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들이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보다 그들의 일기를 선호할 때가 많다. 뭐랄까, 문체나 형식이라는 방해물 없이 내용과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글은 문체와 형식을 품고 있고, 좋은 글에서는 그런 것이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 P21
노트북에 비밀번호를 설정하거나 문서를 잠가두거나 아예 노트북을 숨기는 식으로 내 일기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귀찮은 일을 감수할 만큼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일기장은 비밀이 담긴 보물 상자가 아니다. 그건 단지, 모든 것이다. 어쩌면 일기에 나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가 내 일기를 읽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 - P24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떠난 건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과거의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작과 끝이 전부였다. 살아가는 순간, 기록하는 순간, 그리고 기록한 후에는 안전하게 잊는 순간. 그게 전부였다. - P28
한 친구는 이렇게 썼다. 금이 헬륨과 비슷하면서도 헬륨 이상의 무언가이듯, 결혼은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그 이상의 무언가다. 전자(電子)의 내부 껍질이 꽉 차면 다음 전자가 다음 껍질을 채우면서 결국 원소의 성질 자체를 바꿔버린다. - P30
과거의 교훈을 기억하라.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라. 그리고 현재에, 기억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에 몰두하라. - P32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억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뇌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기억함으로써 오염시킬 수 없는 사람의 뇌 속에 말이다. 기억을 회상할수록, 그 기억에 관한 기억은 더 희미해진다. 기억 그리고 세상의 모든 키스는 어쩌면 두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4
언젠가,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의 조상 중 한 명을 낳은 존재로서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과 내 이름이 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밖의 나에 관한 기억은 더 이상 그 누구의 짐으로도 남지 않고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 P35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내가 가진 오랜 기억의 무게뿐 아니라 부모님이 가진 오랜 기억의 무게까지 느껴질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 P36
내가 잊고 싶은 기억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다. 이토록 끈질긴 기억으로 남은 것들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아무것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사라진다 해도 완전히 잊히는 건 아니니까. 이미 벌어진 모든 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긴다. - P37
나는 지금껏 내가 가진 초기 기억의 배경이 주방 한구석이라고 주장해 왔다. 당시 나는 쿠키 단지에서 쿠키를 꺼낸 일로 야단을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주방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의 뇌가 처음으로 학습하고 간직한 기억은 그게 아니다.
육아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나에게 처음으로 입력된 기억은 엄마라는 존재였을 것이다. - P38
열두 살 때 나는 사진이 내 기억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사건을 담은 사진을 들여다보다 보면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을 차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많은 기억을 잃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뷰파인더를 통해 내 삶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사진 찍기를 그만두었다. 그 후 20년 동안 내 삶이 담긴 모든 스냅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준 것이다. 사진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 P40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 그토록 광대하고 지속적인 공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 죽음 같다. - P42
어떤 기억을 소환할 언어가 없어도 그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시 나는 기억을 소환할 언어를 갖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척하며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인식은 불완전하다거나 기억은 그보다 더 불완전하다는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을 왜 기억하기로 했는지, 혹은 왜 기억한다고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신경 쓰인다. - P44
부단히 애를 쓰면 아주 잠깐 동안은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죽을 때 내가 가진 의지가 소멸하지 않고 일종의 힘으로 재분배된다는 것. 모든 생명은 이런 힘을 품고 있고, 내가 삶에서 져야 할 막중한 책임은 한동안 이런 힘을 품고 있다가 놓아버리는 일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임박한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 P46
금붕어의 단기 기억 지속 시간은 믿기 어려울 만큼 짧다고들 하지만, 사실 금붕어는 정보—가령 특정한 소리—를 최대 5개월 동안 기억할 수 있다. 한 보고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심지어 신생아도 엄마의 몸 밖으로 나온 직후 몇 달 동안 자궁 안에서 들은 수중음을 기억한다고 한다. - P52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야, 전부 다 잊어버린 건 아니었어. - P53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다 보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허비되고, 너무나도 많은 텅 빈 시간이 생겨난다. 밤에 젖을 먹이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낮에 젖을 먹이는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아무것‘이란 수년 전 기록 없이 흘러간 ‘아무것‘과는 달랐다. 이 새로운 ‘아무것‘에는 주관적인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늘 잠들어 있거나 거의 잠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 P58
내 몸, 내 삶은 내 아이의 삶을 이루는 풍경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세상이다. - P59
내게는 아무런 생각도, 어떤 자의식도 없었고, 다만 소리를 빽빽 지르고 또 소리를 빽빽 지르는 자그마한 생명체와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만 생겼다. - P62
한때 나는 더 온화하고 더 강인했다. 강인함은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이고, 강인함이 있어야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 온화함을 간직할 수 있다. - P63
나는 물리적인 세상에 대해 그야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때의 기분을, 내 몸이 언어를 위한 도구가 되기도 전에 기억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쓰고 있었다. - P73
시간 속에 홀로 남겨진 기억들은 요약본의 형태로 굳어진다. 원본은 복구가 불가능하다. - P80
더 많은 감정을 기억할수록 그 감정은 강해진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커진다. 새로운 사랑이 낳은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 P80
어쩌면 문제는 삶의 형태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사실, 그에 따라 우리가 다양한 층위의 충만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삶의 충만감을 판단하는 우리의 능력이 형편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허감과 충만감이라는 개념이 행복에 대한 형편없는 은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이 행복이라면 말이다. - P83
어쩌면 모든 불안은 순간에 대한 병적인 집착, 인생을 지속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 P86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을 다 써버리는 특권, 필멸의 파도가 나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위로 부서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더 이상의 시간도, 더 이상의 잠재력도 없다. 모든 것을 배제하는 특권. 끝내는 특권. 내가 끝났음을 아는 특권. 그리고 나 없이도 시간은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아는 특권. - P88
결과를 바라보며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막상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순간, 내 모든 기쁨은 결과를 위한 길을 닦고 그 길을 밟는 데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끝이라는 형식은 매력적이지 않다. 내가 시작이나 끝보다 지속하는 과정을 즐긴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 P90
지금 나는 일기가 내가 잊은 순간의 모음집이라고, 내가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어가 끝낼 수도 있는 기록이라고, 말하자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P96
개인적 기록인 일기가 그 자체로 말이 되게 쓰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일기는 어제에서 벗어나지도, 내일로 향하지도 않았다. 일기는 상위의 형식에서 분리된 형식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기 자체에는 형식이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일기는 그저 축적, 그저 하루 하루 하루 하루의 축적이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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