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데, 머리카락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목 뒷부분에 장식을 단 머리카락은 갈색도 아니고 실제로 검은색도 아니지만, 햇볕에 내건 지 오래되어 빛이 바랜 깃발처럼 거무스레하고 때로는 잿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녀는 몸놀림이 느리다. 천천히 움직이지 않으면 콧등에 작은 땀방울이 솟는다. 소녀는 자기 키가 너무 커버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목을 움츠린다. 마치 자기 내면에서 들끓는 어떤 큰 힘을 그런 식으로라도 억제해야 할 것처럼 몸을 숙인다. - P9

모두들 아이들을 보러 오지만, 그렇게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는 아이들도 많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 불결하거나, 너무 키가 크고 거칠어서 거절당할 일도 없다. 그런 아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선택을 위해 짜놓은 그물망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녀도 이런 아이들에게 속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눈에 띄지 않는 소녀의 특징은 어쩐지 어떤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의 전체 모습은 걷는 모습까지 너무나 위축되어 있기 때문에 소녀의 손을 잡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헛짚기 십상이다. - P10

부모들이나 부모가 되려는 사람들이 운동장에 시선을 박고 자신의 자식들 또는 자식으로 삼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소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소녀가 그들의 시선을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남루한 부모들이나 우는 부모, 그리고 다른 부모들 중 어느 누구도, 그리고 부모가 되려는 낯선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소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소녀가 생각했던 대로다. 다른 사람들은 감옥이나 강제수용소, 정신병원 또는 군대처럼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을 탈출하려고 노력하지만 소녀는 정반대로 그처럼 울타리 쳐진 곳 가운데 하나인 아동 복지원 안으로 침입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소녀를 문밖으로 끌어내 세상 밖으로 다시 내칠 생각을 할 가능성은 없다. - P11

제일 낮은 위치야말로 제일 안전한 위치, 말하자면 어떤 요구라도 배겨낼 수 있는 바로 그런 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손에 묻은 더러운 흙을 닦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며 좀 더 흐느끼면서 더러워진 손톱을 다시 물어뜯기 시작한다. - P12

발가벗은 소녀는 나무토막을 닮아 보인다. 소녀는 몸을 펴고 샤워대 밑으로 들어가서 몸을 씻기 시작한다. 마침내 온몸을 뒤덮고 있는 때를 씻어낼 수 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한 사람의 몸에 쌓인 때를. - P15

이제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옷을 지급받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깨끗해진 것에 매혹된 상태가 되어 거울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새로운 삶 속의 자기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새 삶을 시작하는 자기 얼굴이 달라졌는지 어떤지를. 그러나 소녀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자 화장실이든 복도든 복지원 어디에도 거울은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침내 소녀는 죄라도 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 될수록 넌지시 거울 있는 곳을 물어볼 것이고, 그때 허영은 칠거지악의 하나에요, 귀부인,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 대답 속에 들어 있는 비난은 거울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거울이 어디 있느냐고 묻게 만드는 이유의 본질에 대해서 여자 사감이 깜깜무소식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래도 그러한 대꾸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이 복지원에 속속들이 스며 있는 원칙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소녀는 그런 원칙의 축조물을 바라봄으로써 빠지게 되는 상태보다 더 행복한 상태를 모른다. 그보다 더 밝고 더 아름다운 광경을 모른다. - P17

여학생들은 새로 들어온 학생이 세심하게 짜진 위계질서를 무너뜨릴 만큼 예쁘지는 않다고 한눈에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그 큰 덩치가 자리에 앉는 순간 마치 납 성분의 침전물처럼 질서의 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한 마리 걸려들었다고, 약간의 웃음거리로 삼을 만한 먹이가 입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고 기뻐했다. 자기 자리가 정해지자 같은 반 동급생들이 미소 지으며 침묵하는 것을 본 소녀는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정쩡한 태도가 8학년 중학생 학급에 자리를 얻기에 충분했다는 결론을 내려볼 용기를 가졌다. 그것도 제일 낮은 자리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소녀는 기쁨을 느꼈다. 이 순간 어디선가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제 옛날 생활은 물러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20

다른 아이들은 삶이 자신들에게 어떤 빚이 있는지를 안다. 삶은 자신들에게 자유라는 빚이 있고, 그 자유는 이 복지원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녀는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누군가를 밀어뜨릴 필요가 없다는 데 있음을 안다. - P27

소녀는 아무에게도 자기를 믿으라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의무를 지우지 않는데, 사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자기 자신의 문장들이 뱃속에 든 한 무더기의 고철같이 느껴진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 있는 텍스트로 성장하지 못한다. 소녀는 이 문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몸 밖으로 뚫고 나올까 봐 가끔 자기 몸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 P39

체육 시간을 몇 번 겪으면서 소녀가 걱정스럽게 확인한 사실은 자기가 팀을 위해 바치는 선의의 의지만으로도 벌써 힘을 너무 소비하기 때문에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의의 의지는 그 의지로써 도달해야 할 어떤 것과는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의의 의지가 족쇄처럼 몸에 달라붙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기 팀에 수치가 되지 않으려는 선의의 의지, 아니 최선의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점점 느림보가 된다. 소녀는, 내가 아마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서 그럴 거야, 난 너무 조용히 걷고 있는지도 몰라, 하고 혼잣말을 한다. - P46

다른 아이들한테 그와 같은 무결점은 배반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쩐지 노예근성 같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예들 사이에서는 누군가 자유의지로 노예처럼 처신하는 자가 있을 때만큼 치명적인 게 없다. - P52

소녀가 가지런히 옷을 쌓아두는 이유는 뒤죽박죽인, 그리고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모든 것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무질서는 적대적이고, 무질서는 이런 물건들로부터 시작한다. 물건들이 장롱 속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으니까 옷장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부패와 죽음과 혼란이다. 소녀는 그런 일을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적대적인 일들이 사방에서 밀려오건만 소녀는 옷을 가지런히 정돈함으로써 견뎌낸다. 그렇게 해서 소녀는 자기가 지켜야 할 질서보다 더 많은 것을 지켜 낸다. - P53

이런 상황은 소녀가 극히 사소한 부분이기는 해도 그 파괴적인 원칙의 한 귀퉁이를 지속적으로 빼냄으로써 질서와 무질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게 한 다음부터 그랬다. 무질서와 질서의 동시성은 소녀의 생존으로부터 재앙을 걷어가 버렸다. 이젠 아무도 소녀를 건드리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아무도 소녀를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 P53

내 삶의 무게가 늘고 있어. 나는 내 위에 호화로운 궁전을 세우는 거야. 내 궁전은 짚으로 만들었지. 그 궁전은 한 개의 닭발 위에 서 있어. 닭은 내가 직접 잡았지. 천둥 번개 치는 날이면 아직도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내 궁전을 장식해. 궁전은 화려한 불을 뿜을 거야. - P56

병실만큼 세상이 저 멀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소는 없다. 그곳은 보호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세상이 아니면 어디로부터 보호를 받는단 말인가. - P58

여기는 신체 역학을 잘 아는 직원들이 있다. 소녀의 몸은 한 무더기의 살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몸은 비정상적으로, 아니, 적대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왜, 어째서,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몸이 제멋대로 하는 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다. 감기 들거나 염증이 생겨서 통증이 와도 그렇고, 씻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해도 어쩔 수 없다. 또 감기에 걸리거나 염증이 생기지도 않고, 더러운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 몸집의 무게를 힘들게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 없다. 이런 소녀의 몸을 여기서는 별로 법석 떨지 않고 거의 완벽하게 적절히 다룬다. 그래서 소녀는 자기도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과 거의 똑같은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놓는다. 물론 예쁘게 생기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그야 순전히 외적인 결함이니까. 따라서 내면적으로는 소녀의 몸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덮친 질병도 결코 별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는 소녀의 몸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몸과 똑같이 잘 알고 똑같이 적절히 다루는 전문가들이 있다. 언제나 동일한 메커니즘이 있을 뿐이니까. - P59

진찰받을 때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그 사람이 거대한 몸집을 가졌는지, 거칠거나 못생겼는지, 어리석은지 또는 아주 바보 같은지,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징후가 아주 명백하게 감기를 암시하고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행복한 직원들, 이 행복한 전문의들, 오직 그들만이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언제나 완전히 자기 자신만을 의지한 채, 도대체 그 목적도 모르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는 큰 책임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 P61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속에 사는 미세한 기생충들이 이제 멱살 잡힌다는 생각만 하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이 야비한 탐식의 전형들. 눈에 보이지 않고 우글거리는 더러운 것들, 그놈들이 이제 추격당한다. 깨물고 썩히고 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추격당하는 것이다. 소녀는 감기약으로 처방받은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나면 다른 할 일이 없다. 이제 뱃속에 살아 있는 놈들이 멱살 잡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냥 누워 있을 뿐이다. - P63

사람들은 우선 당당한 인상을 주는 외모를 보고 몸속도 당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몸이 그렇게 불어난 것은 거대한 식욕을 가진 소녀의 몸이 과다하게 공급한 영양소들을 용도에 알맞게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몸은 안으로 들여보내는 모든 것들을 무턱대고 쌓아둔다는 인상을 받는다. 마치 이 몸은 유일하고 거대한 맹목적인 축적이라도 되는 듯, 잘못 전달된 인색한 선물이라도 다시 내놓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 처리 지침이 없는 자재 창고와 같다. 사람들은 소녀가 부패한 덩어리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살아 있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또한 어딘지 모르게 죽은 덩어리. - P67

앞서 말한 것처럼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고, 게다가 가장 따뜻한 자리다. 그렇기는 해도 병이 나면 뭔가 싫은 것, 좀 괴로운 것은 있다. 그것은 병을 통해서 생기는 일상의 단절이며, 자주 병이 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되는 특수한 지위다. 소녀는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그토록 자주 병이 나는 것,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병이 나는 것에 대한 수치심,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소녀한테는 더 본래적인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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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실은 입사한 지 여드레째부터 편집회의에 참여했다. 우민정책 차원에서 1층과 자료실의 개미들도 참여시키는, 진정한 벌들의 회의였다. 벌들이 이미 거론되고 또 거론된 아이디어들을 반추하며 붕붕거렸다. 루실은 두 시간 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롬의 라이벌의 판매부수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전반적인 지향점 속에서, 아첨과 오만과 근엄함과 치졸이 현란하게 뒤섞이며 가속화되는 이 인간희극을 목도했다. 그중 오직 세 남자만이 어리석은 말을 내뱉지 않았다. 첫 번째 남자는 시종일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남자는 국장이었기 때문이며, 세 번째 남자는 그나마 가장 똑똑해 보였기 때문이다. 루실은 앙투안에게 이 회의를 영웅서사시로 부풀려 들려주었고, 앙투안은 한참을 낄낄거리고 나서, 그녀가 과장하는 경향이 있고 모든 걸 나쁘게만 본다고 지적했다. - P209

그녀는 저녁 6시나 때로는 8시엔, 헛되이 택시를 잡다가 결국 포기하고서 지하철을 탔고, 자리다툼 따위는 혐오했던지라 집에 가는 내내 서있기 일쑤였다. 같은 열차 칸에 탄 사람들의 지치고 근심어리고 넋 나간 얼굴을 볼 때면 분노로 울컥 했는데 그들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한테는 그 모든 것이 곧 깨어날 한낱 악몽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 P210

루실은 칵테일을 두 잔재 주문하고는 검토할 서류를 펼쳐 들었으나, 2분 남짓 훑다가 하품을 하면서 서류를 덮어버렸다. 서류에 세 줄 정도 기사를 덧붙여봐도 좋고, 데스크의 마음에 들면 발행될 수도 있다는 언질을 들은 터였는데도 말이다.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하물며 잠시 뒤에 다시 그 잿빛 사무실로 들어가 사유하는 자, 혹은 실천하는 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활동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형편없는 연기였고, 형편없는 연극이었다. 혹여 앙투안이 옳았고 그녀가 공연 중인 이 연극이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라면, 그녀의 역할이 형편없거나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인 역할이리라. 앙투안이 틀렸다. 루실은 이제 칵테일의 강렬한 빛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때로 알코올은 가차없고 결정적인 투광기가 되기도 하는데, 이 투광기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기 위해 매일 자신에게 했던 수천 가지 거짓말들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불행했고, 그것은 부당했다. 스스로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엄습해왔다. - P211

그렇게 종업원은 그녀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고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안녕하세요", "갈게요" 같은 인사말만 겨우 던지던 그녀를 누군가 좋아해주었던 것이다. 순간 루실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알코올은 사람을 냉철하게 만드는 만큼 감상적으로도 만든다는 걸 잊었다. - P212

루실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뒤, 오전에 앙투안에게 빌린 책을 가만히 펼쳤다.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였다. 운명이 그녀를 속히 해리의 독백으로 이끌었다.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적,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 P212

이래저래 그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 기보다는 앙투안에게 거짓말하는 편을 택했다.
루실은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보름을 보냈다. 파리와 게으름과 이 게으름을 남용하는 데 필수적인 돈을 되찾았다. 그녀는 늘 이끌던 삶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번엔 몰래. 마치 수업을 빼먹는 기분으로 그녀의 가장 단순한 기쁨은 배가 되었다. - P214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만큼 거짓말을 지어냈고, 그런 만큼 행복했으며, 이 행복을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 하지만 이 위협은 루실의 현재의 나날에 외려 돌발적인 맛을 제공 했다. 그녀는 앙투안의 넥타이며 예술 서적이며 음반을 구입했고, 앙투안에게는 가불을 받았다거나 원고료든 다른 무엇이든 받았다고 둘러댔다. 그녀는 명랑했고, 앙투안은 그녀의 명랑함에 휩쓸렸다. 목걸이 가격으로 그녀에겐 두 달이 보장되었다. 게으르고 호사스럽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두 달, 두 달간의 행복이. - P215

청소년에게, 타인들과 미래와 종종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오래되고 은근한 거짓말보다 더 멋진 기억이 무엇이겠는가? 루실은 필시 재앙이 될 미래, 앙투안의 분노를 유발하고, 신뢰를 잃고, 그 둘 모두 그녀가 그가 제안한 이 정상적이고 안정적이며 비교적 쉬운 이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서, 스스로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잠정적으로 숨기는 것이 이 상황을 만회하려는 의지를 의미하는 건 전혀 아니라는 걸 정확히 인식했다. 그녀 안에는 끔찍하리만치 확고한 무엇이 있었으나, 그녀도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 P216

무기력한 사람들의 분노에는 끈질기고 고통스러운 데가 있었다. 희생자보다 사형집행인이 더 고통스러운. - P220

많은 사람들이 다 듣지 않고 암시만으로 이해한 것을 잊지만, 완전한 침묵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부조리한 걸 의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잊는다. - P227

그녀는 오직 앙투안만을, 행복하고 금발이고 황금색 눈빛이고 자유롭게 그녀를 떠날 수 있는 앙투안만을 원했다. 이것은 아마 그녀가 유일하게 정직한 부분일 터였다. 모든 책임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 - P226

그들은 싸늘했고, 서로에게 몸이 닿는 걸 피했다. 이 넓은 침대에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기분이었다. 고독한 저녁 시간, 궁핍한 경제 사정,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보였다. 화염의 바다 속에서 원자폭탄이 발사되는 것이 보였다. 힘겹고 적대적인 미래가 보였고, 서로가 없는 삶이, 사랑 없는 삶이 보였다. - P236

"태양, 해변, 한가로움, 자유··· 이게 우리가 누릴 것들이야, 앙투안.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그게 우리의 정신에, 피부에 뿌리 박힌 걸. 어쩌면 우린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은 척할 때, 더 타락했다는 기분을 느껴." - P239

루실은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의 색깔에 대해, 나아가 외모에 대해 말해준 것이 실로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앙투안은 분명 자신의 욕망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리라고 믿었으리라. 어쨌든 마주 앉은 이 성숙한 남자가 그녀를 당장 이룰 수 있는 욕망으로서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대상으로서 응시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 P246

그들은 저녁 8시 30분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가 집에서"라고 장소를 말했을 때, 루실은 푸아티에 가의 원룸은 단 한순간이라도 떠올리지 않았다. 푸아티에 가에 있는 건 방이었다. 그건 집이 아니었고, 집이었던 적도 없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 뒤얽힌 천국이었을지라도. - P248

루이즈 웨르마가 하프에서 조용히 뽑아내는 첫 소절에 루실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음악은 점점 더 애잔해질 터였다. 루실은 그걸 알았다. 점점 더 애절해질 것이고, 점점 더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걸. 행복하고 싶고 친절하고 싶었는데, 두 남자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더는 알 수 없었던 사람에게는 비인간적인 음악이었다. 노부인은 이제 더는 미소를 짓지 않았고, 하프 소리는 극도로 잔인해져서 루실은 그만 손을 뻗쳐 잡히는 사람의, 다시 말해 샤를의 손을 덥석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손, 이 온기는 물론 일시적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였고 이 살과의 접촉, 이것만이 그녀와 죽음 사이에, 그녀와 고독 사이에, 그녀와 저쪽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놓인 전부였다. - P251

이제 밤에 그들이 벌이는 건 사랑의 행위라기보다는 투쟁이었다. 상대의 쾌락을 연장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참고해왔던 학문은 점차로 보다 빨리 끝내기 위한 노골적 인 기술이 되어버렸다. 권태가 아닌 두려움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신음에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그들은 예전엔 경탄이 먼저였다는 것을 잊었다. - P253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것도 그렇게 자유로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서로를 결정적으로 상처 입히지 않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 P254

그녀는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삶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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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무위에 지쳐 우울과 위기감을 느끼는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직장이 출판사나 의상실이나 신문사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바닥을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여자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저 정신 나간 시레가 루실에게 일을 시키고 월급도 줄 기세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오직 무위뿐이었는데 말이다. 삶은 어리석었다. - P205

그는 남자들 특유의 아름다운 낙관으로, 루실이 한 달에 두 벌 정도의 원피스는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연히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들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몸매가 좋은 만큼 완벽하게 어울릴 게 분명했다. 또한 택시를 탈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도 만나고, 정치며 세상 전반에, 그리고 다른 것에 조금은 관심을 가질지도 몰랐다. 물론 퇴근했을 때 자기 소굴에서 웅크리고 있는 짐승 같은 그녀, 오직 독서와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그녀가 없는 것은 아쉽겠지만, 한편으로는 희미한 안도감이 느껴질 터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현재만을 살며 미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정체된 삶에 경악하고, 나아가 어렴풋한 분노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그도 인테리어의 일부, 한 요소일 뿐이고, 언제든 상황이 변하면 필시, 가차없이 불태워질 것만 같았다고 할까. - P206

루실은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좋아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녀는 이미 앙투안에게서 가학적인 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무고하고도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루실은 정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가 테이블 건너에서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충동적이고 다정했던지 루실은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와 볼을 맞댄 채 미소 지었고, 그들은 함께 그녀를 어처구니없어하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것에 안도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어렴풋한 원망을 품었다. - P207

앙투안에게 디올 드레스는 30만 프랑이고, 그녀는 지하철이라면 질색이며, 구내식당이라는 말만으로도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루실은 자신이 본질적이고 극단적인 속물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문득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돌아보자, 그에게 미소를 되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들처럼 주먹구구식 셈을 했고, 장관들처럼 예산을 짰다. 그는 흔히 남자들이 즐기듯 숫자놀음을 했다. 상관 없었다. 어쨌든 창안자가 앙투안인 이상, 그녀의 삶도 이 공상적인 등식에 맞춰야 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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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사이엔, 심지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순간에도, 불안하고 난폭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더러 이 불안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혹여 그들 중 누군가의 가슴에서 이 불안감이 사라진다면 그건 동시에 사랑도 사라졌다는 의미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인식했다. - P186

상대의 진실만큼이나 꾸민 모습, 나아가 반 거짓말까지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 보고 좋아하는 사랑의 단계였다. 상대가 그런 모습까지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신뢰의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 P189

앙투안은 이따금 의문스런 눈초리로 루실을 힐끔거렸다. 루실의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행복할 수 있는 재능 – 그토록 텅 비고, 무위하고, 그날이 그날인 날들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이 그에게는 때로 괴이하다 못해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다. 앙투안은 루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렇듯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런 끝도 없는 무위를 루실에 대한 열정으로 견디는 것과 달리, 루실에게는 이런 삶의 방식이 그녀의 뿌리 깊은 천성에 보다 근접해있으리라고 느꼈다. 마치 불가해한 짐승, 처음 보는 식물, 만드라고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 P192

그들은 점차로 서로의 몸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으로 거의 학술을 정립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오류가 많은 학술이었다. 상대의 쾌락을 배려하는 데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자신의 쾌락 앞에서 무력하고 허술해지며 흐지부지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난 30년간 서로를 모른 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걸 믿기지 않아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며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93

그렇게 꿈처럼 8월이 흘렀다. […] 거리엔 가느다란 빗줄기가 힘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앙투안은 빗물이 미지근하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눈을 뜬 채로 조용히 울고 있는 루실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짭짜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실이나 구름에게 이 눈물의 이유를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여름이 끝났고, 그것은 그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P193

돈의 유일한 매력이라면 바로 이 모든 걸 피하게 해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 짜증, 그리고 다른 것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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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소유했으나, 인간으로서는 완벽하게 놓쳤다. 물론 그들은 함께 웃었고, 웃음은 사랑의 고유한 특성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프레카틀랑에서 눈물이 차오른 루실의 눈을 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를 엄습했던 그 기이한 향수를 되새기면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그녀가 그와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그에게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을 터였다. 떠나버렸으므로. - P170

어떻게 두 달 동안 둘이서 그토록 행복했으면서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떻게 그토록 비관적이고 이기적이고 분별없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후회했고, 그래서 몰래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보름 동안 그녀 생각만 했는데도, 정작 그녀는 그가 자기를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그, 앙투안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 때문에 불행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속히 그녀를 찾으러 가야 했다.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하리라. 그녀를 품에 안고서 용서를 구하고, 몇 시간이고 키스하리라. - P172

칸 역에 도착 하니 침대칸이 남아있었다. 밤새, 그들의 뒤엉킨 얼굴들 위로 열차의 울부짖음과 조명 빛들이 어른거렸다. 더러 열차가 철컹거리며 기차역에 정차할 때면, 철도원이 쇠막대로 바퀴 상태를, 파리로 향하는 그들의 여로를, 그들의 운명을 점검했다. 속력은 그들의 쾌락을 증폭시켰다. 열차가 미친 듯 질주하면, 고이 잠든 벌판에 대고 이따금 격렬한 신음을 쏟아내는 건 바로 그들이었다. - P177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할 줄. 또한 그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완벽할 줄. 모든 것이 그녀가 짐작하던 대로 전개되었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절망감이 그녀 안에서 그에게 사랑받았다는 희미한 자부심과 뒤섞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이렇게, 이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는데··· - P181

루실은 신비롭고 기이한 병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렇게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비판적인 두 존재가 그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그 지경으로 단단히 밀착되어서,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기에 단지 ‘사랑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그녀는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충만함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실은 언젠가, 어느 훗날엔, 이 충만함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행복했고, 두려웠다. - P184

두 사람은 어긋나고 위태했던 공동의 과거 속을 달렸던 반면, 평화롭고 영구적일 수 있을 공동의 미래를 꿈꾸지는 않았다. 루실은 계획들과 평범한 삶을 앙투안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홀린 사람들처럼, 펼쳐지는 현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이 서로에 대한 허기가 충족되지 않은 채 한 침대에 누운 그들을 비추며 바라보았고, 저녁이면 지는 태양이 열기가 가신 부드럽고 비할 데 없는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순간 그들은 지극히 행복해서, 더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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