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정말 희한했다. 죽기 전에 이런 막간의 즐거움을 맛보다니, 평생 살아온 삶에서 – 맡아 온 일에서, 자식들에게서, 헨리 에게서 – 멀찍이 물러선 끝에 이토록 흡족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새로운 생활을 얻다니! 이 같은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은 레이디 슬레인 자신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는 것이 인생인지도 몰라." 그러고는 오래된 책 하나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펴고 읽기 시작 했다.

맹세하지 말라, 거창하게 장담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 과시하지 말라, 증오하지 말라, 모독하지 말라, 악행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분노하지 말라, 음탕한 짓을 하지 말라, 사기 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혀를 놀려 험담하지 말라.

레이디 슬레인이 유념해 온 덕목들을 벌써 – 누군가가 그녀는 날짜를 확인했다. – 무려 1493년에 정리해 두었다니, 분명 굉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음 연도 읽었다.

피상적인 허위를 피하라, 혹독하게 휘발하는 혹취이므로.
포식자의 환심을 피하라, 희번지르르하므로.
버스러질 호감정을 피하라, 허황한 환담이므로.
패배자들의 폭력을 피하라, 편견이 흔하므로.
흥분한 폭군을 피하라, 표독함으로써 행복하므로.
허수아비의 허위를, 호의적인 환상을 피하라.
허무맹랑한 해찰을 피하라, 편녕하는 허구이므로. - P155

이토록 기이하고 무례하고 바보 같은 사랑 고백은 레이디 슬레인의 마음에 연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남편을 향한 충심을 거슬렀고 노년의 평화를 방해했다. 유년의 혼란을 되살렸다. 그녀는 작은 충격을 느꼈고, 동시에 그것보다 큰 기쁨을 느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무수한 회고와 단 하나의 바람으로 채워지고 있었으니까. 피츠조지 씨는 마치 무엇을 느껴야 할지 이미 정해 놓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침입한 듯했다. - P164

케이를 좋아하시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물었다.
"좋아하냐고요?" 피츠조지 씨는 놀라서 되물었다. "글쎄요. 난 케이가 익숙하지요. 맞아요,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서로를 잘 이해하니 공연히 귀찮게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서로 익숙한 사이입니다. 이쯤 해 두지요. 우리 나이에는 익숙한 것 말고 다 성가신 법이니까." - P171

과거의 나날은 세월이라는 장막을 드리우고 바라보아도 그녀의 약해진 시력에는 지나치게 밝았지만. - P172

케이는 우물쭈물 창가로 가서 피츠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비교했다. 두 사람은 실로 다른 삶을 살았다. 피츠는 세상을 비웃었고, 자기만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삶을 살았으며,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아무한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웬 신문에서 런던의 괴짜들에 관한 기사를 냈을 때였다. "세상에!" 그가 말했다. "사생활을 지키며 산다고 괴짜라니?" 그는 자기 이름이 포함되었음을 발견하고 분노했다. 사람들이 흔히 타인에게 표하는 호기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박하고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피츠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 세상사에 전연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세상에 침잠해서 자신의 소장품과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만의 종교였고 사색이었다. 그러니 그의 외로운 죽음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삶과 완전히 부합했으니까. - P179

"가장 작은 행성도," 벅트라우트 씨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좋든 싫든 부와 지위와 소유물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나는 피츠조지 씨가 현명한 줄 알았어요. 벅트라우트 씨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 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절박하게 공감을 구했다. "나는 마침내 그런 것들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츠조지 씨가 다시 그 속으로 날 밀어 넣었어요. 어쩌면 좋지요, 버트라우트 씨? 난 어떡해야 하나요? 피츠조지 씨는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했으리라 믿어요. 그렇지만 난 그런 것에는 깜깜하다고요. 난 항상 인간의 작품보다 신의 작품을 더 좋아했어요. 신의 작품은 백만장자든 빈털터리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열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작품은 백만장자만 누릴 수 있지 요.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든 못 하든 훗날 값을 치를 백만장자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물론 피츠조지 씨가 값을 따지면서 고가의 예술품만 모았다는 소리는 아니지요.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을 감정했어요. 게다가 구두쇠였잖아요. 시장 가치에 맞게 값을 치르기는커녕 훨씬 싼값을 내야 즐거워했다고요. 그러면서 인간의 작품이 아닌 신의 작품을 손에 넣은 양 느꼈을 테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려나요."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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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녀는 데버라 리였다. 데버라 홀랜드도, 데버라 슬레인도 아닌 데버라 리. 늙은 여인은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호숫가를 거니는 여자아이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늙은 여인의 시선은 유년기 전체를 관통했다. 사실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촉촉하고, 흔들거리고, 청순하고, 열정적이고 넉넉하지만 수줍은 충동에 부풀어 오른 것. 새끼 토끼처럼 겁이 많고, 나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암사슴처럼 날쌔고 은밀하며, 대기를 무대로 삼은 댄서처럼 발이 가볍고, 다마스크 장미처럼 연하고 향긋하며, 분수처럼 웃음이 가득한 것. 그래, 그것이 젊음이었다. 낯선 집 앞을 서성이는 아이처럼 두려워하면서도, 가슴에 창을 맞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시기. - P109

그녀는 흘러간 야망의 여정을 따라 갈 작정이었다. 탄생의 비밀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몸 안에 안착하여 성장하고, 피처럼 흐르다가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들어 꺾이게 될 마지막 순간까지 전부 더듬어 볼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야망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했다. 이를테면 그녀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현실적인 것, 다른 여자들이 현실적이라고 여길 만한 것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현실에 머무를 수 없었고, 최대한 오래, 그 초월적 현실에 매달려야 했다. 초월적 현실은 아주 견고했으며, 한때 그것이 인생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이었다. 그녀는 떠들기만 하지 않고,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초월적 현실은 강한 사랑만이 발휘할 수 있는, 깊숙이 파고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기억 속을 더듬어 꺼낸 연애담처럼 희미하고 싸늘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과 같은 희열감에, 전과 같은 고양감 에 새삼 활활 타올랐다. 그런 황홀감 속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얼마나 근사하고, 어렵고, 또 지극히 가치 있는 삶인가! 그녀는 수습 수녀보다 훨씬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그녀는 팽팽하게 조인 철사처럼 손짓 한 번에도 파르르 떨었다. 갓 태어나서 조금도 힘을 잃지 않은 어린 신처럼 자신만만했다. 그녀 마음속에선 이미지가 뭉클거렸는데, 저마다 모두 지극히 서정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적합했으리라. 주홍색 망토, 검 같은 것은 그런 뜨거운 열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롭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신에게 맹세코, 지금 그녀 몸속을 흐르는 젊음의 피를 위해서라면 살아 볼 가치가 있었다! 예술가, 창조자의 삶. 자세히 관찰하고 거침없이 느끼는 삶. 한 번의 눈길만으로 광활한 전경과 세세한 부분을 전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삶. 그녀는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그림자의 원물보다 더 흥미로웠음을 기억 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이나 햇빛 속의 튤립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자기 머릿속의 패턴에 맞춰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애쓰던 순간도 기억했다. - P111

데버라는 여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여기는, 사치스러운 여성주의적 사고관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녀가 보기에 자신의 본질과 운 명 사이의 간극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와 몽상가 사이의 간극이었다. 데버라가 여성이고 헨리가 남성인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황이 악화된 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뒤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P122

살아온 모든 나날들을 총합하면 그저 삶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평생의 삶에 대고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묻기는 부조리했다. 꼭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두고 던지는 질문 같았다. 아니, 불가해하고 다채로우며 변화무쌍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어로 위장한 질문 같았다. 삶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말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호수의 물을 단단한 공으로 압축하는 일처럼. - P126

우리가 사는 이 삶은 호흡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죽음의 자아, 그것이 순례를 떠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여행의 짤막한 첫 단계를 걷는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40

레이디 슬레인은 햄스테드 히스를 향해 느긋느긋 언덕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그들은 평온한 삶에 안착했다. 이제 그녀와 제누는 고요하고 오붓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감사해하고 제누는 헌신하며, 또 속으로는 누가 먼저 떠나게 될지 추측하며, 그렇게 단단한 유대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드물게 손님이 다녀가면, 그 뒤로 현관문을 굳게 닫을 때마다 두 사람 모두 방해꾼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지 잔잔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사실 그들의 기력으로 살 수 있는 삶이란 그런 삶뿐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데에 진력이 났다. 물론 이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 P143

이제는 소소한 것들이 그녀의 삶을 구성했다. 제누와의 공감,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향한 흥미, 화요일마다 예정된 예의 바른 벅트라우트 씨의 방문, 서리 내리는 아침에 햄스테드 히스에서 연 날리는 남자아이들을 구경하는 즐거움 같은 것들…... 나이 들어서 뼈가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만큼 꽁꽁 언 현관을 오르다가 미끄러질까 봐 걱정하는 일 역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사소한 것들, 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은 거대한 풍경, 즉 죽음의 풍경 위에서 고귀함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회화 중에 투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를 – 포플러와 버드나무와 오리나무였다. – 묘사하면서 나뭇잎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그 결까지 빈틈없이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그녀의 삶을 이루는 작은 것들은 바로 그런 그림 속의 나뭇잎 같았다. 찬란한 영원과 병치되며 심오한 가치를 얻은 것이다.
마침내 뻔하고 초라하고 힘겨운 삶은 끝났으며 이제 궁극의 모험만이 남았다는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모험은 이 궁극의 모험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최후의 순간까지 경이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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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오면서 저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아주 많지만, 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인생은 순식간이에요, 레이디 슬레인. 그래서 사람은 한없이 과거로 날아가는 현재의 꽁무니라도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어제나 내일을 생각하는데 몰두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어제는 영영 갔고, 내일은 물음표뿐이니까요. 장담합니다, 심지어 오늘조차 위태롭지요. - P93

그들과의 관계가 선사하는 위안과 해방감은 참으로 기묘했다! 노년기의 피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소망이 이루어진 듯한 벅찬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모든 결정과 책임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어린 시절로, 세상은 따뜻하고 상냥한 곳이라고 굳게 믿으며 마음껏 꿈을 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온과 사색을 위해 살리라고, 분투하고 계획에 얽매이고 애써야 하는 삶은 거부하리라고. 그런 삶은 거짓이었다. 그래! 거짓이고 말고, 하고 외치며 레이디 슬레인은 한 손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반대쪽 손바닥을 때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기력이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저 세상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예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신에게 열의가 부족하다고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색을 통해서는 (그리고 오래전에 선택했다가 단념하고 말았던 어떤 애호를 통해서는) 결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의 자식들보다 진정한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0

여자의 마음속은 적막했다,
거리의 소음과 군중에도 개의치 않고.
손에 서두름이 없었으며
발에도 서두름은 없었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04

늦여름의 햇살 아래, 햄스테드 집의 남쪽 벽을 따라 늘어선 잘 익은 복숭아 밑에서, 그녀는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앉아 헨리와 약혼했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는 날이면 날마다 여유가 넘쳐서 방금 지나온 산책길을 뒤돌아보듯 자신의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마침내 삶의 기억은 외떨어진 밭뙈기들이나 파편화된 사건들이 아닌, 거대한 풍경이자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서 밀려왔다. - P105

그때 헨리가 백조 이야기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술수였다는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어느 틈엔가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자기가 긴장했음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 몸을 앞으로 굽힌 채 그녀의 드레스 한쪽을 만졌다. 꼭 두 사람을 하나로 엮으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헨리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긴 듯했고, 손을 뻗어서 헨리 볼 위의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을 만져 보고 싶은 욕망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 반드시 진중한 목소리로 전해야 했던 말들, 그 무거운 의미가 어조에 오롯이 실려야 했던 말들. 마음속 어느 진지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만들어 낸 듯한, 마음의 우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듯한 말들. 버겁고 성숙한 영역에 속한 말들. 그런 말들이 번개같이 그녀와 헨리의 유대를 끊어 버렸다. 독수리가 두 발로 헨리를 낚아채서 하늘로 날아갔더라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았으리라. 헨리는 사라졌다. 그녀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열심히 헨리의 얼굴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이미 그가 멀리 멀리 사라졌음을 알았다. - P106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정확히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스스로를 돌아보는 늙은 여자로서 자문했다. 이러한 궁금증은 아주 편안하고 아련한 심심풀이였지만 결코 멜랑콜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최후의 사치, 궁극적인 사치였다. 한평생 누리고 싶었던 사치였다. 이제야 죽음을 유예한 채 이 사치를 만 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 아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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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텐트를 돌고 또 돌았다. 다시 돌고, 또 돌고, 그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버려서, 땀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리넨 원피스 여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서로를 살피는 저 친절들이 자꾸 나를 건드려서, 나는 그곳에 더 있지 못하고 비칠비칠 로비 입구로 걸어나갔다. 손 조심이라고 쓰여 있는 유리문의 잠금장치를 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 앞에 섰다. 내가 밀폐된 공간에 있다는 자각이 그제야 한꺼번 에 밀려오며 갑자기 호흡을 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린 비상 상황이 되자 나는 내게 또렷하게 새겨진 그 감각을, 계곡물 소리가 주던 두려움을, 내가 움켜쥐었다 놓친 로프의 감촉을, 순식간에 다시 나를 감아올리던 누군가의 안간힘을 그대로 다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 P158

멜로와 로맨스는 닮은 얼굴을 한 다른 성격의 형제와 같다. - P198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가 그녀와 친구들 앞에 앉았다. 남자는 커피잔을 밀 어내고 사주 책과 노트, 펜을 늘어놓았다. 커피가 남자의 노트에 흘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와 친구들은 차례로 생년월일시를 읊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애처롭고 무기력한 기운이 무방비하게 새어나왔다. 죄를 저지르고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나중에 그녀는, 그것이 진부할지언정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운명 앞에서는 겁에 질리기 마련 이니까. 아닌가, 겁에 질리니까 죄를 짓게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무래도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았다. - P217

그 이듬해 그녀는 사립 중학교에 기간제 미술 교사로 취직했다.
스물한 살, 미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녀는 선생님이 되는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사주 보는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전시회에서 그림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런 소망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가느다란 줄의 끝에서부터 힘없이 타들어가다가 결국엔 꺼지고 마는 불꽃처럼.
너무 적은 양의 기름, 너무 가느다란 줄, 너무 약한 불. 삼박자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 P219

"돌아가요. 개는 죽을 겁니다. 죽을 거라고요. 당신 때문에."
수의사는 화난 듯 내뱉었다. 유감이나 위로의 표현은 없었다.
보름 후, 작은 개가 죽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의사의 이름을 잘못 기억해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기억해냈다면 개가 죽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더 흐르자 이름을 잘못 기억한 건 문제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죄는 교만이었다. 잘못 떠올린 이름을 그대로 믿어버린 것. 더 나아가서는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고 자신을 과신한 것. 그것 때문에 개가 죽었다. - P252

무용담이 될 거라던 선장의 말이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맞았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방금 자신들이 겪은 일을 서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허세, 과장, 술회하는 듯한 태도. 모두가 함께 겪은 일이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아무도 (의도된) 오류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세부 사항을 추가하고 부풀리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질 것이었다.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 축소되고 쪼그라들 것이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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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젤다는 계절과 관련된 표현들을 짚어주었다. 젊었을 때 그는 가을을 탄다는 게 뭔지 몰랐다. 오십대가 되니 그게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삶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나갔고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빛은 낙엽을 닮아갔다. 그는 강 쪽으로 걸어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과 멀리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과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오리배들을 보았다. 오리배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묶고 있는 줄을 풀면 오리배들은 어디로 떠내려갈까. 영어 수업을 그만두게 되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P106

그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후드 집업을 걸치고 일어나서 창 너머의 하늘과 길게 이어지는 철도, 그 위로 지나가는 전철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볼 때 전철의 움직임은 다른 시공간의 일처럼 낯설고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그는 늦가을의 풍경이, 풍부한 색채로 잎을 떨구는 늦가을의 나무가 앙상해진 겨울나무보다 더 쓸쓸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 P116

그는 스터디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업 내용을 정리한 프린트가 놓여 있었다. 물컵은 비었고 두 사람의 음료 잔에는 다른 색의 얼룩이 남았다.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젤다가 먼저 나갔고 그는 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다. 젤다와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그는 프린트를 여러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창 너머 보이는 철도 위로 전철이 천천히 지나갔다. 토요일에 그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언제나 그 철도를 볼 수 있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그 장면들은 늘 다음 토요일로 이어졌지만 이제 그는 토요일에 로건으로 지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토요일 오전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쟁반을 들자 4인용 테이블이 텅 비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스터디룸을 한번 둘러보았다. 수업은 끝났지만 그에게는 몇 개의 장면들이 남아 있었다. - P122

대기가 차가워지면 사람들은 목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목을 가리면 나는 안심이 된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이 다시 목을 드러내면, 그때부턴 가슴이 뛴다. 여름이면 나는 매일 가슴이 뛴다. 사람들이 저렇게 쉽게 급소를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다. - P135

나한테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게 뭘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어준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친절한 사람이요.
저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해요.
나는 툭하면 누군가를 좋아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기간엔 내내 가라앉아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기꺼이, 기필코 좋아해버린다. 내시경실 베드에 누울 때 긴장하지 말라고 손을 잡아주던 간호사를 나는 그날 하루종일 좋아했다.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어, 어, 하며 몸이 떠밀려갈 때 재빨리 내 팔을 잡아당겨주던 남자를 나는 일주일 동안이나 좋아했 다. 빗물과 눈물과 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로프에서 풀려났을 때, 내게 다가와 담요를 둘러주던 구조대원을 나는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 이상하고 뜨거운 여름에 대피소 한쪽에서 같이 훌라후프를 돌렸던 여자도 나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 P151

"저 기억하세요?"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벌써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나는 방습재 돗자리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눈썹 문신 여자한테 다가가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실내에서 가까이 앉고 보니 그녀는 짐작했던 것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다. 여자는 팥과 소금을 얘기하는 것인지 아이스 쿨 타월을 얘기하는 것인지 잠시 가늠하는 것 같더니 둘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가 막상 몇 해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하자 새삼스레 가슴이 묵직해져왔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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