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녀는 데버라 리였다. 데버라 홀랜드도, 데버라 슬레인도 아닌 데버라 리. 늙은 여인은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호숫가를 거니는 여자아이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늙은 여인의 시선은 유년기 전체를 관통했다. 사실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촉촉하고, 흔들거리고, 청순하고, 열정적이고 넉넉하지만 수줍은 충동에 부풀어 오른 것. 새끼 토끼처럼 겁이 많고, 나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암사슴처럼 날쌔고 은밀하며, 대기를 무대로 삼은 댄서처럼 발이 가볍고, 다마스크 장미처럼 연하고 향긋하며, 분수처럼 웃음이 가득한 것. 그래, 그것이 젊음이었다. 낯선 집 앞을 서성이는 아이처럼 두려워하면서도, 가슴에 창을 맞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시기. - P109
그녀는 흘러간 야망의 여정을 따라 갈 작정이었다. 탄생의 비밀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몸 안에 안착하여 성장하고, 피처럼 흐르다가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들어 꺾이게 될 마지막 순간까지 전부 더듬어 볼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야망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했다. 이를테면 그녀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현실적인 것, 다른 여자들이 현실적이라고 여길 만한 것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현실에 머무를 수 없었고, 최대한 오래, 그 초월적 현실에 매달려야 했다. 초월적 현실은 아주 견고했으며, 한때 그것이 인생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이었다. 그녀는 떠들기만 하지 않고,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초월적 현실은 강한 사랑만이 발휘할 수 있는, 깊숙이 파고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기억 속을 더듬어 꺼낸 연애담처럼 희미하고 싸늘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과 같은 희열감에, 전과 같은 고양감 에 새삼 활활 타올랐다. 그런 황홀감 속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얼마나 근사하고, 어렵고, 또 지극히 가치 있는 삶인가! 그녀는 수습 수녀보다 훨씬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그녀는 팽팽하게 조인 철사처럼 손짓 한 번에도 파르르 떨었다. 갓 태어나서 조금도 힘을 잃지 않은 어린 신처럼 자신만만했다. 그녀 마음속에선 이미지가 뭉클거렸는데, 저마다 모두 지극히 서정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적합했으리라. 주홍색 망토, 검 같은 것은 그런 뜨거운 열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롭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신에게 맹세코, 지금 그녀 몸속을 흐르는 젊음의 피를 위해서라면 살아 볼 가치가 있었다! 예술가, 창조자의 삶. 자세히 관찰하고 거침없이 느끼는 삶. 한 번의 눈길만으로 광활한 전경과 세세한 부분을 전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삶. 그녀는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그림자의 원물보다 더 흥미로웠음을 기억 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이나 햇빛 속의 튤립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자기 머릿속의 패턴에 맞춰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애쓰던 순간도 기억했다. - P111
데버라는 여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여기는, 사치스러운 여성주의적 사고관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녀가 보기에 자신의 본질과 운 명 사이의 간극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와 몽상가 사이의 간극이었다. 데버라가 여성이고 헨리가 남성인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황이 악화된 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뒤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P122
살아온 모든 나날들을 총합하면 그저 삶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평생의 삶에 대고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묻기는 부조리했다. 꼭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두고 던지는 질문 같았다. 아니, 불가해하고 다채로우며 변화무쌍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어로 위장한 질문 같았다. 삶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말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호수의 물을 단단한 공으로 압축하는 일처럼. - P126
우리가 사는 이 삶은 호흡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죽음의 자아, 그것이 순례를 떠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여행의 짤막한 첫 단계를 걷는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40
레이디 슬레인은 햄스테드 히스를 향해 느긋느긋 언덕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그들은 평온한 삶에 안착했다. 이제 그녀와 제누는 고요하고 오붓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감사해하고 제누는 헌신하며, 또 속으로는 누가 먼저 떠나게 될지 추측하며, 그렇게 단단한 유대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드물게 손님이 다녀가면, 그 뒤로 현관문을 굳게 닫을 때마다 두 사람 모두 방해꾼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지 잔잔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사실 그들의 기력으로 살 수 있는 삶이란 그런 삶뿐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데에 진력이 났다. 물론 이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 P143
이제는 소소한 것들이 그녀의 삶을 구성했다. 제누와의 공감,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향한 흥미, 화요일마다 예정된 예의 바른 벅트라우트 씨의 방문, 서리 내리는 아침에 햄스테드 히스에서 연 날리는 남자아이들을 구경하는 즐거움 같은 것들…... 나이 들어서 뼈가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만큼 꽁꽁 언 현관을 오르다가 미끄러질까 봐 걱정하는 일 역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사소한 것들, 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은 거대한 풍경, 즉 죽음의 풍경 위에서 고귀함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회화 중에 투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를 – 포플러와 버드나무와 오리나무였다. – 묘사하면서 나뭇잎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그 결까지 빈틈없이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그녀의 삶을 이루는 작은 것들은 바로 그런 그림 속의 나뭇잎 같았다. 찬란한 영원과 병치되며 심오한 가치를 얻은 것이다. 마침내 뻔하고 초라하고 힘겨운 삶은 끝났으며 이제 궁극의 모험만이 남았다는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모험은 이 궁극의 모험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최후의 순간까지 경이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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