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서는 돈이나 금반지는 물론, 이니셜을 수놓은 침대 시트조차 물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낡은 침대와 울분이 전부다. 원망과 밤에 누워 자는 곳, 이 두 가지만 이 집에서 물려받을 수 있다. - P11
할머니는 포도주 한 병을 꺼내더니 잔 세 개에 따라 부었다.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 것, 그리고 세 번째 잔은 성녀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어째 기운이 좀 없네요.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설 거지통 옆 제단에 모셔둔 젬마 성녀의 상 앞에 잔을 올렸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아 버스에 사람이 많았는지 물었다. 나하고 푸줏간 아저씨밖에 없었어.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혹시 푸줏간 주인이 물리면 독이 퍼질 것처럼 더럽고 간사한 혓바닥을 놀리며 내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마을 남자들은 죄다 간사할 뿐만 아니라 겁쟁이들 이라서 네다섯 명이 모이지 않으면 면전에서 찍소리도 못 하기 때문이다. - P17
그들의 이빨 사이에는 증오심이 음식 찌꺼기와 함께 껴 있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을에는 거짓말쟁이들과 간사한 자들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고용주, 과르디아 시빌, 기자들에게 무슨 일이든 고자질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자들이다. 칭찬이라도 받을까 싶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험담하거나 일러바치러 간다. - P23
그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나오기만을 원했으며,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지어낼수록 더 많이 출연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간절한 열망이 그들의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혀에 엉겨 붙었다. 그러자 몇 년 동안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혹은 방금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한—결과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분노가, 갈수록 더 극심한 분노가 그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유골을 꺼내기 위해 무덤을 파내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죽은 이들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주민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의 험담과 거짓말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졌을 뿐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 관해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를 혐오했다. 그리고 증오했다. 카메라 앞에서 우리에 관해 떠들어대는 동안, 그들의 입천장에 눌어붙어 있던 격렬한 증오심이 터진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 P24
그건 금빛 갑옷을 입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 천칭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이 죽음 없이는 정의도 없고, 속죄 없이는 죽음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좋아했다. 반면 그 그림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대천사의 생김새가 사마귀나 나방, 메뚜기 같지 않고 너무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그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실제로 천사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세상의 모든 화가들은 협잡꾼들이었고, 나는 그들이 꾸며내는 거짓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 P27
가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평생 남을 위해 뼈 빠지게 일만 했던 저 가엾은 이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성인들과 천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렇게 가여운 사람들에게 지옥을 겪게 하는 하느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땅굴 속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것이 지옥이라면 말이다. 하기는 하느님이 죽은 그들을 이곳저곳으로 데려가지 않고 여기 남겨둔 것도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옥이라면 이미 신물 날 정도로 겪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천국은 미사와 장례 비용을 댈 수 있는 대주교들이나 잘난 사람들로 바글바글할 텐데, 불쌍한 이들이 거기 가봐야 뭘 할 수 있겠는가. - P43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땅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수도로 떠난 터라, 가난한 이들도 이제는 땅속이 아닌 하늘 아래 판잣집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럽 나는 아버지도 그 땅굴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어머니들이 남몰래 자기 자식들을 증오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으리라. 여기 이 집에서 우리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살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죽도록 싫기 때문이리라. - P44
아버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부잣집 도련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남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의 양들을 데려다 털을 깎거나 부자들의 땅을 갈기도, 또한 그들의 자식들에게 존칭을 쓰거나 사냥에 동행해 그들 쪽으로 사냥감들을 몰아주기도 싫었다. 그는 땅굴 사람들만큼이나 자기를 고용한 주인들도 증오했다. 물론 그 이유는 정반대였다. 그가 주인들을 미워한 것은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라기 보다, 자신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P46
양들로 바글거리는 우리에서 아버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끔찍이도 원망하는 이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즉, 자기들 밑에 있는 사람 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도 힘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끈적끈적한 거품과 함께 모든 곳에 더러운 흔적을 남기는 민달팽이처럼 보잘것없이 작고 미끄러지기 쉬운 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P46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한다는 것을, 또한 남자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며 그 3분의 1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펠리사에게는 싸구려 선물이나 감언이설이 절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당초 우리 아버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사탕발림해도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자기를 볼 때마다 축 처진 가슴과 눈 밑 주름, 그리고 물러진 살밖에 안 보일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무언가를 노리는 게 없다면, 왜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남자들은 항상 무언가를 바랐다. 특히 나이가 들고 한창때가 지난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 P48
엄마는 이 집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전까지는 아침에 햇빛이 들면 바닥이 빛나고 벽도 반짝이는 그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집에 전등이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아돌피나네 집과 하라보네 집의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훔쳐보던 것 외에 전등이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등이라고 해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어진 전선에 매달린 전구 하나였다. 물론 성자들의 후광처럼 빛나는 하라보 부부의 램프나 아돌피나 자매의 집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기절한 듯, 거의 굶어 죽은 것처럼 희미한 빛을 내는 기름 등잔보다는 훨씬 좋았다. - P53
어머니는 그 여자들과 똑같이 매질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버지는 그 여자들을 모두 한곳에 감금했고, 어머니를 바로 그 집에 가두어 놓았다. 아버지는 이 집을 어머니에게 선사하기는커녕 그 안에 갇혀 살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집은 그 여자들의 몸 위에 세워졌고, 우리 어머니의 몸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의 고통과 두려움 위에서. 그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였다. - P57
사실 어머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마을에서 마당 앞까지 찾아온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상중인 과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냐고 소리치면서 그들을 쫓아버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남자도 감히 이 집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남자는 평생 한 명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어떤 여인이든 외롭고 가난에 찌들다 보면 같은 교훈을 두 번씩이나 깨우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집에서 살아온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P63
엄마는 부잣집 나리들 집에서 하녀 노릇은 절대 안 할 거라고, 그것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내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가 다른 일을 할 줄 알게 되면 더 좋은 일자리를 찾게 될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 누구도 보살피거나 뒷바라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내게 내려진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시중들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들을 시중드는 것,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우리 가족이 해야 했던 몫의 순종을 내가 모두 떠맡는 것. - P91
나는 그 집에서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9년 동안 하녀 노릇을 했다. 하라보 부부는 카르멘과 나를 잘 대해줬지만, 언뜻언뜻 무관심 속에 숨겨진 증오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였다. […] 그 증오심은 긴 역사에 걸쳐 부부의 내면에 지녀온 것이라 굳이 보여주려 애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은 분노와 반감이 아닌 무관심과 경멸의 방식으로 우리를 미워했다. - P91
하지만 가슴에 솟구치던 분노는 이미 구역질로, 괴로움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버려 할머니의 얼굴을 할퀴고 싶은 충동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왜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지 당최 모르겠어. 할머니가 말했다. 어둠의 그림자들이 왜 어떨 때는 구석의 숨소리로만 있다가 어떨 때는 짐승처럼 미쳐 날뛰는지, 그리고 왜 어떨 때는 오한과 전율로만 나타나다가 또 어떨 때는 우리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지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나무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하지만 국물이 입가로 흘러내려 턱 끝에 기름진 자국을 남겼다. 이제 할머니는 거대하고 위엄 있는 벌레가 아니라, 안쓰러우면서도 조금 혐오스럽지만 두렵지는 않은—그렇다, 결코 두렵지는 않았다 여타 할머니들이나 다름없는 노인네처럼 보일 뿐이었다. - P107
부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머지 벼룩시장에서 구한 옷을 입고 염색을 하지 않아 머리가 허연, 가난한 할머니의 손에 자기 아들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기는 그런 불행한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평생 하나도 이룬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여자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도록 가르치겠는가 그런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성공과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겠는가 항상 짓밟히며 살아온 여자가 무슨 수로 아이에게 남을 짓밟는 법을 가르치겠는가. - P139
어려서부터 그들의 얼굴 대신 구두를 봐야 했고 평생 그들로부터 수모를 당해야 했다면, 남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할머니의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나까지 그 집을 찾아가 비굴하게 일자리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돌볼 남자아이가 나중에 커서 우리를 무시할 또 다른 망나니로, 넓은 땅과 양조장은 물론 고작 4두로를 주고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을 권리를 물려받게 될 또 다른 후레자식으로 둔갑할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독이 오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집에서 죽은 딸의 그림자를 매일 형벌처럼 바라봐야만 했다. - P141
한참 동안 여자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떠난 다음에도, 아이를 재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웃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끊임없 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의뭉을 떠는 이들이 내는 듯한, 아무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다 들으라는 듯이 숨 죽여 낄낄거리는 그 소리는 마치 바닥에 동전을 내던지는 후작이나 사료 먹는 돼지들을 지켜보는 농부가 비웃는 소리 같았다. - P146
하지만 그들 또한 우리를 한결같이 싫어하고 혐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혐오감은 우리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를 독으로 물 들이고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다. 결국 우리는 혐오감이 아예 우리의 것이라고—사실은 그렇지 않지만—생각 하기에 이른다. - P147
나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30년 동안 괴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내 손녀가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을 때, 나는 성자들이 딸을 데려간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둘 중 누가 그랬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남자 모두 저마다 잘못이 있었고, 어느 쪽도 아직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망할 놈들은 마치 내 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갔다. 그중 하나는 그다음 해 여름 에 애인과 결혼했고 한편 다른 남자는 몇 년 후 에밀리아와 결혼했다. 그 작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식 들을 낳았다. 마치 내게서 딸을 앗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내가 그들에게서 빚을 받아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 P165
나는 부인의 기자회견을 보긴 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저 완벽하게 손질한 머리 완벽하게 칠한 매니큐어 완벽하게 다려 입은 셔츠만 보일 뿐이었다. 저 완벽함 뒤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 바퀴벌레 덫과 곰팡이 얼룩이 가득한 집에 살면서 은행 대출을 갚고 각종 납입금을 내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그녀를 완벽히 단장하는 일에 얼마나 많이 동원되어왔을까. 머리 염색을 담당하는 미용사, 매니큐어를 칠해주는 네일 관리사, 옷을 다림질해주는 상주 가정부, 오랜 세월 동안 받은 미용 시술이 만약 없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손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그녀를 돌봐준 보모들 수십 년 동안 그녀의 옷에 먼지 기름때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해 준 하녀들 정확하게 발음하도록 말을 또박또박 잘하도록 그래서 남들 앞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공들여 가르쳐 준 학교 선생님들이 아예 없었다면 기자회견에서 부인이 말하는 순간, 실성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붓고 남을 험담하고 ‘s‘라고 해야 할 곳에서 ‘j‘로 발음하고 또렷이 발음해야 할 음절을 멋대로 집어삼키면서 누군가 내 아이를 데려가버렸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아, 저 어머니에게 큰 불행이 닥쳤군요, 하면서 대강 안타까워하겠지만, 결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 P169
세상은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아이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세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런 아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아이들은 소란을 피우고 거리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샤워도 못 할 정도로 각박하게 살면서 머리도 감지 않은 채 텔레비전에 나오는가 하면 기운이 없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자식들이다. […] 사람들은 그들의 실상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사라지는 건 바로 그런 여자들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모르고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는 그런 아이들만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누가 봐도 분명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언론이 그 아이들을 금방 잊어버리고 아이들 또한 곧장 통계자료에서 하나의 숫자로 변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숫자 하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일로 슬퍼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 P171
돈은 세상 모든 것에 적당히 기름칠을 해서 그 무엇도 삐거덕거리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딱 들어맞게 하고, 아무것도 고장 나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어느 날 갑자기 멈칫거리다 멈춰 서지 않도록 모든 부품 조각들이 딸깍딸깍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가난한 이들은 결코 맞지 않아 삐걱대는 부품 조각들을 망치로 두들기며 평생을 보내지만, 부자들은 모두 피로한 기색 없이 반들반들 혈색이 좋고 차분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 집에서 깨달았다. 부잣집 여자들도 남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질투심 많고 난폭한 남자가 나타나, 숟가락으로 사각사각사 각사각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묻어버릴 구덩이를 파기 시작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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