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가만히 서서 땅바닥만 쳐다보는 가족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했는데 어느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심지어 늙은 마틴조차 붉은 울 모자만 벗을 뿐 목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잉그리드의 새하얀 손을 잡았다. 손톱은 때도 없고 물어뜯은 자국도 없이 잘 다듬었고 옴폭 들어간 작은 부분마다 관절이 자리했다. 목사는 예술 작품 같은 조그만 손을 잡고 가만히 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손도 열심히 일하는 여성의 손, 힘줄이 튀어나오고 흙 때가 잔뜩 끼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남자의 손, 여기 있는 가족들의 나뭇조각처럼 투박한 손으로 변할 것을 직감했다. - P9

"넌 새로운 것만 보면 웃는구나." 그는 딸이 장난과 진심의 차이를 안다는 걸 알고 말했다. 딸은 울거나 반항하거나 거역하는 법 이 없었고 한 번도 아프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배워 나갔다. 이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만 떨쳐 버려야 한다. - P17

잉그리드는 손질한 명태를 질질 끌며 앞장서서 걸었고, 물고기에서 떨어진 마지막 핏방울이 가녀린 종아리로 흘러내렸다. 한스는 어깨에 나뭇가지 네 개를 올리고 겨드랑이에 도끼를 끼우고 손에는 딸의 마른 옷을 들고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북서쪽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서 이내 달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낫자루를 수리할지, 아니면 몇 시간 자고 다음 날 아침 로즈에이커에 이슬이 맺히기 전에 작업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이슬은 항상 이상한 붉은 풀이 자라는 로즈에이커에 가장 먼저 맺혔다. - P18

드물게 편지가 담긴 병도 발견하는데 발견할 사람에 대한 기대와 사적인 비밀이 담긴 편지는 정해진 수신인이 있는 경우 섬사람들이 그 대상에게 전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무심해져서 병을 열고 편지에 적힌 언어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내용을 살핀 다음 병 속에 담긴 메시지는 동경, 희망, 이루지 못한 삶을 전해 주는 신비로운 매개이기에 소유도 폐기도 아닌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병은 끓는 물에 소독해서 레드커런트 주스를 담거나 빈 채로 헛간 창가에 놓아두는데, 햇살이 병 속에 들어와 파랗게 빛을 내고 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 위로 반짝였다. - P21

수레가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섬의 철학자인 마리아는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다른 섬에서 온 터라 비교 대상이 있기에 이런 걸 경험, 더 나아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점은 또한 바라보는 시선 혹은 섬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정신분열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 P28

지형이 개방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니 누군가는 가문비나무나 소나무 같은 상록수를 해안가에 심어 방풍림으로 쓰고 노르웨이의 이상적인 묘목장으로 키우자는 좋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작은 가문비나무 묘목을 크기와 상관없이 섬마다 무상으로 나눠 주면서 이 나무를 땅에 심어 키우면 후대에 연료와 목재로 쓰일 거라고 말한다. 바람이 토양을 바다로 쓸어 가는 것을 막고 그 전까지는 낮이고 밤이고 늘 바람에 시달렸던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쉴 곳과 안식이 찾아울 것이다. 게다가 섬은 더 이상 지평선에 떠 있는 관자놀이처럼 보이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땅과 북쪽 선창을 닮을 것이다. 아니, 누구도 지평선을 망가뜨리는 이런 짓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평선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티가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 떨리는 시신경처럼 그 자체로 중요하다. 아니, 이 나라가 파멸의 기로에 들어서는 엄청난 부를 얻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30

모든 세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일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생각은 분명 어딘가 목적지가 있고 최악의 경우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온다. - P39

섬사람들은 카르비카의 폐허와 집 두 채가 사라진 이유를 알지못해도 여전히 폐허를 존중했다. 가족들은 발길을 피하고 아이들은 놀지 못했다. 새들도 둥지를 틀지 못했는데 흔한 솜털오리조차 그럴 수 없었다. 하물며 집을 허물어 나온 돌조차 에이커 사이의 다른 돌담과 기초벽에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새로운 돌을 찾는 편을 택했고, 그래서 폐허는 그 자리에 기념비 혹은 묘지처럼 남아 쐐기풀과 분홍바늘꽃이 무성한, 너무 춥고 또 너무 더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언덕에서 폐허를 바라보면 서로 다른 손이 쓴 한자처럼 보였다. 겨울이면 눈이 폐허 꼭대기에 쌓여 완전히 하얗게 뒤덮이기 전에 죽은 갈색 풀 위로 폐허가 한층 두드러졌다. - P39

넓은 바다라는 불길로 해가 저물 때 그들은 붉은 지평선에 드리운 숫양의 실루엣을 보았다. 바다에 떠 있는 바위처럼 생긴 뗏목에 올라탄 작은 곤충 같았다. 바람이 제 방향으로 불 때면 양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 P48

어른들의 얼굴은 돌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냉랭했다. 그들은 속삭이고 눈썹을 한일자로 모으고 웃어 보려고 했지만 가식적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아서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또한 바뢰이섬의 건물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견뎌 왔고, 그건 사실이지만 순전히 과거를 입증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한때 카르비카에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처럼. - P58

섬사람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섬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섬을 떠나 숲이나 계곡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어두운 성향이 있어 두려움이 아니라 침통함에 빠져 버리기에 그런 상황이 오면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 P58

그들은 밖으로 나 갔고 맹렬한 하늘 아래서 바람과 홍수의 강을 헤치며 남쪽으로 세 개의 돌담을 향해 걸어가 한 곳에 도착했다. 그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른 뒤 다른 돌담으로 건너갔다. 한스는 모든 장애물을 거뜬히 넘었지만 잉그리드는 숨을 쉬려면 얼굴 앞으로 손을 모아야 했다. 폭풍의 마지막 보루인 러시아 나무가 누워 있는 뒤쪽 동산에 도착하니 깜깜한 어둠 위로 솟아난 물이 벽을 만들어 그들을 향해 밀려오면서 바위와 해변과 자갈에 부딪히고 모래와 조개와 얼음을 마구 던졌다. 누구도 마주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죽음의 트럼펫 같아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음속에서 그 광경을 지워 버리는 것뿐이었다. - P59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화가 나서 한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바뢰이섬을 떠날 것도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사실 지금처럼 첫 겨울 폭풍이 삐걱거리는 벽 너머로 최후의 발악을 하면 사람들은 본모습을 잃곤 했다. 게다가 한 번 섬에 정착하면 섬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붙잡는 통에 절대 떠날 수 없었다. - P60

폭풍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한 해와 섬 생활의 외로움이 천천히 가르침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가족이 줄었고 그들은 이 섬의 수장을 잃어버린 채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거나 입을 닫거나 성질을 내고 안달을 부렸다. 게다가 로포텐은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매해 겨울 그곳에서 200명이 넘는 남자가 목숨을 잃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추정만 할 뿐이었다. 하느님의 땅인 이 해안가만큼 무덤 없는 십자가가 많은 묘지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 P73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1월이 되었다.
그렇게 석 달이 더 지났다. 서리와 눈보라와 악마의 달이.
그리고 이상하게도 새로운 희망이 가족들을 감쌌다. 희망은 검은 하늘에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1월 초에는 멍든 눈 같다가 2월이 되자 벌겋게 변했고 마침내 하늘이 밝아져 분화구 같아졌다. 그들은 신앙심 깊은 남자를 소용돌이치는 어둠 속으로 보냈고, 지금은 그가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터, 혹시나 주머니 가득 돈을 가져올지도 모르며 이는 결국 섬의 희망으로 바뀌었다. 가장이 어구와 물고기 판 돈을 받아서 돌아올 거라고 말이다. - P73

아빠이자 남편이자 오빠이자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이상한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4월 말이라 하루 종일 해가 짱짱하고 심지어 밤도 없이 오로지 아침에만 조금 어두울 뿐이고 처음으로 파릇한 풀이 오르고 어린 양들이 나타나고 솜털오리가 해안가를 뒤뚱뒤뚱 걸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만족했는데, 집을 떠났던 사람이야말로 시간이 그 자리에 멈춰 있다는 걸 깨닫고 가장 기뻐할 장본인이었다. - P74

모든 것이 잉그리드의 행복한 어린 시절 기억과 똑같을 수 없는 건 세상엔 불안이라는 불길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P75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빈곤과 전쟁이다. - P76

스웨덴 사람들은 10월 초부터 쭉 내린 비를 맞으며 떠났고, 바뢰이 가족은 헤어지는 게 슬프지만 원래 인구로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방문객을 들인 장점이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가족들만 남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섬사람들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손님이 오기 전부터 그랬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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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과 마찬가지로,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며 두려움에 대한 염려를 떨쳐낸 덕분에 엘리너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마도 그녀는 모두를 대표해 이따금 두려움을 토로할 자격을 얻은 듯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달래면서 그들 자신도 다독여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녀는 모두를 대신해 온갖 두려움을 담기에 충분한 역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저들은 어린애 같아. 서로 먼저 도망치라고 배짱을 겨루며 달아날 채비를 하다가 마침내 누가 달아나면 욕을 퍼붓지. - P158

엘리너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막막했지만, 아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자신이 심각하게 겁을 먹은 것은 아니며, 최악의 악몽을 꾸는 것보다 무섭지는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소리보다 한기가 더 괴로웠다. 등을 간질이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에는 시어도라의 따뜻한 가운도 소용없었다. 어쩌면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여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리라. 순수한 과학적 연구라는 박사의 취지에도 잘 맞았다. 하지만 설령 발이 문 앞까지 간다 하더라도 손이 손잡이까지 올라가지 않을 성싶었다. 정당하고도 객관적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세상 그 누구의 손도 저 손잡이를 만질 수는 없을 거야, 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녀는 문이 쿵쿵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몸을 떨었다. 소리가 점점 가라앉자 점차 진정되었다. - P203

그는 브랜디병과 잔을 들고 있었다. 엘리너는 앞으로 새벽 4시에는 시어도라의 방에 모여 앉아 브랜디를 마시며 즐겁게 놀아야겠다 싶었다. 가볍게 수다를 떠는 동안, 호기심에 서로를 은밀히 엿보며 각자 궁금해하리라. 다른 이들은 어떤 공포를 맛보았을까. 얼굴이나 몸짓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어떤 약점을 경솔히 드러내어 파멸의 문을 열지는 않았을까. - P207

그들의 염려 어린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모두 불안을 얇디얇은 막 아래 감추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 위해 비명을 지를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과 분별력은 사실상 전혀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 P237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를 버리는 짓이죠.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이지, 그 중간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P244

"두려울 때면 세상의 이성적이고 아름다우면서 두려움이 없는 면이 분명하게 보여요. 의자와 탁자와 창문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죠. 꼼짝하지 않아도 카펫의 섬세한 짜임새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물들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뇨. 우리는 자신을 아무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두려워하죠." - P245

그녀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나에게만 알려 줄 수 있는 뭔가를 말해 봐요. 혹은,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뭔가를 주지 않겠어요? 혹은 심지어, 가슴 속에 한없이 중요한 뭔가가 자리 잡고 있어요. 도와줄 수 있나요?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어리석은 것인지, 대담한 것인지. - P252

그녀는 생각했다. 되도록 좋은 인상을 남길 표현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거야. 대답을 들으면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겠지. 과연 나한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할까? 자그마한 신비주의에 내가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독특한 사람인 척 보이려고 애쓸까? 용감한 사람처럼 굴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창피할 것 같아. 내가 용감한 남자한테 끌린다는 걸 그가 알고 있다는 뜻이니. 아니면 신비로운 사람처럼 굴까? 미친 사람처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착각일 수도 있건만 벌써부터 이렇게 확신하다니, 루크가 당연히 나의 가치를 알아본다고 여기다니.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깨닫지 못하기를, 그가 지혜롭거나 내가 맹목적이기를,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기를, 그녀는 간절히 소망했다. - P252

두려움과 죄책감은 자매인 법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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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종달새나 베짱이도 꿈을 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 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 P35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라 그녀가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 언니뿐이었다. 형부와 다섯 살짜리 조카딸도 꼴 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주변에 친구라고는 없었다. 앓아 누운 어머니를 돌보느라 십일 년을 보낸 탓이 컸는데, 덕분에 간호사 노릇은 능숙해졌지만 강한 햇빛을 쬐면 눈을 계속 깜박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른이 된 후 진심으로 행복을 느낀 순간은 없었다. 어머니를 돌보며 보낸 세월은 작은 죄책감과 자잘한 치욕과 끊임없는 피로와 끝이 없는 절망을 그녀 주위로 굳건히 쌓아 올렸다. 바란 적도 없었건만 조용한 운둔자의 삶을 살며 사랑할 사람 하나 없이 긴 세월을 홀로 보내다 보니, 엘리너는 다른 사람과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때도 괜한 자의식에 머뭇대며 적절한 표현을 떠올리지 못했다. - P39

어쩌다 여름을 헛되이 보냈더란 말인가? 매년 초여름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다니. 그러면서도 그녀는 현명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진실로 허비되는 것은 없으며, 심지어 그 어떤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다 매년 어느 여름날 아침,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는데 따뜻한 바람이 스쳐 가면 섬뜩한 생각이 살며시 떠오르곤 했다. 또 시간을 허비했구나. - P50

그녀는 즐거운 고독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래에서 유쾌하게 콸콸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를 들었다. 곧 여행이 끝나겠지. 벌써 반 이상 왔어. 여행이 끝나다니. 머릿 속에서 어떤 노래의 일부가 개울처럼 반짝이며 맴을 돌았다. 가사가 아련히 떠올랐다. 시간을 허비한들 무엇을 얻으리. 시간을 허비한들 무엇을 얻으리. - P58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는 정문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의구심이 들었다. 높다랗고 육중한데다 불길해 보이는 철제 정문은 나무들 사이로 우뚝 선 돌담에 굳건히 박혀 있었다. 심지어 차에서도 빗장을 휘감고 있는 사슬과 자물쇠가 보였다. 정문 너머로는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만 보일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길 양편에 선 고요하고 시커먼 나무들의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
정문은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쇠사슬과 빗장으로 이중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녀는 도저히 차에서 내릴 마음이 안 들었다. 그래서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에 나무와 정문이 부르르 떨며 슬쩍 움츠리는 듯했다. - P66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이었다. 몸을 부르르 떠는 동안,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갈겨 댔다. 힐 하우스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고, 병들었어. 지금 즉시 떠나야 해. - P72

힐 하우스의 선과 공간은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집의 정면에 악마적 분위기를 드리웠다. 그 원인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나 광기 어린 배치와, 고약하게 비틀린 각도와, 하늘을 등진 지붕을 보노라면 절망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힐 하우스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텅 빈 유리창은 노려보는 듯했고, 지붕의 눈썹 꼴 창문은 누군가의 불행을 고소해하며 비웃는 듯해 섬뜩했다. 보통 특이하거나 기이한 각도로 지어진 건물은 사람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뜬금없는 자그마한 굴뚝이나 보조개처럼 팬 지붕창조차 구경꾼들에게 유대감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만과 증오를 담은 채 항상 경계하는 집은 사악함이 넘실댈 수밖에 없다. - P73

이 집은 집을 짓는 사람들의 손길 아래서 스스로 강력한 형식을 추구해 자신만의 선과 각도를 완성한 것만 같았다.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머리를 쳐든 힐 하우스에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친절이라고는 없으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위한 곳이 아닌 듯했다. 사람이나 사랑, 희망에 전혀 맞지 않는 건물이었다. 구마 의식을 한다고 해도 이 집의 표정을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힐 하우스는 파괴될 때까지 이런 몰골로 서 있을 터였다. - P73

엘리너는 도덕적 의지를 십분 발휘해 발을 들어 현관 계단을 디뎠다. 힐 하우스와 처음 접촉할 때 너무도 꺼려졌던 까닭은 이 집이 사악한 동기를 품고서 끈질기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리라.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마침내 노래를 다 기억해 낸 그녀는 깔깔 웃으며 힐 하우스 계단에 서 있었다.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그녀는 현관 베란다와 현관문을 향해 단호히 올라갔다. 힐 하우스가 다가와 그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무 베란다를 밟는 소리는 절대적 침묵 속의 분노 같았다. 힐 하우스의 바닥은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밟힌 적 없으리라. - P75

여기 힐 하우스의 푸른 방에 내가 있어, 하고 그녀는 나직이 소리 내어 말했다. 의문의 여지 없이 푸른 방이기는 했다. 푸른색 줄 무늬 커튼이 두 창문에 걸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현관 베란다 지붕과 잔디밭이 내다보였다. 바닥에 푸른 무늬의 카펫이 깔려 있고, 침대에 푸른색 침대보가 펼쳐져 있고, 침대 발치에 푸른색 퀼트 이불이 놓여 있었다. 벽은 어깨 높이까지는 시커먼 목재였지만, 그 위로는 자그마하고 섬세한 푸른 꽃다발이나 화환이 그려진 벽지로 꾸며져 있었다. 아마도 한때 누군가가 힐 하우스의 푸른 방을 앙증맞은 꽃무늬로 환하게 꾸미려 했던 모양이었다. 힐 하우스에서 그런 희망은 모조리 증발해 버려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리라. 머나먼 곳에서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메아리가 되듯······. 엘리너는 방 전체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며 부르르 떨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형편없이 설계된 방이었다. 어디를 보나 섬뜩하도록 엉망이었다. 한쪽 벽은 눈에 거슬릴 만큼 긴 반면, 다른 쪽 벽은 숨 막힐 만큼 짧았다. 기가 막혔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라니. 저 높다란 구석에서 어떤 악몽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을까. 무심한 공포의 숨결이 내 입으로 다가와······. - P80

"언덕은 쓰러지지 않아요. 그저 산사태가 날 뿐이죠. 소리 없이 은밀히. 우리가 달아나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를 덮치겠죠." - P93

"항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죠." - P94

"사람들은 이름 붙일 수만 있다면, 심지어 무의미한 이름일지언정 과학적인 분위기를 띤 이름이기만 하면 그걸로 세상만사를 규정해 버리고 싶어 안달하죠." - P122

"그리하여 이 오래된 집이 이렇게 홀로 서 있게 된 거군요. 만지는 이 없이, 사용하는 이 없이, 필요로 하는 이마저 없는 채로 여기 이렇게 생각에 잠겨 홀로 서 있게 된 거군요." - P136

엘리너는 뜻밖에 자기 발을 찬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어도라는 눈앞에서 불타는 벽난로를 꿈꾸듯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너는 붉은색 샌들을 신은 자기 발이 근사하다는 깊은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붉은 신발을 신은 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나는 완전하고 독자적인 존재야. 오직 나에게만 속하는 특성을 소유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 나는 빨간 샌들을 신고 있고, 이로써 나는 엘리너인 것이지. 나는 가재를 싫어하고, 왼쪽으로 누워 자고, 초조할 때면 손마디를 꺾고, 단추를 모으지. 나는 내 브랜디 잔을 들고 있어, 나는 여기 있고, 잔을 사용하고 있고, 이 방에 내 자리도 있지. 나는 빨간 신발을 신었고, 내일 아침에 깨어나도 여전히 여기 있을 거야. - P137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즐겁다니 별나기도 하지.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겠어. - P144

엘리너는 푸른 방의 문을 닫고서, 힐 하우스의 어둠과 압박으로 피곤한 것은 아닌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푸른 침대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그녀는 졸음에 잠긴 채 생각했다. 이상해. 집 자체는 이렇게 섬뜩한데 많은 점에서 이토록 안락할 수 있다니. 폭신한 침대, 쾌적한 잔디밭, 따뜻한 벽난로, 더들리 부인의 요리. 실험에 동참한 다른 사람들까지 너무나 좋아.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 혼자이니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어. 루크는 왜 여기 왔을까? 하긴 나 역시 여기 왜 온 걸까?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내가 겁을 먹은 걸 모두들 봤어.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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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나는 세상이 무척 넓은 곳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무렵 우리 식구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갔다. 하루를 꼬박 달린 완행열차는 세상이 무진장 넓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내가 정확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어릴 적 기억은, 어머니 품에 꼭 안겨 바라보던 차창 밖의 깜깜한 밤 풍경이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그건 내가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든 상관 없이, 나한테 의미 있는 세상이라곤 고작 어머니 품속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 P10

서양의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홉 살은 세상을 느낄 만한 나이이다." 다행히 내 아홉 살은 지나치게 행복했던 편은 아니었고, 그리하여 나 또한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 P12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이 차이의 슬픔을 아버지도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침내 산꼭대기에나마 우리 집을 마련한 것이리라. - P17

비겁한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두렵다기보다는 성가신 일이다. - P28

슬픔과 절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이 산동네에는 더더욱 많은 슬픔과 절망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정작 그 당사자들은 슬픔과 절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희망이라는 거울에 비출 때만이 실감이 나는 법이다. 거울이 없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있었으랴. 기쁨과 희망의 거울을 갖지 못한 산동네 사람들은 슬픔과 절망이 마치 자신의 얼굴처럼 당연히 달려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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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면, 이 순간 죽음이 내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두렵다. - P139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자는 것처럼 죽고 싶다. […] 얼마나 대단한 박사들인지는 모르지만, 만난 적도 없는 정형외과 선생이니 마취과 박사니 뢴트겐과 선생들에게 둘러싸여 사뭇 대단한 사람인 양 대접받으며 숨이 막혀 죽어 가기는 싫다. 그런 긴박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호흡 곤란이 일어나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하고 차차 인사불성이 되어 기관지에 튜브를 꽂았을 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죽음에 동반하는 고통과 긴박감과 공포감은 질색이다. 필시 그 순간 칠십 평생 쌓은 갖가지 악행들이 주마등처럼 잇따라 나타나겠지. 아아, 자네는 이런 짓도 했군. 그런 짓도 했군. 그러고도 편히 죽으려 하다니 너무 뻔뻔하군. 지금 이렇게 고통받는 건 당연해. 꼴좋다. 어디에선가 그런 소리도 들릴 것이다. - P140

그녀가 돌을 짓밟으며 ‘나는 지금 노망난 그 늙은이의 뼈를 이 땅속에서 짓밟고 있다.‘라고 느낄 때, 내 혼도 어디에선가 살아서 그녀의 무게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하고, 곱고 만질만질한 발바닥의 부드러움을 느끼리라. 죽어서라도 나는 느껴 볼 것이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 땅속에서 기꺼이 그녀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내 혼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어쩌면 흙 속에서 뼈와 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뒤얽혀서 서로 웃으며 노래하고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릴지 모른다. 아니, 그녀가 실제로 돌을 밟고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을 모델로 한 불족석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돌 아래에서 뼈가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릴 터다. 나는 울면서 ‘아파, 아파‘라고 외칠 것이며, ‘아프지만 즐거워, 더없이 즐거워,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즐거워.‘라고 외칠 테다. 또 ‘더 밟아 줘. 더 세게 밟아 줘‘라고 외치리라.······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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