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으며, 하신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간직해 온 숱한 습관들과 결별하는 중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삶이 전보다 훨씬 나아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울적함이 찾아들 때도 혼자 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의 존재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닌지 반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생을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 낙오자가 되었다는 우울한 생각이 사라진 건 순전히 코랄리 덕분이었다. 코랄리가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와의 섹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장인, 장모도 썩 좋은 분들이었다. 다만 시내에 나갈 때마다 위축되는 기분이었는데, 아마도 전에 저지른 일들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런 러브 스토리는 대낮에 드러나면 가면극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연기에 서툰 가엾은 배우가 된 것 같았다. 하신은 두목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내이므로,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 - P547
카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앙토니는 불편해졌다. 이 여자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똑같은 기쁨,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자녀의 존속만을 위해 스스로 무너지며 하녀나 다름없는 신세를 자처한다. 모든 것이 앙토니에게는 심각할 정도로 우울했다. 그 소리 없는 집요함 속에서 앙토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운명을 그려 보았다. 최악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세월을 보내는 여자들의 자각 없는 몸, 넙데데한 엉덩이, 불룩한 뱃살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종족의 법칙이었다. 앙토니는 가족을 증오했다. 가족은 목적도 끝도 없이 연장되는 지옥이었다. 그는 길을 떠나고 기적을 만들 것이다. 다른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 P552
친구들, 매일 저녁, 그리고 아페리티프 마시는 시간을 두려워 했다. 저녁 7시쯤 되면 어김없이 욕구가 찾아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 잔,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잔이 그를 유혹했다. 한 잔으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인생은 짧고 너나 할 것 없이 언젠가 죽게 마련이라는 친구의 목소리와 함께 아페리티프가 그를 유혹했다. 그러니 즐겨야 했다. 그리하여 파트릭은 스스로에게 일탈을 허락했고, 다음 날이면 형편 없이 망가진 자신을 다시 만났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P571
그때 여자애와 춤추고 있는 앙토니를 발견했다. 소년은 소녀를 바싹 당겨 안았고, 두 아이는 메두사처럼 느리게 흐느적 거렸다. 에로스 라마초티의 코맹맹이 소리가 사랑의 고통을 노래하자, 무대 위 커플들은 운명에 대한 진지한 감정에 압도당한 듯 서로를 한층 더 꼭 안았다. 여자들은 희미한 옛 사랑을 떠올렸고, 남자들은 경계를 늦추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원통함 같은 상반된 감정이 읽혔다. 구슬픈 멜로디에 힘입어 삶은 돌연 소용돌이처럼, 잘못된 출발의 결과처럼 되어 버렸다. 이탈리아 가수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가 그들의 귀에 대고 이혼과 죽음, 일에 좀먹히며 이리 채고 저리 채는 신세, 불면과 외로움 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존재들의 비밀을 속삭였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사랑하고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지배하지 못한다. 도약도 끝도 우리의 힘 밖에 있다. - P576
일터에서 앙토니는 친구를 몇 명 사귀었다. 시릴, 크림, 다니, 르주크, 마르티네. 아침마다 그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다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간혹 C작업장 뒤 작은 뜰에 있는 팔레트에 앉아 몰래 마리화나를 피웠다. 근무가 끝나고도 만났다. 취미나 월급이 다들 엇비 슷했으며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마저 공유했다. 특히 본질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게 만드는 수치심,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 촌구석에서 날이면 날마다 뜨개질하듯 이어지는 삶, 아버지들과 너무나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 느릿하게 찾아오는 저주까지. 앙토니는 복제된 일상이 가져다주는 선천성 질병 같은 삶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같은 고백이 순종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삶에 수치심을 더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빈둥거리지 않고, 공짜 혜택만 찾아다니지 않고, 변태나 실업자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자랑스러워했다. 굳이 마르티네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걸쭉하게 트림하며 알파벳을 읊조리는 것도. - P614
술에 취해 RFM 라디오를 들으며 에일랑주의 밤길을 운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취미가 되었다. 엔강을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운전하면서 그가 나고 자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거리를 끝없이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점을 찍듯 그의 길을 소리 없이 밝혀 주었다.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달리다 보면 조금씩 엄청난 감정이 밀려 올라왔고, 앙토니는 굳이 그것을 억누를 이유를 알지 못했다. 조니 할리데이는 그의 최애 가수였다. 그는 절망을 남긴 희망, 헛되이 끝난 이야기, 도시, 고독을 노래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엔 캔 맥주를 든 채 그 흔하디흔한 풍경을 몇 번이고 훑었다. 조명을 받은 거대한 공장.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유년의 절반 이상을 보낸 버스 정류장. 그가 다니던 학교, 늘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케밥집,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떠났다가 불알을 덜렁거리며 되돌아온 기차역. 너무나 심심해서 강물에 대고 침 뱉기 놀이를 하던 다리. 마권 발매소, 맥도날드, 텅 빈 테니스 코트, 불 꺼진 수영장, 주택 단지로 미끄러지는 완만한 비탈길, 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주블리 레 통 농」의 노랫말. - P615
하신은 갈기갈기 찢겼다.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신은 바로 이 사람들 손에 입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강박과 생활 방식을 증오했다. 점심식사는 정각 12시, 저녁식사는 정각 7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를 마치 타르트 조각 자르듯 일일이 계산하고, 할당량을 정하고, 잘게 조각내는 사람들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으레 단추를 푸는 장인. 단순하고 거짓말을 모르고 영원한 얼간이 같은 그의 사고방식. 세상의 수업 앞에서 언제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성자와도 같은 강직함. 그들이 초등학교에서 배운 서너 가지 강렬한 교훈은 각종 사건 사고, 정치, 노동 시장, 유로비전의 트럭이나 크레디 리오네 은행 사건 등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그저 어쭙잖게 분개하거나 정상이 아니라는 둥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둥 비인간적이라는 둥 하는 말로만 거들 뿐이었다. 모든, 아니면 거의 모든 질문들을 잘라 버리는 세 개의 칼날. 인생이 계속 그들의 진단에 어긋나고 그들의 희망을 꺾고 역학적으로 속였음에도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원칙을 꼿꼿하게 고수했다. 여전히 우두머리를 존중하고 TV에서 하는 말들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필요할 때면 열광하거나 분노했다. - P618
하신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사람, 동지가 절실했다. […] 동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아이가 있는 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뻔한 대꾸만 돌아왔다.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고정 관념이 직장을 지배했으며, 그것이 사람들을 점잖게 꾸며 주고 냉혹한 현실에서 고꾸라지지 않도록 행복으로 중독시켰다. - P619
그러나 사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하신은 다른 한 가지를 깨달았다. 코랄리는 내면 깊이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오세안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고, 코랄리는 생애 처음으로 완벽히 채워졌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정리되었다. 아이가 모든 일의 잣대가 되었고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 P620
하신에게 질투심 따위는 없었다. 딱히 자신이 배제된다는 느낌도, 딸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다. 아이에게 모든 걸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하신에게는 그 공허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없었을 뿐이다. 오세안은 하신의 신경증, 불행, 그를 떠 나지 않는 분노에 더해진 보너스였다. 어차피 인생은 하신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딸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무튼 쉽지 않은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 P621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 무렵, 앙토니와 하신은 ‘공장‘ 앞 보도블록에 서 있었다. 멀리서 아주 간간이 폭죽과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술집들은 문을 닫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깃 덩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앙토니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리는 바람에 담뱃불 하나 붙이면서도 담벼락에 등을 기대야 했다. 저녁 내내 수없이 떠들고 수많은 사람들과 술을 퍼마셨다. […] 앙토니와 하신은 가능한 한 서로를 피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한마디가 오가기까지는 늦은 시간, 알코올, 승리, 그리고 공기 속을 부유하는 용서와 사면의 강렬한 감정이 필요했다. 하신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가왔다. 먼저 말을 건넨 것도 하신이었다. "엉망진창이긴 해도 멋지네." "그러게." - P641
하신은 화단 가에 앉아 팔을 무릎 위에 얹고 아주 침착하게 담배를 피웠다. 앙토니는 선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서로 할 말이 없는 것도 우스웠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같은 시에서 자라고 같은 일에 권태를 느끼고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너무 일찍 그만두지 않았던가. 심지어 아버지들은 메탈로르 동료였다. 그동안 두 소년은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이런 공통점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두툼한 벽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앙토니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운전 욕구가 오줌이 마려워 절절 맬 때처럼 그를 불태웠다. "야, 한 번만 타 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하신이 두 눈을 들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오갔다. 앙토니가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자.....!" 하신이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던졌다. "저 끝까지 갔다가 다시 와." "오케이." "한 번만 왕복하는 거야. 끝." 앙토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집요함은 짜증스럽다. 알았다고 했지만, 앙토니의 눈에는 비웃는 듯한 기미가 숨어 있었다. - P646
앙토니는 바캉스 계획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채무에서 벗어난 기분이랄까.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옷을 다 벗고는 세면대 위 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물을 아주 뜨겁게 틀었다. 델 듯이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 앙토니는 입을 벌리고 검고 숱 많은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몸을 떨었다. 뜨거운 물이 미지근해졌다가 차가워질 때까지 한동안 물을 맞았다. 스테프가 남긴 공허는 단연 물리적이었다. 가슴속, 뱃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이러고도 삶이 계속된다니. - P655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혼자 사는 여자들은 정말 많아서 같이 산책을 하고 단체 여행에 등록했다. 이렇게 우리는 싱글 여성이나 미망인, 어떤 이유로든 혼자가 된 여성들을 가득 싣고 알자스 지방과 포레누아르를 달리는 관광버 스를 종종 보게 된다. […] 전부, 아니, 거의 모두가 몇 번의 임신을 겪었으며, 해고당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난폭하고 마초적인, 실업자 신세가 된 강박적인 남편과 함께 살아왔다. 그 남자들은 식탁에서, 술집에서, 잠자리에서도 우울한 얼굴을 했으며, 굵은 손과 기진맥진한 마음으 로 수년 동안 세상을 원망했다. 그토록 대단했던 그들의 공장 이 문을 닫고 용광로가 입을 꾹 다문 뒤로는 위로받을 길조차 막혔다. 그중 어진 쪽인 세심한 아버지, 선량하고 말수 없고 순종적이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남자가, 아니, 거의 모든 남자가 침몰했다. 그 아들들 역시 짝을 찾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기대에 어긋나고 아무 짓이나 해 대고 근심만 낳았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아마조네스들은 견디고 인내했으며 학대받았다. 그러다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상황은 비로소 받아들일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제 위기라고 해도 그것은 더 이상 한순간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건 순리였다. 운명. 그네들의. - P660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로, 두 사람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 그의 죽음은 서서히 지워지는 것들 다음에 오는 논리적인 결과였다. 몇 주가 흘렀다. 몇 달. 앙토니도 엄마도 죽음에 대해 또는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엇비슷한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엘렌은 전남편을 떠올릴 때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추억은 동전처럼 무너져 내렸다. 엘렌은 추억들의 순서를 맞추었고, 자기 편의에 맞게 이야기들을 재구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후회하지 않는 그녀 삶의 일부였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경제 위기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술이 문제였을까. 그것이 운명이고 그들의 삶이었으니 창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앙토니가 고집을 부리거나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일 때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어쩜 그렇게 네 아빠랑 똑같니. 칭찬이 아니었다. 앙토니는 자랑스러워 했다. - P668
앙토니는 차라리 보지 않고 싶었다. 스즈키에 올라탄 앙토니가 전속력으로 지방 도로를 달렸다. 엔진의 강하고 갑작스러운 떨림이 손바닥에 다시 찾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이 감정, 지옥의 소리, 머플러가 뿜는 달콤한 휘발유 향기. 그리고 한숨 가운데 에일랑주에 7월이 다시 찾아올 때 보드랍게 와닿는 빛의 질감. 해가 저물 녁의 하늘은 솜처럼 나긋나긋한 분홍빛을 머금었다. 여름날 저녁 언제나 똑같은 이 느낌, 숲속에 드리운 그늘, 얼굴 위로 부는 바람, 공기의 이 틀림없는 냄새, 소녀의 피부처럼 오돌토돌한 아스팔트 길의 친숙함. 호수 골짜기가 그의 피부에 남겨 놓은 지문.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이 끔찍한 포근함.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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