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 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5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 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그때 지연씨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이게 숨구멍이라는 말. 이 공부를 할 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다고 했어요."
그때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 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 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그 순진무구한 사랑은 대학원에 진학 하면서 차츰 빛을 잃어갔고, 그 자리는 현실적인 크기의 희망으로 대체됐다.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158

"이티가 착한 애잖아요. 손가락으로 빛을 밝혀서 사람들 다친 데도 고쳐주고, 친구도 되어주고. 엄마 따라 극장 가서 그 영화를 봤는데 어느 장면에선가 이티가 저를 보는 거예요.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모두를 보는 게 아니라, 극장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는 거죠. 내가 자기를 보는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해요. 이티가 마지막에 자기 별로 돌아갈 때 얼마나 울었는지 엄마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 이후로 밤이 되면 하늘을 올려다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어릴 때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어딘가에는 내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58

– 봄이야. 우리 봄이야.
봄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증조모를 올려봤다.
– 여기서 헤어지자. 이제 우리를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야. 내레 미안해······
증조모의 말이 끝나자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의 냄새를 한 번씩 맡더니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멀어졌을 때야 한 번 뒤돌아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혹시나 봄이가 돌아올까봐 봄이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채로 걸어가는 봄이를 보며 할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 P161

– 작은 간나가 애 하나 데리고 기렇게 내려가기가······
증조모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걱정 되어 견딜 수 없을 때면 증조모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곧 침묵했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나려는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만류하지 않았던 증조부가 미워졌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그런 식으로 보내는 건 아니었다고.
– 기래두 아바이가 있어서 다행인 기야.
증조모가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두려웠다. 헛간에서, 마당에서, 뒤뜰에서 잘 때, 때로는 운이 좋아 사랑채나 행랑채에서 잘 때에도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난길을 가는 여자에게는 인민군, 국군, 미군, 중공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밤마다 민가를 다니면서 여자를 강간하는 군인들이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었으니까. - P165

– 어마이.
– 됐다.
– 이렇기 간다는 말이시까.
– 기래.
– 어마이, 이러지 마시라요.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6

"너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런 계절이었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길가에 서서 계속 맴돌았어. 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그렇게 지내면서 나는 내가 정말 오랜만에 온전하게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사논문을 쓰고, 박사 후 과정을 밟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남편의 배신을 알게 되고, 이혼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앞만 보며 달려왔었다.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느끼고 싶지 않아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주면서. - P172

전남편에게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의 생각에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후회의 덫에서 구원해준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없었으리라는 사고의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속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일어날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 P173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P선배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선배가 건넨 파일을 한번 더 봤다.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 사정을 들어서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어떻게 내게 전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빌미를 제공한 나의 실수가 문제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에 몸이 떨렸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흠 잡힐 일이 없도록 어느 때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다. - P174

새비 아주머니의 고모 집은 대구의 비산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피난민 수용소가 있는 곳이어서 골목은 물론이고 큰길을 걸을 때도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 마치 죽 속 밥풀처럼, 모두가 개어져서 하나의 대접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밀접함이 아득했다. 모두가 살고자 연고도 없는 그곳으로 모인 것이었다. - P177

개성에 찾아온 두 사람을 피난길로 몰았던 것은 그녀의 가족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봤지만 개성에 두고 온 봄이 생각도 났다. 피난길에서 본 광경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되도록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처마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동안 그간 한쪽에 밀쳐뒀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나왔다. 쌀 한 톨, 장작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 P178

– 영옥이 언니.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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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으며, 하신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간직해 온 숱한 습관들과 결별하는 중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삶이 전보다 훨씬 나아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울적함이 찾아들 때도 혼자 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의 존재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닌지 반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생을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 낙오자가 되었다는 우울한 생각이 사라진 건 순전히 코랄리 덕분이었다. 코랄리가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와의 섹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장인, 장모도 썩 좋은 분들이었다. 다만 시내에 나갈 때마다 위축되는 기분이었는데, 아마도 전에 저지른 일들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런 러브 스토리는 대낮에 드러나면 가면극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연기에 서툰 가엾은 배우가 된 것 같았다. 하신은 두목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내이므로,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 - P547

카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앙토니는 불편해졌다. 이 여자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똑같은 기쁨,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자녀의 존속만을 위해 스스로 무너지며 하녀나 다름없는 신세를 자처한다. 모든 것이 앙토니에게는 심각할 정도로 우울했다. 그 소리 없는 집요함 속에서 앙토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운명을 그려 보았다. 최악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세월을 보내는 여자들의 자각 없는 몸, 넙데데한 엉덩이, 불룩한 뱃살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종족의 법칙이었다. 앙토니는 가족을 증오했다. 가족은 목적도 끝도 없이 연장되는 지옥이었다. 그는 길을 떠나고 기적을 만들 것이다. 다른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 P552

친구들, 매일 저녁, 그리고 아페리티프 마시는 시간을 두려워 했다. 저녁 7시쯤 되면 어김없이 욕구가 찾아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 잔,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잔이 그를 유혹했다. 한 잔으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인생은 짧고 너나 할 것 없이 언젠가 죽게 마련이라는 친구의 목소리와 함께 아페리티프가 그를 유혹했다. 그러니 즐겨야 했다. 그리하여 파트릭은 스스로에게 일탈을 허락했고, 다음 날이면 형편 없이 망가진 자신을 다시 만났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P571

그때 여자애와 춤추고 있는 앙토니를 발견했다. 소년은 소녀를 바싹 당겨 안았고, 두 아이는 메두사처럼 느리게 흐느적 거렸다. 에로스 라마초티의 코맹맹이 소리가 사랑의 고통을 노래하자, 무대 위 커플들은 운명에 대한 진지한 감정에 압도당한 듯 서로를 한층 더 꼭 안았다. 여자들은 희미한 옛 사랑을 떠올렸고, 남자들은 경계를 늦추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원통함 같은 상반된 감정이 읽혔다. 구슬픈 멜로디에 힘입어 삶은 돌연 소용돌이처럼, 잘못된 출발의 결과처럼 되어 버렸다. 이탈리아 가수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가 그들의 귀에 대고 이혼과 죽음, 일에 좀먹히며 이리 채고 저리 채는 신세, 불면과 외로움 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존재들의 비밀을 속삭였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사랑하고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지배하지 못한다. 도약도 끝도 우리의 힘 밖에 있다. - P576

일터에서 앙토니는 친구를 몇 명 사귀었다. 시릴, 크림, 다니, 르주크, 마르티네. 아침마다 그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다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간혹 C작업장 뒤 작은 뜰에 있는 팔레트에 앉아 몰래 마리화나를 피웠다. 근무가 끝나고도 만났다. 취미나 월급이 다들 엇비 슷했으며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마저 공유했다. 특히 본질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게 만드는 수치심,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 촌구석에서 날이면 날마다 뜨개질하듯 이어지는 삶, 아버지들과 너무나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 느릿하게 찾아오는 저주까지. 앙토니는 복제된 일상이 가져다주는 선천성 질병 같은 삶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같은 고백이 순종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삶에 수치심을 더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빈둥거리지 않고, 공짜 혜택만 찾아다니지 않고, 변태나 실업자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자랑스러워했다. 굳이 마르티네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걸쭉하게 트림하며 알파벳을 읊조리는 것도. - P614

술에 취해 RFM 라디오를 들으며 에일랑주의 밤길을 운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취미가 되었다. 엔강을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운전하면서 그가 나고 자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거리를 끝없이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점을 찍듯 그의 길을 소리 없이 밝혀 주었다.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달리다 보면 조금씩 엄청난 감정이 밀려 올라왔고, 앙토니는 굳이 그것을 억누를 이유를 알지 못했다. 조니 할리데이는 그의 최애 가수였다. 그는 절망을 남긴 희망, 헛되이 끝난 이야기, 도시, 고독을 노래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엔 캔 맥주를 든 채 그 흔하디흔한 풍경을 몇 번이고 훑었다. 조명을 받은 거대한 공장.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유년의 절반 이상을 보낸 버스 정류장. 그가 다니던 학교, 늘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케밥집,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떠났다가 불알을 덜렁거리며 되돌아온 기차역. 너무나 심심해서 강물에 대고 침 뱉기 놀이를 하던 다리. 마권 발매소, 맥도날드, 텅 빈 테니스 코트, 불 꺼진 수영장, 주택 단지로 미끄러지는 완만한 비탈길, 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주블리 레 통 농」의 노랫말. - P615

하신은 갈기갈기 찢겼다.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신은 바로 이 사람들 손에 입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강박과 생활 방식을 증오했다. 점심식사는 정각 12시, 저녁식사는 정각 7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를 마치 타르트 조각 자르듯 일일이 계산하고, 할당량을 정하고, 잘게 조각내는 사람들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으레 단추를 푸는 장인. 단순하고 거짓말을 모르고 영원한 얼간이 같은 그의 사고방식. 세상의 수업 앞에서 언제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성자와도 같은 강직함. 그들이 초등학교에서 배운 서너 가지 강렬한 교훈은 각종 사건 사고, 정치, 노동 시장, 유로비전의 트럭이나 크레디 리오네 은행 사건 등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그저 어쭙잖게 분개하거나 정상이 아니라는 둥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둥 비인간적이라는 둥 하는 말로만 거들 뿐이었다. 모든, 아니면 거의 모든 질문들을 잘라 버리는 세 개의 칼날. 인생이 계속 그들의 진단에 어긋나고 그들의 희망을 꺾고 역학적으로 속였음에도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원칙을 꼿꼿하게 고수했다. 여전히 우두머리를 존중하고 TV에서 하는 말들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필요할 때면 열광하거나 분노했다. - P618

하신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사람, 동지가 절실했다. […] 동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아이가 있는 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뻔한 대꾸만 돌아왔다.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고정 관념이 직장을 지배했으며, 그것이 사람들을 점잖게 꾸며 주고 냉혹한 현실에서 고꾸라지지 않도록 행복으로 중독시켰다. - P619

그러나 사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하신은 다른 한 가지를 깨달았다. 코랄리는 내면 깊이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오세안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고, 코랄리는 생애 처음으로 완벽히 채워졌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정리되었다. 아이가 모든 일의 잣대가 되었고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 P620

하신에게 질투심 따위는 없었다. 딱히 자신이 배제된다는 느낌도, 딸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다. 아이에게 모든 걸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하신에게는 그 공허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없었을 뿐이다. 오세안은 하신의 신경증, 불행, 그를 떠 나지 않는 분노에 더해진 보너스였다. 어차피 인생은 하신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딸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무튼 쉽지 않은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 P621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 무렵, 앙토니와 하신은 ‘공장‘ 앞 보도블록에 서 있었다. 멀리서 아주 간간이 폭죽과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술집들은 문을 닫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깃 덩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앙토니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리는 바람에 담뱃불 하나 붙이면서도 담벼락에 등을 기대야 했다. 저녁 내내 수없이 떠들고 수많은 사람들과 술을 퍼마셨다. […] 앙토니와 하신은 가능한 한 서로를 피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한마디가 오가기까지는 늦은 시간, 알코올, 승리, 그리고 공기 속을 부유하는 용서와 사면의 강렬한 감정이 필요했다. 하신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가왔다. 먼저 말을 건넨 것도 하신이었다.
"엉망진창이긴 해도 멋지네."
"그러게." - P641

하신은 화단 가에 앉아 팔을 무릎 위에 얹고 아주 침착하게 담배를 피웠다. 앙토니는 선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서로 할 말이 없는 것도 우스웠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같은 시에서 자라고 같은 일에 권태를 느끼고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너무 일찍 그만두지 않았던가. 심지어 아버지들은 메탈로르 동료였다. 그동안 두 소년은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이런 공통점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두툼한 벽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앙토니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운전 욕구가 오줌이 마려워 절절 맬 때처럼 그를 불태웠다.
"야, 한 번만 타 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하신이 두 눈을 들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오갔다.
앙토니가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자.....!"
하신이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던졌다.
"저 끝까지 갔다가 다시 와."
"오케이."
"한 번만 왕복하는 거야. 끝."
앙토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집요함은 짜증스럽다. 알았다고 했지만, 앙토니의 눈에는 비웃는 듯한 기미가 숨어 있었다. - P646

앙토니는 바캉스 계획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채무에서 벗어난 기분이랄까.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옷을 다 벗고는 세면대 위 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물을 아주 뜨겁게 틀었다. 델 듯이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 앙토니는 입을 벌리고 검고 숱 많은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몸을 떨었다. 뜨거운 물이 미지근해졌다가 차가워질 때까지 한동안 물을 맞았다. 스테프가 남긴 공허는 단연 물리적이었다. 가슴속, 뱃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이러고도 삶이 계속된다니. - P655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혼자 사는 여자들은 정말 많아서 같이 산책을 하고 단체 여행에 등록했다. 이렇게 우리는 싱글 여성이나 미망인, 어떤 이유로든 혼자가 된 여성들을 가득 싣고 알자스 지방과 포레누아르를 달리는 관광버 스를 종종 보게 된다. […] 전부, 아니, 거의 모두가 몇 번의 임신을 겪었으며, 해고당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난폭하고 마초적인, 실업자 신세가 된 강박적인 남편과 함께 살아왔다. 그 남자들은 식탁에서, 술집에서, 잠자리에서도 우울한 얼굴을 했으며, 굵은 손과 기진맥진한 마음으 로 수년 동안 세상을 원망했다. 그토록 대단했던 그들의 공장 이 문을 닫고 용광로가 입을 꾹 다문 뒤로는 위로받을 길조차 막혔다. 그중 어진 쪽인 세심한 아버지, 선량하고 말수 없고 순종적이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남자가, 아니, 거의 모든 남자가 침몰했다. 그 아들들 역시 짝을 찾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기대에 어긋나고 아무 짓이나 해 대고 근심만 낳았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아마조네스들은 견디고 인내했으며 학대받았다. 그러다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상황은 비로소 받아들일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제 위기라고 해도 그것은 더 이상 한순간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건 순리였다. 운명. 그네들의. - P660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로, 두 사람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 그의 죽음은 서서히 지워지는 것들 다음에 오는 논리적인 결과였다. 몇 주가 흘렀다. 몇 달. 앙토니도 엄마도 죽음에 대해 또는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엇비슷한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엘렌은 전남편을 떠올릴 때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추억은 동전처럼 무너져 내렸다. 엘렌은 추억들의 순서를 맞추었고, 자기 편의에 맞게 이야기들을 재구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후회하지 않는 그녀 삶의 일부였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경제 위기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술이 문제였을까. 그것이 운명이고 그들의 삶이었으니 창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앙토니가 고집을 부리거나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일 때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어쩜 그렇게 네 아빠랑 똑같니. 칭찬이 아니었다. 앙토니는 자랑스러워 했다. - P668

앙토니는 차라리 보지 않고 싶었다. 스즈키에 올라탄 앙토니가 전속력으로 지방 도로를 달렸다. 엔진의 강하고 갑작스러운 떨림이 손바닥에 다시 찾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이 감정, 지옥의 소리, 머플러가 뿜는 달콤한 휘발유 향기. 그리고 한숨 가운데 에일랑주에 7월이 다시 찾아올 때 보드랍게 와닿는 빛의 질감. 해가 저물 녁의 하늘은 솜처럼 나긋나긋한 분홍빛을 머금었다. 여름날 저녁 언제나 똑같은 이 느낌, 숲속에 드리운 그늘, 얼굴 위로 부는 바람, 공기의 이 틀림없는 냄새, 소녀의 피부처럼 오돌토돌한 아스팔트 길의 친숙함. 호수 골짜기가 그의 피부에 남겨 놓은 지문.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이 끔찍한 포근함.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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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
그러던 사람이 나를 붙잡고 그러는 기야. 희자 어마이, 내레 더이상 기도를 못하겠어. 천주님, 그때 뭐하고 계셨어. 어린아이들,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가는 동안 뭐하고 계셨더랬어.
[…]
회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 예전의 희자 아바이였다면 천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조선으로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했을 텐데, 희자 아바이는 천주님한테 사과받고 싶댔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소리간. - P123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 짧아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 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 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희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희자 아바이 묻어주고 오는 길에 하늘에 뜬 낮달을 봤다. 아, 희자 아바이가 이제 그 고운 눈으로 저 달을 보지 못하갔구나. 푸른 하늘두, 5월의 보리밭두, 우리 희자두······ 그 좋아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갔구나. 울면서 한참을 타박타박 걷다보니 달이 나를 앞서 걷는 것 같지 않갔어. 마치 내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기래 뭐이야, 하구 달을 보는데 그 둥근 달이 하늘로 가는 문처럼 보였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갔겠지······ 우리 희자 아바이······ 저짝으로 가서 그렇게 미워하고 사랑하는 천주님 얼굴 보았구나······ 그런 생각이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들었어. 내 고저 이런 생각을 하구 희자 아바이 보내고 있어.
삼천아, 보고 싶어. 이게 뭐라고 너에게 편지로도 말하지 못했을까. 항상 건강해야 한다, 우리 삼천이. - P128

"젊은 애를 잡아두고서 편지나 읽게 시키구."
"아니에요. 나중에 더 읽어드릴게요."
"고맙구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등에 손가락을 살짝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고른 숨을 쉬면서 잠들었다. 나는 내 손등 위에 놓인 할머니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컵을 챙겨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고 큰방으로 돌아와 할머니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고개는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고 입을 작게 벌리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 때문에 심각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돌담 아래에서 새비 아저씨를 부르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리움을 묻어야 했을 열두 살 영옥의 모습이 이 얼굴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쪽에 놓인 담요를 가져다가 할머니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 조용히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 P129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 없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지쳐 보이기도 했다. - P134

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너 정도로 똑똑하고 너 정도로 배운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은 꿈도 꿔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진 것 별로 없는 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게 크게 실망했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정상 가족을 꾸린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엄마는 사위를 살뜰히 챙겼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잘 굴려나가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살기를 기대했다. - P135

나는 엄마의 그 작은 기대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엄마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엄마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번번이 상처받기보다는 내 일에서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아는 일을 내 가슴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엄마의 바람이 단지 사람들에게 딸을 전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 P136

천천히 올라왔는데도 엄마는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해야겠어, 엄마. 멕시코 가려면."
"응, 그때까지 열심히 걸을 거야."
"약속해."
" 약속할게."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 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 P136

할머니는 그때의 희자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언니 기억나우? 물으며 새비 아저씨와 함께 연을 날리던 일을 이야기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만든 연을 들고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달려 가던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 그때 희자와 할머니가 얼마나 깔깔대며 웃었는지, 겨울바람에 얼굴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래 연 놀이를 했었는지 이야기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면 할머니도 희자야, 나도 기억난다, 하고는 희자를 보며 같이 웃었으리라고.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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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가고 나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새비 아주머니의 사진을 보았다. 두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까. 두번째 삶을 선물받은 기분이었을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을까. 꿈이라고 의심하진 않았을까. - P99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P99

지우를 배웅하고 오는 길에 나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지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엉망이지 않았을까 두려워서였다. 눈에 띌 정도로 야위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꼴로 친구에게 괜찮아, 나는 괜찮아, 라는 말만 반복하던 나의 모습이. - P106

"재미있었어. 옛날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지연이 너는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열 살 때 네가 우리집에 와서 며칠 있었을 때 말야. 같이 바다도 가고."
"저도 기억나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게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날 영영 잊은 줄 알았지."
"할머니."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아. 미선이랑 나랑 사이가 그러니까. 그래도 가끔은, 너를 볼 수 없었던 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했어. 그래, 미선이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어."
"그럴 만해요." 내가 답했다. "엄마에게는 엄마만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 그랬을 거야." - P109

하루는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는데 아저씨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할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는지, 할머니의 엄마가 얼마나 용기 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는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귀한지 천한지를 갈랐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인들은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그저 천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P111

봄이 끝날 무렵에 마당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누런 털에 꼬리에는 검은 털이 조금 섞인 날씬한 수캐였다. 중조모는 개의 이름을 봄이라고 지었다. 봄이는 그 누구보다도 증조모를 잘 따랐다. 섬돌 위에 놓인 증조모의 신에 턱을 괴고 잠이 들었고, 증조모가 밖으로 나가면 겅중대면서 그 옆에서 뛰었다. 증조모는 귀찮다는 듯이 봄이를 옆으로 밀치면서도 결국에는 자리에 앉아서 봄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증조모가 집을 오래 비울 때면 봄이는 동구 밖가지 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증조모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의아한 표정으로 봄이의 등을 쓰다듬는 증조모의 얼굴에는 늘 작은 서글픔이 서렸다. 자기에게 달라붙는 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투정하듯 말하는 중조모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P112

새비 아주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증조모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와 영영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심정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까요."
"그게 무슨 뜻이니."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가만히 차를 마셨다.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슬프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 P115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 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할머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 P116

어쩌면······ 희자 아바이를 생각하면 그게 나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희자 아바이가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두, 이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도 좋다. 희자 아바이 말고 내 위주로 생각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래두 난 희자 아바이가 살아 돌아오고, 그렇게 살아서 나랑 희자랑 같이 지냈던 시간이 좋았더랬어.
희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 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 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돌아와 고작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다고, 마음만 더 아픈 거 아니냐고 말하는 동무들도 있었지. 그런데 삼천아 봐봐라, 한 시간, 한 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나, 희자 아바이가 참 귀해. 기래, 얼마 있으면 희자 아바이가 가겠지. 내 기걸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두 난 이쪽이 더 좋다.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 P120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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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60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그는 의아했고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내를 그렇게 바라봤다. 본데없이 자라서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 P61

– 맛이 좋아요. 아즈마이.
새비 아주머니가 그런 증조모를 보고 말했다.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 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 P64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어마이, 나는 사람들한테 기대하는 기 아니라요.‘ 증조모는 생각했다. ‘나는 새비한테 기대하는 기야.‘
언젠가부터 증조모는 마음속으로 고조모와 이야기를 했다.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소리 내어 고조모에게 말했다. 너무 외로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던 때였다.
‘새비도 사람이라. 걔라고 무에 다를 기 있나? 내는 너가 상처받을 까봐 걱정된다이. 말이 승한 사람, 무조건 믿지 말라우.‘ 고조모가 말했다.
‘말 때문이 아니야, 어마이. 새비는 달라.‘ 증조모가 답했다. - P65

"읽기 많이 어려우세요?"
"또 구차한 이야기 하게 되네. 눈이 잘 안 보이잖아. 편지는 책보다 더 심해. 종이며 잉크가 바랬으니까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가 않아. 영 뿌옇기만 하구······"
"제가 읽어드릴까요?"
"괜찮아, 괜찮아." 할머니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제가 읽어드리는 게 불편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자꾸 나한테 뭘 해주면, 내가 되돌려줄 게 없어서 문제가 생겨."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시잖아요."
"네가 들어주는 거지."
"아닌데요."
나는 그 순간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놀랐다. 몇 번이나 만났다고 이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걸까. - P72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5

"명희 아줌마 말 진짜야?"
"무슨 말?"
"엄마가 아줌마 어머니 수술비 보탰다면서."
"아."
엄마는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내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명희 언니라도 그렇게 했을걸. 멕시코 가기 전에 빌려준 돈도 다 갚고 그랬어, 언니가."
"아직도 잊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
엄마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더니 휴지에 코를 한 번 풀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등을 돌리고 보조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엄마에게 명희 아줌마는 어떤 의미였을까. 엄마는 명희 아줌마가 멕시코로 떠난 일에 대해서 지나가듯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날의 기온을 말하듯이, 거스름돈이 얼마 나왔는지 말하듯이 아무 감정 없이 이야 기했었다. 나는 엄마를 알지 못했다. 명희 아줌마보다 더, 할머니보다 더, 그리고 어쩌면······ 아빠보다 더. - P88

"그런데 어른들이 할머니한테 나쁘게 했어요? 백정 딸이라고?"
"사람마다 다 달랐는데, 자기 아이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게 하던 사람들도 있었지."
"증조할머니랑 중조할아버지는 가만히 있었어요?"
"난 그런 걸 말하는 애가 아니었어."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 것 같다. - P94

"우리 아버지가 자기 엄마 아버지를 빼고서 사랑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새비 아저씨였을 거야."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날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할머니는 입을 벌리고서 한동안 나를 골똘히 바라봤다.
"얘, 나는 오래전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래, 아마도 어쩌면······"
그렇게 말하다가 할머니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날 할머니와 나는 목성을 봤다. 목성의 흐린 줄무늬를 봤다. 할머니는 아이처럼 감탄하면서 접안렌즈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 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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