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요. 우리 엄마는 꿈이 뭐였대요? 저는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엄마 꿈이 뭐였는지 몰라요. 엄마를 많이 좋아하셨죠? 둘도 없는 친구셨죠? 두 분이 팔짱 끼고 같이 거리도 걷고 비밀도 나누고 그러셨죠? 저도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당장은 얘기 못하지만요. 아직 할 수 없는 얘기가 많지만요. 저도 편지 보내고 싶어요. 답장도 받고 싶어요. 명진씨, 저는 꿈이 싫어요. 저는 꿈이 중요하지 않은데 제 친구들은 꿈을 찾아가느라, 그게 너무 중요해 보여서 저를 떠나가지 말라고 말을 못했거든요. 가을바람 맞으니 외롭네요. 지금 저도 가을에 있어요. 단풍 구경은 아직 못했지만요. 바빠서는 아니고요. 사실, 단풍 구경 안 좋아해요. 그냥 그래요······ - P91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게 좋았다. 인생에 하나쯤, 사람들이 나를 먼저 찾아줄 이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인형을 그리고 나는 원하던 걸 받았다.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맞물리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인형을 그리기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사람들이 찾으면 찾을수록 잘하고 싶어졌다. - P94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거대한 숲과 집과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저렇게 큰 캔버스에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아. 아주 작은 붓으로 인형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막상 큰 그림 앞에 서면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나의 미련 같은 것들은 그냥 미련이었다고, 그렇게 후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 P94
우직하고 오래가고 싶어. 그렇게 얘기했을 때 아름은 그렇게 될 수 있어, 라고 해주지 않았다. 해든은 민첩하고 계속될 거야. 그렇게 말해주었다. 듣고 싶었던 말이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 최고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몇 년간 사진을 전공한 건 나였는데 아름의 말을 듣고야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쉰 적이 없고 그래서 민첩할 줄 알고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이우환도 권진규도 아니니까······ 그제야 좀 웃을 수 있었다. 아주 옅은 웃음 일지라도. - P108
아름은 솔직했다. 속엣말과 내뱉는 말이 일치하지 않는 걸 못 견디는 편인 것 같았다. 싫으면 싫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라고 말했다.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좋으면 좋다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했다. 그건 큰 장점이고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솔직함에 당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할 준비가 안 될 사람에게 솔직한 아름의 말은 미울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아름이 나에게 진짜 예술가 같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아름이 자신과 나를 가르는 선 같은 게 있는 듯했다. 그렇게 솔직하게는 말하지 마. 우리가 멀고 다르다고 말하지 마. 나도 안단 말이야. 나는 아름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 P112
그런데 말이야.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말을 못해도 있는 마음 같은 게 있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알아도 말하지 못하고 몰라도 비슷한 걸 말해버리는 사람도 있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건 진짜야. - P112
아름과 민아 언니를 생각하면, 그 둘 사이에 나를 끼워 생각하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테두리는 비슷한 모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두처럼 그 속을 채운 것들은 다를지라도. 서로 다른 마음이 세 개. 세 개의 마음. 나는 세 개의 마음이 어쩐지 둥그렇게 생겼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것은 맛이 다른 세 개의 만두일 수도 있지만, 가끔 그 둥근 마음으로 저글링을 하는 나를 상상한다. 마음을 던지고 받는 장면을 허공에 떠 있는 마음과 손에 쥔 마음, 던져지는 마음과 떨어지는 마음, 떠나는 마음과 돌아오는 마음······ 리듬을 잘 지키면 척척척 마음들이 순서대로 자리를 바꿔 도착하지만, 리듬이 깨지는 순간 우르르 내 품으로 떨어지는 마음 세 개. 이름이 세 개. 상상 저글링은 긴장되고 짜릿하고 어설프고 곧잘 실패하지만 연습하면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을 잘 굴리고 잘 받게 될지도 모른다. - P113
저 정물 같은 미소. 아름이 왜 얼굴을 그리다가 얼굴을 찍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사람의 심성을 닮는 듯했다. 아름은 얼굴을 자세히 보고,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고, 얼굴에 많은 걸 담고 있는 사람이다. 해든은 그런 아름을 좋아했다. 속 모를 사람이라도. 너무 신중해서 답답할 때가 있더라도. 자기가 뭘 가졌는지 모르고 내미는 손만 잡고 남의 등만 보더라도. 해든은 가끔 아름을 ‘신중하다‘고 표현하고 스스로 그 표현에 질색할 때가 있었다. 왠지 그 말의 반의어는 ‘경솔하다‘ 같고, 아름의 반대엔 자신이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건 자격지심인가. 불퉁한 마음으로 웹 국어사전에 ‘신중하다‘를 쳐보기도 했는데, 별생각 없이 검색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신중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조심스럽다‘였다. 거기에는 무게도 가치판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해든은 자신의 모난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조심스러우면 그럴 수 있지. 남의 뒤에 서 있을 수 있지. - P124
아름, 재능은 그런 한 단어가 아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포함된 단어인데, 네가 만난 사람들과 네가 다한 열심도 거기 들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했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바라는 성공에 필요한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여러 재능은 있을 거야. 그래서 재능은 항상 사후적일 거야. 되고 나야 그런저런 재능이 있었군, 하고 평가 할 수 있거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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