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슬레인은 제누 때문에 처음으로 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듯 멀거니 바라보았다. 원래 손은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몸처럼 생경 해 보이는 일이 잦다. 문득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손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일부인 듯 그 놀라운 움직임 을, 뇌의 명령을 받자마자 기적처럼 즉각 반응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손톱의 둥근 곡선, 피부위의 모공, 관절에 잡힌 주름, 부드러운 부분과 쪼글쪼글한 부위까지, 호기심이 동해서 찬찬히 뜯어볼 수밖에 없다. 손은 한 사람의 하인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상술에 의하면 분명 주인의 성격과도 결부 되어 있는데 말이다. - P55
레이디 슬레인은 캐리와 함께 길 모퉁이까지 걸어가서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홀로 햄스테드에 가고 있으니 자신의 노쇠함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젊음의 기운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처음이었고, 그 증거는 그녀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지언정 –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 P59
집, 특히 빈집이 얼마 나 특이한 존재인지 그들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집은 단순히 벽돌 위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구조물도, 배관을 뚫고 수평을 맞추고 문과 여닫이창을 뚫어 놓은 건물도 아니다. 집은 자기만의 생을 지니고 있다. 마치 어디선가 불어온 화합의 숨결이 네모난 벽돌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감옥 같은 벽을 무너뜨리고 온 세상에 그 내부를 내보일 때까지 머무는 듯했다. 집이란 아주 사적인 것이었다. 집에는 몰트와 기둥이 축조한 물리적 사적임과는 다른 종류의 사적임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미신 같고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 게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이 벽돌의 합이라면 인간은 원자의 합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그럼에도 인간은 영혼과 정신과 기억력과 인지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느냐고, 인간이 원자의 합 이상이라면 집도 벽돌의 합 이상인 것 아니냐고. - P66
레이디 슬레인은 다시 자신이 서 있는 빈방을, 이 집을 점령한 무례한 존재들이 마음대로 흩날리고 흔들리고 달음질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 짚 부스러기, 담쟁이덩굴, 거미 – 오랫동안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살았다. 집세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마루와 창문과 벽을 기어 다니며 가볍고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 왔다. 그것은 레이디 슬레인이 원하는 공존의 관계였다. 소란과 경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다른 사람의 야망을 찍어 누르는 상황은 지긋지긋했다. 빈집으로 흘러드는 존재들과 하나 되고 싶었다. 물론 그녀는 거미처럼 구석구석 거미줄을 치지는 않을 터다. 그저 바람이 불면 산들산들 흔들리고 햇볕 아래서 초록색으로 물들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다가, 죽음 이 그녀를 부드럽게 쫓아내고 문을 닫으면 그것으로 끝이기를 바랐다. 이런 외부의 동력이 의지를 발휘하면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만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단 이 집에 살 수 있을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 P67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중대한 사안에 대해선 같은 마음인 겁니다. 스무 살 청년의 삶이란 끔찍한 거예요, 레이디 슬레인. 장애물 경마를 앞둔 기수만큼이나 끔찍해요. 틀림없이 경쟁이라는 개울물에 처박힐 테고, 실망이라는 울타리에 걸려서 다리가 부러질 테고, 호기심이라는 철조망에 발이 묶일 테고,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장애물에 마음 끓이게 될 테니까요. 노인의 삶이란, 경기를 마친 뒤 저녁 무렵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앞으로 경마 따윈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하는 기수의 삶이지요." "하지만 잊으신 것이 있네요, 벅트라우트 씨." 레이디 슬레인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말했다. "젊을 때는 위험하게 사는 걸 즐기면 즐겼지 – 사실 갈망하지요. – 저어하지는 않아요." - P73
그들은 뜨거운 감정을 느끼기에는, 경쟁하고 앞지르고 승리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뒤로 물러나 서 마지막 미뉴에트를 추는 쪽이 좋았다. 신사가 몸을 숙이면 그것은 오직 여성을 향한 호의와 정중함만을 의미하고, 숙녀가 부채를 부쳐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춤을 추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노년,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무엇을 표현하든 상징밖에 사용할 수 없는 시기였다. 감정이 한계를 모르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젊음의 나날들, 복잡하고 모순적인 열망들로 마음이 쪼개질 것만 같은 나날들은 끝났다. 이제는 무채색 풍경만이 남았다. 세상의 윤곽은 전과 같았으나 색깔을 잃었고, 언어가 있던 자리에는 몸짓만이 남아 있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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