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 살림지식총서 141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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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인류학회가 엮었다는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문화인류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이렇게 적은 기억이 있습니다. “세계화, 국제화시대에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이나 민족의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목적을 둔 문화인류학적 관념이 빠르게 자리 잡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최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외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사는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기회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http://blog.joins.com/yang412/13245374>를 읽게 된 것도 이 책에 담긴 문화인류학적 관점보다는 프랑스에서 브라질에 이르는 그의 여정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용환교수님의 <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을 읽게 된 것은 정말 문화인류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말리노프스키(1884~1942)는 폴란드 출신의 인류학자로서, 20세기 전반기 영국의 사회인류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독보적인 업적 - 기능주의의 시각을 도입하여 다양한 사회 제도와 문화 부문을 다룬 독창적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민족지 조사방식에 새로운 초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말리노프스키의 업적을 두루 살펴, 그가 영국 사회인류학 형성에 기여한 바를 평가하고, 당시 인류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던 점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필독도서목록의 맨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우연히 읽었던 것이 말리노프스키가 인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런던대학에서 웨스터마크를 사사한 말리노프스키는 현지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조사를 수행하는 새로운 연구방식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인류학 연구는 주로 여행가나 탐험가, 식민 행정가나 군인, 교역자 그리고 선교사를 통해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고 오류도 많았다고 합니다. 말리노프스키는 1914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를 경유하여 뉴기니 지역으로 조사를 시작하여 1918년 10월까지 현지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분명 다른 방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말리노프스키는 탁월한 언어적 능력을 발휘하여 조사 후반기에는 원주민 언어를 구사하면서 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1922년에는 <서태평양의 항해사들>이라는 600여 쪽에 달하는 민족지를, 1929년에는 530여 쪽에 달하는 <북서 멜라네시아 야만인의 성 생활>을, 19335년에는 상하 두 권으로 된 900여 쪽에 달하는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는 저술을 통하여 기능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하여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담았는데, 그는 “인류학적 사실(혹은 문화요소)들이 각기 고유한 기능, 즉 그것들이 문화의 통합적 체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나름대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14쪽)”라는 것입니다. 그가 많은 관심을 두었던 트로브리안드 사회는 독특한 형태의 모계중심사회였는데, 이에 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쓴 논문, <야만사회에서의 성과의 억압>은 문화와 본능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프로이트가 주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에 관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제 사회에는 부합될지 몰라도 인류 문화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었고, 결국 문화의 발생에 선행해서 그 절대적 기원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 것은 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한 인류학이라고 할 응용인류학의 기치를 내걸고 아프리카 토착 사회의 문화변동이라는 새로운 조사를 시작하면서라고 합니다. 즉 인류학이 문화 변동 사항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식민 통치 및 행정이 보다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자문할 수 있는 실용과학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외적으로 주언 유럽 식민 통치라는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일어난 상황적 변이만을 조사하는 특수한 연구 틀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노프스키가 처음 시작한 민족지 조사방식은 분명 문화인류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업적을 섭렵하고 분석하여 부각시킬 것은 부각시키면서 비판할 것은 예리하게 비판하는 중립적 시각에서의 기술이 돋보이는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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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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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 책장에서 집어든 책입니다. 책장을 열었다가 시나브로 잊어버리기를 몇 차례 하다가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손에 잡히는 무엇이 없다는 생각에 황당하기만 합니다. 「변신」과 「시골의사」가 표제에 나와있기는 합니다만, 카프카의 중·단편소설과 엽편(葉片)소설까지 32편의 작품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들 가운데는 고 추송웅씨가 처음 모노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학술원에의 보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표제작이라서인지 「변신」과 「시골의사」에 관심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변신은 ‘몸의 모양이나 성격, 태도 등을 바꿈’이라고 설명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변신」이라고 번역되는 카프카의 작품 「Die Verwandlung」에서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변한 경우는 변신의 수준을 넘어서 변태라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변태(metamorphosis)는 성체(成體)와는 모양이나 기관, 생태가 전혀 다른 유생(幼生)의 시기를 거치는 동물이 유생에서 성체로 변하는 과정을 말하는 생물학적 용어입니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이나 배추벌레가 배추흰나비로 변하는 과정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순간을 카프카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9쪽)” 아마도 얼굴은 변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가족들이 잠자를 알아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인공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더 걱정하고 있는 듯해서 읽어가면서도 착잡해지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즉, 변한 모습에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지는 가족들에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우선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주인공의 변신을 걱정해주기는 합니다만, 그 배경에는 당장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주인공이 일터에 나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우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어머니와 여동생은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걱정하는 듯하지만, 아버지는 조금 더 냉정하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아버지가 내던진 사과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주인공이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로부터 도피하고 싶다는 무의식을 갑충으로 변신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지만, 결국은 기대했던 가족의 보호나 이해는커녕 냉대와 폭력으로 되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20세기 초반의 작품이지만 작금의 사회현상을 예견한 듯 하여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가족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시골의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사라진 의사들의 왕진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여 많이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날 10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는 중환자를 보러 왕진을 떠나야 하는 의사는 어제 말이 죽어버려 움직일 수 없는 빈 마차에 맬 말을 구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가 두 마리의 말을 제공하여 일단 출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하녀를 남기로 왕진을 떠나야 하는 상황과 막상 왕진을 요청한 환자는 치료해서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 시골의사는 자신이 해줄 것이 없는 상황, 그리고 하녀 역시 자신이 어찌해줄 수 없는 상황 등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변신」이외에도 「굴」, 「학술원에의 보고」 등, 인간의 삶을 다른 생물의 그것과 비교한 작품들을 보면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천착하는 작가 나름대로의 특별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그냥 여기를 떠난다. (…) 그것이 나의 목표이니라. (…)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죽고 말 것이다.(176쪽)”라고 한 「돌연한 출발」이나, “내가 집으롷 돌아왔다. (…) 누가 나를 맞아줄 것인가?”라고 묻다가 갑작스레 “그대는 아늑한가, 집에 있는 양 느껴지는가?”라고 묻는 것는 「귀가」 역시 종잡기가 어려운 책읽기입니다. 아무래도 읽지 않은 척 던져 두었다가 다시 읽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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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과학의 철학 - 신경 과학의 철학적 문제와 분석
맥스웰 R. 베넷 외 지음, 이을상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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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음을 맞는 순간 영혼은 육체를 이탈하여 영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뇌와 의식의 작용을 연구해온 신경외과의사도 갑작스러운 뇌사상태를 경험하고서,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라고 주장하여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이븐 알렉산더 지음, 나는 천국을 보았다, 김영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45530)

 

그런가 하면 1907년 미국의사 던컨 맥두걸은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하고 죽음을 맞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사망 전후의 체중 차이가 바로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이를 증명해보려 한 것입니다. 그는 설득에 넘어간 다섯 명의 중증폐결핵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에 이릅니다. g 단위 까지 측정이 가능한 초대형 정밀 저울 위에 침대 째 올려놓고 임종을 맞은 환자들의 체중변화를 측정하는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체중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여 보정하였지만, 마지막까지 설명할 수 없는 값 21그램이 남았다는 것이고, 이 값이 영혼의 무게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21그램은 아무리 마른 폐결핵환자라고 해도 전체 체중과 비교해보면 아주 작은 값으로 계측오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수치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에서 출발한 영혼의 존재는 신경과학의 연구결과 영혼의 역할, 즉 의식은 뇌의 활동결과라는 설명과 함께 부정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 혹은 마음이 뇌의 활동결과라기 보다는 인간 전체의 속성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생리학자이자 권위 있는 뇌과학 연구자인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대학교의 맥스웰 베넷 교수와 인지 철학자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피터 마이클 스티븐 해커 교수가 그 주장의 주인공입니다. 두 사람이 쓴 <신경과학의 철학>은 최근까지 인지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바탕이 되고 있는 몸과 마음 혹은 마음과 뇌라는 데카르트식 구분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전제로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발전에 접근하는 첫 걸음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이 책은 인지 신경과학의 개념적 토대, 즉 인간의 인지적, 정서적, 의지적 능력의 신경적 기반을 탐구하는 것에 수반되는 심리학적 개념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로 이루어진 토대에 관한 고찰’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인지신경과학이 이룬 연구성과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논쟁의 여지가 많을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주장이 불러올 논쟁을 통하여 새로운 연구방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잘 요약한 이 책의 얼개를 소개합니다. “베넷과 해커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대니얼 데닛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을 검증하고 반박하면서 신경 과학의 철학적 토대를 보여 주고 있다. 1부 「신경 과학의 철학적 문제: 역사와 개념의 근간」에서는 신경 과학에서 다뤄지는 철학적 문제들을 개괄하고 2부 「인간의 능력과 현대 신경 과학: 분석」에서는 인간의 심리학적 능력을 설명하는 신경 과학적 태도를 비판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감각, 지각, 인지, 사고, 정서, 의지 작용과 관련해 신경 과학이 범한 개념적 혼동을 조명한다. 3부 「의식과 현대 신경 과학: 분석」에서는 의식에 대한 신경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견해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4부 「방법에 관해」는 신경 과학에서 사용하는 철학적 방법에 관한 것으로 환원주의와 방법론적 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저자들이 영혼에 대한 데카르트적 해석이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데카르트는 영혼을 생명의 원리가 아닌 사고 혹은 의식의 원리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즉 영혼을 마음의 본질적 기능이 아니라 몸의 기능으로 해석한 것인데, 이로써 동물 생명의 모든 중요한 기능은 기계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몸을 별개의 두 실체로 보았고, 각각의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데카르트에서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자연물의 형상으로서의 프시케(Psyche)로 환원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때까지 ‘호흡’이나 ‘목숨’을 의미하던 ‘프시케’에 “각각의 생물에 활기를 불어넣는 생명의 원리”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프시케를 ‘마음’이라고 옮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심적능력은 모든 형태의 생물을 특징짓는 성장, 영양섭취, 생식 등과 연합하지 않는 개념인데 반하여 프시케는 이와 연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시케는 ‘영혼’으로 옮길 수 있지만 생물학적 개념이지 종교나 윤리적 개념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특수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지각하는 과정을 해석함에 있어 저자들은 기존의 신경과학자들과 견해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외부의 자극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느끼는 것이지 뇌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감각기관은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들어오는 통로에 불과한 것이지, 그 정보를 분석하고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와 대조하여 특정하는 작업은 뇌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막 태어난 어린 생명은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정보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경험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학습이 이루어진 다음에서야 비로소 정보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뇌가 정보에 기초하여 작동하거나 정보의 조각을 연합시킬 수 없다(288쪽)’라고 단정하면서 뇌가 정보를 정보 이론적 의미에서 ‘연합’시키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의문이고,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고 한 발 물러서고는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과학이 이러한 과정의 마지막 부분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체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저자들은 뇌라는 특정 장소가 인식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면서 신경과학자들이 피해야 할 세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정보’, 정보 처리과정‘과 같은 용어의 사용에 신중해야 한다. 둘째로, 지각과정을 설명하는 노력 속에서 전체-부분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셋째로 2차 성질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묻는 물음을 당연히 비껴가야만 할 것이고, 무엇을 본다는 것이 그 사물의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라거나 그 사물의 이미지를 보는 것임을 포함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297쪽) 저자들은 인간의 의식이란 뇌의 활동결과라는 신경과학자들의 견해를 “신경과학에서 ‘전체-부분의 오류’라고 부르는 특별한 예”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부분의 오류란 동물 전체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만 유의미한 속성을 뇌, 즉 동물의 한 부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467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의식이 왜 뇌가 아니라 전체에 속하는 속성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근거가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지과학자 존슨 레어드가 “의식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지 여부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라든지, 철학자 데이비드 존 차머스가 의식에 대하여 “우리가 무지한 것이 ‘우주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뚜렷한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도 인간 의식의 본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커피향이 신선하고 풍부하며 향기롭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갓 볶은 커피의 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564쪽)”라고 하면서 경험대상의 성질들이 기술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마신 커피의 향으로부터 갓볶은 커피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홍차를 곁들인 마들렌과자 한쪽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탄생하였음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본다. (…)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스완네 집 쪽으로(1): 85~89쪽, 민음사, 2012;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험을 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혼동된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들은 신경과학이론은 철학적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직까지도 미지의 영역이 많은 신경과학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과학이 철학의 영역에 속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철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6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10144)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은 정확한 추론을 통해 성취된 지식과, 동시에 사실에 대한 감각적 관찰에 의해 확증되는 종류의 인식으로 발전하면서 철학으로부터 독립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다는 이유로 인지에 관한 사항이 철학적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경과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철학적 방법론을 논하면서 저자들은 심리철학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논증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신경심리학이 심리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심리학적 개념은 과학적 목적을 위해 고안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한편으로는 철학에 대한 신경과학자들의 인식, 예를 들면, 철학이 신경과학의 관심사에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철학의 선험적인 방법은 마음의 본성에 대한 철학의 탐구를 무가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거나, 그동안 철학이 성취한 것이 보잘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등의 것에 대하여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의식이 과학적인 주제로 취급될 수 있고, 의식이 철학의 독점적인 분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779쪽)”라고 한 에덜먼과 토노니의 말은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않고 있다는 이유로 철학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의식에 대한 영역다툼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철학이 신경과학에 기여한 공로로, 철학은 어떤 경우에 의미의 경계를 넘어서는지 지적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억이 과거의 경험의 재현이라거나 언제나 과거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혼돈에 대해 경고할 수 있다거나, 조건반사가 기억의 형태가 아닌 이유와 기억이 뇌에 저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그리고 “철학적 분석에 대한 개념적 명료화는 신경과학의 목표와는 무관하다는 생각과는 달리, 신경과학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793쪽)”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조목조목 따진 저자들의 주장들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철학적 사유가 신경과학의 연구방법론에 새로운 길을 안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는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시는 분들께 학제간 통섭적 사고를 위해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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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개의 카드로 목돈을 만든다 - 목돈이 모이는 소비체질 개선 프로젝트
고경호 지음 / 다산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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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연말정산을 하면서 카드사용으로 받은 감세혜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결국은 바로 체크카드를 발급받았습니다만, 금년 말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잊고 있었습니다만 신용카드를 사용한 비용에 대한 세금감면제도는 국민의 정부시절 생겼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침체된 내수경기를 부양하고 현금매출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자영업자로부터 세수를 증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정책이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 폐지라든가 신용카드 발급요건을 완화해주기까지 신용카드사용이 빚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분위기로 몰고가, 결과적으로는 늘어나는 카드빚으로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생기는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돈을 버는 길은 번 돈을 절약해서 모으는 것이 제일 어려우면서도 쉬운 돈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3개의 카드로 목돈을 만든다>는 카드사용으로 곤경에 처하기 쉬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돈을 모으는 지혜를 담은 전략서입니다. 이 책의 저자 고경호 대표님은 이미 돈관리와 투자에 관한 기본원칙과 실천방법을 제시한 <4개의 통장>을 써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린 바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행복= 소비 ÷ 욕망)이라는 폴 새뮤얼슨의 행복공식을 변형하여 (행복= 돈 ÷ 욕망)이라고 바꾸었는데, 소비란 결국은 돈을 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욕망을 줄이기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의 크기는 좀처럼 커지지 않는다.(…)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더라도 그와 비례해서 욕망도 함께 커진다면 행복의 크기는 변함이 없다.(7쪽)”라고 핵심을 정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린고비처럼 돈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는 그때 하지 못하면 영원히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만 꼭 해보고 싶은 일을 할 때는 돈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진 일들을 마음껏 해보지 못했는데, 이제 시작해볼까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어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나이 들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해보려 합니다.

 

아무래도 옛날처럼 현금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점이 많을뿐더러 현금지출내역을 확인하여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체크카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절적으로 발생하는 지출에 대비하여 체크카드로 된 예비카드를 만들고, 체크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비상상황에 대비하여 신용카드를 준비하는, 즉 세 개의 카드로 지출을 하는 체계를 만들어두면 수입을 계획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저축을 늘려나갈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목돈이 모이는 소비체질 개선 프로젝트입니다. 이 방식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노후자금 마련과 주택마련에 관한 내용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젊었을 적에는 하루가 다르게 뛰는 집값 때문에 집을 장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노태우대통령께서 주택 500만호 공급사업을 추진한 덕분에 내집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내집 마련보다도 자동차를 먼저 산다고 합니다. 물론 개인의 선택이기는 하지만 마음 놓고 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세월이 바뀌어도 중요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구식이라서 그렇게 생각한다 하겠지요? 우리 세대만해도 100세까지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노후대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저만해도 힘이 닿을 때까지 현장을 지키겠다는 굳은 각오로 노후대책을 대신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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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두뇌는 희망이다 - 혼란을 넘어 창의로 가는 위대한 힘
대니얼 J. 시겔 지음, 최욱림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은 많지만, 이들을 잘 통합하여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감정기복이 심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다독여서 건강한 신체와 반듯한 정신을 가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라 하겠습니다.

 

<내 아이를 위한 브레인 코칭>, <마음을 여는 기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UCLA대학 정신의학과의 대니얼 J 시겔교수가 정신의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하여 10대 청소년들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을 소개하는 <십대 두뇌는 희망이다>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제 두 아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여 훌쩍 커버리고 난 다음이라서 진즉 읽었더라면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저자는 대략 12세에서 24세까지 이어지는 청소년기는 청소년 본인은 물론 그들을 돌보는 어른에게도 마찬가지고 거대한 시련의 시기라고 진단하고,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청소년기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특징을 잘 이해하여야 현재와 여생 전반에 걸쳐 활력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제2장은 청소년기 동안에 뇌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붙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제3장은 관계가 어떻게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고, 타인과 강한 유대를 쌓는 방법을 안내합니다. 제4장에서는 청소년기의 변화와 도전을 최대한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벌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청소년기의 내면심리와 대인관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점은 매 장의 끝에 둔 ‘마인드사이트 도구’ 섹션을 통해서 뇌와 관계를 강화하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통찰력, 공감력, 통합력의 세 가지 기본적 능력으로 구성되는 ‘마인드사이트’라는 개념은 저자가 창안한 것으로 “우리가 타인의 머릿속을 그려볼 때면 뇌 속에 바로 그 순간 타인의 내면세계라고 상상되는 지도가 한 장 생긴다. 자신과 타인의 내면 지도를 그리는 이 같은 능력이 바로 마인드사이트이며,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중요한 기술(63쪽)”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저자는 십대에 경험하는 네 가지 경향, 즉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사회적 유대감, 예민한 감수성, 창조적 탐험은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지녀온 종족보존의 본능이며, 이런 본능적 경향 덕분에 인류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10대에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면, 인생은 지루해지고 고립되며 색채를 잃고 평범해진다고 잘라 말합니다.

 

저자는 청소년 시기의 신체적 심리적 특징을 잘 이해해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탐구하려는 본능을 억누르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긍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 도구와 사례를 인용하여 자신이 개발한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소년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읽어서 서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청소년기를 거대한 통합의 시기라고 정의하고,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험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청소년기의 본질, 즉 감정의 스파크, 격렬한 사회적 참여, 새로움의 추구, 창조적 탐험을 향한 충동을 엮어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이 시기에 우리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모쪼록 독자들이 삶을 음미하고 섬기며, 삶의 노래를 공유하고, 새롭고 진정한 방식으로 삶을 통합하는 법을 찾기를 바란다고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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