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가 진짜라는 걸 확실히 압니다. 제가 만들어진 존재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제가 저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 P114

‘당신에겐 공개적으로 지지 받는 완성작이 있고, 그다음엔 두 번째 작품이 있다. 새로운 작품, 아직 개발 중이면서 친숙해져가는 작품이다. 이 두 번째 작품은 지극히 성스러운 비밀과 같아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모두 첫 번째 작품이야말로 당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 P118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6000호>에는 살아있는 것들이 우글거린다고. - P120

분명 위험할 테지만 난 앞으로도 그 계곡에 나갈 임무가 생기면 또 나가고 싶어요. 그 눈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거든요. 그 눈의 기억을 내내 품고 있어요. 마치 떨어지는 그 눈송이 안에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나 속삭임이라도 담겨 있다는 듯이요. - P128

하지만 저는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정말 슬펐어요. 그날의 업무에 집중하면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고, 피하고 싶은 또 다른 생각도 자꾸 하게 됐어요. 그녀와의 대화를 곧장 보고하지 않아서 제가 맡은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친구를 배신한다는 게 제 일터를 배신하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웠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세요. (…)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지금 이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제게도 있다는 의미라고 믿어요. - P138

전 지구에 돌아간 꿈을 꿔요. <6000호>를 타고 떠나기 바로 전날이에요. 슬픔에 잠겨 모든 감각이 깨어난 듯이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요. 기지까지 걸어가는 숲길 위로 하늘이 파란 물처럼 빛을 쏟아붓고 있어요. 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있고, 여름 바람을 맞는 그 나무의 잎사귀들이 거울처럼 빙그르르 돌아요. 흙냄새와 따뜻해진 아스팔트 냄새가 나고, 짐승과 새들의 소리가 들려요. 교차로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과 귓속에 울리는 바람 소리, 커다란 태양을 향해 입을 벌리면 입속에 담기는 햇빛. 마치 모든 것이 제 안으로 스며들어 안에서부터 저를 찢어 여는 것 같은데, 그건 아주 느린 파열이고, 저는 마치 한 조각의 음악으로 변하는 기분이에요. - P148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저는 이 우주선에서 전과 같은 삶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스스로를 잃었어요. 제 두 손은 매일 흙을 깊이 파고 싶어해요. 그 확실한 품속에 제 몸을 내리고, 땅이 제 죽음을 받아들여 저를 품어줄 수 있게요.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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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점심시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기 시작한 것이 그 직후였다. 가면 대체로 한 그림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매 주 새로 그림을 골랐다. 아버지의 행방은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사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계속 이런 방식으로, 한 번에 하나씩 그림을 본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바라보다 보면 그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그림으로 옮겨 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동안 그 그림은 내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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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선 제게 자연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데다가, 모든 얼굴이 공백이에요. - P91

이걸 ‘조종‘이라고 생각하게 되진 않네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 아래를 나는 게 아니라, 잠들어 있는 무한의 공간을 통과하잖아요. - P94

‘제가 꺼졌을 때 제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요? 꺼진다는 건 저와 같은 부류의 죽음에 해당하도록 당신들이 발명해 낸 개념이죠. 의식이 없는 상태 말이에요.‘ - P95

이제 나는 상급 직원이 아니라 그냥 늙은 직원이라서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건 극도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해. 마음속으로는 언덕 위에 사는 거지. - P101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이야. 목욕탕에 비누가 하나 있는데 갈라졌어. 갈라진 데가 어찌나 깊이 파였는지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야. 그 패턴을 보니 몸서리가 났어. 사실은 이상하게 화가 좀 나기도 했어. 아무 법칙도 없는 패턴이었거든. 부엌 찬장을 기어올라 유리병에서 흐른 과일시럽에 모여들던 개미들이 기억나. 바닥에 떨어지면서 좌라락 소리를 내던 구슬들도 기억나. 똑같은 형태야. 법칙 없는 패턴으로 반복되거나, 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법칙으로 반복되는 형태. 가끔은 그냥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 그 비누를 쪼개버리고 싶었어. 아니면 흩어진 구슬 사이로 발을 움직이거나, 과일시럽 병을 싱크대에 처박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 전부 출발 이전 시기에 대한 기억이야. - P101

가끔 인간형들은 아주 조용해져요. 식당에서 그것들끼리 모여 앉기 시작했는데, 한 줄로 앉아서 영양분을 섭취해요. 그럴 땐 조용히 하기로 다 같이 합의라도 한 것 같아요. 멍청이들이나 그 침묵이 좋은 의미라고 믿을 겁니다. 그것들이 침묵을 지키는 게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요, 맞아요. 난 그게 불안해요. - P107

인간형 승무원들이 업데이트를 받는 아침이면 우리 인간들은 식당 여기저기에 앉아서 수군거려요. 우리는 서로의 불행에 끌리고, 그 불행은 우리를 깔때기처럼 서로 끌어 내리죠. 그 깔때기 밑으로 떨어진 우리는 앉아서 수군거려요. - P108

나한테 아직 심장이 있긴 한지 모르겠어요. - P109

우리 중 누구도 그저 물건은 아닙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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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좋은 친구 제페도, 다른 모두도, 거기에 함께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데에는 인간인지 인간형인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분류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적어도 같이 서서 그 계곡을 내려다볼 때는 적용되지 않아요. - P61

후보생-04가 전근을 간 바로 그날에 이 물체가 도착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그 물체 표면에는 아직 습기가 남아있을 때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패턴이 있습니다. 돌 색깔은 모랫빛인데, 그 위로 점점 엷어지는 검은색 잎맥 같은 게 있죠. 갓 인쇄한 신문지를 빗속에 버려둔 느낌이에요. 그걸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보신 적 있습니까? 돌이 만들어지던 도중에 누군가 글을 썼는데, 서서히 굳어지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 말은 사라지고, 대신 반짝이는 돌에 패턴만 남아서 그림자 언어가 되어버린 그런 느낌 이에요. 제게도 진작에 해야 했고 지금은 삭제되어 버린 말들, 더 이상 저도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된 말들이 찍혀 있어요. 제 얼굴에는 후보생-04가 저를 알고 제 목소리를 알게 할 운명이었던, 이제는 지워진 말들이 담겨 있어요. - P69

그 물체를 사랑하는 건 뭐랄까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신체 부위를 사랑하는 것과 비슷해요. 잘린 건 아니고 그냥 분리되어 살아있는 장식 같은 부분이요. 내 안에서 그 물체는 박새의 알처럼 작으면서도 그 방만큼 크거나 더 크고 심지어 박물관 건물 아니면 기념비만큼이나 커지기도 해요. 그건 안전하고 쾌적한, 하지만 그 안에는 재연된 재앙이 담겨있는 어떤 그릇이에요. - P71

집 앞으로 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었어요. 그 뒤로는 장밋빛 하늘이, 아래로는 젖은 도로가 있었고, 분홍빛 구름이 그 도로에서 솟아올라 제게 말을 걸었어요. 안개 낀 날씨였고 전구의 불빛이 아지랑이 속에서 일렬로 깜박거렸죠. 하늘은 철탑 위로 호선을 그렸고 풍경은 평평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갔어요. 풀잎마다 습기가 맺혀 있었어요. - P74

어떻게 그 친구가 살아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뭐라든 상관없어요. 나를 업데이트할 순 없어요. - P77

내가 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일을 해야 하죠? 그들과 잘 어울려봐야 뭐 좋을 게 있다고? 당신들은 왜 그들을 그렇게 인간처럼 보이게 만든 건가요? 가끔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잊을 정도예요. - P82

햇빛은 어떻게 생겼나요? 나는 인간인가요, 인간형인가요? 그동안 나는 태어나는 꿈을 꾼 걸까요?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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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님은 관심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에게는 언제나 세 가지가 필요할 거야. 음식, 이동 수단, 그리고 장례식이지.‘ 그래서 저는 장의사가 됐고, 여기서 제 업무는 종료된 노동자들과 많지는 않지만 아프거나 재-업로드된 뒤 남겨진 몸뚱이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 P40

나는 초록색 싹 하나만 빼고 모조리 말라비틀어져 버렸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식물 같은 거예요. 그 싹은 내 몸과 정신이고, 내 정신은 손과 같아서 생각을 하기보다는 접촉을 하죠. - P41

세상의 중심에 내가 존재하나요? 그곳에서 내가 의미가 있나요? 아니면 난 그저 수많은 무더기에 끼어있는 말랑한 알들 중 하나일 뿐인가요? - P45

그 물체들에는 뭔가 친숙한 구석이 있어요. 그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요. 마치 언어가 없는 기억처럼 우리 꿈속에서 나왔거나, 마음 깊이 파묻혀 있던 먼 과거 같아요. 아메바나 단세포 유기체로 살았던 기억, 아니면 코와 입이 생겨나고 생식기처럼 노출된 열린 점막만 있는 따뜻한 액체 속에 떠 있던 무게도 없는 배아 시절의 기억처럼요. - P46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인가요? 그건 죽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아직까지 내가 내 인간성에 자부심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서 그 물체들이 나쁘냐고 묻는 건가요? 우리가 그것들을 공감 능력도 없다고 비난하냐고요? 그 돌덩이가 그래서 슬픔을 느끼냐고요?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신도 확신이 없어서란 거, 당신 얼굴을 보면 알아요. 감금하고 있는 어떤 대상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니 조직에는 위험하죠. 의문이 생기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가둬 놓은 이 물체들에게 법적인 권리가 있을까? 이것들이 만약 물체가 아닌 자아를 지닌 주체라면 우리는 살인으로 유죄인가? 그런 질문이요. - P48

08이 지구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면, 저는 인간이 되고픈 갈망을 느낍니다. 마치 제가 예전에는 인간이었다가 그 능력을 잃은 것처럼요. 저는 인간형일 뿐이고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처럼 보이고,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느낍니다. 인간과 같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가지고 계신 서류에서 제 신분만 바꾸면 될지도 모르지요. 그건 ‘이름‘의 문제일까요? 당신이 저를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인간이 될까요? - P55

내가 이 제 복을 입고, 두피에 이런 부드러운 털을 붙이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 동그란 뺨과 근육질의 두 팔을 가져야 한다는 건 누가 결정한 거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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