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한바퀴 돌고 나오자 사람들의 행렬은 길을 가득 메웠다. 가뭄 타는 땅거죽은 사람들이 떼지어 움직이자 마른 먼지가 구름 같이 일어나 높이 공중에 뻗어올랐다. 부황 들어 누르께한 얼굴에 휑뎅그렁 걸린 눈망울들. 덩덩, 북소리는 그들의 허기진 배 속을 아프게 울리고 있었다. - P10
어째서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 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P27
팔년 세월에 비하면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훌쩍 날아간 고향은 참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기내에 퍼져 틀틀거리는 엔진 폭음에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멍한 방심상태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하기에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 식으로 나는 고향에 닿았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땅 한복판에 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뭐랄까, 아무 예비감정도 없이 고향과 맞닥뜨린 셈이랄까. 나는 비행기 안에서 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멍하니 허송한 오십분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괜히 비행기를 탔다 싶었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야 하는 건데 팔년 만의 귀향을 직장 통근시간에 불과한 단 오십 분에 끝내다니. - P43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혀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 바닷가 넓은 ‘돌빌레‘에 높직이 쌓여 있는 저 고동색 해초더미는 ‘듬북눌‘이겠고, 겨울 바다에 포말처럼 둥둥 떠 있는 저것들은 해녀들의 ‘테왁‘이다. 시커먼 현무암 바위 틈바구니에 붉게 타는 조짚불, 뭍에 오른 해녀들이 불을 쬐는 저곳을 ‘불턱‘이라고 했지. 나는 잊어먹고 있던 낱말들이 심층의식 깊은 데서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남모르는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추억의 심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머릿 속은 고향의 풍물과 사투리로 그들먹해지는 것이었다. - P45
집터엔 잿더미 속에서 양식이 썩고 있는데 굶어야 하다니,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가? 제 것 제가 못 먹고 누가 먹는가. 아이고, 먹긴 누가 먹어, 도두, 서호 것들이 먹지. 도두, 서호 것들이 지서와 짜고 훔쳐 먹는다지 않는가. 귀리집은 노여움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우리 것을 왜 저들에게 빼앗겨? 왜? 계엄령만 해제되면 되를 말로 갚겠다고 그렇게 애걸 복걸했건만 저들이 언제 고구마 한 꽁맹이라도 뀌어주던가. - P119
귀리집은 바람 불어오는 바다 쪽으로 힐끗 눈을 준다. 방금 가로질러 건너온 일주도로에는 모래바람이 뽀얗게 일고 있고, 그 너머 해변가의 도두봉 양옆으로 뽕그랗게 부풀어올라 있는 바닷물마루(수평선)는 높하늬바람에 부대 험상궂게 울퉁불퉁하고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이랑들이 수없이 바다들판을 뒹굴고 있다. 깔축없이 갈치떼가 허옇게 뜬 격이로고. 참말 저것들이 몽땅 갈치떼라면 얼마나 좋을거나. 하룻밤 배 띄워 흔전만전 잡아다가, 빈 몸으로 이 해변에 소개해 와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우리 노형마을 사람들 곯은 배를 한번 양껏 채워나봤으면······ 노란 햇조밥에 구운 갈치. 구울 때 들러붙은 검정 조짐불 재도 털지 않고 먹는 그 살진 맛이라니. 조바심 철이면 해변가 도두 서호 아지망들이 대구덕에 갈치를 지고 올라와 팔았었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당장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오목가슴이 쓰려왔다. - P121
소개란 취약지구의 인원과 물자를 후방 안전지대로 후송시킴을 뜻하는데, 이건 숫제 마을에 불을 놓아 물자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거기다가 폭도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인원마저 파괴했으니, 초토작전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게릴라란 물고기와 같아서 인민이라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월남에서 배웠지만, 교본대로라면, 인민이란 물을 퍼내서 게릴라가 서식처를 잃고 자멸하도록 해야 옳지 않았던가. 누구는 편리하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전쟁이란 으레 그런 거다, 그게 전쟁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 시킨다, 그 사람들이 특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 통에선 어느 때 어디서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다, 월남 땅 밀라이 사건을 보라,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전쟁 중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6•25 터지기 두해 전 일, 그러니까 그건 전쟁이 아니라 좌익폭동 진압이었다. 폭동 진압에서 삼만이 죽었다니! - P149
방심할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저 피 젖은 흰 저고리, 그때마다 숨 가빠 헐떡거리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뭐냐? 겁이냐, 분노냐? 아니,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분노를 느껴봤더냐?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겁이다. 백주에 가위눌림이다. 더위 먹은 소 달 보고 헐떡거림이다. - P154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 사람들은 삼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버린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박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버린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 P162
안된다. 왜 겁을 내! 꿈적꿈적 잘 놀라는 어릴 적 소아병을 이젠 청산해야지. 겁 낼 게 아니라 불같이 노여워하고 무섭게 증오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주눅 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 P163
그야말로 실직 칠개월은 수마와 싸운 세월이었다. 몰두할 일이 없어지자 두개골은 텅 비어버리고, 대신 그 텅 빈 공간에 수마가 똬리 틀고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졸음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아무리 자도 노상 졸립기만 했다. 허구한 날 하품을 벅벅 해대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졸음을 쫓아내려고 벽에다 머리를 짓찧고 손등을 물어뜯기를 얼마나 했던가. 석규 생각엔, 졸음이 머릿속에 똬리 튼 황구렁이로만 여겨지는 게 아니라, 사정없이 덤벼드는 쉬파리떼로 느껴지기도 했다. 몸을 흔들면 잠시 붕 날아올랐다가는 이내 새까맣게 내리덮는 쉬파리떼. 성한 몸뚱어리는 쉬파리떼의 공격을 받아 점점 썩어갔다. 점점 허물어져갔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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