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호소에 응답하여 보스니아의 수도를 여행한 스페인의 시인 후안 고이티솔로(Juan Goytisolo)는 이렇게 썼다. "포탄을 발사하는 망나니 같은 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도서관이 불탔을 때, 그것은 죽음보다 더했다. 그 순간의 분노와 고통이 나를 무덤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 공격의 목적, 이 땅의 역사적 실체를 쓸어버리고 그 위에 거짓과 전설과 신화의 신전을 세우는 일은 우리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 P300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배가 고프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말하는 사람은 먼저 죽게 된다. - P304

"그 책들 하나하나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던지! 어린 시절 그 책들은 나의 유일한 문화적 기 준점이었죠. 나는 평생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의 보물이죠!"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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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란 얼마나 기이한가, 또 얼마나 부당한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모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타인을 견뎌야 한다. 생김새가 평범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어쩌면,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외모를 갖게 되는 건 아닐까. - P21

그때 이디스는 이 생각의 흐름 아래서 또 다른 흐름을 발견했다. 드디어 혼자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그 꿈이 좌절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만의 작은 아파트를, 생기 넘치는 거실을, 단 한 명의 하인과 열쇠를, 책 한 권을 들고 난롯가에 앉은 저녁 풍경을 그려 보았다. 이제 아버지의 편지를 대신 쓸 일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갈 일도 없으며, 집안 가계부를 작성할 일도, 아버지와 함께 공원을 산 책할 일도 없다. 이제야 비로소 기르고 싶었던 카나리아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디스로서는 허버트와 캐리, 찰스, 윌리엄이 저마다 돌아가며 어머니를 맡아 주기를 바랄 수 밖에. 그녀는 가족의 뻔뻔한 태도에 충격받았으나 스스로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P27

케이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를 오해했다. 사실 가족 모두가 레이디 슬레인을 – 그녀의 상냥함과 이타심, 공적 활동 까지도 – 오해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내도 여전히 타인을 속속들이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케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이디스만 신이 나서 속으로 방방 뛰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미치지 않았고 사실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조용히 캐리와 허버트의 간섭을 저지함으로써 그들을 궤멸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즐거웠다. 부드럽게 양손을 맞잡고 속삭였다. "잘한다, 어머니! 계속해요!" 일말의 분별력으로 함성을 자제할 뿐 이었다. 새로 발견한 어머니의 말솜씨도 눈부셨다. 레이디 슬레인은 대화할 때 말을 삼가는 편이고 의견을 내놓는 일도 없는 데다가, 뜨갯거리나 자수품 위로 머리를 숙이고 표정까지 감춘 채 가끔 "그러니?" 하고 대꾸할 뿐이라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알 수 없었으니, 그런 말솜씨는 그날 아침에 연달아 이어진 놀라움 속에서도 적잖이 놀라웠다. 이디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다정하고 세심하게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내심 자기만의 세상을 품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것을 관찰하고, 눈치채고, 비판하고, 묻어 뒀을까? 레이디 슬레인은 바구니를 뒤적이면서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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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 하나라고. 세련되면서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이건 반칙 아닌가? 두 가지 미덕은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닌가 싶으므로. 세련이란 매끄럽고 미끈한 물건을 떠올리게 하고,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에서 왔듯이 애쓰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니 말이다. 또 그는 말했다. 순수하고 감각적인 것은 와인 말고도 많지만, 어떤 것도 와인만큼 폭넓은 즐거움과 찬사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고. - P269

정력을 다할 수밖에 없던 그의 인생에 대해 이해한답시고 그렇게 됐다. 인생은 유한하고, 살아 있는 동안만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니 그가 그렇게 발버둥 쳤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시들어 죽기 싫어 자신을 총으로 쏘기도 했고 말이다.
자연스럽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강렬하기는 하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와인을, 세련된 동시에 자연스러운 와인을 감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270

얼마 지나지 않아 라가불린 16년산을 사러 갔다. 나는 실제로 라가불린을 보고 더 반했다. 아직 병을 따지도 않았 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병의 모양과 곡면의 경사도와 길쭉한 타원형 모양으로 붙어 있는 스티커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스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바위 폭포로 돌진 하는 호수의 물. 황야의 피트. 이것들로 만들어 느리게 증류 하고 길게 숙성시킨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스모키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고.
소금이 아니라 바다다. 라가불린을 처음 마시고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저 짠맛이라고 하기에는 더 복잡하고 오묘하고 원시적인 무엇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건 파도였다. 해조류와 바다의 돌과 해변의 모래 맛이 나는 듯했고, 연기도 실려 왔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담긴 연기가. - P289

<미저리>의 첫 장면이 좋다는 것도 상당히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 완성된 원고를 막 송고한 소설가가 누리는 찰나의 기쁨에 대한 것이라. 첫 신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한 대와 성냥 한 개비, 두 번째 신은 빈 샴페인 잔, 세 번째 신은 샴페인 바스켓에서 칠링되고 있는 돔 페리뇽 한 병이다. 이 세 요소가 스탠바이하고 있다. 와, 이 정도면 한숨이 나오면서 막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아직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쏟아부은 소설을 막 끝냈고, 그 보상으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샴페인 한 병을 마신다. 멋지다. 한때 담배를 피웠으나 이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술을 즐기지만 평소에 돔 페리뇽을 마시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맛있을까. - P290

내게 샴페인이란 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의식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식의 핵심은 의전이다. 스스로 에게 하는 의전. 이 의전에는 계획과 환대, 그리고 끓어오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비등점이. 열정이 최고조에 달한 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 P294

술집 ‘사슴‘을 떠올린 것은 김춘수 산문집을 읽다가였다. 바다의 표정은 파도에도 있지만 그건 너무 벅차고, 오히려 물빛에 있다고 쓰신 부분을 읽는데, 아… 술이 너무 당겼다. 이런 운치를 아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술이. 김춘수식으로 말하자면 바다의 표정을 닮은 사람과 물빛을 닮은 술집에서. 하지만 내가 아는 물빛을 닮은 술집 같은 건 없고, 바다의 표정을 닮은 사람도 없어서 참아야 했다. 그러고는 내가 꿈꾸는 술집의 이데아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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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은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도 죽음의 무거운 위엄을 상기하는 유형이었다. 죽고 나니 코와 턱, 관자놀이의 날카로운 곡선이 푹 꺼진 볼 때문에 더욱 도드라졌다. 입술 윤곽은 더 선명했고, 굳게 다문 입술 뒤로 평생 축적한 지혜가 봉인되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죽은 슬레인 경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말쑥한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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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는 이 흑맥주를 아침마다 한 잔씩 마신다.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고정된 아침 메뉴다. 소설에는 그저 ‘흑맥주‘라고 되어 있지만, 뤼베크 태생으로 뮌헨에서 오래 산 토마스 만 이 소설에 쓴 흑맥주는 튀링겐과 작센의 흑맥주인 슈바르츠 비어가 아닐까 싶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경을 마비시키며, 멍한 기분이 들게 한다면서 한스는 흑맥주를 마신다.
나는 이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좋아하는 부분을 끝없이 나열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체질에 좋다고 해도 그렇지 아침마다 맥주를 마시면 너무 나른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 P228

달기만 하면 안 된다. 달면서 시거나, 달면서 쓰거나. 아니면 달면서 진하거나, 달면서 이를 데 없는 향기가 나거나. 그래야 술이라고 생각해 왔다. ‘술이 익는다‘는 것은 여러 맛이 경쟁하고 또 화합하며 각축을 벌이는 과정이고, 술을 열었을 때 농익은 이 맛들이 액체로, 기체로 풀려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르르‘ 말이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 P240

『모비 딕』의 첫머리에 나오는, 바다로 떠나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묘사한 부분을 좋아한다. 이슈미얼은 지갑에는 거의 돈 한 푼이 없고 육지에는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없을 때 세상의 바다를 둘러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며 고래잡이 어선에 지원한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것만이 울화증을 떨치고 날뛰는 피를 잠재우는 방법이라며, 자신에게는 그것이 권총과 총알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 P255

섀클턴 위스키의 병뚜껑에는 나침반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병 뒤에는 이런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 어니스트 섀클턴". 병 앞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다. "인내심 endurance을 통해 우리는 정복할 것이다." 섀클턴 가문의 가훈이다. 섀클턴은 남극에 세 번째로 갈 때 타고 갈 배의 이름을 가훈에서 따와 ‘인듀어런스‘호로 지었다.
인듀어런스호의 ‘리츠 호텔‘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정하고, 세심하고, 헌신적으로 선원들을 위했다는 섀클턴은 갑판 사이에 있던 창고를 개조해 선실로 만들게 했는데, 그 선실이 어찌나 아늑했던지 고급 호텔의 대명사인 파리의 리츠 호텔 이름을 따서 ‘리츠‘로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아늑하고 편안하고 따뜻한 리츠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체스를 두고, 축음기로 주간 음악 감상회를 열었다. - P256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하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후의 죽음』을 읽다 보면 이런 자문자답이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사는 동안 진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감각을 계발하고 또 계발해서 완전히 향락할 수 있도록.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는 말한다. 지식과 감각을 연마함에 따라 술에서 무한한 향락을 얻을 수 있다고. 딱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게 아닌가. 신기하게도 알면 알수록 맛은 더 깊어지고, 더 깊어질수록 아는 것도 늘어나는 게 바로 술 마시는 기쁨 아니던가.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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