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종달새나 베짱이도 꿈을 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 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 P35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라 그녀가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 언니뿐이었다. 형부와 다섯 살짜리 조카딸도 꼴 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주변에 친구라고는 없었다. 앓아 누운 어머니를 돌보느라 십일 년을 보낸 탓이 컸는데, 덕분에 간호사 노릇은 능숙해졌지만 강한 햇빛을 쬐면 눈을 계속 깜박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른이 된 후 진심으로 행복을 느낀 순간은 없었다. 어머니를 돌보며 보낸 세월은 작은 죄책감과 자잘한 치욕과 끊임없는 피로와 끝이 없는 절망을 그녀 주위로 굳건히 쌓아 올렸다. 바란 적도 없었건만 조용한 운둔자의 삶을 살며 사랑할 사람 하나 없이 긴 세월을 홀로 보내다 보니, 엘리너는 다른 사람과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때도 괜한 자의식에 머뭇대며 적절한 표현을 떠올리지 못했다. - P39
어쩌다 여름을 헛되이 보냈더란 말인가? 매년 초여름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다니. 그러면서도 그녀는 현명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진실로 허비되는 것은 없으며, 심지어 그 어떤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다 매년 어느 여름날 아침,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는데 따뜻한 바람이 스쳐 가면 섬뜩한 생각이 살며시 떠오르곤 했다. 또 시간을 허비했구나. - P50
그녀는 즐거운 고독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래에서 유쾌하게 콸콸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를 들었다. 곧 여행이 끝나겠지. 벌써 반 이상 왔어. 여행이 끝나다니. 머릿 속에서 어떤 노래의 일부가 개울처럼 반짝이며 맴을 돌았다. 가사가 아련히 떠올랐다. 시간을 허비한들 무엇을 얻으리. 시간을 허비한들 무엇을 얻으리. - P58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는 정문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의구심이 들었다. 높다랗고 육중한데다 불길해 보이는 철제 정문은 나무들 사이로 우뚝 선 돌담에 굳건히 박혀 있었다. 심지어 차에서도 빗장을 휘감고 있는 사슬과 자물쇠가 보였다. 정문 너머로는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만 보일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길 양편에 선 고요하고 시커먼 나무들의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 정문은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쇠사슬과 빗장으로 이중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녀는 도저히 차에서 내릴 마음이 안 들었다. 그래서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에 나무와 정문이 부르르 떨며 슬쩍 움츠리는 듯했다. - P66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이었다. 몸을 부르르 떠는 동안,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갈겨 댔다. 힐 하우스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고, 병들었어. 지금 즉시 떠나야 해. - P72
힐 하우스의 선과 공간은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집의 정면에 악마적 분위기를 드리웠다. 그 원인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나 광기 어린 배치와, 고약하게 비틀린 각도와, 하늘을 등진 지붕을 보노라면 절망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힐 하우스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텅 빈 유리창은 노려보는 듯했고, 지붕의 눈썹 꼴 창문은 누군가의 불행을 고소해하며 비웃는 듯해 섬뜩했다. 보통 특이하거나 기이한 각도로 지어진 건물은 사람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뜬금없는 자그마한 굴뚝이나 보조개처럼 팬 지붕창조차 구경꾼들에게 유대감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만과 증오를 담은 채 항상 경계하는 집은 사악함이 넘실댈 수밖에 없다. - P73
이 집은 집을 짓는 사람들의 손길 아래서 스스로 강력한 형식을 추구해 자신만의 선과 각도를 완성한 것만 같았다.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머리를 쳐든 힐 하우스에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친절이라고는 없으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위한 곳이 아닌 듯했다. 사람이나 사랑, 희망에 전혀 맞지 않는 건물이었다. 구마 의식을 한다고 해도 이 집의 표정을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힐 하우스는 파괴될 때까지 이런 몰골로 서 있을 터였다. - P73
엘리너는 도덕적 의지를 십분 발휘해 발을 들어 현관 계단을 디뎠다. 힐 하우스와 처음 접촉할 때 너무도 꺼려졌던 까닭은 이 집이 사악한 동기를 품고서 끈질기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리라.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마침내 노래를 다 기억해 낸 그녀는 깔깔 웃으며 힐 하우스 계단에 서 있었다.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그녀는 현관 베란다와 현관문을 향해 단호히 올라갔다. 힐 하우스가 다가와 그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무 베란다를 밟는 소리는 절대적 침묵 속의 분노 같았다. 힐 하우스의 바닥은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밟힌 적 없으리라. - P75
여기 힐 하우스의 푸른 방에 내가 있어, 하고 그녀는 나직이 소리 내어 말했다. 의문의 여지 없이 푸른 방이기는 했다. 푸른색 줄 무늬 커튼이 두 창문에 걸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현관 베란다 지붕과 잔디밭이 내다보였다. 바닥에 푸른 무늬의 카펫이 깔려 있고, 침대에 푸른색 침대보가 펼쳐져 있고, 침대 발치에 푸른색 퀼트 이불이 놓여 있었다. 벽은 어깨 높이까지는 시커먼 목재였지만, 그 위로는 자그마하고 섬세한 푸른 꽃다발이나 화환이 그려진 벽지로 꾸며져 있었다. 아마도 한때 누군가가 힐 하우스의 푸른 방을 앙증맞은 꽃무늬로 환하게 꾸미려 했던 모양이었다. 힐 하우스에서 그런 희망은 모조리 증발해 버려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리라. 머나먼 곳에서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메아리가 되듯······. 엘리너는 방 전체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며 부르르 떨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형편없이 설계된 방이었다. 어디를 보나 섬뜩하도록 엉망이었다. 한쪽 벽은 눈에 거슬릴 만큼 긴 반면, 다른 쪽 벽은 숨 막힐 만큼 짧았다. 기가 막혔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라니. 저 높다란 구석에서 어떤 악몽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을까. 무심한 공포의 숨결이 내 입으로 다가와······. - P80
"언덕은 쓰러지지 않아요. 그저 산사태가 날 뿐이죠. 소리 없이 은밀히. 우리가 달아나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를 덮치겠죠." - P93
"항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죠." - P94
"사람들은 이름 붙일 수만 있다면, 심지어 무의미한 이름일지언정 과학적인 분위기를 띤 이름이기만 하면 그걸로 세상만사를 규정해 버리고 싶어 안달하죠." - P122
"그리하여 이 오래된 집이 이렇게 홀로 서 있게 된 거군요. 만지는 이 없이, 사용하는 이 없이, 필요로 하는 이마저 없는 채로 여기 이렇게 생각에 잠겨 홀로 서 있게 된 거군요." - P136
엘리너는 뜻밖에 자기 발을 찬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어도라는 눈앞에서 불타는 벽난로를 꿈꾸듯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너는 붉은색 샌들을 신은 자기 발이 근사하다는 깊은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붉은 신발을 신은 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나는 완전하고 독자적인 존재야. 오직 나에게만 속하는 특성을 소유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 나는 빨간 샌들을 신고 있고, 이로써 나는 엘리너인 것이지. 나는 가재를 싫어하고, 왼쪽으로 누워 자고, 초조할 때면 손마디를 꺾고, 단추를 모으지. 나는 내 브랜디 잔을 들고 있어, 나는 여기 있고, 잔을 사용하고 있고, 이 방에 내 자리도 있지. 나는 빨간 신발을 신었고, 내일 아침에 깨어나도 여전히 여기 있을 거야. - P137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즐겁다니 별나기도 하지.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겠어. - P144
엘리너는 푸른 방의 문을 닫고서, 힐 하우스의 어둠과 압박으로 피곤한 것은 아닌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푸른 침대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그녀는 졸음에 잠긴 채 생각했다. 이상해. 집 자체는 이렇게 섬뜩한데 많은 점에서 이토록 안락할 수 있다니. 폭신한 침대, 쾌적한 잔디밭, 따뜻한 벽난로, 더들리 부인의 요리. 실험에 동참한 다른 사람들까지 너무나 좋아.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 혼자이니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어. 루크는 왜 여기 왔을까? 하긴 나 역시 여기 왜 온 걸까? 연인과의 만남으로 여행은 끝난다네. 내가 겁을 먹은 걸 모두들 봤어. - P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