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들은 류진위안의 머릿속에 띄엄띄엄 희미하게 남아서 하나로 연결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기억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아 류진위안은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87
"내일 아침에 일어나시면 원래대로 회복하실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저희 할머니가 낮에 할 수 없는 일을 밤에는 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우리 어머니도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변할 수 있다고 하셨어. 두 분 말씀이 맞기만을 바라야지." - P94
칭린은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어머니,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가 어떤 일로 인해 엄청나게 변해버린 듯했다. 더이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비밀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 비밀 때문에 어머니가 거대한 책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표지만 알았을 뿐 내용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 - P98
그때 멍하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룽중융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영혼은 현세에 없어." […] 칭린과 중융은 대경실색했다. 룽중융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세 글자 이상 말한 적이 없다면서, 처음 병을 잃기 시작했을 때 본인이 현세를 떠나 또다른 세계로 천천히 가고 있다고 자주 말했노라 알려줬다. "두 분이 받아들이는 게 우리 상식과 다른지도 몰라. 혹시 이런 상태는 병이 아니라 당신들 소망이 아닐까." - P101
칭린은 첫번째 일기를 펼쳤다. 처음부터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퇴색한 만년필 글씨에 시선을 떨군 순간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다. 그는 여기에 무엇이 기록됐는지 몰랐다. 여기에서 완전히 낯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낯섦이 그의 인생에 충격을 가져오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칭린은 그때 어머니는 왜 본인이 죽고 나서 보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P105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살아 있어야만 통증도 있어. 죽으면 아픔도 사라지지." 그 장면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어린 그녀는 수예방에서 공작의 꽁지깃을 수놓다가 바늘에 찔렸다. 새빨간 피가 손 끝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고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다가와 힐끗 쳐다보고는 야단치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또다른 방법도 있어. 기억을 없애는 거야. 그러면 아팠는지조차 몰라." - P109
시간은 늘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하루나 일 년, 또 어쩌면 백 일이나 백 년일지도 몰랐다. 그때 갑자기 검은색의 농도가 흐려졌다. 흐릿한 잿빛이 머리 위로 나타났고, 그 빛 속에는 부드러운 베일이 나풀거리는 듯했다. 딩쯔타오는 그 베일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잿빛이 시작되는 쪽을 향해 일정한 선이 계단처럼 고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세어봤다. 열여덟까지 세고 나자 잘 보이지 않았다. 18층, 왜 하필 18층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 P110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이 순식간에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딩쯔타오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문득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녀는 호숫가의 작은 대나무 정자에 앉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물결과 호수 위를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보슬비 내리는 꿈속의 변방은 아득하고, 누대를 메운 옥피리 소리는 차갑구나." - P112
류샤오촨이 칭린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말했다. "시간은 앞으로도 많아. 우리 아버지가 예순 살에 퇴직하셨거든.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흥분하셔서는 드디어 아내와 제대로 살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어. 그렇게 이십여 년을 함께 하셨지. 나중에는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그러면서 예전에 늘 떨어져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하시더라. 아니었으면 한 사람과 오륙 십 년이나 함께 산 것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이 가치 없게 느껴졌을 거라고. 봐봐, 이게 바로 살아본 사람의 심오한 깨달음이라고." 칭린이 웃으며 어르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P134
칭린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처럼 빈손으로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현실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현실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이어서 지금처럼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인생의 가치에 대해 류샤오촨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맞는 말이었다. 바쁘지 않은 인생이라도 똑같이 피곤할 수 있었다. - P135
한 학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룽 선생님, 부자가 이런 곳에 살았다고 확신하세요? 심지어 화려한 저택까지 짓고요?" 룽중융이 대답했다. "이 세상은 말이지, 사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가능해." 칭린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 P137
룽중융이 대꾸했다. "보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보고 나니 가슴이 뛰네. 느낌이 아주 좋아. 부자가 저택을 짓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아주 좋아했을 지역 같아. 중국 부자들은 괜히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뿌리 박고 정착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곳이 고향이 되고. 지나치게 가난한 지역은, 예를 들어 물과 나무가 부족한 곳은 생활이 불편해서 원치 않았을 거야. 그런데 여기는 위치가 정말 좋아. 겹겹의 산이 병풍 같고 물도 풍부해. 조금 멀 뿐이지. 돈 있는 사람한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아. 심지어 외질수록 더 좋아하기도 해. 재산을 숨기기 쉬우니까. 또 궁벽한 시골에 사는 친족들은 소박하고, 왕법 보다 가볍을 중시하거든. 관청보다 종가를 두려워한다고. 그러니 다루기 쉽지. 자기 집안사람을 잔뜩 데려오면 그 지역을 지키기도 쉽고. 원수가 있어도 찾아오기 쉽지 않을 거야. 말하자면 세상의 은신처 같다고 할까." - P139
그들은 차 안에서 남방과 북방의 지주 저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서민의 부유함이 왜 국가 부강의 기반이 되는지, 전통 민가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 민간 건축에서 빠지지 않는 중국식 문화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룽중융은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다고 말했다. 건축사가 없던 시대에는 오히려 알고 있었어. 건축이란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 속에 녹아 유기적인 한 부분이 되어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말이야. 반면 지금은 대부분의 마을이 자연에 시위하는 형태로 건물을 짓지. 마치 봐봐, 내가 너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더 빛나고 멋져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 그런 건축은 결말이 좋을 수 없어. 자연의 힘은 이길 수 없거든. - P140
칭린은 뭔가를 잡은 것 같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혼란에 빠진 것도 같았다. 두 손을 깊고 짙은 구름 속에 넣어 분명히 움켜쥐었는데 양손이 텅 빈 느낌이었다. - P143
칭린은 세상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는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장원에서 봤던 커다란 ‘인‘과 ‘내‘ 글자가 떠올랐다. 요동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글자들이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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