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러운 집에서는..."
파시오나리아가 말을 꺼냈지만, 내가 가로막았다.
"‘더러운 집‘이라는 말은 잘 교육받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표현이야."
"나는 교육을 잘 받지 못했어요."
파시오나리아가 선언했다. - P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늦게 우리는 밀라노에 도착해 다시 파시오나리아와 만났다.
"정말로 착했어요."
파시오나리아를 데리고 있던 부인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파시오나리아는 우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착하지 않아. 착하게 있는 데 지쳤어. 이제는 쉬고 싶어."
그렇게 즐거운 여행은 끝났다.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직 사는 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로 난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필사적으로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심연 속의 영원함에 매력을 느껴요. 때로는 몸을 내밀고 영원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그래요. 마르게리타."
나는 말했다.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절벽 가장자리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지. ‘몸을 내밀면 위험합니다‘." - P16

"당신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어요. 특허 받은 사다리가 아닌가요?"
"그래, 특허를 받았지. 하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에는 특허가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력의 법칙만 중요할 뿐이지." 마르게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개혁과 새로운 것, 혁명적인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법석을 떨지요? 결국에는 자연의 법칙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말이에요. 혹시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오늘 당신이 떨어진 것처럼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가요?" - P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인류 사회의 그와 같은 지리적 차이점을 연구하는 이유는 어느 한 사회 형태를 다른 것들 보다 우위에 놓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고자 함이다. - P21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곳에서 최소한 4만 년 이상 살면서도 금속을 사용하 지 못하는 수렵 채집민 부족으로 남아 있었다. 반면 백인 이주민들이 똑같은 대륙에서 금속기와 식량 생산을 기반으로 문자를 이용하고 산업화 되고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까지는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고부터 1세기밖에 안 걸렸다.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대한 두 차례의 연속적인 실험으로, 주어진 환경은 동일했으며 다만 유일한 변수는 그 환경을 차지한 민족들뿐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사회와 유럽인 사회의 차이는 바로 두 민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그와 같은 인종주의적 설명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자면, 그것은 단순히 역겨울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기술적 차이에 병행하는 지능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 P22

기자들은 저자에게 한 권의 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그와 같은 문장을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 P32

문화적 요인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실제로 기술의 세계적 경향을 이해하는 일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쉽게 해준다.식량 생산으로 인하여 농경민들은 식량이 남아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농경민 사회는 식량을 생산하지 않고 기술에만 전념하는 전업 기능 전문가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 P39

나로서는 이제 독자 여러분이 역사란 결코 어느 냉소주의자가 말했던 것처럼 ‘지겨운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에는 광범위한 경향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탐구 과정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가하는 동안 벅트라우트 씨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떠안은 나이 든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디 슬레인의 한탄을 아주 의아하게 여기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레이디 슬레인이 세상의 보편적가치에 동의하지 않음을 그저 사실로서 받아들였고, 따라서 연신 세속의 가치를 강요받아야 하는 친구의 고충을 자연스 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이디 슬레인이 어렸을 때 어떤 꿈을 꾸었는지, 실제로 살아온 삶과 얼마나 다른 꿈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단순한 성격인 벅트라우트 씨였지만 –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약간 미쳤다고 생각했다. – 그에게는 그만의 명료하고 편견 없는 지혜가 있었다. 그는 규범 을 개인의 삶에 맞춰야지, 개인의 삶을 기성의 규범에 욱여넣기란 흔하기는 해도 부조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레이디 슬레인은 몸이 마비된 운동선수만큼 안타까웠다. 분명 일반적인 관점은 아니었지만, 버트라우트 씨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P196

그녀는 세상사에 초연한 노인으로서 이런 사소한 사건들을 저 먼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곱씹었고, 그러자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덩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참 피곤하고, 단편적이고, 고루하고, 허무하지." 그녀는 지팡이와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했고, 그 와중에 인생의 막바지에서 굳이 셰익스피어 말고 다른 것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 지 고민했다. 아니, 그렇게 치면 인생의 초반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생명력과 성숙함을 모두 이해하는 작가였으니까.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심오한 통찰은 나이 든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 P200

그녀가 보기에 즐거움이란 전적으로 사적인 행위이자 은밀한 농담이었고, 가드니아 꽃잎처럼 화려하고 향긋하지만 멍들기 쉬웠다. - P202

레이디 슬레인은 담담하지만 철학적인 제누의 인생사를 들으며 마음이 동했다. 그간 제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제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다니! 그러나 제누의 다부진 가슴 속에는 풍부한 경험이 깃들어 있었다. 짚단을 깔고 자다가 두들겨 맞던 푸아티에 농장에서 휘황찬란한 총독 관저와 근사한 저택으로 오게 되었으니, 극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제누의 인생에 비하면 증손주들의 인생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레이디 슬레인의 인생도 얄팍한 데다 과도하게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진정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느껴졌다. 이루지 못한 꿈에 남몰래 애태운 그녀였지만, 새로 묻은 무덤에 몸을 던진 언니를 일으켜 세운 경험은 없었다. 가만히 서서 덤덤히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제누를 바라보며, 레이디 슬레인은 자문했다. 현실이 찢어 놓은 너덜너덜한 자상, 그리고 상상이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멍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일까? - P205

지금 느끼는 기쁨은 특히나 사적이었다. 예전처럼 또렷하지는 않았다. 또렷하기보다는 뿌옇고, 강렬하지만 막연했다. 그래서 그 정체를 밝혀낼 능력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이 그저 흠뻑 취할 뿐이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인생의 황혼기, 빛이 저물어 가는 노년기에서 돌연 요동치는 청년기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강가의 갈대처럼 흔들렸고,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저 멀리 나아가다가도 어귀의 잔잔한 물결 속으로 자꾸 밀려 들었다. 젊음! 젊음!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죽음에 이토록 가까이 다가선 지금, 그녀는 또다시 자기 앞에 위험한 모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번에는 더 용감하게 직면하겠다고,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더 굳세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다짐했다. - P213

그녀가 보기에 할아버지와 전 약혼자에게 재산과 귀족 작위는 1야드, 2야드, 100야드, 아니 1마일만큼 크고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1인치, 어쩌면 0.5인치만큼 작고 보잘것없었다. - P2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