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이희봉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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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대단한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면 어렸을 적 잠시 살던 시골 할머님 댁이 생각납니다. 야트막한 야산의 남쪽 자락 끝에 앉아 있는 집 앞으로 논이 널따랗게 펼쳐지는 곳입니다. 들로 나가는 길에서 슬쩍 빠져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걷다가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 담장너머로는 뒷산 비탈이 올려다 보이고 담장가에는 대봉 홍시가 열리는 감나무가 몇 그루 서있습니다. 대문 오른편으로 돼지우리를 돌아가면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쓰셨다는 사랑채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크지 않은 마당을 가로 질러가면 안채가 앉아있는데, 안채를 돌아가면 좁다란 장독을 안은 뒤란이 나옵니다.

 

작은댁에서 집을 새로 지으면서 사라지고 없는 할머님 댁을 그려보는 이유는, 어렸을 적 추억을 되살려보려 하는 것도 있지만, 한여름에도 더위를 별로 느낄 수 없었던 안채에 대한 아련한 향수 때문입니다. 뒤란으로 나있는 작은 문을 열어두면 뒷산에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사이를 지나 흘러드는 바람이 지금의 에어컨보다도 시원했습니다. 여름에도 뒤란은 늘 서늘해서 냉장고가 없는 불편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네 다른 집과 같은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멋은 없었지만 특히 여름에는 좋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서민들이 사는 초가집과는 달리 전통기와집에 담긴 멋과 풍류는 이상현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3005057>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물도 세월의 흐름이 녹아져야 제 멋이 우러난다고 합니다. 요즈음에 새로 조성된 한옥마을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래된 한옥마을에서 느껴지는 멋을 이상헌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옥에는 음악처럼 높낮이가 있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지붕 선이 리듬을 타고 추녀 끝에 걸리면, 벽면을 채운 재료들이 질감의 변화를 이끌며 흥을 돋운다. 한옥에서 시작한 율동감은 자연스럽게 마을로 이어진다. 가을이 봄처럼 화사한 도래마을이라면 율동감이 당연 도드라진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강한 율동감이 몸을 자극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이상현 지음,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245쪽) 나무를 보나 숲을 보지 못하거나, 숲을 보나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고 하는데,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양수겹장의 심미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에 집을 지을 때도 마을 전체와의 조화를 고려했다는 옛날 대목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궁금해집니다. 사실 우리의 고건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비슷해 보이는 모습의 집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졌을 것이란 생각에 별 관심 없이 스쳐 지나고 말았던 것이 전통 건물에 대하여 더 이상 가벼울 수 없는 저의 인식의 전부였습니다. 이런 인식을 새롭게 할 책을 만났습니다.

 

중앙대학교 건축학부의 이희봉교수님의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입니다. 이희봉교수님은 건축역사와 이론을 전공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셔서 사물로서의 건축물에서 더 나아가 그 건축물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였는지까지 연구의 대상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희봉교수님의 이런 철학은 앞서 소개한 이상현님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라 하겠습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 건물과 달리 한옥은 사는 사람을 중시한다. 때문에 한옥을 제대로 보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처럼 대청에 올라 먼산바라기도 하고, 방에 앉아 머름(문턱보다 높은 창턱)에 팔을 얹고 마당도 내다봐야 한다.”(이상현 지음,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 211쪽)

 

이희봉교수님은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책은, 누정 건축 삼척 죽서루 책이다. 그러나 한편 죽서루 책은 아니다. 죽서루라는 자그마한 건물 하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보는 책이다.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서 있는 죽서루를 관광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층을 꿰뚫어 깊이 보는 책이다. 기존 보아오던 방식, 즉 문화재 안내판이나 학계의 방식을 뒤집는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건축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 체험’이라는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죽서루에 관한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추론하여 나온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관찰’하면 ‘본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힘이었던 ‘관찰’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유보하고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눈의 망막에 비치는 것을 ‘본다’고 한다. 보는 것 자체를 관찰이라 하지는 않는다. 망막의 상을 뇌가 인식하는 것을 지각(知覺)이라 한다. (…) 다음으로 지각한 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28쪽)”고 적고, ‘보기→특성 파악하기→해석하여 의미찾기’가 되어야 전통건축의 답사가 완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동양문화권에서 말하는 ‘본다’의 차원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즉 최하등이라고 할 감각의 단계, 눈으로 보는 육안(肉眼), 그 위에 통찰의 아래 단계라 할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을 거쳐 지혜의 눈 혜안(慧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 답사를 유행시킨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달변의 문장력으로 대한민국에 남녀노소 유적답사를 유행시킨 공적은 높이 사지만, 베스트셀러 덕에 문화 교주가 될 만큼 영향력이 크지만, 또 대중 상대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지만 얄팍잡다한 흥미위주서술들이 대중을 오도하고 전문가들을 불편하게 만든다.(17쪽)”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단순히 죽서루를 답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한국건축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시작하는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죽서루 보기, 육안에서 심안을 거쳐 혜안으로 올라가고, 깊은 생각과 더불어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여행을 떠나보자.(31쪽)” 이런 의도는 목차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건물을 감상하는 일이 단순하게 건축기술을 살피는 일을 넘어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먼저 죽서루를 가볍게 훑어보고, 동양건축에 심취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 사이의 깡촌마을 베어런(Bear Run)의 계곡에 지은 낙수장(Falling water)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낙수장이 두 개의 폭포 사이에 바위 위에 집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서루가 강원도 삼척시를 흐르는 오십천 절벽 위에 있는 바위 위에 앉힌 누각이라는 점에서 비교대상이 된다고 본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를 두었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집의 설계개념은 죽서루와 같다. 물이 낙수장은 폭포요, 죽서루는 절벽 밑의 깊은 소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자연을 집으로 끌어들여 와 안팎공간이 상호 편입한다는 점은 똑같다. 그러나 라이트의 낙수장이 현대 건축가가 창의적 설계를 하여 잠깐 사용한 집이라는 점에 비하면 죽서루는 먼 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절벽 바위의 큰 스케일의 자연에서부터 집터의 미세 자연까지 구석구석 기운이 살아 있는 건축이다.(68쪽)”

 

이어서 죽서루의 모습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집터에 있는 바위를 있는 그대로 주춧돌로 이용하여 기둥의 밑면을 바위의 표면에 부합되도록 깎는 그랭이질을 적용하였다는 것이나 북쪽 진입로의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그대로 살려 마루로 파고든 모습 등을 보면 죽서루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건축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고건축에 무식한 저도 처음 다섯 칸 건물로 건축되었다가 후대에 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 증축했다는 지금까지의 통설보다는 저자의 주장이 더 논리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까래, 대들보나 처마와 같이 몇 개의 친숙한 우리의 고건축용어를 넘어 주심도리, 외목도리, 살미, 첨차, 동귀틀, 장귀틀 등과 같은 전문용어가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죽서루는 물론 다른 고건축물의 답사를 통하여 얻은 사진들과 스케치들을 통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아직 가보지 못한 죽서루의 상세한 부분까지도 눈으로 직접 보는 듯합니다. 죽서루는 삼척부사 이성조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써 붙일 정도로 으뜸이 되는 누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생활공간으로서의 죽서루를 체험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만, 객사의 부속 건물로 건축되었던 만큼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죽서루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수덕사 대웅전 다음으로 4번째 쯤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최근에 고려 명종 때 시인 김극기(1148~1209)가 지은 죽서루에 대한 시가 발굴되어 건축연대를 끌어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庾樓夕月侵床下 滕閣朝雲起棟間(유루석월침상하 등각조운기동간; 누각의 저녁달은 누마루 아래로 스며들고, 물에 솟은 누각 아침 구름 마룻대에서 일어나네)(52쪽)” 이처럼 죽서루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를 짓는 장소로 꼽혀왔기 때문에 죽서루에 관한 시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는 정조와 숙종의 시도 있다고 합니다. 임금께서 이곳까지 올 수는 없었겠지만, 궁궐화공이 그려 올린 그림을 감상하고 느낌을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휘돌아드는 개울에 드리운 암벽과 그 위에 서 있는 죽서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김홍도의 그림 ‘죽서루’ 뿐만 아니라 죽서루 아래 오십천에 떠있는 배까지 그린 겸재 정선의 ‘죽서루’와 강세황의 ‘죽서루’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죽서루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망한 고려의 수도 개성을 돌아본 심정을 읊은 야은 길재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건물에 당시 옛 사람을 집어넣어 그들의 삶 속에서 건축을 보아야만 그것이 건축을 보는 바른 역사’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삶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즉 건축을 사물로 보는 경향은 실패한 근대건축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이 통일된 건축을 만들려했던 근대건축의 개념은 노이버그 슐츠가 건축에 현상학 철학을 접목하여 만든 건축현상학에 밀려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니우스 로치(Genius loci, 장소의 혼)’라는 개념에서 땅은 건축 설계 시 건축가 누구나 다 하는 대지분석의 단순한 분석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고 부질없는 인간이 짧은 시간 낙서하며 그 속에서 살다가 사라져가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죽서루가 바로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서루가 자리 잡은 바위 절벽은 오십천 전 구간에서 딱 한군데,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장소, 천지의 혼이 서린 경건한 생명체라는 해석인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 이전에 ‘이미 거기’에 존재해 있었고, 우리는 세상과 다시 원시적·직접적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세상은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니며 ‘객관적 세계’란 없으며, 인간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의미의 세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시각으로 죽서루를 본 저자는 “죽서루는 하나의 물건덩어리가 아니라 나와 또 선현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또 과거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체험 속의 종합적·역사적 생명체(207쪽)”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역사유물을 답사(?)할 때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 그 유물이 선조들의 삶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었는지를 종합적으로 감상하는 혜안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물론자의 죽서루’에서는 죽서루를 건축물이라는 사물로서 보아온 건축학자들의 시각에서 나온 통설들을 뒤엎는 저자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설명을 감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전해지는 다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죽서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의 문화다’는 철학을 가진 저자는 삼척 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진 죽서루를 통해서 한국의 고건축을 제대로 보는 법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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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 개정판
무라카미 류 지음, 정윤아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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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골프코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368야드 파4 제2타; http://blog.yes24.com/document/7342072>를 읽으면서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붙드는 것이 참 힘들구나 싶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런던 히드루 공항에서 느낀 점을 적은 <공항에서 일주일을; http://blog.joins.com/yang412/13173813>과는 다른 무엇을 무라카미 류는 보고 들었을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공항에서>는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읽는 내내 작가의 속셈이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아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 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서 작가 후기를 읽고나서도 머릿속이 맑아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크게 두 그룹이라고 합니다. 겐토샤(幻冬舍)에서 나오는 유학정보지에 실린, ‘술집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편의점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술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폐쇄성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출발. (…) 현대사회에서 ‘출발’의 의미는 폐쇄적이고 좀처럼 충실감을 얻을 수 없는 일본 사회로부터의 도피에서 찾아야 한다.(206-7쪽)”고 적었습니다.

 

‘역 앞에서’, ‘노래방에서’, ‘공항에서’ 그리고 ‘피로연장에서’ 등, 역시 어디에나 있는 네 가지 장소를 무대로 한 한편은 올 요미모노(讀物)에 연재했던 것들로 무언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합니다. “희망이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근대화가 진행되었던 과거에는 누구나 가난했지만, 희망만은 충만했는데, 모든 것이 다 있고, 무엇이든 넘쳐나는 지금 희망만큼은 없는 것 같다.(209쪽)”는 패러독스를 깨트려보고 싶었다는 것이지만, 역시 그 희망은 연기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리뷰를 적으면서 이야기를 다시 훑어보니 저자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편의점에서’의 예를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음향스튜디오에서 효과음을 채집하는 일을 했다는 주인공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작가는 편의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마주치는 상황을 손에 잡힐 듯 그려냅니다. “가게 안은 또다시 빛으로 가득 차고, 나는 유리벽 너머로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본다. 빛 속에서 승객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 소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은 딱딱한 굽이 달린 샌들을, 또 한사람은 가죽을 댄 낮은 펌프스를 신은 것 같다. 버스의 앞 유리창이 반사시킨 가안 빛이 편의점의 물건과 그녀들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다.(30쪽)” 후기에 적은 것처럼 작가는 편의점이라는 제한된 좁은 공간으로 일본의 폐쇄성을 표현하면서도, 음향기술을 공부하러 샌디에고로 가려는 주인공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 일본적일 삶을 살아온 아버지나 형과는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처럼 “무의식중에 듣게 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16쪽)”는 구절에 표시를 두었습니다만, 그보다는 “어린아이들은 표정만 보아도 기분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 그러나 노인은 정반대다. 어떤 변화에도 쉽게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어쩌면 일본인의 특징이 아닐까요?) 아기보다 노인을 돌보는 게 훨씬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바고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치매에 걸리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면일 뿐, 얼굴만 보고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사람은 환자의 사소한 행동과 말투도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19쪽)”는 구절에서 더 강한 느낌을 얻었습니다. 치매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편의점에서’의 주인공은 미국 샌디에고로, ‘술집에서’의 여주인공은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로, 그리고 ;공원에서‘에 등장하는 후타엄마는 무작정 이 공원과 나라를 떠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들이 일본을 떠나려는 계획이 전체의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작다 싶습니다. 문제는 스무살짜리 여자애들과 함께 노래방에 들어선 50대 남성이나, 아홉 살이나 어린 남자를 집으로 끌어드린 피로연의 주인공, 생뚱맞게 초면의 남자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여성, 우울증에 걸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여성, 묘한 클럽에서 일하면서 가게 밖에서 고객을 만나는 여성 등의 이야기는 솔직하게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너무 일본적이라서일까요? 특히 공항에서 생긴 스토리가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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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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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모두 잊었지만, “애기야 가자”, “이 안에 너 있다”는 대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네티즌이 꼽은 황당 결말 드라마 2위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백마탄 왕자 한기주(박신양扮)와 엉뚱한 신데렐라 강태영(김정은扮)의 티격태격 사랑이야기로 시청자를 끌어 모았는데 마지막 회에 가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강태영이 써온 소설의 스토리였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연인>을 인용하는 이유는 김영하의 신작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결말이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는 요약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소설입니다. 치매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치매환자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치매환자가 우발적 사고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누군가는 죽였다는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주인공 김병수를 알츠하이머환자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장애가 있는데, 오래된 기억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반하여 최근 보고 들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고, 인지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MRI검사에서 해마가 위축되어 있는 소견을 나타냈다는 것으로 보아 알츠하이머병, 즉 노인성 치매로 진단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알츠하이머 치매환자는 상황을 수집하여 정리하고 계획을 세워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지기능이 통합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병수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에 관한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 요양보호사 김은희 살해정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김은희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아침을 차려 먹고 체조를 했다. 따갑고 쓰라려 살펴보니 손과 팔에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 나는 샤워를 했다. 몸을 꼼꼼하게 씻은 후 입고 있던 옷을 불태웠다.(120~121쪽)” 왜 그랬을까요? 어디에도 김병수의 옷이나 몸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뿐만 아니라 김은희의 사체가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혈흔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또 엉뚱한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처음 와보는 동네다.(35쪽)” 김병수는 배회증상까지도 있다. 배회증상이 있는 환자는 특히 밤에 낙상을 당해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답은 결말 즈음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병수는 오래 전에 시내 문화센터에서 일하던 여자와 그 남편을 죽이고 그 딸을 입양해서 키워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딸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된 것으로 들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병수가 자신과 오랫동안 동거해왔다고 믿고 있는 은희는 요양보호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의 결론은 가벼운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는 작화(作話), 즉 이야기를 지어내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의 기억은 아마도 신문 사회면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구성하여 적어온 자신만의 살인기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양보호사 김은희는 김병수가 치매에 걸린 다음에 만났을 것입니다. 당연히 김병수는 김은희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박주태 역시 김병수의 기억에 제대로 등록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만난 안형사라는 존재가 사실을 박주태였다는 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치매환자 김병수가 거처하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김은희를 비롯한 다수의 피해자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를 가해자로 위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김병수는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작가는 그런 점을 고려했을까요?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35쪽)”라는 다소 자조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연쇄살인의 망상에 사로잡힌 늙은 치매환자가 인생이 쳐둔 덫에 걸려 곤경에 빠진 상황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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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미술관 산책 - 파리, 런던, 뉴욕을 잇는 최고의 예술 여행 미술관 산책 시리즈
최경화 지음 / 시공아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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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전에 동경가는 길에 장윤선님의 <도쿄 미술관 산책; http://blog.joins.com/yang412/12540845>의 도움으로 우에노공원에 모여있는 도쿄예술대학 미술관,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좋은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예술작품에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진 작품만 챙겨 감상하기에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아보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시공사에서 ‘이국적인 도시에서 즐기는 예술의 향기’ 시리즈로 나온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 소개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보면 책읽기에도 묘한 인연 같은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걷기를 꾸준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자연스럽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http://blog.joins.com/yang412/13056408>, 정진홍님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http://blog.joins.com/yang412/13050186>, 최미선님의 <산티아고 가는 길; http://blog.joins.com/yang412/13089939> 등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느 리뷰에서 적었던 것처럼 언젠가는 저도 가보고 싶은 길이기 때문에 이미지 훈련 삼아 그 느낌을 얻어 보려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럽에서도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인 탓인지 지금은 금지되고 있는 투우 말고는 별로 기억되지 않던 스페인은 한 때 유럽을 제패한 나라이며, 배를 타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겠다는 콜럼버스에게 탐험비용을 대줄 정도로 진취적인 나라였습니다. 1492년 이사벨여왕의 승인을 받아 출항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1898년 쿠바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미국과 붙은 미서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할 때까지 400년 동안,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재화 덕분에 대제국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돈이 모이는 곳에 예술의 향기도 넘쳐나기 마련인데 그런 매력적인 모습을 누군가 먼저 보고 전하게 된 것이겠지요. 결국 역사 속에 잠자고 있던 스페인의 매력이 우리들에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우리네 삶에 여유가 생긴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들과 함께 미술관을 중심으로 돌아본 42일간의 유럽여행을 담은 고형욱님의 <아빠의 자격; http://blog.joins.com/yang412/12327788>에서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걸려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해서 200년째 공사 중이라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EBS인문학 특강]을 통하여 김상근교수님께서 엘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미술에 대하여 설명해주셨는데, 특히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미술이 완성되던 시기에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스페인에 대한 저의 동경을 키우도록 만들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84697).

 

<스페인 미술관 산책>에서 안내를 맡은 최경화님은 미술사학을 전공하셨는데, ‘꿋꿋하게 나만의 길을 가자’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계시다고 합니다. 고등학교(그리고 보니 큰 아이의 선배가 되시는군요)와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인연으로 스페인 어학연수와 산티아고 가는 길 순례를 비롯한 몇 차례의 스페인 여행 끝에 “이럴 바에 아예 스페인에서 살아보자”고 마드리드를 찾았고, 프라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등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전문가이드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전공과 경험으로 볼 때, 스페인 미술관을 안내하는데 꼭 맞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삶을 이 길로 안내한 계기는 <스페인 미술관 산책>의 첫 번째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는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그림을 본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들이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고 죽는 것을 지켜본 어머니 마리아는 울다가 끝내는 기절했다. 죽은 아들보다 낯빛이 더 창백하다. 요한은 눈가가 붉어지도록 울었고, 시신을 내리는 남자들의 미간에는 주름이 져 있다.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의 슬픔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25쪽)” 이런 느낌은 베이던이 인간적인 감정을 잘 표현한 화가이기도 하지만, 예전 종교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적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베이던처럼 플랑드르 출신 화가의 작품이 많은 이유라던가 지금의 벨기에 해당하는 플랑드르는 유화가 처음 시작한 고장이라는 이유로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까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해골의 의미에 대한 저자의 설명으로 앞으로는 무식한 티를 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쓰러지는 마리아를 부축하려는 요한의 발밑에 놓여있는 해골이 바로 최초의 인간 아담의 해골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예수를 매단 십자가가 아담의 무덤 바로 위에 세워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첫 번째 인간이자 인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방식(29쪽)”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해석은 그렇다고 쳐도 “서양회화에서 해골이 등장하는 경우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너희도 곧 죽어서 이 해골처럼 될 테니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설명이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집니다. 오래 전에 루브르박물관을 찾았을 때 유난히 해골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모여 있던 전시실에서 발길이 멈추어지더라는 이야기를 적은 바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7679738). 그때는 해골을 가지고 해부학 공부를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최경화님의 설명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미술관 산책>에서는 프라도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을 따라가는 모데르니스모 루트,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그리고 작지만 알찬 미술관으로 마드리드의 소로야 미술관과 세랄보 미술관, 바르셀로나의 마드리드 카이사 포름과 호안 미로 재단, 그리고 톨레도의 산타크루스 미술관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술관의 대표작을 소개하기에 앞서 미술관이 설립된 배경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을 예로 들면, “프라도 미술관의 기반이 된 컬렉션은 15세기 스페인 왕실에서 시작되었다. 왕들이 취향에 따라 수집한 작품들, 왕실화가의 그림, 그밖에도 왕실 소유의 건물에 걸려 있던 작품 등이 기반이 되어 1819년에 미술관이 설립되었다.(19쪽)”라는 설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을 구경하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만(http://blog.joins.com/yang412/7664069), 프라도 미술관 역시 길을 잃기 쉽다고 합니다. 이렇듯 규모가 큰 미술관을 제대로 감상하는 팁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거대한 건물 안에 일정한 리듬으로 작품을 전시해 놓기 때문에 레게리듬에 몸을 맡기듯, 우리는 그 리듬에 몸을 맡기면 된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미술관에서 제작한 안내 팸플릿이다. 건물안내도와 함께 색상별로 어느 구역에 어느 나라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지 표시를 해놓고, 대표작품들도 명기되어 있다.(22쪽)”

 

저자는 프라도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열 쪽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홉, 아니 열 한 사람에 더하여 개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왕궁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공간감 표현이 자연스럽다.(109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가운데 서있는 마르가리타 공주가 주인공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벨라스케스가 국왕 펠리페4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을 담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정작 상황의 주인공인 왕과 왕비는 멀리 벽에 걸린 거울에 비쳐서 조그맣게 그려지고 오히려 화가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전체 인물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자화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시녀들>을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고 있는 것은 수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 가면 피카소가 리메이크한 <시녀들>을 볼 수 있다고 하고, 그림 오른쪽에 앉아서 졸고 있는 덩치 큰 개가 주인공인 소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시녀들>보다도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떤 미술관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나만의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167쪽)”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만나는 도메니코 가를란다이오의 <조반나>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단한 절세미인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단정한 옆얼굴의 선과 목에서 등으로 떨어지는 곡선 등은 첫눈에 봐도 시선을 확 끌 정도로 아름답다. 젊음, 부족함 없는 생활에서 오는 여유로운 무엇이 이 여인에게 있다. 들여다보고 있는 나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앞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에는 무언가 명상하게 만드는 힘도 있다. 나와 별 상관도 없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닌 500년 전 여인이 내 시선을 이렇게 잡아두고 있다는 것이 미술의 힘이다.(166쪽)”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만,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을 대표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경, 바스코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프랑코를 돕기 위해 최신 기종의 전투기를 보내면서 엄청난 양의 폭탄을 무차별 투하한 것이다. (…) 당시만 해도 비행기로 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게르니카는 이틀 내내 불탔고 1,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223쪽)” 폭격이 있었던 3일 후에 피카소는 이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그림에는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가 있다. 이미 죽어서 힘없이 축 늘어진 아이를 품에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창에 찔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말, 불타는 건물, 폭탄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하늘을 보며 두 팔을 들고 절규하는 사람, 그는 하늘을 본다. 그들을 곧 끝장낼 죽음이 오는 하늘이다. 한 손에 부러진 칼을 든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도 있다. 그러나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꽃은 피어났다.(226쪽)”는 작가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습니다. <게르니카>를 준비하면서 피카소가 남긴 45점의 스케치와 당시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가 제작과정을 찍은 사진들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 같이 감상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도 주목할 작품이겠습니다만, 저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과학과 자선>을 꼭 보고 싶은 그림으로 꼽겠습니다. 피카소가 열다섯 살 때 고전적 유화기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중앙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안색이 좋지 않은 여인이 누워 있다. 그 오른쪽에는 환자의 맥을 짚으면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의사가 앉아 있다. 즉 ‘과학’이다. 침대 반대편에서 한 수녀가 어린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에게 마실 것을 건네준다. 이 아이는 병든 여인이의 아이일 것이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병자를 돌봐 주고, 그가 세상에 남겨둘 갈 곳 없는 아이를 돌봐 주는 역할을 하는 수녀는 ‘자선'이다.(337쪽)”라는 저자의 설명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걸음 나아가서 치료와 간병의 개념을 병존시켜 환자의 질병을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어집니다.

 

스페인에 가실 계획이 있으시거나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을 읽고 소개할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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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티브와 무임승차 - 성공전략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마야 보발레 지음, 권지현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SK 플래닛의 박태현 매니저의 추천사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근래 많은 기업 혹은 기관에서 KPI(Key Performance Index)를 활용한 성과평가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시스템을 알고 계시다면 이 책에 몰입되어 단숨에 읽어내려 가실 것 같습니다. 연초에 조직이 달성해야 할 목표수준을 정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조직원들이 해야 할 지표들을 찾고 평가기준을 정하고, 연말에 성과분석을 통하여 그 기준과 비교하여 성과를 측정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태현 매니저는 이러한 평가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1. 회사가 단위 조직의 KPI에 포함되지 않은 일들이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2. 단위조직들이 만만한 KPI를 설정한다, 3. KPI는 직원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4. KPI는 측정이 어려운 일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든다, 5. KPI는 신시장 개척을 목표로 할 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6. 직원 개개인에 대한 KPI를 통한 평가 역시 문제가 많다.

 

<인센티브와 무임승차>는 공공경제학을 전공한 프랑스 경제학자 마야 보발레가 30여 년 동안 일반화되어 온 인센티브와 디스인센티브, 즉 당근과 채찍을 근간으로 하는 경영방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기업과 사회 전반에 유행하고 있는 인센티브전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자는 인센티브 자체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인센티브 전략이 때로는 더 나쁜 상황을 초래하는 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 졸업반인 작은 아이는 가끔 투덜거리곤 합니다. 실습팀이 받은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팀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적은 과제수행정도에 따라서 모든 팀원이 같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책의 제목처럼 무임승차를 하는 팀원이 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집단성과지표를 도입했을 때 일을 하지 않는 직원은 상사가 아니라 동료들에게 걸린다. 동료들이 그에게 충분히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꽤 빠른 시간 내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89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서의 무임승차자는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경기할 때 심사위원의 점수가 나올 때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심사위원은 생각보다 박하게 점수를 매기는 것을 보면서 투덜거린 적도 있습니다만, 피겨스케이팅 심사위원이 채점방식에 따라서 점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밀양송전탑을 세우는 문제를 두고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만, 최근 우리사회에 암암리에 커져온 보상심리가 사태를 키워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스위수정부에서 추진한 핵폐기물처리장 설립을 사례로 들어서 경제적 인센티브 전략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협상에서 불리한 상황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경제적 인센티브는 의욕을 꺽는다. 시민정신에 입각해서 매립지를 받아들이겠다는 내재적 동기를 감소시킨 것이다.(39쪽)”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기획단계에서부터 모든 상황을 투명하게 설명하고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는 것이 시일이 많이 걸리더라도 바람직한 정책처리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업무와 직접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제4장에 나오는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과 제왕절개분만이 늘어나는 현상입니다. 아마도 자연분만하는 비용과 제왕절개하는 비용에서 차이가 있는 미국에서의 사례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두 경우에서 비용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이 우리나라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뉴욕병원에서의 수술사망율과 관련된 평가는 제가 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해서 관련 논문을 찾아서 깊이 공부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사망율이 높은 병원에 불이익을 주었더니 수술이 위험한 환자는 아예 수술을 하러들지 않더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체온을 수집하는 경우에 체온계를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 근심이 늘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평가사업 역시 참여하고 있는 의료기관이 관련 자료를 성실하게 제출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참고할 점이 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병원평가라고 하는 사회적 파장이 큰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만, 항상 고려하고 있는 점은 저자가 에필로그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관찰과 검증이 가능한 좋은 지표를 만들어 평가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표는 가시적 데이터를 향상시키고 지식을 객관화하며 사람보다는 과정을 측정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센티브를 매개로 한 평가의 본모습을 이해하게 된다면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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