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요, 초사쿠 군… 당신이 다시금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만화로부터 도망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P23

"매일매일을 새롭게 태어난 기분으로 살아라."
괴테의 말입니다. - P40

"기대는 모든 고통의 원천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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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 먹고 점점 부영에게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게 되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섰다가도 내 차례가 되면 쓸쓸히 돌아서곤 했다. 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까. 갈등과 암투만을 먹고 사는 인간이. 새끼 오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못하게 된 후로 나는 술 먹고 자주 다쳤다. 낯선 고립감이 이리저리 쏠리면서 신체의 균형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다. 술에서 깨고 나면 어딘가 욱신거렸고 팔꿈치나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의 다친 마음이 뒤늦게 몸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영의 말대로 응석받이였던 나는 살아남았고 부영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정원은 어떤 응석도 없이 갔다. 그리고 정원이 떠난 지 이십 년 되는 날 밤 오래전의 내 못된 술버릇이 모조리 도졌다. - P15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 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사슴 벌레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 - P20

삼십 년 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내가 물었을 때 정원은,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사슴벌 레식 문답에 대해 심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경애는 그렇다 치고, 부영이는 왜 내 전화도 받지 않는 거니?
내가 묻는다.
부영이는 왜든 네 전화도 받지 않아. 정원이 답한다.
어떻게 네 추모 모임에도 안 오니?
어떻게든 내 추모 모임에도 안 와.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 P26

아무리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해도 추모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급격히 혼탁해지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 P34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 P35

제발 잘 살라는 부영의 마지막 말이 제발 잘 좀 살아달라고, 더 천하지는 말고, 그런 말로 읽혔다. 이제 부영과도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묻다,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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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슬레인은 제누 때문에 처음으로 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듯 멀거니 바라보았다. 원래 손은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몸처럼 생경 해 보이는 일이 잦다. 문득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손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일부인 듯 그 놀라운 움직임 을, 뇌의 명령을 받자마자 기적처럼 즉각 반응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손톱의 둥근 곡선, 피부위의 모공, 관절에 잡힌 주름, 부드러운 부분과 쪼글쪼글한 부위까지, 호기심이 동해서 찬찬히 뜯어볼 수밖에 없다. 손은 한 사람의 하인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상술에 의하면 분명 주인의 성격과도 결부 되어 있는데 말이다. - P55

레이디 슬레인은 캐리와 함께 길 모퉁이까지 걸어가서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홀로 햄스테드에 가고 있으니 자신의 노쇠함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젊음의 기운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처음이었고, 그 증거는 그녀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지언정 –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 P59

집, 특히 빈집이 얼마 나 특이한 존재인지 그들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집은 단순히 벽돌 위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구조물도, 배관을 뚫고 수평을 맞추고 문과 여닫이창을 뚫어 놓은 건물도 아니다. 집은 자기만의 생을 지니고 있다. 마치 어디선가 불어온 화합의 숨결이 네모난 벽돌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감옥 같은 벽을 무너뜨리고 온 세상에 그 내부를 내보일 때까지 머무는 듯했다. 집이란 아주 사적인 것이었다. 집에는 몰트와 기둥이 축조한 물리적 사적임과는 다른 종류의 사적임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미신 같고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 게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이 벽돌의 합이라면 인간은 원자의 합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그럼에도 인간은 영혼과 정신과 기억력과 인지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느냐고, 인간이 원자의 합 이상이라면 집도 벽돌의 합 이상인 것 아니냐고. - P66

레이디 슬레인은 다시 자신이 서 있는 빈방을, 이 집을 점령한 무례한 존재들이 마음대로 흩날리고 흔들리고 달음질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 짚 부스러기, 담쟁이덩굴, 거미 – 오랫동안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살았다. 집세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마루와 창문과 벽을 기어 다니며 가볍고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 왔다. 그것은 레이디 슬레인이 원하는 공존의 관계였다. 소란과 경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다른 사람의 야망을 찍어 누르는 상황은 지긋지긋했다. 빈집으로 흘러드는 존재들과 하나 되고 싶었다. 물론 그녀는 거미처럼 구석구석 거미줄을 치지는 않을 터다. 그저 바람이 불면 산들산들 흔들리고 햇볕 아래서 초록색으로 물들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다가, 죽음 이 그녀를 부드럽게 쫓아내고 문을 닫으면 그것으로 끝이기를 바랐다. 이런 외부의 동력이 의지를 발휘하면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만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단 이 집에 살 수 있을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 P67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중대한 사안에 대해선 같은 마음인 겁니다. 스무 살 청년의 삶이란 끔찍한 거예요, 레이디 슬레인. 장애물 경마를 앞둔 기수만큼이나 끔찍해요. 틀림없이 경쟁이라는 개울물에 처박힐 테고, 실망이라는 울타리에 걸려서 다리가 부러질 테고, 호기심이라는 철조망에 발이 묶일 테고,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장애물에 마음 끓이게 될 테니까요. 노인의 삶이란, 경기를 마친 뒤 저녁 무렵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앞으로 경마 따윈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하는 기수의 삶이지요."
"하지만 잊으신 것이 있네요, 벅트라우트 씨." 레이디 슬레인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말했다. "젊을 때는 위험하게 사는 걸 즐기면 즐겼지 – 사실 갈망하지요. – 저어하지는 않아요." - P73

그들은 뜨거운 감정을 느끼기에는, 경쟁하고 앞지르고 승리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뒤로 물러나 서 마지막 미뉴에트를 추는 쪽이 좋았다. 신사가 몸을 숙이면 그것은 오직 여성을 향한 호의와 정중함만을 의미하고, 숙녀가 부채를 부쳐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춤을 추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노년,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무엇을 표현하든 상징밖에 사용할 수 없는 시기였다. 감정이 한계를 모르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젊음의 나날들, 복잡하고 모순적인 열망들로 마음이 쪼개질 것만 같은 나날들은 끝났다. 이제는 무채색 풍경만이 남았다. 세상의 윤곽은 전과 같았으나 색깔을 잃었고, 언어가 있던 자리에는 몸짓만이 남아 있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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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를 알 수 없는 이 책은 수백, 아마도 수천 명의 손을 거쳤겠지요. 책이 수감자에게 무슨 의미였는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야만의 한가운 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자유, 문명이었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 자들의 인터뷰를 묶은 모니카 즈구스토바의 『눈 속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Vestidas para un baile en la nieve)』은 삶의 심연 속에서도 우리가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든 책을 (우리 안에) 가지고 다닌다. 절망에 대한 효과적인 응급처치로서 말이다. - P307

책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대한 역사적 재앙과 비극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준다. 어둠을 탐험한 미국 소설가 존 치버(John Cheever) 는 "우리는 문학이라는 최상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문학은 저주받은 자들의 구원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도해줬으며 절망을 이겨냈 으니,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P308

정보를 조직하는 일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그랬듯이 신기술 시대에도 근본적인 도전 과제다. 프랑스어, 카탈루냐어, 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에서 우리가 정보처리 시스템을 ordenador[컴퓨터, ordenador 는 ‘정리하다, ‘질서를 세우다‘라는 의미의 ordenar에서 파생한 단어다.–옮긴 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55년 소르본 대학의 고전언 어 교수인 자크 페레(Jaques Perret)는 프랑스 IBM 운영진에 계산에만 초점이 맞춰진 영어식 이름인 ‘컴퓨터(computer)를 대신하여 ‘컴퓨터 (ordinateur)‘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그가 말하는 ‘컴퓨터(ordinateur)‘는 (계산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데이터 정렬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글쓰기가 발명될 때부터 컴퓨팅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모험의 역사는 지식을 배치하고 보관하고 복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법의 연대기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망각과 혼란에 맞선 이 모든 진보의 경로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책의 궁전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오늘날 디지털 네트워크로 전개되고 있다. - P314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번역이라는 작업에는 신비한 면모가 있다. 폴 오스터는 『고독의 발명』에서 번역이라는 마법 같은, 거울의 장난 같은 경험에 관해 얘기한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여 생계를 꾸렸을 만큼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책상에 앉 아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영어로 옮겼다. 사실 그것은 같은 책이면 서 다른 책이다. 그렇기에 번역의 작업은 늘 놀라운 일이었다. 그에게는 모든 번역이 현기증이었으며 또 다른 자기와의 불안한 만남이었고 여러 상태가 중첩된 혼란의 순간들이었다. 오스터가 타인의 작품을 번역하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방에는 혼자가 아니라 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살아 있는 유령(종종 죽은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래서 그는 번역하는 순 간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 P315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따라 그리스인을 지도자로 대하지 않았으며 야만인을 전제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타자를 식물이나 동물처럼 대하지도 않았 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선인을 인척으로, 악인을 낯선 사람으로 여기라고 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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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호소에 응답하여 보스니아의 수도를 여행한 스페인의 시인 후안 고이티솔로(Juan Goytisolo)는 이렇게 썼다. "포탄을 발사하는 망나니 같은 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도서관이 불탔을 때, 그것은 죽음보다 더했다. 그 순간의 분노와 고통이 나를 무덤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 공격의 목적, 이 땅의 역사적 실체를 쓸어버리고 그 위에 거짓과 전설과 신화의 신전을 세우는 일은 우리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 P300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배가 고프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말하는 사람은 먼저 죽게 된다. - P304

"그 책들 하나하나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던지! 어린 시절 그 책들은 나의 유일한 문화적 기 준점이었죠. 나는 평생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의 보물이죠!"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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