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아침, 처음으로 마주한 내리막길에서 바람을 가로질렀다.
눈가의 눈물 방울이 귀 뒤로 흘렀다.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여름날을 생각했다.
너무나 아득해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여름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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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리자마자 나는 박수갈채가 잦아들기도 전에 휴게실로, 코린토스 양식의 대리석 기둥과 나뭇가지 모양의 크리스털 촛대, 황금테두리 거울, 벌꿀색 벽지에 자주색 양탄자가 깔린 장대한 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둥들 중 하나에 기대어 도도하고 거만해 보이려 애쓰면서 호엔펠스 가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을 보았을 때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유대인 아이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볼 때, 채 몇 분도 못 가서 내 심장에 들어박히게 될 단검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통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친구를 잃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무슨 이유로 의심이 잠으로 달래지게 놓아두는 대신 증거를 요구해야 할까? - P111

이거 봐, 콘라딘, 너도 내가 옳다는 거 분명히 알잖아. 네가 나를 너희 집 안으로 불러들인 건 부모님이 출타했을 때뿐이었다는 걸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 정말 내가 어젯밤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어.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네가 오기 전까지는 외톨이였고 네가 나를 버리면 더더욱 외톨이가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네가 나를 부끄러워해서 네 부모님께 인사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어.
나를 이해해 줘. 나는 네 부모님을 사교적으로 만나 뵙는 거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 내가 너희 집에 침입자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딱 한 번, 딱 5분만 만나 뵙게 해달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또 나는 모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외톨이가 되겠어. 나는 세상의 모든 호엔펠스집안 사람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사람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누구도 나를 모욕하게 놓아두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왕도, 왕자도, 백작도. - P115

너는 누구에게나 네 이상적인 우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너무 심하게 세워! 너는 단순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해. 내 소중한 한스,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애써 봐. 그리고 우리 계속 친구이기로 해. - P120

천천히 콘라딘이 철 대문을, 그의 세상으로부터 나를 갈라놓는 문을 닫았다. 앞으로 내가 그 경계선을 다시는 넘지 못할 것이고 호엔펠스 가문의 저택은 영원히 내게 닫히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고 그도 알았다. 그가 천천히 현관문까지 걸어 올라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불가사의하게 뒤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콘라딘이 돌아서서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같이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나의 손이 풀어 달라고 울부짖는 죄수의 손처럼 쇠창살을꽉 그러쥐었다. 부리와 발톱이 낫처럼 생긴 독수리들이 호엔펠스 가문의 방패 문장을 높이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 P121

상황이 다시는 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우정과 어린 시절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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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교육청이 2017년 7월 추진한 1차 주민토론회는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물리적 저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9월에 열린 2차 주민토론회에서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어떤 모욕도 감수하겠지만, 아이들 학교만은 포기할 수 없다‘라고 호소하며 지역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끓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자,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요? 국가인권 위원회가 2017년 9월 17일 장애인차별시정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결정문 내용을 참조할 수 있을 듯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장애인 특수학교가 지역사회 안전이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유독 특수학교만은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은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학령기 장애아동이 누려야 하는 기본권의 동등한 향유를 막는 행위"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행위는 "헌법 제11조, <교육기본법> 제4조,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의 평등 정신에 위배"된다고 밝혔습니다. 즉 지역 발전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민주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국민의 기본적 ‘인권 보다 우선시 될 수 는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 P173

그러고 보니 시설을 의미하는 영어 ‘institution‘은 또한 제도를 의미하기도 하네요. 장애인들 이 시설에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제도의 문제이지 그들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P187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 때문에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으면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 P194

최근 주목을 받는 난민의 사유는 ‘기후 난민‘ 혹은 ‘환경 난민‘ 이에요. 온난화로 인한 비정상적 기후변화, 빠르게 진행 중인 사하라 남쪽 지역의 사막화 등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엄청나게 늘고 있어요. 기후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가파르게 증가하면 머지않아 난민 협약의 난민 사유에 ‘환경‘이 추가되지 않을까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P196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그들(난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낯선 음식을 처음 먹고,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유사한 감정은 아닐까요? 하지만 종교를 악용하는 이들로 인해 공 포감이 생겼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그 종교인들을 차별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나 인종 등의 요소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차별할 경우 또 다른 인권 문제를 야기하니까요.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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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추구할 권리‘란 국가나 타인의 간섭이나 강요를 받지 않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권리를 의미 합니다. (행복할 권리‘와는 구분해야 합니다. 난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 나를 행복하게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 P151

요즘은 과거와 달리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서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하지 않도록 ‘나는 나의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남길 수 있는 제도가 생겼습니 다. 존엄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겠다는 결정도 자기운명결정권에 속하고, 이를 사회가 존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사랑과 연애, 결혼과 임신, 출산, 성행위 여부 등을 스스로 결정하는 ‘성적자기결정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P152

성적자기결정권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며,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여러 선택 지 가운데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충분 한 시간적 • 심리적 여유를 갖도록 하는 것, 혹은 취소하고 거부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을 권리이기도 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피임에 대해 정확히 알 권리,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양성애자이든 성적 지향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 등이 모두 성적자기결정권에 속합니다.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받았을 때 침해받은 이가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침해한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침해받는 일이 생긴다면 혼자 견디지 말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문제 제기를 하면 됩니다. 믿을 만한 주위 사람과 상의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등 보호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일 역시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 P155

이 글에서는 장애인이라는 말과 대비하여 장애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을 지칭할 때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상인‘이라는 용어를 무의식중에 많이 쓰지요. 정상인이라는 용어의 대칭어는 ‘비정상인‘입니다. 따라서 정상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라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일반인‘이라는 용어는 어떨까요? 국어사전 을 찾아보면 일반인이란 "1.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 2.어떤 일에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장애를 ‘특별한 지위나 신분‘이라고 우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장애인이 ‘어떤 일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 억지로 찾을 요량이 아니라면 일반인 역시 장애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쓸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장애를 지니지 않은 집단은 장애인을 먼저 정의한 후 그 정의에 해당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러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지요. 따라서 장애인이라는 경계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객관성이 확보된 용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158

권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상황은 장애인에게 전혀 좋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에 비해 여전히 네 배나 차별을 받고 있으니까요. 영국의 경우 2005년 저상버스 보급률(3월 말 기준)이 28퍼센트였 지만 불과 10년 만인 2015년에는 89퍼센트로, 2019년에는 99퍼 센트까지 끌어올리며 사실상 모든 버스를 저상버스로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영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관점의 차이죠.
저상버스는 단지 ‘장애인을 위한‘ 버스가 아닙니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도록‘ 만든 버스입니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어린이, 임산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빠와 엄마, 때로는 무거운 짐을 든 젊은 사람들까지 포함해 모두를 위한 버스라는 말이지요. 이러한 보편적 권리의 관점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접근할 때, 교통약자법 제3조 "교통약자는 (…)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는 이동권 조항은 공허한 선언이 아닌 하나의 실질적 권리로 우리 사회에 정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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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본인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고 있 다면, 단지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소외와 배제, 차별을 받아보 적이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세요. 나의 성적 지향은 이미 사람들에 게 존중받고 있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성적 지향을 존중하기 위해 애를 쓴 적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나요? - P149

국민의 기본권인 성적자기결정권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어렵게 느껴지기 도 하지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고 풀어 쓰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거예요. 성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좀 거리가 느껴지나요? 성행위나 성욕, 결혼이나 임신 같은 일은 모두 성인이 된 다음에 해야 하고 청소년 시기에는 하지 말라 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지요? 이런 말은 청소년에겐 성적자기결 정권이 없고 성인이 되어야만 갖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하지만 성적자기 결정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갖는 천부인권이고,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이므로 당연히 청소년에게도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습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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