴란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낮의 집, 밤의 집>이라는 제목에서 집이라는 대상을 낮과 밤으로 구분해놓은 것을 보면 집으로 나타낸 무엇의 이중성을 담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목차에 무려 102개나 되는 제목을 담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그 제목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다양하고, 등장인물에 따라 이야기들이 단속적으로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방랑자들>에서 보였던 서술방식을 차용하고 있는데, 이런 서술방식을 별자리 소설이라고 한답니다.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단문이나 짤막한 삽화들을 였어 하나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토카르추크의 독특한 서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삽화들은 서로의 주제들이 결합하면서 작가가 의도하는 통합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별 들이 모여서 성좌를 이루듯 말입니다.


삽화가 무려 102개나 되다보니 폴란드를 중심으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등 이웃나라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들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체코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크워츠코 계곡에 있는 피에트노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역사, 독일 정착민들에 관한 이야기, 등장인물들의 꿈, 성녀 쿰메르니스의 전설 등을 촘촘히 짜 넣고 있습니다.


삽화들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꿈과 집입니다. 첫 번째 삽화 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첫날 밤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몸도 이름도 없는 순수한 시선이다. 나는 모든 것 또는 거의 모든 것이 보이는 애매한 지점의 계곡 위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나는 그 시선 안에서 움직일 수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11)” 나는 나이면서도 나 같은 것은 없다고도 합니다.


화자가 이웃인 마르타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집의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아마도 실재하는 집은 낮의 집, 실체가 분명치 않은 집은 밤의 집인 듯합니다. 이런 설명을 읽으면서 다중우주의 개념을 차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대가 국경마을인 까닭인지 국경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도 있습니다. 여늬 국경마을이 그렇듯 화자의 집에서 체코 공화국의 땅이 보이고, 여름에는 체코 쪽에서 개 짖는 소리, 수탉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고 가깝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경은 수 세기 전부터 두 나라를 서로 다른 나라로 분리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나무들은 자신의 자리 밖으로 넘어가지 않고 국경을 중요하게 여긴 반면, 동물들은 어리석게도 그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경을 두고 묘한 행동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사람 페터 디에터는 오래 전에 폴란드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옛날 살던 곳을 구경하기 위하여 국경을 찾았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 에리카는 남편을 배려하여 동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페터의 주검을 체코의 국경수비대가 발견하였는데 경계선에 누워있는 페터의 몸을 폴란드 쪽으로 밀어냅니다. 그런가 하면 30분 뒤에 나타난 폴란듸 국경 수비대원 역시 페터의 몸을 체코 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폴란드의 국경수비대원은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데, 가끔은 넋을 잃고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을 마치 그림처럼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늑대와 조우한 그는 늑대여 국경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폰 괴첸 가문 사람들의 죽음도 인상적입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안개처럼, 갑작스럽게 전기가 끊기듯이 다가왔다.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의 호흡이 느려지고,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사망했다.(309-310)’ 행복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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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 1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634
필론 지음, 문우일 옮김 / 아카넷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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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 종교의 교리를 담은 성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화제가 단편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전하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I>은 창세기의 내용을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재해석하였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필론(그리스어; Φίλων ὁ Ἀλεξανδρεύς, 라틴어; Philo Judaeus)은 기원전 30년경에 태어나 기원후 45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주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였으며 철학자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을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재해석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창세기>의 내용을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논설한 데미우르고스(造物神)과 이데아의 관계와 연관지었으며, 신이 창조한 인간이 저지른 죄와 정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의 초월성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었다는 것입니다. 필론의 저술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필론은 성경 주석서, 호교론역사적 논고 그리고 철학적 논고 등의 범주에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유실된 저술도 있으나 현존하는 것들이 일곱 편의 작품집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I>은 첫 번째 작품집의 내용으로 7편의 작품들이 담겨있습니다. 1부는 세상 창조에 대하여는 창세기 1~2장을 그리스 철학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2알레고리 해석 1은 창세기 21~17, 3알레고리 해석 2는 창세기 218절부터 31, 4알레고리 해석 3은 창세기 37~19, 5케루빔에 대하여는 창세기 324절과 41, 6아벨과 가인의 제사에 대하여는 창세기 42~4, 7나쁜 자들이 더 나은 자들을 공격함은 창세기 48~16절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입니다


옮긴이가 나무랄 데 없으나 장황한 그리스어와 철학으로 모세오경을 주해하였다고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구약에서 추출한 사례에 대하여 그리스철학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바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 그리스 철학의 바탕이 부족한 저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세상 창조에 대하여를 시작하는 문장은 새겨볼 만하였습니다. “(모세 이외의) 다른 입법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열거했으나, 어떤 이들은 자기 사상들을 과도하게 가미하고 신화적 심상들로 진리를 가림으로써 대중을 기만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둘을 모두 넘어섰으니, 전자는 사유하지 않아서 경박하고 철학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럴싸한 거짓을 담아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61)”


필론 이전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이 남긴 예언들은 뜻이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이었기 때문에 듣는 이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것을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재해석하여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낸 것이 성경의 형태로 자리 잡아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창세기에는 천지창조가 6일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첫째 날에는 빛을 만들어내 밤과 낮을 만들었고, 둘째 날에는 하늘과 땅을 만들었으며, 셋째 날에는 채소와 나무를 만들었고, 넷째 날에는 태양과 달을 만들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날에는 짐승들을 만들고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구의 자전으로 밤과 낮이 구분이 되는 것을 초등학생도 알고 있습니다만, 하루의 길이는 어떻게 계량하였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창세기의 내용부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여전히 설명이 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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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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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는 프랑스 작가 마르탱 파주의 두 번째 소설입니다. 대학에서 심리학, 언어학, 철학, 사회학, 예술사, 인류학, 음악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관심사가 다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한 하루>에서는 자살을 꿈꾸는 스물다섯 살인 젊은 남자 회사원의 24시간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에서 “<완벽한 하루>는 내 첫 소설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가 출간되기 8개월 전에 써둔 작품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완벽한 하루>는 등단 전에 써보았던 무수한 습작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강의실에서 원고를 쓰고 출판사에서 거절한 원고들을 들여다보던 학생시절을 거쳐 중학교의 야간 경비원, 축제의 안전요원, 기숙사의 사감 등 먹고살기 위한 직업을 전전하였다고 합니다.


작가가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두 명과 함께 만든 실패자들의 모임덕이었다고 합니다. <우울한 하루>의 주인공이 자살을 꿈꾸는 것처럼 자칫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고 세워낼 수 있었던 동력이었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인 성향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관적이라는 성향은 낙천적 성향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작가는 두 성향이 공존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 가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자전적 소설 <우울한 하루>의 주인공처럼 작가는 자명종이 울리며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매일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쓰디쓴 절망 속에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아이디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 찬 이야기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우울한 일상과 정면으로 싸워 나갔다. 하루를 보내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온갖 비관적인 상상을 하면서도 남들과 더불어 지냈고, 토론을 하고 이야기도 하며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그 덕에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삶이 힘들어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더라도 혼자만의 세계로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낙천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자살을 꿈꾸는 주인공이 기막힌 상상을 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의 세간살이 골프채로 흠집을 내고 부식성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도 모자라서 카펫과 마루판을 뜯어내고 바닥에 구멍을 파 부식토를 채우고 토마토나 딸기 등 제철 채소류를 심고 심지어는 사과나무와 등나무, 장미와 팬지를 심어 실내 정원을 만드는 상상도 합니다. 이 부분을 읽다보니 고인이 된 저의 사수께서 저와 함께 쓰던 사무실에 화분을 들여 밀림처럼 만들었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평소 달고 살던 통증이 심해진 듯하다는 느낌은 회사 동료가 폐암으로 진단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생긴 증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몸 안에 길이가 5.2미터에 달하는 백상아리가 살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런 진단을 내려주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도 신기합니다. 백상아리는 낚아 몸밖으로 내보내려는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공존하기로 합니다. 즉 소소한 잔병과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겠지요. 일종의 자가치료법인데, 끔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요일 별로 자신의 기분 상태를 부여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는데 참고할 만합니다. "월요일은 행복하고 긍정적이다, 화요일은 우울하고 지친다. 수요일은 공격적이다, 목요일은 순진한 척한다. 금요일은 냉소적이고 지루하다, 토요일은 어리벙벙하다, 그리고 일요일은 똑똑하고 유머러스하다.(61)"


날이 밝으면서 구토가 일고 몸안에 있던 백상아리가 빠져나와 거리로 헤엄쳐나갑니다. 자살충동으로 고통스러웠던 하루가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1993년작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처럼 하루의 일상이 반복된다는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우울한 일상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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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기 전에 - 프루스트 단편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현암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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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프루스트의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 해도 국일미디어, 열화당, 펭귄클래식, 동서문화사, 민음사 등 다섯 곳에서 새로 번역한 작품들이 완간을 앞두고 있고, 그의 단편들을 묶은 단편집들도 여러 종류가 출간되고 있습니다. 단편집들의 경우는 골라 뽑은 단편들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아서 아쉬운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도 프루스트의 단편들의 일부를 묶은 단편집입니다. 모두 18편의 글을 골랐는데 모두 20대 초중반에 쓴 글들이라고 합니다. 1부에 담긴 6편의 단편들은 작가의 생전에 발표된 것들이고 2부에 담긴 12편은 미공개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20대에 쓴 작품들이라서인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교하면 다소 투박한 느낌이 들지만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사교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적지 않은 것을 젊은 시절 프루스트의 사교계의 경험을 녹여낸 것으로 보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습작으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 작품 <무관심한 이>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앙투안 바토의 동명의 그림과 <어린 소녀>라는 두 작품의 대조적 분위기를 이야기에 담은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밤이 오기 전에>는 동성을 사랑한 여주인공이 스스로의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음을 앞둔 상황에 찾아온 이성 친구에게 속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프루스트적인 색채가 많이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스스로를 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매우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그런 절망의 순간들 중 하나에 놓여 있었을 때 나 자신이 쏘았던 거예요.”


그녀가 죽음을 맞는 순간에, “우리는 함께 울었다. 슬프면서도 무한한 조화의 일치, 우리의 합체된 연민은 이제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대상을 향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마음껏 자유롭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나는 가여운 눈물로 흥건히 젖은 그녀의 두 손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새로운 눈물로 젖어들었고 그녀는 한기를 느꼈다. 그녀의 손은 분수대에 떨어지는 창백한 나뭇잎처럼 차가워졌다. 우리는 그 순간만큼 그렇게 아파했던 적이, 또 좋았던 적이 없다.”


프루스트 자신이 천식으로 고통을 받았기 때문인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은 듯합니다. <추억1>에서는 불치의 병으로 쇠약해진 여자 친구를 문병하는 이야기합니다. 못 알아볼 정도로 초췌해진 그녀는 바닷가에서 정양 중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바닷가 풍경이 묘사됩니다. 먼저 여주인공 오데트의이야기입니다. “저 끝없이 푸른 바다를 보는 건 정말 매력적이에요. 모래사장에 와서 부서지는 파도는 저를 슬픔에 빠지게 하는 생각들이고, 동시에 이제는 작별을 고해야 하는 희망들이에요.(51)”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한 회한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헤어져 바닷가에 나온 화자는 나는 바닷가로 나왔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오데트에 대한 생각에 잠겨 무관심하고 고요한 긴 해변을 따라 걸었다. 태양은 수평선 너머 사라졌지만, 자줏빛 광선으로 하늘을 여전히 물들이고 있었다.(52-53)” 결국은 무로 돌아갈 상황을 바닷가 풍경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담긴 이야기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분위기는 결코 우울하거나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을 구원할 무언가가 내재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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