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막무가내로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희망은 마치 눈먼 두더지처럼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서 제멋대로 굴고 있다. 그 어리석은 두더지를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이놈과 나에게 마지막 일격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눈먼 두더지는 우리 둘이 죽어가기 전에야 인정할 것이다. 내가 그의 고집스러움에 어떤 승리감도 안겨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그렇지만 두더지도 제정신은 아니니 내가 그의 버릇을 고쳐줄 수 있다면 기뻐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 P104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덥석 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많은 의무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장부였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여장부 타입은 아니었고, 평범한 이성을 가진, 과중한 짐을 지고 고통받는 여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들에게 적대적이며 낯설고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살고 있던 사회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항상 알 수 없는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 P113

그 밖에도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개울가에 피어 있는 꽃 이름 하나도 모른다. 과학시간에 책과 그림을 통해서 배웠겠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학도 몇 년 배웠지만 그런 것은 어디다 쓰는 건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 외국어는 쉽게 배웠지만 그걸 써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했고, 맞춤법과 문법도 고스란히 잊어버렸다. 카를 6세가 언제 살았는지, 서인도제도가 어디에 있으며 거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우등생이었다. 모르겠다. 우리 교육제도에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면 이 시대의 정신박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 P114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내게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나는 기회를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초반의 인생에서 어중간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곳 산속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교사는 꼭 나만큼 무지하고 무식하다. 그 교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 P114

나를 이렇게 염려해주는 개의 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개는 젖은 발로 내 가슴에 뛰어오르면서 신이 나서 크게 짖었다. 룩스에게는 강하고 쾌활한 주인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삶의 의욕에서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개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즐거운 척해야 할 때도 많았다. 비록 내가 그에게 그다지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개는 내가 얼마만큼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P131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에 점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아무 계획 없이 살아온 것이 사실 내 탓은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관철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던 것뿐이다. 내가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내 계획을 수포로 돌리는 누군가가 나타나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여기, 산속에는 내 계획을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계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 내가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 P135

이상하게도 나는 일을 다 끝낸 뒤의 기쁨 같은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한 가지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새 일거리를 생각했다. 별로 많이 쉬지 않았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몸이 괴로울 정도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편안하게 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마침내 벤치에 앉게 되면 금방 불안해져서 새 일거리를 찾았다. 내가 유난히 부지런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천성적으로 게으른 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방어 본능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쉬고 있으면 자꾸 지난 일을 생각하게 되고 잡념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내게 남은 선택은 계속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 P136

동굴에 대한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흙과 석회석이 걸러진 아주 깨끗하고 맑은 물이 땅 밑에 고이고 있을 것이다. 동굴에는 동굴 뱀과 하얀 장님 물고기 같은 동물들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커다란 종유석 동굴 안, 맑은 물속에서 끝없이 빙빙 도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물이 찰랑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적막한 곳이 있을까? 내가 그런 물고기들을 보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굴에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동굴은 굉장히 매력적인 동시에 무시무시하다. - P141

소는 어떻게 혼자 이 침울한 외양간 속에서 밤낮 참으며 서 있는 것일까. 나는 벨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소도 이따금 꿈은 꾸겠지. 햇볕이 등에 내리쬐고 맛있는 풀을 뜯고 송아지가 달려와 따스한 몸을 비비던 일, 그 다정함과 지난겨울 주고받았던 끝없는 침묵의 대화들에 대한 꿈을. 꿈속의 송아지는 건초더미 안에서 뒹군다. 친근한 숨결을 콧구멍으로 내보낸다.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이 소의 무거운 몸에서 피어올랐다가 흐르는 피를 타고 다시 가라앉는다. 소는 그런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매일 아침 소의 얼굴을 쓰다듬고 말을 걸면서 내 얼굴을 향한 소의 촉촉하고 커다란 눈을 들여다볼 뿐이다. - P144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지금도 두렵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151

숲속 생활에서 나에게 지루함을 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묵은 신문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갇히기 전에도 나는 신문들을 볼 때마다 지루해했을지 모른다. 다만 언제나 따라다니던 그 희미한 불쾌감이 지루함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나의 가여운 딸들도 지루함을 참지 못해 단 10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지루함에 마비되어 있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의 끝없는 파동과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은 없다. 벽 역시 고통받던 한 인간의 절망적인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다. 부서져야만 했던 한 인간. 부서지지 않으면 미치고 말 한 인간의 몸부림. - P151

산속에서의 생활은 개에게 흥밋거리들을 많이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태양, 비, 바람, 소나기, 이 모든 것이 룩스를 신나게 했다. 룩스가 곁에 있으면 오래 슬픔에 잠길 겨를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그를 그토록 행복하게 하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야생에서 자란 개들이 모두 그렇게 행복하고 밝은 성격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개에게 그런 능력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왜 우리가 개에게 그런 묘약 같은 존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의 과대망상증은 아마도 이런 개들이 키워준 것일지 모른다. 내가 던지는 눈길 한 번에 룩스가 기뻐 날뛰는 것을 볼 때면 내가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된 착각에 빠진다. 물론 나한테 특별한 것이라곤 없다. 다른 개들과 마찬가지로 룩스도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 P161

아무리 다른 모습을 떠 올려보려고 해도 바뀌지 않는다. 머릿속의 그림들을 억지로 지우려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단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 P171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내키는 대로 사는 만큼의 대가는 누구나 치러야 하는 법이다. - P172

산속에서 정당한 일과 부당한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오직 나만이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벗어던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었다.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뿐이다. - P177

나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순간이 무서웠다. 저녁 내내 이 두려움이 나와 함께 탁자에 앉아 있었다. […] 나 혼자 카드를 앞에 두고 무서움을 견디며 앉아 있었다. 매일 잠을 자긴 자야 했다. 너무 지쳐 탁자 아래로 몸이 쓰러질 것 같다가도 막상 침대에 누우면 어둠과 적막 속에서 잠이 달아 나곤 했다. 그러면 온갖 생각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힘겹게 잠이 들면 꿈을 꾸었고,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그 끔찍한 꿈속으로 되돌아갔다. - P180

등잔에 불을 붙일 때, 불현듯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세차게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만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회피하는 일에 나는 지쳐 있었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지난 일들이 또렷이 다 기억났다. 나는 솔직해지겠다고, 지난 일들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 P183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에 나가보았다. 등잔의 불빛이 길 위를 비추었다. 어린 가문비나무 위에 쌓여 있는 눈이 불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였다. 이런 풍경들이 의미해왔던 것들을 나의 눈이 잊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사물 뒤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 내 머리가 과거의 일로 가득 차 있고 내 눈이 새로운 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나는 과거를 잃어버렸고 아직 내 앞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왜 나에게 작은 설렘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오랜만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P186

룩스가 의자로 뛰어오르더니 머리를 내 무릎 사이에 묻었다. 나는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가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지난 몇 주 동안을 우울하게 보내야 했을 테니 이제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 했다. 개는 내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나한테 달려들고 킁킁거리며 내 손을 핥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룩스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러더니 금세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개는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따라갈 수 없었던 낯선 세계로 훌쩍 떠났던 주인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밤이 힘겹든 즐겁든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결코 그것에 맞서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 P187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매우 현명했지만 나의 현명함은 너무 늦게 나타났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했다 하더라도 현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 모두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는 일이 좋다.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들은 내 삶의 일부다. 내가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의 새로운 인생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잠 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전에 꾸던 꿈들과는 달랐다. 무섭지 않았다. 다만 슬플 뿐이었다. 슬픔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P188

나는 별로 힘이 센 편이 아니었다. 단지 우직하고 끈기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내 손으로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이란 정말 놀라운 도구였다. - P190

무엇인가를 죽이는 일이 즐겁다고 느끼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팔뚝의 털이 모두 곤두섰고 혐오감에 입안이 타들어갔다. - P195

그동안 너무 큰일들을 치렀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먼 지평선에 눈 덮인 산들이 보이고 거대하고 하얀 적막 속에서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들이 보인다. 생각이란 생각, 기억이란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눈의 반짝임만 남아 있었다. 머릿속에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저항할 힘을 낼 수 없었다. - P207

첫해 겨울 꿈 속에 나타나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더 볼 수가 없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다정하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아무 관심 없다는 표정 정도를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항상 다정하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건 단지 내가 사람들과 동물들에 대해서 평소 품은 생각이 표출된 것뿐이다.
꿈은 차라리 꾸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P209

벽은 이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몇 주씩 벽을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한다. 벽을 떠올릴 일이 있더라도 이제 벽은 내 발길을 가로막는 벽돌담이나 정원의 울타리 같은 것일 뿐이다. 사실 벽이 그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내가 모르는 물질과 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상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것들은 벽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벽 때문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태어남, 죽음, 계절의 바뀜, 성장과 소멸. 벽은 죽어 있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벽은 내가 마음을 쏟을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벽에 관해서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벽과 맞설 날이 올 것이다.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까지 나는 벽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싶다. - P210

이제껏 나는 내 눈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신체의 일부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눈이 멀게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마 약간 원시가 된 것뿐, 더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211

까마귀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공터로 날아와 하늘을 몇 바퀴 선회한 다음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황혼이 깃들 무렵이면 다시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까마귀들은 묘한 이중생활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까마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에는 왜 까마귀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도시에서는 더러운 쓰레기더미 위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까마귀를 형편없고 지저분한 새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 반짝이는 가문비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은 완전히 다른 새다. 그래서 나는 까마귀를 싫어했던 기억들을 전부 잊었다. 지금도 나는 매일 까마귀들이 날아올 때를 기다린다. 까마귀들이 시각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 P212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는 모든 일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시계를 수천 개 가져다놓고 가리킨다 한들 시간에 쫓기지 않을 것이다. 재촉하고 등을 떠미는 것도 없다. 산속에서 조급해하는 것은 나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문에 힘이 든다. - P216

마음을 줄 대상이 남김없이 사라진 데 안도감이 드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갈 길은 없다.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 P226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일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고원의 초원과 그 너머의 숲, 서쪽에는 창백한 달이 떠 있고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대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원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유혹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든 낯선 것들처럼 낯설고 위협적이기도 했다. - P245

마음을 들뜨게 하는 수천 가지의 냄새들, 등 위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혀끝에 닿는 차가운 샘물, 가쁘게 산짐승을 향해 달리던 사냥, 겨울바람이 집 주변에 휘몰아칠 때 따스한 난로 앞에서 잠들던 일, 쓰다듬어주는 인간의 손길, 다정한 인간의 목소리, 그것이 룩스의 삶이었다. - P253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때로는 어쩔 도리 없이 그저 섭리에 몸을 맡긴다. 나는 죽어가는 동물을 구해주기도 했다가 고기가 필요하면 산짐승에게 총을 겨눈다. 내가 어떤 서툰 짓거리를 해도 산은 변함이 없다. 노루가 새로 태어나 자라나고, 또 어떤 동물은 죽는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훼방꾼에 불과하다. 외양간 곁의 쐐기풀은 계속 자란다. 내가 수백 번 뽑아낸다 한들 쐐기풀은 죽지 않을 것이다. 쐐기풀은 나보다도 오래 산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풀을 베지 않을 것이다. 잡초가 자라 숲이 벽을 덮고, 사람들이 강탈해간 평지까지 다시 뒤덮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마치 숲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 속에서 영원히 끝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숲은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 P257

글을 쓰면서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새로운 나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것이 서서히 보다 큰 ‘우리‘로 녹아 사라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고원 때문이었다. 거대한 하늘 아래 초원의 적막 한가운데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나‘로 머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보잘것없는 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나, 고집스러운 나로 남아 거대한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때는 내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었지만, 고원에 올라간 뒤 나는 그런 내가 매우 초라하고 우스꽝스럽다고 느꼈으며 빈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P258

어렸을 적에 나는 내 눈앞의 모든 것이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설명도 그 걱정을 덜어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집 생각을 하면 집이 커다란 공터로 변해 있을 것 같았다. 식구들이 집에 없을 때에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누워 있거나 식탁에 다 함께 앉아 있을 때만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확실하다는 것은 보거나 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260

나의 두려움은 정말 바보스러운 것이었을까? 벽은 내가 어린 시절 가졌던 공포의 증거는 아니었을까? 하룻밤 사이에, 내가 집착하던 나의 모든 과거가 사라져버렸다. 그런 일도 가능했으니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두려움이 덮치려고 할 때마다 물리칠 만큼의 이성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상적 반응은 아마 미쳐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60

도시에서는 항상 불을 켜놓고 지내던 밤이 이 고원에서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돌로 지은 집 안에서 덧창을 내리고 커튼을 치고 갇혀 지낼 때 나는 밤을 몰랐던 것이다. 밤은 전혀 으스스하지 않았다. 밤은 아름다웠으며 나는 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 너머에 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강별, 초록별, 파랑별, 노랑별. 그들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한낮에도. - P266

문득 도망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이곳을 떠남으로써 동물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도 아니었고, 순간적인 감정에 따른 결정도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어떤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내게 의지하고 있는 동물들을 궁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걸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겁도 나지 않았다. - P279

고양이와 나 사이에 사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선택은 할 수 있었다. 다만 머리로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고양이와 나, 우리 둘은 결국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거대한 암흑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배. 인간이기 때문에 다만 나는 이를 인식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인식이라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쓸모없는 선물일 뿐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집어치우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 P281

나는 더 이상 삶을 견뎌낼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바람은 어쩐지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역할을 하며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인생들 거의 모두가 형편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내가 불평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기에 그들을 심판할 수 없다. 그들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해와 달과 별의 위대한 운행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주의 깊고 열광적인 관객에 불과했다. 나의 생애는 이 우주의 일부분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것이다. 나는 생애의 대부분을 일상적인 일들에 허비해버렸다. - P292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나와 있었다. 내가 삶을 지속하고 싶어 한다면 이런 상태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는 초원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을 모두 잊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 것 모두가 서투른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흔적을 좇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초막 앞의 벤치에서 보낸 그 시간은 나의 현실이었고, 또한 불완전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개인적 체험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이 눈보다 빨랐고, 그래서 현실의 진면을 보지 못했다. - P292

잠에서 깨어날 때,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눈으로 보면 어떤 사물을 잘 알아볼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때 사물은 무섭고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내 옷을 걸쳐둔 의자였음을 알게 된 후에야 사물은 친숙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러고도 잠시 동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보이고 가슴이 쿵쿵거린다.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가 그런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데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곳에는 내가 마음을 쏟고 정신 적으로 몰두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책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어려서부터 나는 사물을 나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이 오래전에는 싱싱하고 완벽하고 매우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나는 돌이킬 수 없었으며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고독은 나로 하여금 모든 기억과 의식을 던져버리고 다시 한번 삶의 위대한 광채를 바라보게 했다. - P293

나는 환상을 격렬히 거부하고 모든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오로지 현실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는 것을 내가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를 마치 로봇처럼 조종할 때가 많다. 이걸 해, 저리 가, 그걸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그렇게 나 자신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나는 로봇치고는 형편없는 로봇이다. 아직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 P295

드디어 바람이 바뀌더니 동풍이 불기 시작했다. 날씨는 다시 좋아졌다. 점심때는 햇볕이 따뜻해서 벤치에 앉아 햇볕을 쪼일 수 있을 정도였다. 커다란 불개미들이 열심히 움직이면서 새까맣게 행렬을 지어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개미들은 목표가 뚜렷해 보였으며 오로지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개미들은 가문비나무의 가지라든가 작은 풍뎅이, 흙덩이 같은 것을 나르는 데 열심이 었다. 개미들은 보면 나는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도 개미굴을 부숴본 적이 없었다. 이 작은 로봇들은 경탄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왕개미의 눈에는 아마 내 행동이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 P306

내가 느려지기 시작한 후에야 산은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적합한 방식인 것 같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물론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다. 전에 나는 항상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서는 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천천히 가는 편이 나았다. 나의 처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확실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깨고 나올 능력은 내게 없었다. 때때로 나를 엄습했던 지루함은 자동차 생산업자들의 회의에 앉아 있는 정원사가 느낄 만한 지루함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평생 동안 그런 회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내가 권태에 지쳐 죽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 P308

나는 위령의 날(11월 2일)을 좋아 하지 않았다. 병과 죽음에 관한 노파들의 수군거림, 죽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무정함, 이런 장례 의식에 아무리 아름다운 의미를 덧붙이려고 해도 죽은 사람에 대한 산사람의 공포는 없앨 수가 없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묘지를 장식하는 것은 그들을 잊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자기도 죽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입을 종이꽃과 초와 근심스러운 기도로 막아버릴 것임을. - P316

죽은 사람들은 마침내 죄를 범하는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손길로부터 벗어나 쐐기풀과 잡초로 뒤덮인 채 땅의 습기를 마시고 끝없이 살랑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 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언젠가 생명이 다시 이 땅에 생겨난다면 그것은 흙이 된 이들의 몸에서 자라날 것이다. 무생물로 태어나 영원히 돌덩이로 남는 것에서는 생명이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연민을 느꼈다. 연민이야말로 내게 남아 있던 사랑의 유일한 형태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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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든다. 그러나 공포가 나를 덮쳐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글을 쓸 테고, 이 새롭고 서툰 작업에 피로해진 나의 머리는 텅 빈 채로 잠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침은 두렵지 않다. 다만 어스름한 기나긴 오후가 두려울 뿐이다. - P6

나는 말을 걸며 개를 안심시켰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우울하고 습한 계곡의 적막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너도밤나무 나뭇잎 사이로 초록빛 햇살이 비치고 돌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얕은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울리던 계곡의 적막을. - P20

나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내가 조금 전 계곡에서 보았던 광경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건 도무지 사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일어난다 해도 산속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서 나비를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 P21

나는 걱정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않았다. 억지로 걱정거리나 절망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를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 나는 첫 번째 가정을 믿기로 했다. 그래야 누군가가 며칠 뒤 나를 이 산속 감옥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이미 누군가가 나를 구해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확실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한동안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은 현명했다. - P26

내가 해둔 모든 조치들이 인간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조치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내가 경험했던 위험이란 모두 인간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내 관념을 갑자기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적은 인간이었다. - P27

불현듯 이 화창한 5월의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하루를 살아 넘겨야 하며 도망갈 길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면서 버텨내야 할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던 날이 그날 생애 처음 닥친 것도 아니었다. 빨리 저항을 단념해야 더 견딜 만해질 것이었다. 전날의 멍함은 이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전에 없이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 P33

그것이 만약 죽음이었다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부드럽게, 사랑스럽다고 말해도 좋을 방식으로 닥쳐 왔던 것이다. 만약 내가 후고와 루이제를 따라 마을에 갔더라면 나의 상황은 오히려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 P37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소가 나에게 축복인 동시에 커다란 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멀리 나가 돌아다니는 일도 힘들 것 같았다.
소 같은 가축은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고 젖을 짜주어야 한다. 그래서 붙어 앉아 보살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의 주인이자 소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소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에 소를 남겨두고 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는 그만큼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 P42

선량한 후고, 그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는 지금도 어느 주점에서 레모네이드를 한 잔 앞에 놓고 앉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이다. 이제는 회의와 회의 사이를 떠밀려 다닐 필요도 없다. - P46

나는 소에게 이름을 하나 붙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벨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은 이런 산골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짧고 부르기 좋았다. 소는 자기 이름이 벨라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고 내가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렸다. 소가 전에는 어떻게 불렸는지 궁금했다. 디른들, 그레틀, 아니면 그라우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소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그 소는 산속에 있는 유일한 소였고, 어쩌면 온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는 소인지도 몰랐다. - P50

사실 룩스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어놓은 이름이다. 여하튼 오래전부터 계곡의 사냥개들은 모두 룩스라고 불렸다. 진짜 살쾡이는 씨가 마른 지 오래기 때문에 산속에 사는 사람들도 살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잘 모를 것이다. 룩스의 선조들 중 하나가 마지막 남아 있던 진짜 살쾡이를 죽이고 룩스라는 이름을 전리품으로 얻었는지도 모른다. - P50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다. 구조의 손길을 더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이 어리석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의 모든 논리를 벗어난 희망이었다. - P51

오늘 내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다섯 살짜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그 나이에 벌써 내 인생에 서는 멀어져갔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식들이란 그 나이가 되면 으레 부모의 인생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서서히 하숙인으로 변해간다. 단지 이런 일이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기 때문에 거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 같다는 서늘한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나 역시 다른 부모들처럼 그런 생각을 얼른 머리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나는 어쨌든 살아야만 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고서도 살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 P52

나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적은 없었다. 내가 슬픔을 느낀 것은 오래전 그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였다. 어쩌면 이런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누구한테 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진실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생 동안 거짓말을 하며 위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 - P52

희생자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두뇌가 생각해낸 가장 인간적인 악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54

사실 지금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나는 이미 나로부터 너무 멀어졌고 이를 느끼는 것도 버거운 지 모른다. - P57

내 이름을 어디에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이름은 벌써 거의 잊히고 있다. 그렇게 앞으로도 잊힐 것이다. 아무도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젠 이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P58

염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런 편이 다행이다. 상상력은 사람을 과민하게 만들고 상처받기 쉽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퇴화의 증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을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그들이 더 쉽고 편안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 P59

룩스도 내가 오래 쳐다보면 시선을 돌린다. 나는 인간의 눈이 최면 작용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눈이 너무 크고 반짝거리기 때문에 동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접시만큼 큰 눈이 나를 바라본다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 P67

전쟁 때 그런 상태를 겪어보고도, 사람이 채워지지 않는 육체적 열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햇감자를 거두었을 때 갑자기 그 무서운 식욕은 씻은 듯 사라졌다. 신선한 과일과 초콜릿, 아이스커피의 맛이 어땠는지도 서서히 잊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 냄새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빵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가끔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엄습하곤 한다. 평범한 검은 빵이 나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을 자랑하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 P73

너무나 힘에 부친 나머지 내 상황을 똑똑히 헤아려 볼 여유도 없었다. 견뎌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나는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잊은 채 나는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 P75

산장으로 돌아가는 긴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면에서 불만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것 가운데 이룬 것은 거의 없었고,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를 나누어본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그런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언젠가 나에게 다시 주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 P82

어떤 것에 대한 삶이 몸 구석구석 까지 스민 뒤에야 그것을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내정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나에게는 그토록 비현실적인 것이다. - P83

숲은 한낮의 햇살에 안겨 있었고 왜송나무 쪽에서 훈훈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때 석남꽃이 피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꽃들은 산등성이 위로 붉게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한낮이 달밤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숲이 노란 태양 아래 노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룩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잠이 들었고 거대한 적막이 나를 덮어버렸다. 나는 영원히 거기 앉아 있고 싶었다. 따스함 속에, 햇살 속에, 발밑에는 개가 잠들어 있 고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그 한 가운데에. 걱정과 기억이 전부 다 사라진 것처럼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발길을 떼어야 했을 때는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이 숲속의 고요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존재,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뒤죽박죽이며 무지막지한 신발로 나뭇가지를 밟고 피비린내 나는 살생을 불사하는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 P84

인간이 없는 곳에서 정확한 시간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 전에는 5분도 늦지 않고 약속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생각날 때가 가끔 있다. 시계를 마치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태도가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노예로 살고 있을 때는 규정들을 잘 따르면서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공적인 시간에, 째깍거리는 시계에 맞춰 사는 것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많았다. 나는 시계를 좋아한 적이 없다. 시계를 마련하면 모두 얼마 안 가서 망가지거나 없어졌다. 체계적인 시계 제거의 방법을 나는 자신에게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인지 물론 다 알고 있다. 지금은 그만큼 생각할 시간도 많고, 나이를 먹으면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 P87

그렇다, 차라리 나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 나보다 힘이 약한 파트너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받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죽도록 키워가기만 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숲에서 홀로 지내는 삶도 바꾸지 못한 것이다. 나를 참아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동물들뿐인지도 모른다. 후고와 루이제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89

내가 지금 함께 있을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현명하고 재미있어서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를 원할 것이다. 웃음은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라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나는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 그것은 할머니를 아예 모르고 지내던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웃음에 대한 대가 를 너무나 비싸게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계속 할머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지난 추억이라면 안 그래도 넘칠 지경인데 더는 싫다. 그러다 머리가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 P90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그런 불안에 떨며 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생명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불안의 고통을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 하지만 이 무거운 짐에 대해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해보았자 남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나와 똑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차라리 옷이라든가, 친구들, 연극에 관해 떠들면서 웃어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근심들은 두 눈에 숨긴 채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능력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 P96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보잘것 없다. 그것은 아마 종이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자유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내면이 자유로운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것이 치욕스럽다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부과된 짐을 지고 가다가 결국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나는 명예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명예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그저 일어나는 일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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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을 느끼며, 그 빛이 지닌 까다로운 진실 중 하나를 다시금 포착하고 있다: 아무 색깔도 없는 얼어붙은 침묵. 거울이 지닌 그 격렬한 없음, 색의 없음을 재창조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치 물이 지닌 그 격렬한 없음을, 맛의 없음을 재창조할 때처럼. - P129

아, 삶은 너무도 불편하다. 모든 게 죄어 온다: 몸은 요구하고,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피곤한데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와 같다—삶은 성가시다. 당신은 몸과 정신 그 어느 것도 벗어 둔 채 걸어 다닐 수 없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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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 P12

평소라면 이쯤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문득 누군들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마음의 준비가 되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 P18

사빈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여자들을 좋아 했지만 그의 눈에는 다들 게을러 보였다. 그 여자들은 절대 오지 않을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거나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여자조차도 달리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한가롭게 우유를 따랐다. - P20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은 다시 달콤해졌다. 첫 말다툼이라는 장애물을 넘었기에 평소보다 더 달콤했을지도 몰랐다. - P28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 P35

카헐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진실에 불편할 정도로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녀가 입을 닥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헐은 농담을 해야겠다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이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은 채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여자가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의 문제였다. 눈을 가리고 있던 낭만이라는 베일이 걷혀서 당신을 들여다보고 읽을 수 있게 된다. - P37

거실로 돌아온 카헐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역시나 정말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었다. 케이크를 마시다시피 먹고 샴페인을 느긋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마시다 보니 케이크와 샴페인이 다 떨어졌다. 겪어본 적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거의 끝나가는 하루를 지워주지는 않았다. 잠이라도 잤으면 좋았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 P43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 P44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웃기다고 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저녁을 태우고 사랑이 식은 여자는 덜 익은 요리를 내놓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 P46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 P48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깐 눈을 붙였지만 섬에 들어오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온전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칠흑 같이 까만 길까지도 생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높고 든든한 산과 헐벗은 언덕, 그리고 저 아래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선명하고 기분 좋게 철썩이는 대서양의 존재를 느꼈다. - P53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그녀는 집으로 곧장 가는 대신 남쪽으로 차를 돌려 집이 거의 없고 덤불도 하나 없는 애틀 랜틱 차도를 따라 차를 달렸다. 겨울에 이런 동네에 살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덤불을 꺾고 해변의 모래를 흩날리는 거센 바람, 안개와 가차 없는 비, 갈매기의 차가운 비명. 마침내 겨울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할까. - P58

언젠가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별거 중인 남자와의 사랑이 식었던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 기분을 반대로 말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말하면 진실이 되리라는 듯이, 또는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듯이. - P64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 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 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 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 P78

공기가 그녀의 폐를 찔렀다. 하늘에서 구름이 충돌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구름을 보았다. 그녀의 기분에 걸맞게 세상이 거짓말 같고 터무니없는 빨간색으로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85

"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 P97

낮의 빛이 다 빠졌다. 황혼이 하늘을 물들이고 대낮의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고 꼬드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걸으면서 일요일의 고요함을 느끼고 얼음장 같은 바람 때문에 나무가 긴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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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은 내향적이며 자아를 깊이 성찰한다. 사람들은 제비꽃이 겸손해서 숨는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제비꽃은 자신의 비밀을 포착하기 위해 숨어 있다. 그 거의—없는—향기는 억제된 영광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찾아봐 달라고 요구한다. 제비꽃은 향기로 소리치지 않는다. 제비꽃은 말할 수 없는 가벼운 것들을 말한다. - P93

겁이 난다. 하지만 내 심장은 뛰고 있다. 이해를 허락지 않는 사랑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한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라는 존재의 한 형태이고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한 형태라는 것: 그것들이 내가 지닌 가능성의 한계다. - P108

나는 죽을 것 같은 기쁨 속에 있다. 달콤한 탈진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이란 미래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일이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척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사랑 속에서 산다. 하지만 갈망을 안은 채 기억을 되새기는 건 다시 한번 작별을 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 P108

나는 생각을 넘어 하나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걸 말들로 쪼개는 일은 거부한다—표현할 수 없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은 것은 결국 내 비밀들 가운데 가장 은밀한 것이 된다. 나는 내가 생각을 쓰지 않는 순간들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순간적인 상태다. 도달하기 어려운, 완전히 은밀한, 생각을 빚어내는 말들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상태. 말들을 쓴다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해롭고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이 아닐까?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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