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서는 돈이나 금반지는 물론, 이니셜을 수놓은 침대 시트조차 물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낡은 침대와 울분이 전부다. 원망과 밤에 누워 자는 곳, 이 두 가지만 이 집에서 물려받을 수 있다. - P11

할머니는 포도주 한 병을 꺼내더니 잔 세 개에 따라 부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 것, 그리고 세 번째 잔은 성녀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어째 기운이 좀 없네요.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설 거지통 옆 제단에 모셔둔 젬마 성녀의 상 앞에 잔을 올렸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아 버스에 사람이 많았는지 물었다. 나하고 푸줏간 아저씨밖에 없었어.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혹시 푸줏간 주인이 물리면 독이 퍼질 것처럼 더럽고 간사한 혓바닥을 놀리며 내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마을 남자들은 죄다 간사할 뿐만 아니라 겁쟁이들 이라서 네다섯 명이 모이지 않으면 면전에서 찍소리도 못 하기 때문이다. - P17

그들의 이빨 사이에는 증오심이 음식 찌꺼기와 함께 껴 있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을에는 거짓말쟁이들과 간사한 자들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고용주, 과르디아 시빌, 기자들에게 무슨 일이든 고자질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자들이다. 칭찬이라도 받을까 싶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험담하거나 일러바치러 간다. - P23

그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나오기만을 원했으며,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지어낼수록 더 많이 출연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간절한 열망이 그들의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혀에 엉겨 붙었다. 그러자 몇 년 동안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혹은 방금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한—결과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분노가, 갈수록 더 극심한 분노가 그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유골을 꺼내기 위해 무덤을 파내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죽은 이들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주민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의 험담과 거짓말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졌을 뿐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 관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를 혐오했다. 그리고 증오했다. 카메라 앞에서 우리에 관해 떠들어대는 동안, 그들의 입천장에 눌어붙어 있던 격렬한 증오심이 터진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 P24

그건 금빛 갑옷을 입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 천칭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이 죽음 없이는 정의도 없고, 속죄 없이는 죽음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좋아했다. 반면 그 그림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대천사의 생김새가 사마귀나 나방, 메뚜기 같지 않고 너무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그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실제로 천사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세상의 모든 화가들은 협잡꾼들이었고, 나는 그들이 꾸며내는 거짓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 P27

가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평생 남을 위해 뼈 빠지게 일만 했던 저 가엾은 이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성인들과 천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렇게 가여운 사람들에게 지옥을 겪게 하는 하느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땅굴 속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것이 지옥이라면 말이다. 하기는 하느님이 죽은 그들을 이곳저곳으로 데려가지 않고 여기 남겨둔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옥이라면 이미 신물 날 정도로 겪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천국은 미사와 장례 비용을 댈 수 있는 대주교들이나 잘난 사람들로 바글바글할 텐데, 불쌍한 이들이 거기 가봐야 뭘 할 수 있겠는가. - P43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땅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수도로 떠난 터라, 가난한 이들도 이제는 땅속이 아닌 하늘 아래 판잣집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럽 나는 아버지도 그 땅굴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어머니들이 남몰래 자기 자식들을 증오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으리라. 여기 이 집에서 우리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살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죽도록 싫기 때문이리라. - P44

아버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부잣집 도련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남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의 양들을 데려다 털을 깎거나 부자들의 땅을 갈기도, 또한 그들의 자식들에게 존칭을 쓰거나 사냥에 동행해 그들 쪽으로 사냥감들을 몰아주기도 싫었다. 그는 땅굴 사람들만큼이나 자기를 고용한 주인들도 증오했다. 물론 그 이유는 정반대였다. 그가 주인들을 미워한 것은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라기 보다, 자신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P46

양들로 바글거리는 우리에서 아버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끔찍이도 원망하는 이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즉, 자기들 밑에 있는 사람 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도 힘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끈적끈적한 거품과 함께 모든 곳에 더러운 흔적을 남기는 민달팽이처럼 보잘것없이 작고 미끄러지기 쉬운 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P46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한다는 것을, 또한 남자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며 그 3분의 1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펠리사에게는 싸구려 선물이나 감언이설이 절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당초 우리 아버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사탕발림해도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자기를 볼 때마다 축 처진 가슴과 눈 밑 주름, 그리고 물러진 살밖에 안 보일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무언가를 노리는 게 없다면, 왜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남자들은 항상 무언가를 바랐다. 특히 나이가 들고 한창때가 지난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 P48

엄마는 이 집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전까지는 아침에 햇빛이 들면 바닥이 빛나고 벽도 반짝이는 그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집에 전등이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아돌피나네 집과 하라보네 집의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훔쳐보던 것 외에 전등이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등이라고 해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어진 전선에 매달린 전구 하나였다. 물론 성자들의 후광처럼 빛나는 하라보 부부의 램프나 아돌피나 자매의 집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기절한 듯, 거의 굶어 죽은 것처럼 희미한 빛을 내는 기름 등잔보다는 훨씬 좋았다. - P53

어머니는 그 여자들과 똑같이 매질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버지는 그 여자들을 모두 한곳에 감금했고, 어머니를 바로 그 집에 가두어 놓았다. 아버지는 이 집을 어머니에게 선사하기는커녕 그 안에 갇혀 살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집은 그 여자들의 몸 위에 세워졌고, 우리 어머니의 몸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의 고통과 두려움 위에서. 그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였다. - P57

사실 어머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마을에서 마당 앞까지 찾아온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상중인 과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냐고 소리치면서 그들을 쫓아버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남자도 감히 이 집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남자는 평생 한 명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어떤 여인이든 외롭고 가난에 찌들다 보면 같은 교훈을 두 번씩이나 깨우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집에서 살아온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P63

엄마는 부잣집 나리들 집에서 하녀 노릇은 절대 안 할 거라고, 그것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내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가 다른 일을 할 줄 알게 되면 더 좋은 일자리를 찾게 될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 누구도 보살피거나 뒷바라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내게 내려진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시중들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들을 시중드는 것,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우리 가족이 해야 했던 몫의 순종을 내가 모두 떠맡는 것. - P91

나는 그 집에서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9년 동안 하녀 노릇을 했다. 하라보 부부는 카르멘과 나를 잘 대해줬지만, 언뜻언뜻 무관심 속에 숨겨진 증오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였다. […] 그 증오심은 긴 역사에 걸쳐 부부의 내면에 지녀온 것이라 굳이 보여주려 애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은 분노와 반감이 아닌 무관심과 경멸의 방식으로 우리를 미워했다. - P91

하지만 가슴에 솟구치던 분노는 이미 구역질로, 괴로움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버려 할머니의 얼굴을 할퀴고 싶은 충동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왜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지 당최 모르겠어. 할머니가 말했다. 어둠의 그림자들이 왜 어떨 때는 구석의 숨소리로만 있다가 어떨 때는 짐승처럼 미쳐 날뛰는지, 그리고 왜 어떨 때는 오한과 전율로만 나타나다가 또 어떨 때는 우리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지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나무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하지만 국물이 입가로 흘러내려 턱 끝에 기름진 자국을 남겼다. 이제 할머니는 거대하고 위엄 있는 벌레가 아니라, 안쓰러우면서도 조금 혐오스럽지만 두렵지는 않은—그렇다, 결코 두렵지는 않았다 여타 할머니들이나 다름없는 노인네처럼 보일 뿐이었다. - P107

부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머지 벼룩시장에서 구한 옷을 입고 염색을 하지 않아 머리가 허연, 가난한 할머니의 손에 자기 아들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기는 그런 불행한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평생 하나도 이룬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도록 가르치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성공과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겠는가 항상 짓밟히며 살아온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남을 짓밟는 법을 가르치겠는가. - P139

어려서부터 그들의 얼굴 대신 구두를 봐야 했고 평생 그들로부터 수모를 당해야 했다면, 남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할머니의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나까지 그 집을 찾아가 비굴하게 일자리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돌볼 남자아이가 나중에 커서 우리를 무시할 또 다른 망나니로, 넓은 땅과 양조장은 물론 고작 4두로를 주고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을 권리를 물려받게 될 또 다른 후레자식으로 둔갑할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독이 오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집에서 죽은 딸의 그림자를 매일 형벌처럼 바라봐야만 했다. - P141

한참 동안 여자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떠난 다음에도, 아이를 재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웃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끊임없 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의뭉을 떠는 이들이 내는 듯한, 아무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다 들으라는 듯이 숨 죽여 낄낄거리는 그 소리는 마치 바닥에 동전을 내던지는 후작이나 사료 먹는 돼지들을 지켜보는 농부가 비웃는 소리 같았다. - P146

하지만 그들 또한 우리를 한결같이 싫어하고 혐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혐오감은 우리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를 독으로 물 들이고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다. 결국 우리는 혐오감이 아예 우리의 것이라고—사실은 그렇지 않지만—생각 하기에 이른다. - P147

나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30년 동안 괴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내 손녀가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을 때, 나는 성자들이 딸을 데려간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둘 중 누가 그랬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남자 모두 저마다 잘못이 있었고, 어느 쪽도 아직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망할 놈들은 마치 내 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갔다. 그중 하나는 그다음 해 여름 에 애인과 결혼했고 한편 다른 남자는 몇 년 후 에밀리아와 결혼했다. 그 작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식 들을 낳았다. 마치 내게서 딸을 앗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내가 그들에게서 빚을 받아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 P165

나는 부인의 기자회견을 보긴 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저 완벽하게 손질한 머리 완벽하게 칠한 매니큐어 완벽하게 다려 입은 셔츠만 보일 뿐이었다. 저 완벽함 뒤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 바퀴벌레 덫과 곰팡이 얼룩이 가득한 집에 살면서 은행 대출을 갚고 각종 납입금을 내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그녀를 완벽히 단장하는 일에 얼마나 많이 동원되어왔을까. 머리 염색을 담당하는 미용사, 매니큐어를 칠해주는 네일 관리사, 옷을 다림질해주는 상주 가정부, 오랜 세월 동안 받은 미용 시술이 만약 없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손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그녀를 돌봐준 보모들 수십 년 동안 그녀의 옷에 먼지 기름때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해 준 하녀들 정확하게 발음하도록 말을 또박또박 잘하도록 그래서 남들 앞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공들여 가르쳐 준 학교 선생님들이 아예 없었다면 기자회견에서 부인이 말하는 순간, 실성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붓고 남을 험담하고 ‘s‘라고 해야 할 곳에서 ‘j‘로 발음하고 또렷이 발음해야 할 음절을 멋대로 집어삼키면서 누군가 내 아이를 데려가버렸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아, 저 어머니에게 큰 불행이 닥쳤군요, 하면서 대강 안타까워하겠지만, 결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 P169

세상은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아이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세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런 아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아이들은 소란을 피우고 거리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샤워도 못 할 정도로 각박하게 살면서 머리도 감지 않은 채 텔레비전에 나오는가 하면 기운이 없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자식들이다. […] 사람들은 그들의 실상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사라지는 건 바로 그런 여자들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모르고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는 그런 아이들만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누가 봐도 분명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언론이 그 아이들을 금방 잊어버리고 아이들 또한 곧장 통계자료에서 하나의 숫자로 변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숫자 하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일로 슬퍼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 P171

돈은 세상 모든 것에 적당히 기름칠을 해서 그 무엇도 삐거덕거리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딱 들어맞게 하고, 아무것도 고장 나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어느 날 갑자기 멈칫거리다 멈춰 서지 않도록 모든 부품 조각들이 딸깍딸깍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가난한 이들은 결코 맞지 않아 삐걱대는 부품 조각들을 망치로 두들기며 평생을 보내지만, 부자들은 모두 피로한 기색 없이 반들반들 혈색이 좋고 차분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 집에서 깨달았다. 부잣집 여자들도 남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질투심 많고 난폭한 남자가 나타나, 숟가락으로 사각사각사 각사각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묻어버릴 구덩이를 파기 시작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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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는 언덕에 앉아 날개를 펴고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새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힘을 감지했다. - P204

"마투티넘, 마투티넘······."
라틴어로 내일이라는 뜻인데 철도 부지에 있는 기도서에서 본 글귀였다. 그 단어가 입 안의 진주처럼 그에게 박혔다. 자신의 섬에 돌아왔는데도 좀처럼 침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곳에서 낳고 자란 이 남자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집에 도착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목사에 대한 것은 물론 다른 모든 것도 다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섬은 단단한 바위이며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세상이 삐딱한 지금 이렇게 신앙심이 고조되긴 처음이고 전에 없이 어깨가 무겁게 느껴져 해안에서 돌을 내리고 페링의 강철 부분이 나무에 닿을 때까지 몇 미터 미끄러지게 놔두었다. - P212

라스는 북쪽 창 밖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다는 검고 부드러웠다. 납처럼. 타르처럼. - P237

하늘 높이 해가 뜨고 새들이 다시금 불협화음을 냈다. 온 섬에 눈이 반짝이며 흩날려서 얼룩말이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바브로는 다시 의자를 들고 나가 그물을 만들었다. 수잔은 잉그리드 옆에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잉그리드는 날이 밝자마자 아빠뿐 아니라 엄마도 영원히 떠났다는 걸 깨닫고 그 사실이 거센 바람처럼 사무쳐 참기 힘들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도 부모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부모님이 있을까 봐 눈으로 섬 이곳저곳을 살폈다. - P243

앞치마에 조개껍데기를 챙기고 수잔과 함께 집으로 걸었다. 잉그리드는 수잔을 보며 어릴 때는 조개껍데기가 돈이라 생각했고 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껍데기를 엄청나게 주워서 집과 헛간 창틀에 쭉 늘어놓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보물을 묻을 장소를 따로 찾아 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수잔을 데리고 다시 그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수잔은 이번 겨울에 네 살이 되지만 생일을 알 수 없었다. 수간과 생일과 찾지 못한 보물을 생각하면 다른 문제를 잊을 수 있었고, 그제야 섬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였다. - P244

세상에 적응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그는 단지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바뢰이섬을 발전시켜서 자신이 물려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물려 주려고 했으며, 목사는 그것이 삶의 사슬이자 법칙이라고 보았다. 어쨌든 이 말은 잉그리드가 평생 동안 바다 위 움직이지 않는 바위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은 썩어 가는 뗏목이었고, 자기 아빠가 계속 떠 있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 P257

맘베르게트 목사는 각기 다른 전략의 플러스마이너스가 조심스럽게 더해져 잉그리드가 바이를 제대로 운영하려는 황금 공식을 찾았다는 감이 왔다. 동물과 육지와 사람과 바다 사이 최적의 비율은 조심스럽게 고안된 균형 속에서 유지되어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지금 인구로 사는 그 섬이 돌아가는 것이라 목사는 미소를 지었다. - P259

잉그리드는 그걸 아빠한테 배웠다. 침묵. 기적을 부르기도 하는 침묵을. 봉투에 들어 있는 증권과 사본들. 아니, 잉그리드는 그걸 엄마에게 배웠다. 그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 P264

그 후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위기감이 느껴졌으며 범죄자가 섬에 와서 그들이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를 훔쳐 가고 그들의 삶에 오점을 남긴 뒤로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왔다. 새와 바다와 눈과 주방의 수도와 독수리가 자리 잡은 부두 창고의 지붕까지. 그녀는 바닥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동물의 심장 박동처럼 부풀었다가 수축하는 단단한 리듬이 되었다. - P265

한스는 잠시라도 떨어지는 게 싫다며 식탁에서 늘 그녀 맞은편에 앉았는 데 그게 불과 한두 해 전이라고. 그리고 마리아가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손이 말 위에 올려져 있어 그 뜨거운 살갗 아래로 근육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잉그리드는 이해한다고 대답했지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아빠가 자신이 죽을 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마리아는 몰랐을 거라고 대답하며 그는 죽어야 할 때 죽었기에 좋은 죽음이고, 다른 좋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리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다. - P269

더운 늦여름 날 갑자기 잿빛 바다안개가 지평선에서 벽처럼 일어나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고, 섬을 차례로 푸르스름한 잿빛 어둠 속에 가두고 삼켜서 모든 사람과 사물이 차가운 담요에 말려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사방이 막힘없이 보였는데 지금 그들은 양 떼는 물론 건조대나 덤불이나 등대나 바뢰이의 반짝이는 흰 집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난 풀잎만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이며 비가 오지 않는데도 온몸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 P273

바다안개는 대낮에 그 어둠을 가져와 일식으로 시야를 가렸다. 가족들은 조용히 연장을 내려놓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바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면의 빛을 밝혀서 (눈먼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남과 공유할 수도 없고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이나 파편을 살폈다. - P273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더 살아나기에 쐐기풀과 늪지와 해초와 젖은 울의 냄새가 강하게 피어오르고, 안개는 바다처럼 짜고 낯선 차가움으로 피부를 감싸고, 솜털오리조차 육지로 올라와 날개를 땅 위로 펼치고, 곤충과 동물들은 이곳 사람들처럼 침묵하여 소라 껍데기에서 들리는 소리나 죽은 쥐를 곱게 내린 눈 위로 질질 끌 때 나는 소리처럼 이상한 소리만 안개 속에서 휙휙거렸다. - P273

한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해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삶은 대구의 눈처럼 게슴츠레하게 먼 북쪽에서 나타나더니 점점 더 노란색으로 바뀌고 한층 황금빛으로 변해 마지막 남은 안개를 모조리 몰아내고 야생마처럼 사방으로 그들의 시야를 터 주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반으로 줄었지만 어쩌면 하루 안에서 새로운 날이 다시 주어진 것이라 가족들은 낫을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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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는 조용한 일이 별로 없어서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일인지 서로 물었다. 침묵은 궁금증을 불렀다. 신비롭고 스릴을 가져다주고 들을 수 없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섬을 가로지르는 검은 망토를 걸친 얼굴 없는 이방인 같았다. 침묵의 시간은 계절마다 달라서 겨울에 땅이 얼었을 땐 길게 찾아오고, 여름에는 한 차례 바람이 불고 그다음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 밀물과 썰물 사이에 잠깐 찾아들거나 인간에게 기적이 일어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바꿀 때 찾아왔다. - P105

바로 그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우리는 폭풍 전의 고요를 이야기하며 침묵이 경고 혹은 행동을 취하라는 신호라고 말하거나 한참 동안 성경을 뒤져 그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섬의 침묵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침묵에 대해 말하지 않고 강한 인상을 받아도 그 침묵을 기억하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침묵이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아주 잠시 죽음을 본 것에 불과했다. - P106

잉그리드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잘 지냈고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저 신이 나서 항상 웃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엔 세 가지 이유로 웃어서는 안 된다고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웃으면 수업에 방해가 되고, 다른 학생들도 따라 웃게 되고,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먹을 때도 웃으면 안 되었다.
잉그리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요할 때 웃지 못하게 하는 건 한쪽 다리를 빼앗는 것과 같았다. - P116

한스는 걸음을 멈추고 봄에 새끼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양을 가리키며 세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양들 사이로 걸어가 직접 세며 양들의 이름을 들었고 지금부터 그 무엇도 전과 같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한 해가 흐르면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잉그리드가 어쩌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아내는 평상시처럼 대답할 테고, 그건 아직도 그가 자기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P122

고양이 카놋과 라스가 가장 크게 슬퍼했다. 라스는 울부짖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렸다. 한스는 말이 없었다. 바브로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조용히 흐느꼈다. 마리아의 얼굴은 가뭄에 동물들이 죽을까 봐 걱정할 때처럼 굳고 핼쑥해졌다. 그리고 잉그리드는 어떤 슬픔은 자신이 아는 다른 슬픔보다 더 사무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잉그리드는 부두 창고 근처 해머로 가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 자신을 바다로 쓸어 버리고 파도가 숨을 앗아가길 바랐지만 물속에 뛰어들 기력도 없고 육지에서 끝낼 수도 없을 노릇이라 그저 온 마음을 다해 흐느꼈다. 마리아가 다가와 바위 끝에서 딸을 끌어내리며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이제 잉그리드는 라스와 페링을 타고 몰래 나간 게 어떤 행동이었는지 이해했다. 마틴은 노인이고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그 차이는 엄청났다. - P171

바위틈, 초원, 작은 만······. 이들 이방인은 자기 손등처럼 바뢰이섬 구석구석을 알았고 다시 마주하는 걸 매우 기뻐했다. 잉그리드는 모든 보물과 비밀을 안고 있는 섬 주민이 자기만이 아니며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방문객들도 한때 이곳에서 살았고 그들의 어린 시절 또한 결코 지울 수 없기에 앞으로도 남으리란 걸 알았다. - P174

잉그리드는 다시 해머로 가서 바다에 휩쓸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촌 조세핀의 무신경한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삼촌이 앞으로 넘어져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려고 했다. 눈물을 조금 쏟았지만 미소가 지어졌다. 한편 잔잔한 비처럼 밤이 찾아올 때까지 모든 질문에 대답하며 바뢰이를 낯선 도시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고, 그 너머로 엄마의 매우 낯선 모습도 계속 보게 되었다. 잉그리드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안됐다는 마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 P176

잉그리드는 왜 이렇게 두려워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섬에서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그녀를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신이 상황을 오해한 것이고, 그러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엄마가 외로워서 딸을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뇌리를 스쳤지만 잉그리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P191

잉그리드의 방 창문 너머로 바다와 섬들이 보였다. 바뢰이는 다른 섬보다 더 어둡게 보이는데 절벽이나 바위보다는 풀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매일 밤 바뢰이를 바라보며 잘 자라, 인사하고 아침에 섬을 다시 마주하지만 가끔은 분명하게 보이고 어떤 때는 그림자처럼 아른거렸다. 지금은 가을이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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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불쌍한 것은 아니야. 가난한 것은 그냥 가난한 거야. 가장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 P57

돌멩이는 장독 뚜껑을 눌러 놓는 데 쓸모가 있고, 개똥은 나무 거름을 주는 데 쓸모가 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골방철학자도 마찬가지이다. 잘 궁리해 보면 그도 반드시 뭔가 한군데쯤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짝에도‘ 라는 말은 좀 이상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정 쓸모가 없다면, 골방철학자더러 돌멩이 대신 장독 뚜껑 위에 올라가 있으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 P98

"하긴 내가 좀 남달라 보이기는 할 테지. 사람들은 특이한 사람을 때로 미친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한단다." - P101

"[…] 기침은 정말 짜증나는 거야. 사람들의 편견은 꼭 가래침 같단다. 칵 뱉어 버리고 싶지만, 목구멍에 찐득찐득 달라붙어 뱉을 수가 없지. 너는 이런 심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거야." - P102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P108

낭만은 생활을 벗어난 자리에나 존재하는 것인지. 내가 창 넓은 찻집에 앉아 비 오는 날의 낭만적 분위기를 즐기는 요즘에도, 지붕 위에서 부엌 바닥에서 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웃들이 얼마든지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 시대의 낭만이란, ‘대단히 미안한 짓거리‘이기 일쑤인 것이다. - P137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종종 느닷없는 행운이나 불행이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느닷없이 우리 삶을 뒤흔들어, 우리를 전혀 다른 존재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우리는 바로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예전의 나‘와 ‘느닷없이 바뀌어 버린 나‘—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혼란에 빠져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P143

모든 것이 갑자기 변했다. 마치 내 몸이 신비롭게 빛나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신비로운 빛 때문에 나는 예전의 평범한 소년으로는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으리란 생각마저 들곤 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남에게 주목받는 삶에는 대단히 짜릿한 즐거움이 있었다. - P151

"참 이상한 일이야. 뭔가 아쉽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하면 더욱 아쉬워지게 되거든. 그래서 때때로 악당이 되어 버리지. 공연히 트집을 잡고 공연히 화를 내고······."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야. 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속만 부글부글 끓이다가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지."
[…]
"사랑을 하면 기대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운 것도 많아지고, 그래서 공연한 투정도 부리는 건데, 상대방은 결코 그걸 이해하려 들지 않아. 단지 못된 성깔을 가졌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 P163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 주든, 한 번 떠나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 P173

—검은제비는 지금 잘 있습니까?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그만 덜컥 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만 것은 아닙니까? 무능한 아버지 대신 이번엔 무능한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울부짖고 있는 것은 혹 아닙니까? 술을 마시고 제 아버지와 똑같은 주정뱅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엇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동네 사람들한테 하염없이 하소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하여 이번엔 검은제비의 아들이 뾰족한 송곳을 나무에 꽂으며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P182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아홉 살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허영심까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므로. 그러나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맹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조차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멍텅구리들이 세상에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을. - P198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어찌 되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는 오만과 착각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월감과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 - P203

어차피 죽기 마련이라면 - P215

인간은 도대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어서, 황홀하든 끔찍하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해 저 혼자 아무리 고고하고 우아해지려 애써도, 세상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 버려두는 법이 없다. - P242

어머니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동안 숲 속에서 아주 중요한 걸 하나 배웠던 것이다.—어떤 슬픔과 고통도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회피하려 들 때 도리어 더욱 커진다는 사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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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가만히 서서 땅바닥만 쳐다보는 가족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했는데 어느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심지어 늙은 마틴조차 붉은 울 모자만 벗을 뿐 목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잉그리드의 새하얀 손을 잡았다. 손톱은 때도 없고 물어뜯은 자국도 없이 잘 다듬었고 옴폭 들어간 작은 부분마다 관절이 자리했다. 목사는 예술 작품 같은 조그만 손을 잡고 가만히 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손도 열심히 일하는 여성의 손, 힘줄이 튀어나오고 흙 때가 잔뜩 끼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남자의 손, 여기 있는 가족들의 나뭇조각처럼 투박한 손으로 변할 것을 직감했다. - P9

"넌 새로운 것만 보면 웃는구나." 그는 딸이 장난과 진심의 차이를 안다는 걸 알고 말했다. 딸은 울거나 반항하거나 거역하는 법 이 없었고 한 번도 아프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배워 나갔다. 이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만 떨쳐 버려야 한다. - P17

잉그리드는 손질한 명태를 질질 끌며 앞장서서 걸었고, 물고기에서 떨어진 마지막 핏방울이 가녀린 종아리로 흘러내렸다. 한스는 어깨에 나뭇가지 네 개를 올리고 겨드랑이에 도끼를 끼우고 손에는 딸의 마른 옷을 들고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북서쪽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서 이내 달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낫자루를 수리할지, 아니면 몇 시간 자고 다음 날 아침 로즈에이커에 이슬이 맺히기 전에 작업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이슬은 항상 이상한 붉은 풀이 자라는 로즈에이커에 가장 먼저 맺혔다. - P18

드물게 편지가 담긴 병도 발견하는데 발견할 사람에 대한 기대와 사적인 비밀이 담긴 편지는 정해진 수신인이 있는 경우 섬사람들이 그 대상에게 전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무심해져서 병을 열고 편지에 적힌 언어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내용을 살핀 다음 병 속에 담긴 메시지는 동경, 희망, 이루지 못한 삶을 전해 주는 신비로운 매개이기에 소유도 폐기도 아닌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병은 끓는 물에 소독해서 레드커런트 주스를 담거나 빈 채로 헛간 창가에 놓아두는데, 햇살이 병 속에 들어와 파랗게 빛을 내고 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 위로 반짝였다. - P21

수레가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섬의 철학자인 마리아는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다른 섬에서 온 터라 비교 대상이 있기에 이런 걸 경험, 더 나아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점은 또한 바라보는 시선 혹은 섬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정신분열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 P28

지형이 개방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니 누군가는 가문비나무나 소나무 같은 상록수를 해안가에 심어 방풍림으로 쓰고 노르웨이의 이상적인 묘목장으로 키우자는 좋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작은 가문비나무 묘목을 크기와 상관없이 섬마다 무상으로 나눠 주면서 이 나무를 땅에 심어 키우면 후대에 연료와 목재로 쓰일 거라고 말한다. 바람이 토양을 바다로 쓸어 가는 것을 막고 그 전까지는 낮이고 밤이고 늘 바람에 시달렸던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쉴 곳과 안식이 찾아울 것이다. 게다가 섬은 더 이상 지평선에 떠 있는 관자놀이처럼 보이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땅과 북쪽 선창을 닮을 것이다. 아니, 누구도 지평선을 망가뜨리는 이런 짓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평선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티가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 떨리는 시신경처럼 그 자체로 중요하다. 아니, 이 나라가 파멸의 기로에 들어서는 엄청난 부를 얻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30

모든 세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일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생각은 분명 어딘가 목적지가 있고 최악의 경우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온다. - P39

섬사람들은 카르비카의 폐허와 집 두 채가 사라진 이유를 알지못해도 여전히 폐허를 존중했다. 가족들은 발길을 피하고 아이들은 놀지 못했다. 새들도 둥지를 틀지 못했는데 흔한 솜털오리조차 그럴 수 없었다. 하물며 집을 허물어 나온 돌조차 에이커 사이의 다른 돌담과 기초벽에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새로운 돌을 찾는 편을 택했고, 그래서 폐허는 그 자리에 기념비 혹은 묘지처럼 남아 쐐기풀과 분홍바늘꽃이 무성한, 너무 춥고 또 너무 더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언덕에서 폐허를 바라보면 서로 다른 손이 쓴 한자처럼 보였다. 겨울이면 눈이 폐허 꼭대기에 쌓여 완전히 하얗게 뒤덮이기 전에 죽은 갈색 풀 위로 폐허가 한층 두드러졌다. - P39

넓은 바다라는 불길로 해가 저물 때 그들은 붉은 지평선에 드리운 숫양의 실루엣을 보았다. 바다에 떠 있는 바위처럼 생긴 뗏목에 올라탄 작은 곤충 같았다. 바람이 제 방향으로 불 때면 양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 P48

어른들의 얼굴은 돌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냉랭했다. 그들은 속삭이고 눈썹을 한일자로 모으고 웃어 보려고 했지만 가식적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아서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또한 바뢰이섬의 건물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견뎌 왔고, 그건 사실이지만 순전히 과거를 입증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한때 카르비카에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처럼. - P58

섬사람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섬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섬을 떠나 숲이나 계곡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어두운 성향이 있어 두려움이 아니라 침통함에 빠져 버리기에 그런 상황이 오면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 P58

그들은 밖으로 나 갔고 맹렬한 하늘 아래서 바람과 홍수의 강을 헤치며 남쪽으로 세 개의 돌담을 향해 걸어가 한 곳에 도착했다. 그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른 뒤 다른 돌담으로 건너갔다. 한스는 모든 장애물을 거뜬히 넘었지만 잉그리드는 숨을 쉬려면 얼굴 앞으로 손을 모아야 했다. 폭풍의 마지막 보루인 러시아 나무가 누워 있는 뒤쪽 동산에 도착하니 깜깜한 어둠 위로 솟아난 물이 벽을 만들어 그들을 향해 밀려오면서 바위와 해변과 자갈에 부딪히고 모래와 조개와 얼음을 마구 던졌다. 누구도 마주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죽음의 트럼펫 같아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음속에서 그 광경을 지워 버리는 것뿐이었다. - P59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화가 나서 한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바뢰이섬을 떠날 것도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사실 지금처럼 첫 겨울 폭풍이 삐걱거리는 벽 너머로 최후의 발악을 하면 사람들은 본모습을 잃곤 했다. 게다가 한 번 섬에 정착하면 섬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붙잡는 통에 절대 떠날 수 없었다. - P60

폭풍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한 해와 섬 생활의 외로움이 천천히 가르침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가족이 줄었고 그들은 이 섬의 수장을 잃어버린 채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거나 입을 닫거나 성질을 내고 안달을 부렸다. 게다가 로포텐은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매해 겨울 그곳에서 200명이 넘는 남자가 목숨을 잃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추정만 할 뿐이었다. 하느님의 땅인 이 해안가만큼 무덤 없는 십자가가 많은 묘지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 P73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1월이 되었다.
그렇게 석 달이 더 지났다. 서리와 눈보라와 악마의 달이.
그리고 이상하게도 새로운 희망이 가족들을 감쌌다. 희망은 검은 하늘에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1월 초에는 멍든 눈 같다가 2월이 되자 벌겋게 변했고 마침내 하늘이 밝아져 분화구 같아졌다. 그들은 신앙심 깊은 남자를 소용돌이치는 어둠 속으로 보냈고, 지금은 그가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터, 혹시나 주머니 가득 돈을 가져올지도 모르며 이는 결국 섬의 희망으로 바뀌었다. 가장이 어구와 물고기 판 돈을 받아서 돌아올 거라고 말이다. - P73

아빠이자 남편이자 오빠이자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이상한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4월 말이라 하루 종일 해가 짱짱하고 심지어 밤도 없이 오로지 아침에만 조금 어두울 뿐이고 처음으로 파릇한 풀이 오르고 어린 양들이 나타나고 솜털오리가 해안가를 뒤뚱뒤뚱 걸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만족했는데, 집을 떠났던 사람이야말로 시간이 그 자리에 멈춰 있다는 걸 깨닫고 가장 기뻐할 장본인이었다. - P74

모든 것이 잉그리드의 행복한 어린 시절 기억과 똑같을 수 없는 건 세상엔 불안이라는 불길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P75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빈곤과 전쟁이다. - P76

스웨덴 사람들은 10월 초부터 쭉 내린 비를 맞으며 떠났고, 바뢰이 가족은 헤어지는 게 슬프지만 원래 인구로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방문객을 들인 장점이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가족들만 남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섬사람들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손님이 오기 전부터 그랬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81

마틴이 해덕 줄과 미끼가 들어 있는 어업용 상자를 들고 새 보트 하우스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한스는 캔버스에 망원경을 돌돌 말아서 아버지를 뒤따랐다. 그리고 망원경을 선반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망원경은 다른 누군가가 "맞아, 그건 망원경이야."라며 다시 찾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한스는 사람의 눈이 어느 정도 이상을 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는 눈과 눈이 바라보는 사물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고, 아무튼 지금은 본토와 관련해서 가장 우울해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돈 문제는 잊어버렸다. - P86

마리아는 두건을 벗고 새 부두로 이어지는 해변을 걸으며 섬에서 바다로 겨울을 내보내는 재잘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두 발이 감각이 없어지고 하얘질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꺼내 말리고는 두건을 벗어 눈물을 닦은 다음 스타킹과 양말을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딸을 찾아 주방으로 들어갔다. 잉그리드는 할아버지 손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마틴은 흔들의자에 앉아 딸이 살아 있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는 듯 바브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 P95

바브로는 잉그리드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자기처럼 될 거라고 말했다. 그건 마음속에서 방수포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 점점 더 두렵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덧붙였다.
잉그리드는 고모를 쳐다보았다.
바브로는 배설물을 삽으로 떠서 벽에 난 구멍으로 내보내며 잉그리드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잉그리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은 그녀가 성장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잉그리드는 가을부터 다른 섬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하브스테인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지 않은 걸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섬이 너무 많았다. 빨간 점이 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잉그리드는 고모에게 팔을 두르고 절대 놓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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