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누군가의 부재가 왜 고통이 되는가. 부재가 곧 무지의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사람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 한다. 한때 있었다가 없어진 것/사람은 지금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고통스럽다. 연인들은 곁에 없는 연인이, 심지어 조금 전에 헤어졌어도, 지금 무얼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이 의심과 불안은 고통을 만들고, 이 고통이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로, 기만적인 순화의 과정을 거쳐, 표현된다. - P59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없이 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 P63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면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다.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게 되면 그리워할 때의 반응인 설렘은 의심과 불안, 고통과 함께 사라진다. 설렘이 의심과 불안, 고통을 데리고 사라진다. 그 순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과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깨닫고, 잠시 안도한다. 울퉁불퉁한 감정에서 해방된다. 평평해진다. 정착한다. 멈춘다.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멈춘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모르니까 멈춘다. 멈춘 사람은 더 가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지식을 손에 쥔 사람이다. 교만은 멈춤의 다른 말이다. 더 가야하는 사람, 더 가야 해서 멈추지 못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 P63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오래 응시하며 서 있는 소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소년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다였을까? 출렁이는 물, 꿈틀거리거나 흐느적거리는, 삼키려고 덤비거나 등에 태우고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 같은 물, 크고 멀고 아득한 눈앞의 물이었을까? 꼭 그랬던 것 같지 않다. 내 기억은 바다가 허공과 같았다고 떠올린다. 내 기억은 내 눈이 그 허공 너머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바다는 거기 없는 것을 보게 하려고 거기 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 P66

향수가 보았던 바다를 다시 보려는 마음이라면, 추구는 본 적 없는 바다 너머를 새로 보려는 마음이다. 향수가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그리움이라면, 추구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얻으려는 그리움이다. 향수가 현실이 불완전하거나 낯설기 때문에 완전한,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익숙한 세계로 귀환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면, 추구는 이 익숙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부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모르는, 낯선 세계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분명한 세계 너머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세계를 지향하게 하는 열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리움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다른 차원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초대된 다른 차원이 우리를 끌어 올린다. 바깥으로, 위로. 말하자면 초월. 레비나스는 초월을 횡단하는 trans 운동이자 상승하는 scando 운동이라고 했다.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P71

얼굴은 독자적이고 고유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피해 달아난다. 마주볼 수 있을 뿐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얼굴이다. 붙잡으려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얼굴은 무수히 많은 기호가 모여 있는 장소여서, 붙잡았다 하면 달아나고 파악했다 하면 벗어난다. 절대로 고정되지 않는다. - P74

‘몸의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맞물리도록 꼭 붙‘이려면, 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과 손을 사용해야 한다. 두 팔로 감싸서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이쪽 손과 저쪽 손을 상대의 등뒤에서 맞잡고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 팔과 손으로 하는 것이 포옹이다. 이때 두 팔과 두 손은 연인을 가두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때 연인의 팔과 손은 수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포옹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사랑은 가두고 잠근다. 틈을 없애기 위해서이고, 틈이 생길 여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P79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반복해서 쓰다듬는 연인의 손길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초조하다. 닿을 듯 말 듯해서 안타깝다. 이 초조와 안타까움은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부정하려는 몸짓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얻으려고 한 것을 얻지 못한다. 어쩌면, 얻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갈망하지만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무의 손길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 위에서 끝없이 맴도는, 맴돌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애무는 손으로 하지만, 그러나 레비나스를 따라 말하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애무는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 (『시간과 타자,)이고, "애무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며, 폭력은 실패하고 소유는 거부된다."(『존재에서 존재자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소유/정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험은 멈추지 않는다. - P81

첫 키스의 순간에, 첫 키스와 함께 사랑이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든다고.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원을 꿈꾸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사랑이 기본적으로 영원을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84

살아 있다는 건 시간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하고 움직인다. 시간은 시간 위에 있는 것들을 흔들고 요동치게 한다. 삶은 시간의 변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시간 위에 있는 한 완전한 평온과 고요는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영원에 속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려면 시간 너머로, 시간을 초월한 자리로 건너가야 한다. - P87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90

발화의 순간 단어는 재정의된다. 발화자의 조건과 발화의 상황에 의해 단어의 뜻이 새로 부여된다.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말은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에 의해 출현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이 말의 뜻을 재부여하기 때문에, 기존의 사전, 사전 속의 정의가 무색해지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말은 누군가에 의한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말하는 순간 단어들은 다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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