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모두 잊었지만, “애기야 가자”, “이 안에 너 있다”는 대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네티즌이 꼽은 황당 결말 드라마 2위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백마탄 왕자 한기주(박신양扮)와 엉뚱한 신데렐라 강태영(김정은扮)의 티격태격 사랑이야기로 시청자를 끌어 모았는데 마지막 회에 가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강태영이 써온 소설의 스토리였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연인>을 인용하는 이유는 김영하의 신작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결말이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는 요약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소설입니다. 치매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치매환자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치매환자가 우발적 사고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누군가는 죽였다는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주인공 김병수를 알츠하이머환자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장애가 있는데, 오래된 기억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반하여 최근 보고 들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고, 인지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MRI검사에서 해마가 위축되어 있는 소견을 나타냈다는 것으로 보아 알츠하이머병, 즉 노인성 치매로 진단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알츠하이머 치매환자는 상황을 수집하여 정리하고 계획을 세워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지기능이 통합적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병수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에 관한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 요양보호사 김은희 살해정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김은희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아침을 차려 먹고 체조를 했다. 따갑고 쓰라려 살펴보니 손과 팔에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 나는 샤워를 했다. 몸을 꼼꼼하게 씻은 후 입고 있던 옷을 불태웠다.(120~121쪽)” 왜 그랬을까요? 어디에도 김병수의 옷이나 몸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뿐만 아니라 김은희의 사체가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혈흔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또 엉뚱한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처음 와보는 동네다.(35쪽)” 김병수는 배회증상까지도 있다. 배회증상이 있는 환자는 특히 밤에 낙상을 당해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답은 결말 즈음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병수는 오래 전에 시내 문화센터에서 일하던 여자와 그 남편을 죽이고 그 딸을 입양해서 키워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딸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된 것으로 들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병수가 자신과 오랫동안 동거해왔다고 믿고 있는 은희는 요양보호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의 결론은 가벼운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는 작화(作話), 즉 이야기를 지어내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여섯부터 마흔 다섯까지 저질렀다는 살인의 기억은 아마도 신문 사회면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구성하여 적어온 자신만의 살인기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양보호사 김은희는 김병수가 치매에 걸린 다음에 만났을 것입니다. 당연히 김병수는 김은희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박주태 역시 김병수의 기억에 제대로 등록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점입니다. 김병수가 만난 안형사라는 존재가 사실을 박주태였다는 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치매환자 김병수가 거처하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김은희를 비롯한 다수의 피해자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김병수를 가해자로 위장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김병수는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작가는 그런 점을 고려했을까요?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35쪽)”라는 다소 자조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연쇄살인의 망상에 사로잡힌 늙은 치매환자가 인생이 쳐둔 덫에 걸려 곤경에 빠진 상황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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