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우맨 암실문고
마틴 맥도나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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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이 ‘어떨’수록 어떤 사람을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처절한 잔혹극. 스스로 뭔가를 깨닫고 다른 길을 개척할 수는 없을까 싶다가도… 이 책을 읽으면 그럴 수 없겠다 싶은 생각도 동시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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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창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내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었다······ - P81

하지만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왔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 뒤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헛일이었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한 개비 장작처럼, 성령의 숨결처럼 단순했던 내 어린 집시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여자. 건물 잔해 속에서 찾아낸 무거운 널빤지들을 커다란 나무 십자가처럼 어깨에 메고서 끌고 오던 여자. 감자 스튜와 말고기 소시지면 족했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가을 하늘에 커다란 연을 날리는 것 외에는 더이상 바라는 게 없었던 여자. - P83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열광이라고는 모르던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퍼 자신의 스튜를 끓이고 내 맥주 단지를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여자. 빵을 성체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이 불의 노래는 그녀가 유년기부터 알아왔고 그녀의 종족을 신성한 유대감으로 묶어주던 것이었다. 그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우수 어린 미소를 그려 넣으며 모든 고통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행복의 그림자였다······ - P84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옹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P85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바츨라프 광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처럼,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올라가 스미호프 양조장의 가마솥만큼이나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저 끔찍한 용기가 가득차면 벨트가 멈추었고 거대한 수직 나사가 천장에서 내려와서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종이를 짓누른 뒤 지친 탄식을 내뱉으며 천장으로 도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되었다. 벨트가 흔들리며 카렐 광장의 분수대만큼이나 커다란 타원형 용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넣었다······ 책더미들이 여기서 몽땅 파괴되었다. 나는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유리 벽 너머로 트럭들이 손때 묻지 않은 새 책들을 쏟아놓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 P89

대담해진 나는 압축통을 에워싼 승강대 위로 기어올라가보았다. 한 번에 5만 리터의 맥주를 생산해내는 스미호프 양조장에서처럼 그곳을 어슬렁거리면서, 공사가 진행중인 집의 비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난간에 기대어 홀을 내려다보았다. […] 스웨터들과 캡들이 앵무새나 꾀꼬리, 물총새의 깃털처럼, 요란한 색깔의 향연 속에 길을 잃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나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 P90

그러나 내 용기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건 그 젊은이들이었다. 양다리를 벌린 채 손을 허리에 갖다대고 우유와 코카콜라를 병째 들이켜 는 젊은이들. 더럽고 지친 늙은 일꾼이 일감에 매달려 혼신의 힘으로 맞붙었던 시절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새 인간, 새 방식과 더불어 바야흐로 새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우유를 수리터씩 들이켜며 일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암소들이라면 갈증이 나서 죽을지언정 우유라면 한 모금도 마시려 하지 않을 텐데. - P91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 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들처럼 볕에 그을린 젊은 남녀들이 작업을 재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는 그들은 헬라스에서 여름을 보내는 일에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 P93

저 젊은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게 확실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지하 공간으로 돌아왔다. 뒷문으로 들어와 어슴푸레한 빛과 희미한 전구, 곰팡내를 다시 찾았다. 내 압축기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압축통, 세월의 손길이 밴 그 나뭇결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난데없이 비통한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려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장에서 소장이 충혈된 눈으로 얼굴을 아래로 들이밀고 내지르는 소리였다. 내가 긴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 작업장 안마당이 종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꾸짖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가 비열한 인간처럼 여겨졌다. 더이상 나를 보아넘길 수 없게 된 소장은 내가 아직 아무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욕설을 쏟아놓았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이고 바보천치였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 P97

만차는 이미 잿빛이 된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이나 운동선수, 아니면 신의 은총을 입은 육상 선수의 머리 모양이랄까. 한쪽 눈이 다른 쪽 눈보다 아래로 내려가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사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시각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한의 문턱 너머에 자리한 정삼각형의 한복판, 존재의 심부에 영원히 고정된 채 길을 잃고 방황하는 눈이었다. 그녀의 사팔눈은, 어느 가톨릭 실존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강석에 난 영원한 흠을 암시했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그곳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경악을 금할 수 없었던 건 두 개의 크고 흰 장롱처럼 보이는 천사의 두 날개였다. 그것들이 보일락 말락 파닥이는 것 같았다. 비상에 앞서, 아니면 하늘로부터 귀환한 뒤 잠깐 동안, 만차가 부드럽게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책이라면 질겁하며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만차가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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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속에서 엘렌은 삼십 년 전 학교에서 배운 크롤 수영을 한다. 그 시절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반복 동작을 되새기는 사이 엘렌은 의문의 여지 없는 건강함을 되찾는다. 곧 관절과 어깨에 열이 오른다. 노력은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영역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행복이 그녀를 감싼다. 배가 홀쭉해지고 어깨가 당기는 느낌이다. 수면에 올라와 한 번씩 들이마시는 숨은 키스다.
풀장을 한 번 완주하고 엘렌은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망설이듯 수면을 떠도는 수많은 빛의 영상들이 엘렌의 얼굴을 찌른다. 엘렌은 눈을 깜박여 속눈썹 위에 맺힌 물방울을 떨군다. 산들바람이 불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기적과도 같은 즐거움. 육체의 존재를 알리는 모든 것이 그녀를 기쁨으로 채운다. - P230

엘렌은 50미터를 헤엄치기 위해 다시 출발했다. 벌써 다리가 아프다. 숨이 차오르니 노인네가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우울과 무기력은 처음 10미터만 지나면 사라진다는 걸 엘렌은 안다. 추위와 마비, 늪 같은 권태를 극복해야 한다. 부조리하게 반복되는 왕복 운동을 계속하며 버텨 내야 한다. 상념들이 머리, 추억, 물결을 지나 영혼까지 전해진다. 수영은 인내의 운동, 다시 말해 권태의 운동이다. 엘렌은 타일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낡은 풀장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햇살이 물에 내리꽂히고, 빛은 각도에 따라 섬광이 되었다가 그늘이 되었다가 눈부심을 낳기도 한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빛의 단계가 모습을 감춘다. 엘렌은 수영을 한다. - P232

엘렌은 또래 여자애들의 시기와 중상에 이미 익숙했다. 그녀의 엉덩이, 얼굴, 스캔들을 일으키고도 남을 법한 탐스러운 머리카 락은 그녀를 여자애들 사이의 균형과 위치, 아늑함을 위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 사람들은 그런 엘렌을 창녀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엘렌이 위협 적인 존재이며 몸을 무기로 특정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권력자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창녀라는 용어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래처럼 나약함을 드러낼까봐 예방 차원에서라도 미리 씨를 말려 버려야 하는 부당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이 경우 윤리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정치 프로젝트 같은 것으로 엘렌이 지닌 무질서의 가능성들을 제 압했다. 엘렌이 소유한 미적 효과 축소하기, 엘렌이 예쁜 엉덩이로 남용하는 권력 꺾기. - P233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엄마가 말했다. "이모네 집으로 가자. 오토바이는 없어. 걔네가 홀라당 태워 버렸어."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 앙토니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미 끝나 버린 세계에도 장점은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이 재앙이 강박을 없애 주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지낼지, 생활은 어떻게 할지, 돈, 옷, 먹거리, 그리고 어디서 잘지 고민할 일만 남았다. 잠수부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지낸 일주일을 생각하면 지금이 차라리 나았다. - P244

이제 모든 일은 돌아올 수 없는 추락으로 이어졌다. 소년은 마음 가는 대로, 빠르다는 말보다 더 빠르게, 아스팔트의 미세한 돌기로 인한 충격이 두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스쿠터를 몰았다. 시야 양편에 늘어선 벽들이 잿빛 띠처럼 보였고, 소년은 자신이 움직이는 하나의 점이 되어 버린 것 같은 패닉 상태를 한껏 누렸다. 스쿠터를 몰면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흥분 지점을 찾아 끝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배 속에서, 가슴속에서, 몸의 모든 기관에서 소년은 엔진의 한계점을 재발견했다. 그의 의지마저 포물선을 그리며 변해 갔다. 그때부터 추락은 착각이 되었고, 사고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앙토니는 달렸다. - P249

태양이 얼굴 정면을 강타했으나 하신은 앙토니의 각진 얼굴, 굳게 쥔 주먹, 총구를 틀림없이 알아보았다. 근처의 고층 아파트들이 초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신은 문득 두려워져서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하거나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비겁함은 고통보다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걸 하신은 아주 어려서부터 겪어 왔다. 누군가의 주먹을 피해 도망치는 건 눈물 겨운 피해자의 운명을 자처하는 셈이었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맞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지난날 백 번도 넘게 곱씹은 이 교훈이 하신을 MAC 50 앞에 우뚝 서게 했다. - P252

"너희 여기서 뭐 해? 관광객이야, 뭐야?"
"아무것도요. 그냥 좀 쉬었어요." 이윽고 시릴이 경영자로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릴의 비밀 병기였다. 다시 말해 그는 무슨 일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는 주제에 케케묵은 연설과 교훈을 늘어놓고 본인보다 돈을 덜 버는 이들의 업무 내용을 헐뜯으며 경영상의 무능함을 감추었다. 그것이야말로 사장인 그의 비극이자 그를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리라는 걸 그도 알았다. 이번엔 도전과 개인 투자의 문제였다. 시릴에게 익숙한 소니아와 두 소년은 말없이 감내했다. - P261

지중해 반대편에서 두 남자를 기다리던 엄마가 아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도 아닌 데다 온 가족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가운데 엄마 품에 안겨 있자니 하신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하신은 그 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생김새도 볼품없고 마치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먼지투성이라고 생각했다. 주름투성이의 얼굴, 옷매무새, 언뜻 튼튼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푸라기 같은 체격, 하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 특유의 시선. - P282

하신을 두고 게으르다, 어물거린다, 엉큼하다, 거짓말을 한다고 쉼 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어머니의 질책도 감수해야 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하신에 대해 수군거릴 일을 생각하고 망신을 당할까 걱정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엿 먹이는군, 소년은 생각했다. 너 때문에 망신스러워서 미치겠구나, 어머니가 누누이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패고 싶었지만, 아들은 이미 너무 커 버렸다. 하신은 몇 번이고 층계참에 몸을 숨기고 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푸른색,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은 난폭함, 해변, 힘없이 움직이는 이파리들, 그의 얼굴 위로 이글거리던 대기. - P289

실망은 소년을 또 다른 종류의 열정으로 이끌었다. 삶에서 모든 것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우리의 손을 벗어나 먼지가 되어 버리므로, 소년은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금전적 이익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끊임 없이 계속되는 삶의 손실 앞서 소년은 분노를 축적했다. 그러나 테투안에서는 돈을 벌 방법이 많지 않았다. 소년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치기로 했다. - P290

밖으로 나왔을 때는 풍경이 조금 전과 전혀 딴판이었다. 밤이 더욱 선명해졌고, 가로등 빛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으로 쪽빛 따뜻한 섬광을 점점이 뿌렸다. 빨갛고 노란 자동차 불빛들이 느릿느릿 움직였고, 간판의 초록색과 파란색 불빛들은 서리라도 맞은 듯 생생하고 차가워 보였다. 옥외 광고판에서 뿌옇고 흐리멍덩한 빛이 번졌다. 이토록 수많은 불빛 앞에서 인간의 운명이란 얼마나 불투명한지, 삶이란 얼마나 헛된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93

이제는 125를 몰 때 어떻게 하면 자신을 지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앙토니는 매일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 길을 고를 때는 높이 뛰어오를 때나 자신이 좋아하는 까다로운 조작을 할 때 어떤 느낌일지, 이러저러한 변수에서 어떤 짜릿함이 전해질지 고심하며 여러 가능성들을 저울질했다. 어머니 집에서 수상 클럽까지, 학교에서 아버지 집까지 가는 경로는 매일 달라졌다. 르클레르에서 발전소까지 시내를 거치는 경로는 특히 수직과 직각이 주는 환희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었다. 이 경로를 되풀이하면서 앙토니는 동작의 정확성, 아침의 유동성, 순수한 풀림을 겨냥했다. 물질과 공기 사이의 마찰은 사라지고 행복만 남았다. - P300

주말마다 집에 돌아온 바네사는 변함없는, 그러나 바네사 자신은 원하지 않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 여념 없는 부모와 그들의 따사로운 염려, 너무나 뻔한 말들을 다시 맞닥뜨렸다.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는 법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엔지니어가 될 수는 없다. 바네사는 부모를 가슴 깊이 사랑했지만, 생의 그 어떤 번뜩임도 치명적인 실패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부모를 보며 부끄러움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집을 단장하고, 저녁마다 식사를 준비하고, 빗나가는 사춘기 아이가 조금씩 자립 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며 함께 있어 주고·····. 쉬지 않고 이어질 그 어중간한 일상이 요구하는 끈기라든가 겸허한 희생을 바네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네사는 그런 것들이 TV연예 프로와 즉석 복권,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넥타이, 넉 달에 한 번씩 머리 색을 바꾸고 자신이 사기꾼으로 여기는 정신과 의사 대신에 점쟁이를 찾는 어머니의 습성만큼이나 작고 하찮으며, 늘 환기 없고 씁쓸하고 강압적이고 굉장히 꽉 막혔다고 보았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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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어야 하리라. 최적의 조건은 신학 학위가 아닐까 싶지만.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웅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 - P69

어제는 그 선로 변경 초소에서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은 외삼촌의 장례를 치렀다. […] 그렇게 수습한 것들을 관 속에 놓인 삼촌의 옷에 몽땅 쑤셔넣었다. 그리고 아직 못에 걸려 있는 철도원 모자를 삼촌의 머리에 씌우고 삼촌의 손가락 사이에는 이마누엘 칸트의 아름다운 글귀를 끼워넣었다. "나의 생각을 언제나 더 크고 새로운 감탄으로 차오르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도덕률이다······" 언제 읽어도 변함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글귀였다.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젊은 칸트의 책을 들척이다가 더 아름다운 문장을 찾아냈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 P70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거나 후진했다. 기계가 멈출 때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칸트의 『천계론』을 읽었다. 한 불멸의 정신이 침묵 속에서, 밤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녕 설명할 수는 없는 개념들이다. 너무도 놀라운 글귀들이어서 나는 저 높은 곳의 별이 총총한 하늘한 자락을 보려고 건물의 배기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러고 나면 역겨운 종이 더미와 솜뭉치에 둘러싸인 생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을 갈퀴로 찍어 압축통 속에 던져넣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P74

처음에 나는 그녀가 항시 불을 지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사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은 그녀 안에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없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저녁마다 우리는 말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내 집 열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 P79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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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일상이 이상한 양상을 띠었다. 전날 밤보다 더 피곤한 아침을 맞이할 때도 있었다. 앙토니는 점점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주말이면 더 심해서 엄마의 분노를 샀다. 농담을 건네는 친구들에게 버럭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일 초도 쉬지 않고 몸을 부딪쳐 일부러 아픔을 느끼고, 벽 속에 처박히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워크맨을 귀에 꽂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 똑같은 슬픈 노래를 스무 번도 넘게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가 TV로 「베벌리힐스」를 보고 있자면 멜랑콜리가 정점을 찍었다. 다른 세상, 캘리포니아라는 지역, 그 곳 사람들은 여기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앙토니가 가진 것은 여드름, 구멍 난 운동화, 부실한 오른쪽 눈이 다였다. 그의 생활을 침범하는 부모도. 물론 부모의 명령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며 그 권위에 끈질기게 도전했지만, 앙토니가 원하는 삶은 여전히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처럼 살다가 아버지처럼 인생을 끝낼 수는 없었다. 술에 취해 하루의 절반을 TV 뉴스 앞에서 투덜거리거나 무슨 말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여자와 으르렁거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 P212

"혹시 나랑 사귈래?"
스테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사뭇 진지해 보이는 소년 앞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소년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집스럽고 잘생긴 아이였다. 보드카의 효력인지 스테파니의 눈에 소년은 그다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옆모습을 보니 소년에 대한 선입견이 점점 사라지고 정면에서는 도드라져 보였던 부실함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속눈썹이 길었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소녀는 소년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잊었다. 관찰당한다는 느낌에 소년이 소녀를 돌아보자, 반쯤 감긴 오른쪽 눈이 다시 드러났다. 하지만 소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 P220

"데려다줄까?"
스테파니는 도움닫기라도 하듯 팔을 살짝 뒤로 휘둘렀다가 빈 술병을 마을 쪽으로 멀리 던졌다. 술병은 탄도 미사일처럼 아름답고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소년과 소녀는 술 병이 마른 잎사귀의 바스락거림과 함께 10여 미터 아래에 떨어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아니야, 됐어." 스테파니가 말했다.
소녀가 떠난 뒤 양토니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울고 싶어졌다. - P222

그녀의 피부는 서서히 복잡한 표층이, 추억이 되었다. 변화는 매일매일 들여다본다고 감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변화와 주름은 어느 날 아침 문득 눈에 띄었고, 검붉은 소정맥이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자기만의 은밀한 생애를 누리며 느린 반발을 일으키듯이. 또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렌도 계절마다 다이어트를 했다. 그건 그녀와 그녀의 몸 사이에 맺어진 야릇한 협약이었다. 다이어트는 지난 시절로 돌아가려는 경제학을 허락하는 합법적인 유통 수단이었으며, 그 속에서 활력과 고통을, 주름과 공허를, 충만함과 절제를 맞교환했다. 요컨대 엘렌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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