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어때야 집이지? 뼈, 풀, 열기로 가장 자리가 표백된 하늘—익숙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옛날 책을 넘겨 볼 때처럼 페이지가 뒤죽박죽이고 색이 햇빛과 세월에 바래고 이야기는 기억과 다르다. 그래서 매일 아침이 익숙하면서도 뜻밖이다. 연기 나는 탄광, 교차로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마을과 빈둥거리는 두 소년, 흰 뼈, 온통 재로 변한 마을에 남아 있는 호랑이 발자국, 키가 크고 작은 두 여자아이가 서 있는 다른 교차로, 말라붙은 개울, 다른 교차로, 한숨을 쉬는 풀이 있는 언덕, 검게 변했으나 여전히 흐르는 개울, 노래하는 풀이 있는, 무언가 다른 게 묻혀 있을지 모르는 둔덕, 파헤쳐진 흙 위에 들꽃이 피는 탄광,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술집, 또 다른 아침, 또 다른 밤, 또 다른 정오에 흘러내려 가늘게 뜬 눈을 따갑게 만드는 땀,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새벽에 울부짖는 풀밭 위 무언가 다른 게 묻혀 있을지 모르는 표식 없는 둔덕에서 속삭이는 듯한 바람,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교차로, 금, 풀, 풀, 풀, 금, 풀, 금— - P314
둘은 느릿느릿 큰 바다 건너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긴 게임의 끝에서 자기 패를 보여 주는 포커 플레이어처럼 잔뜩 긴장한 채로. 루시는 말할 상대가 바람과 풀밖에 없는 그들 땅에 머물고 싶다. 샘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거리를 누비고 생선을 맛보고 상인과 흥정하고 싶다. 눈길 받는 게 지겹지 않아? / 거기에 가면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게 아닐 거야. 나를 제대로 볼 거야. - P317
루시는 말에서 내리고, 욕을 하며 땀을 흘리는 샘을 언덕 꼭대기로 끌고 간다. 샘에게 위를 보라고 한다. 구름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맴돌기 시작한다. 전에 루시는 길을 잃을까 겁나면 하늘을 보라고 배웠다. 지금 루시는 샘에게 하늘에서 아름다움을 보라고 가르친다. 샘의 짜증이 경이감으로 바뀌면서 땅도 달라진다. 같지만 달라진다. - P318
어쩌면 이동 속도가 빨라진 게 루시가 사랑을 닮은 슬픔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메마른 누런 언덕이 고통과 땀과 헛된 희망밖에는 안겨 주지 않았음에도—이 언덕을 아니까. 루시의 일부가 거기 묻혀 있고 일부가 그 안에서 사라졌고 일부가 그 안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졌다. 너무 많은 부분이 이 땅에 속한다. 탐사봉이 이끌리는 것처럼 가슴이 아픔에 끌린다. 큰 바다 건너 사람들은 그들과 닮았을 테지만 그들은 이 언덕의 형상, 풀이 쏴 우는 소리, 흙탕물의 맛을 모른다. 눈과 코가 외면을 이루듯 루시의 내면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을, 어쩌면 이동 속도가 빨라진 게 루시가 이미 이 땅을 잃을 일을 애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시에게는 샘이 있으니까. - P318
루시는 나중에—말[言]이 그렇게 위험스럽지 않을 때, 말이 샘을 불안에 떨게 만들지 않을 때—묻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왜 그렇게 경계하며 사냐고. 질문은 배에 올라타 주위 사방에 대양이 펼쳐질 때까지, 새로운 언어, 자기들을 다치게 하지 않은 언어를 배울 시간이 얼마든지 있을 때까지 미뤄도 된다. - P319
나중에 루시는 서쪽 끝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다. 바다가 살아날 때가, 안개가 등대 불빛을 감출 때가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언덕이 치명적일 때가 있다. 이 도시에 언덕 일곱 개가 있는데 몇 해마다 한 번씩 개가 벼룩을 떨어내듯 부르르 집을 떨군다. 나중에 루시는 저 아래 파도 거품 안에 버펄로 뼈보다 훨씬 더 많은 뼈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중에 루시는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P322
안개가 두 사람을 둘러싼다. 바람의 축축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훑는다. 낮은 땅이 웅얼거리며 옛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단편을 기억한다. 571이라고 적힌 집, 구슬 하나가 반짝이는 나무 그루터기, 파란 벽 앞의 노란 꽃. 금이 간 문, 굶주린 고양이 울음. 대기 중인 마차에서 고개를 푹 박고 자는 마부. 불이 켜진 창문에 맺힌 물방울. 도망가는 아이의 발목. - P323
루시는 예쁜 액자 속 여자들에게 걸어간다. 여자들이 여전히 꿈쩍도 않자, 루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치맛자락을 잡는다. 천 찢어지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비명보다 더 요란하다. 아름다운 얼굴들이 루시를 돌아본다. 숙련된 고요함이 처음으로 깨진다. 분노가, 그리고 모욕, 두려움, 재미, 경멸이 루시를 향한다. 이 여자들은 루시가 들어왔을 때 루시를 쳐다보고 꿰뚫어 봤다. 루시는 오는 길에 샘이 한 말을 생각한다. 쳐다보는 것과 진짜로 보는 것의 차이. - P327
"내가 선생님처럼 질문 하나 해도 될까—아까 우리 애들이 이야기 같다고 했었잖아. 왜 그렇게 말했지?" "텅 비어 있어요." 루시가 파란 책을 보며 말한다. 대답이 엘스크 마음에 든다면 그 책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루시는 움직임이 없는 얼굴, 저마다 다르지만 완벽히 똑같은 여자들을 생각 한다. "종이가 생각나요." 아니면 맑은 물.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이따금 보았던 표정. - P330
"바오베이." 루시가 말을 꺼내다가 멈춘다. 지금은 다정한 말을 나눌 때가 아니다. 묵은 상처를 건드릴 때도 아니다. 루시는 딱딱한 빵을 찢는다. 빵을 뜯다가 껍질 조각이 손톱 아래로 파고든다. "전에 있었던 일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우리가 바다를 건너가면, 그러면 마치 마치—" 오래된 약속이 루시의 입을 가득 채운다. 달콤하고 씁쓸하다. "꿈 같을 거야. 거기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은 다 꿈이 될 거야." - P335
기억나는 가장 슬픈 일을 떠올려 봐. 나한테 말하지는 말고. 몸 안에 담아 둬, 루시 걸. 그게 자라게 해. 도박꾼들 사이에서 루시는 그렇게 한다. 루시의 어깨에 얹힌 샘의 손이 샘이 지닌 슬픔의 무게까지 더한다. 그들은 탐광꾼의 자식들이다. 어디에 있는지 느껴 봐, 루시. 그냥 느껴. […] 그 밤이 끝날 무렵 작은 돈 무더기가 생긴다. 앞으로 올 힘겨운 날에 루시는 이걸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하룻밤 동안은, 둘이서 언덕에 금이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 P337
샘은 고집이 세다. 대답을 안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눈으로 루시를 쳐다볼 뿐. 스위트워터에서 샘이 했던 질문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운다. 외로울 때 없어? 지금껏 내내 루시는 샘이 이기적이라고 했다. 지금 보니 자신밖에 보지 못한 사람은 루시였다. 루시는 같은 걸 샘에게 묻지 않았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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