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요. 여기 시든 부분만 떼면 괜찮거든요. 가져가실래요?"
미색 장미다발을 내밀면서 남자가 선생님 앞에서 허락을 구하는 학생처럼 내 표정을 살폈다. 보통 오십대 남자에게는 좀체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나 조심스럽고 급히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표정에 놀라 나는 화들짝 시선을 피했다. 선뜻 권력을 넘겨주는 그런 시선은 받아내기 힘들다. 고맙습니다.
"어차피 못 팔 거라서요."
"그래도 예뻐요."
[…] 놔두면 손수 꽃잎을 다 정리하겠다 싶어 남자 손에서 장미 다발을 건네받았다.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 어차피 못 팔 거니까요. 그래도요. 두 번의 ‘어차피‘에 두 번의 ‘그래도‘였다. 몇 걸음 걷다가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거참. 그냥안에 계시라니까."
나는 굳이 돌아보진 않았다. 코끝에 잠시 온기가 스쳤다. 겨울에는 잠시 잠깐의 온기가 이상하게 서러워서 아예 냉기를 곁에 두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와 그래도 사이를 휘청이며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런 마음으로 시든 꽃잎을 톡톡 떼어냈다. - P107

관계 실패와 회피에 익숙한 사람이면 흔히 그렇듯 몸피를 줄이고 체온을 낮추는 데도 능하다. 관계는 그렇게 취소된다. 존재도 취소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나를 그 취소의 순서에 세우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불능의 감각. 존재 대신 자꾸 취소되는 마음들. 그러려니, 하고 살았더니 그것 봐라, 하고 돌아오는 삶의 단념들에게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집 요한 질문일수록 틀린 질문이다. 틀린 질문일수록 집요해진다. - P109

슬픈 사람은 슬픔을 지키기 위해 비극 옆에서 잠든다, 라고 쓴 건 오래전 일이고 지금 그 문장이 다시 떠오른 건 살아온 대로 살려는 지긋지긋한 인간인 ‘나‘의 꼬리가 오늘따라 길어서다. - P113

어떤 면에서 모든 이야기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타인의 얼굴을 만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라고 내가 쓰면, 삼 초 전에 세상에 없던 문장이 갑자기 나타난 거다. 말들의 세계는 바쁘게 이 새로운 문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내 말은,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게 중요하다. 내 문장, 내 이야기, 내 것을 욕심내라고 말해준 한 사람. 이 모든 걸 부사로 바꾸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체로 망망하게. - P118

내가 만난 여성노인들은 죽음이 자기들 편이라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죽음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어쩐지 더 당당했다. 웃으면서, 그건 내 편이지, 하듯이. 이곳의 노인들도 그렇다. 병원밥 맛없어서 도저히 못 먹어주겠다, 라는 말을 죽음과 젯밥까지 버무려 할 일인가 싶지만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다 웃어버리는 순간에는 그 죽음이 폴폴 첫눈처럼 가볍다.
[…]
욕하는 사람은 참는 사람에 속한다. 참기 위해서 욕을 하는 거니까. 노인들의 ‘아우씨!"와 ‘씨팔‘ 발음은 무슨 기예처럼 절묘하게 공기를 냅다 가른다. 욕인데 욕이 아니어서 신음의 기예다. - P119

그게 뭐든 버리는 마음에는 모서리가 생긴다. 버릴 것과 버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마음에도 가끔은 그렇다. - P121

사람을 대상으로 쓰레기를 욕으로 쓰지 않으려고. 사람이 뭐 대단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쓰레기로 세상에 나오는 건 없잖아.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럼 안 될 것 같아. 그 시간을 더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 P122

혼자 사는 다른 아픈 사람들은 주로 어떤 걸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지 궁금해졌다. 그게 자신에 속한 것인지 타인의 영역에 관한 것인지도. 대부분은 혼재되어 있겠지만 오롯이 타인을 향한 감정이나 생각만으로 소진되는 날이 있기도 하니까. 누구를 대신해 사는 순간이 있기도 한 것처럼.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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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그 울부짖음이 우리 마음이나 머릿속에서 울리기도 하고 또 잦아들기도 해. 굶주린 바람이 머릿속에서 "더 많이 필요해", "다른 사람 것을 가져와야 해", "빼앗아야 해" 하며 울부짖지. 누구든 힘든 사람을 도우면 대모 요정이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못된 새어머니처럼 될 수도 있어. 우리는 다들 마음속에 그런 굶주림이 조금은 있지만, 그래도 "나한테 넉넉히 있어."라든가 "자, 이거 가져." 또는 "잘 지내니?"라고 묻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단다. - P37

신데렐라는 케이크 가게를 하면서 가끔 케이크를 먹으러 온 사람들과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 그럴 때 꿈이 무어냐고, 뭐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면 뭐가 되고 싶으냐고, 자유롭다는 건 어떤 것일 것 같으냐고 묻기도 해. 그러고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가끔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기도 하지. 신데렐라는 마을 사람 누구나 생일이면 케이크에 초를 켤 수 있게 하고 생일 파티에도 많이 초대받을 수 있게 하려고 해. - P39

신데렐라는 대모 요정은 아니지만 마법 능력이 없어도 해방자가 될 수 있었어. 해방자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사람이야. - P39

게다가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건 있을 수가 없고, 그냥 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밤이 올 테고 다음에는 내일 아침이 오고 그리고 그다음 날, 또 다음 날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지구는 해 주위를 돌고 도마뱀은 햇볕이 따스한 벽에 붙어 있고 생쥐는 달밤에 케이크 부스러기를 먹으러 밖으로 나오겠지.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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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거든. 어떤 사람은 둥글고 부드러운 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선과 단단한 근육을 좋아하니까. 어떤 사람은 사자 갈기처럼 굵은 머리카락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잉크를 쏟아부은 듯 차르르 흘러내리는 가는 머리카락이 좋다고 해.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하지. 어떤 사람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눈 내리는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많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달라서 다 이야기하기도 힘드네. 사랑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거란다. - P9

"몇 시간 뒤에 아침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런 아름다운 옷을 입고 일할 수는 없어요. 음식이 묻을 수도 있고 치맛자락에 불이 붙을 수도 있는 데다가 거추장스럽기도 해서요."
순식간에 신데렐라는 낡은 누더기 옷차림으로 돌아갔고 곁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남아 있었지. 이 옷을 입고라면 얼마든지 개하고 어울려 놀고, 호두나무를 타 오르고, 옷에 묻을까 걱정 없이 케이크를 만들고, 도마뱀이 햇볕을 쪼이는 텃밭에서 밭일을 할 수도 있지. - P27

제대로 나누기만 하면, 아니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제대로 나누어져 있었다면 뭐든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만큼 넉넉하게 있는 법이야. 음식도, 사랑도, 집도, 시간도, 크레용도, 친구도 충분히 있지. - P31

대모 요정은 또 이렇게 덧붙여 말했어.
"그것도 그렇지만 누구도 부모가 어떤 사람이라서 더 훌륭하고 더 중요하다거나, 부모가 나쁜 사람이니 자식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 누구든 자기의 말과 행동만큼 훌륭하고 중요한 거니까. 너는 생쥐에게 모질지 않고 근사한 케이크를 굽고 가슴속에 희망과 꿈이 가득한 사람이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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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추 안엔 수분이 있지." 그가 말했다. "빵이 허기를 달래줄 거야." 우리는 싱싱한 상추 잎을 골라 빵에 얹고는 행복한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
"완전 콩밥 먹는 기분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래, 그치만 우리는 자유의 몸이라는 거지."
그가 우리 농담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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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는 겨울에 눈을 꿈꿨고 여름에 꽃을 꿈꿨고, 가끔 탑 꼭대기 작은 방의 열린 창문으로 나비나 눈꽃이 날아들기도 했어. 그렇지만 구름 같은 누비이불을 덮고 있어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았지. 꿈속에서 아이다는 새들의 언어를 배웠어. 꿈속에서 어맨들라 강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해 아이다에게 와서 물이 부르는 모든 노래를 가르쳐 줬어. 폭포의 으르렁거림, 홍수의 함성, 봄비의 다정한 속삭임, 바위 위로 굴러가는 작은 시내의 행복한 옹알이, 파도가 밤과 낮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바위를 두들기는 소리, 뺨 위로 구르는 눈물방울의 슬픈 노래. 때로는 몇 해 동안 꿈을 하나도 꾸지 않기도 했어. 어쨌든 아이다는 잤어. 그리고 또 잤어. 또 잤어. - P26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
"아침에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땅에 떨어진 깃털이나 잎이 둘 달린 잔가지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걸 마야가 보여 주었어. 마야는 지친 말이나 두꺼비의 금빛 눈이나 초를 불어 껐을 때 생기는 연기에 눈을 돌리게 했고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게 했지. 본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고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쳤어. 마야는 아름다움을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어. 사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지." - P30

백 년이 지났어. 백 번의 봄, 백 번의 가을, 어떤 사람의 삶은 시작되고 어떤 사람의 삶은 끝이 나고,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하나 다른 이야기가 되었어. 마야의 두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았고 또 그 아이들이 아이를 낳았고 마야는 살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어. 아이들 하나하나가 또 다른 이야기, 수천 개의 다른 이야기가 되었고 주르 땅에는 비가 내린 뒤 풀잎에서 반짝이는 물방울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 - P31

별이 많이 나온 어느 날 밤, 아틀라스는 사과를 잡아채는 불새의 발목을 덥석 잡았어. 그렇지만 거대하고 강력한 불새는 아틀라스를 매단 채 불꽃처럼 밝은 깃털이 무성한 날개로 날아갔지. 불새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자 아틀라스는 겁이 났어. 불새는 남자아이가 매달려 있어서 겁이 났고. 그 상태로 둘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날아갔어. 겁에 질린 새와 아이가 두려움으로 한 덩이가 되어 밤하늘 속으로. 새는 점점 더 높이 날아올랐어. 그날 밤 불새는 산맥을 넘었고, 해가 불새의 깃털처럼 눈부시게 떠오를 즈음 지칠 대로 지쳐서 탑 꼭대기에 내려앉았어. 아틀라스는 새를 잡은 손을 놓았어. 새는 황금 사과를 놓았고 사과는 탑의 물받이 홈통으로 굴러 들어갔어. - P33

목요일이 말했어. "우주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각자 자신이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느끼죠. 그러니까 세상에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 빗방울 수만큼, 혹은 비구름이 걷혔을 때 밤하늘의 별의 수만큼, 바다 아래 모래알의 수만큼의 중심이 있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 이야기를 전부 들을 거고요, 또 차도 마시고 싶네요. 화요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각자 약 1700만 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목이 말라져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고 불끈 타오르게 하는 이야기도 있고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도 있고 무언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 주는 이야기도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놓아 버리게 하는 이야기도 있어요. 여기 세 사람도 좋은 이야기를 갖고 있네요. 노아도 곧 멋진 이야기를 갖게 될 거예요."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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