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목욕탕, 우동집, 중국집, 떡 가게, 채소 가게, 빵집, 이발소, 미용실, 문방구, 과자 가게, 오코노미야키 가게, 찻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있어 편리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절대 고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본인과 한국조선인이 공존하던 동네였다. 나는 그 거리에서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어머니가 직접 만든 치마저고리를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다. 밖에서도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오빠!‘를 불러대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곧잘 "조선인인 영희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네가 나쁜 게 아냐. 언제나 당당하게 굴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려면 예의 바르게 인사 똑바로 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다녀야지. 어머니가 늘 블라우스랑 양말을 새하얗게 빨고, 손수건은 다림질하는 이유가 다 그래서란다. 조선인은 더럽다,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P19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보고 마치 자신의 부모를 보는 것 같다고 해서 적잖이 놀랐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민 1세의 고생을 보고 자란 2세, 3세의 연대감을 느꼈다.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생활의 기반을 다지며 권리를 쟁취해온 이민 1세들의 모습을, 2세들은 알고 있다. 식민지지배나 전쟁, 내전, 독재 체제를 경험한 세대에게 지배자, 침략자, 적, 원수였던 나라의 인간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터이다. 개인의 연애와 결혼에 국가 간 문제를 적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부모와 조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우리 부모도 그랬다고 관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 P26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

오빠들과의 추억이 서린 집이라고 하기에는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너무도 짧아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가슴에 박힐 만큼 소중한 기억이 됐다. 조총련 커뮤니티에서는 ‘영광의 귀국‘을 한 오빠들을 칭송하며 남은 가족들의 상실감을 ‘명예‘로 메울 것을 강요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들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외로움을 견뎠다. 주변 어른들은 ‘민족 차별이 만연하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차별 없는 조국에서 고생하는 게 낫다. 5년쯤 지나면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고 남북도 일본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며 꿈같은 소리를 했다. 당시에 그런 말은 확실히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재일코리안을 둘러싼 일본 상황 역시 악몽 같았다. - P48

가족과 마주하기. 딸이라는 역할에 갇힌 상태에서 이 소박하고도 장대한 과업에 임하기란 심히 어려웠다. 캠코더라는 장치의 힘을 빌려 속내를 숨긴 관찰자, 인터뷰어, 감독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발을 내디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어디서 왔는지 파헤치는 행위다. 고통을 수반하는 딸의 행위에 한 번도 그만두라는 말 없이 렌즈를 받아들이는 데 얼마큼의 각오가 필요했을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내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게 되기까지 이런 작은 역사가 존재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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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 P11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 P12

내 주제는 ‘순간‘일까? 내 인생의 주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나는 무수한 시간을 흘러가는 순간들의 수만큼 나눈다. 나 자신처럼, 혹은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찰나들처럼 조각내는 것이다—나는 오직 시간과 함께 태어나고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는 삶만을 다짐한다: 나는 오직 시간 그 자체 속에서만 충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다. - P12

나는 둥글고 돌돌 말리고 따뜻한 것, 그러나 가끔은 새로운 순간들처럼, 늘 떨리는 시냇물처럼 차가운 것을 쓰고 있다. 내가 이 캔버스에 그려 놓은 것을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리 없는 말이 음악의 소리에서 암시를 얻을 때처럼. - P13

내가 어떻게 음악을 듣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전축에 가만히 손을 올려 놓으면 손이 진동하면서 온몸으로 파동을 보낸다: 그렇게 나는 진동이 품은 전기電氣를, 현실이라는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토대를, 내 손 안에서 떨리는 세상을 듣는다. - P14

내가 ‘나‘라고 말하는 건 감히 ‘당신‘이나 ‘우리‘ 혹은 ‘누군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허해지라고 강요 당한 나는 나 자신을 개인으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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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파악하고 규정하려 한다. 어떻게든 자기 눈앞에 두려고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신의 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는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불안해서 보이는 우상을 만든다. - P172

신성과 경이는 느낄 수는 있으나, 느낄 수 있을 뿐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다. 압도적이면서 매혹적인데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진다.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루돌프 오토는 그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가 하면 동시에 우리를 고양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제약하는가 하면 또 스스로를 초월하게 하며, 공포와 유사한 감정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한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성스러움의 의미』) 두려움과 매혹, 이 상반된 감정의 동시적 습격을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추방하거나 수용하기 위해 축소한다. 손에 잡히게 바꾼다. 생각의 범주나 시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두려고 한다. 불가사의와 불가시는 밀려난다. - P172

이해할 수 없이 크고 파악할 수 없이 큰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파악의 범주 안으로 욱여넣어야 한다. 그러면 이해 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빠지고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담긴다. 훼손과 손실이 불가피하다.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들이 훼손되고 손실되면 안 되는 것들이 손실된다.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집어넣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게 할 수 없다. 우주를 집어넣으려면 우주보다 큰 자루가 필요하다. 신을 집어넣으려면 신보다 큰 자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까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채로 보아야 한다. - P174

예배는 이벤트가 된다. 경이와 신비 대신 형식과 순서와 기능이 중요해진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견고한 교리와 세련된 형식을 갖춘 종교는 종교인을 예배라는 이름의 잘 기획된 행사에 참여하는, 동원된 일원으로 만든다. - P175

존재는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의 앎과 모름에 따라 어떤 존재가 있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 혹은 무엇의 있고 없음은 우리의 앎, 혹은 모름에 좌우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우리의 앎과 상관없이 있고, 없는 것은 우리의 모름과 상관없이 없다. - P179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 안에서 많은 경우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이를테면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의 대체재, 혹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지렛대가 된다. 신은 쉽게 이용당한다.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 욕망과 접속해 있다면, 그 욕망을 위해 병 속에 들어가 웅크린, 축소된 신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적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신과의 만남이 물리적 공간의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 P182

공동체는 집단이 아니라 고유한 ‘한 명‘들의 모임이다. 몰입과 흡수, 예속이 신앙의 지표가 되는 순간 인간은 고유성을 잃고 사유할 줄 모르는 기계, 프로그래밍된 내용에 따라 열광할 뿐인 기계가 된다. 기계의 부품이 된다.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가 신 앞의 유일한 존재인 사람의 지위를 빼앗는 일이 무의식, 무의지중에 발생한다. 집단은 ‘개별성을 삼키는 육체의 집합체‘이다.(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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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은 말하는 이의 성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결과적 현상이다. 누군가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잘못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들어서일 때도 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같은 발음의 한 단어는 그 단어에 대해 발화자와 청취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된다. 특정 단어에 대한 이해는 삶의 경험에 의해 주로 형성되는데, 그 경험이 상이할 때 말은 허공을 떠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는 악몽이고, 사랑은 끔찍한 것이다. - P158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다른 책 (『창조와 타락』)에서 이 사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혔다. "성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는 점에서, 그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언어(자신의 시대, 인식, 한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 P158

성서는 많은 인간 저자에 의해 쓰였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쓴 것이다. 어떤 책은 누가 썼는지 분명하고 어떤 책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시대와 인식의 한계 아래서‘ 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쓰려고 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없다. 두 차원에는 절대적 차이,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아무리 잘 옮겨도 축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쓰인 ‘신의 말‘은 본래 뜻이 손실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신의 말이므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 P159

여백은 신의 말과 인간의 말이 맞부딪치는 자리이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란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지지 못해 유보된 말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 P160

들은/ 맡은 말이 없는데도 사신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해 카프카는 신랄하다. 세상에는 파발꾼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에게는 귓속말을 해줄 왕이 없다. 그들에게 말을 맡긴 왕이 없다면, 없는데도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그들이 의미 없는 말들을 서로에게 외쳐댈 뿐이라고 말한다.(「파발꾼」)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비참하다고 느낀다. 이들이 비참한 것은 메시지 없이 메신저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65

전하는 자는 말하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의 말은 뿌려진 씨앗과 같을 것이다. 어떤 씨앗은 싹이 났다가 물기가 없어 말라버릴 것이다. 어떤 씨앗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의 먹이가 될 것이다. 어떤 씨앗은 결실할 것이다. 그러나 결실은 사신이 하는 일이 아니고 사신의 몫도 아니다. 그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이지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결실의 많고 적음에 그의 영광이나 수치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과 수치는 씨/말을 뿌리기/ 옮기기에 대한 그의 성실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결실의 많고 적음은 우연한 행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불운이다. 우연한 행운이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영광과 수치를 가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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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기다림을 산다. - P118

롤랑 바르트는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기다림의 ‘일‘을 강조한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 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 전화를 하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사랑의 단상』) 기다리는 사람은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에 비유된다.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부동은 그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다른 많은 움직임과 그 질량이 같다. 그가 할 수 있는, 하지 않은 일들을 할 때 필요한 에너지가 그의 기다림에 쓰인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일은 기다리느라고 그가 하지 않은/ 못한 모든 일과 등가이다. 기다리는 데는 힘이 많이 든다. 기다리는 데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 P119

제때에 도착하는 기다림은 없다. 아무리 빨리 와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항상 늦는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그것은 내가 항상, 어쩔 수 없이 일찍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때‘는 정해져 있지 않다. ‘와야 할‘ 시간은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 제때에 오지 않으리라는 것, 예정된 일이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기다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P122

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하면서도 언제 올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없다. 죽음이 오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죽음만큼 지연되고 연기되는 것은 없다. 죽음만큼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도 없다. 대개 죽음은 지연되고 연기되지만, 그러나 죽음이 닥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은 온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 P128

내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확정되어 있지도 않다. 내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느닷없이 닥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멀기와 가깝기를 가늠할 수 없다. 우리는 내일의 주민이 아니다. - P129

미워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미워할 수는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미워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듯이 미워하는 사람도 닮아 간다. 미워해서가 아니라, 미워하느라 생각해서이다. 상대방을 닮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의 기능이 아니고 생각의 기능이다. 사랑하느라 생각하든 미워하느라 생각하든 마찬가지다. 생각은 그 대상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사람은 생각한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 P140

유한 속으로 들어온 무한은 유한에 의해, 유한을 통해 이해되고,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은 시간에 의해, 시간을 통해 해석된다. 이해와 해석은 오해와 왜곡의 과정을 포함한다. 의문과 모호함은 불가피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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