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 클라라는 사랑이란 매일 새로 만드는 거라고 했다. 실제 삶에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단 한 번도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다. - P336

집 안 어디에도 아이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밤에 어둠이 내려오면 침묵 속에서 말 한마디, 신음 한마디 새지 않게 조심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아이들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우리의 시선에서 읽어낼까봐 아무런 기억이 없는 척해야 했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서른 살밖에 안 됐어도 이미 청춘이 아니다.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 웃을 때 빼고는 엄마 아빠 역할만 연기해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가 내는 소리를 듣거나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상상하지 못하게 집에서 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정말로 젊음을 잃어버렸다. 벽 너머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오면, 잠을 자겠다면서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방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몸을 섞는 것이 불편하고 불결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불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몰래 임대한 방이나 호텔이나 독신남의 아파트에서 만나 저지르는 죄악보다 더 큰 죄악처럼 느껴진다. - P341

가끔은 일기를 쓰는 대신 남편 곁에 앉는다.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제야말로 정말로 함께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장기적으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신중함이 단순히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방어기제인지 잘 모르겠다. - P356

그가 처음으로 사무실 밖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부터 그는 내게서 돈이 줄 수 없는 확신을 기대하는 것 같다. 우리 둘의 관계에서도 무언가가 변한 것 같다. 어쩌면 그가 자기와 함께 나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몰래 길모퉁이에서 만나 이제는 우리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버린 카페에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흠칫 놀라는 짓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모든 것이 일 이야기만 하고, 매주 토요일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고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사무실만을 공유하던 때보다 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둘 다 사무실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각자의 삶과는 다른 삶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 P358

나는 잠들기 전, 젊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이 호텔 저 호텔에 묵으며 여행하면서 스파에 다니는 여자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이 모험가라고 부르는 그런 여자 말이다. 단 하루, 하룻밤이라도 그런 여자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남자와 만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니 서서히 전에는 미처 몰랐던 수많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엇보다 미켈레와는 아주 다른 남자에게서, 미켈레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가 알아온 방식과는 다르게 사랑받는 상상을 하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내가 일탈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집으로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안심이 됐다. - P359

나는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에 혼자 있고 싶었다. 가족 안에서도 자신만의 고독 속에 고립되고자 하는 이는 이미 죄악의 싹을 품고 있는 거다. 실제로 일기장을 읽어보면 모든 것이 사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귀도를 향한 내 감정까지도. 일기에서는 극복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나의 나약함이 그의 돈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감히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불가항력의 외적인 힘으로 인해 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려 든다. 나를 이끄는 가장 강한 감정은 비겁함이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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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생기는 문제는 너무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타인 전체를 대조군으로 삼으면 당신이 가장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것과 가장 낙관적으로 바라는 것이 동시에 현실로 다가온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인 것처럼, 비정상인 동시에 다른 모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 P7

우리 집 근처에 사는 물새들은 마치 중학생 같다. 검둥오리들은 목소리가 갈라졌고, 갈매기들은 오리들을 못 살게 굴고, 방금 치아 교정기를 낀 듯한 백로는 자존심 상한 얼굴로 혼자 서 있다. - P8

꽃병처럼, 마음도 깨지는 건 처음 한 번이다. 그다음에는 이미 가 있는 금들을 이겨낼 수 없을 뿐이고. - P9

facility라는 단어는 병원이라는 뜻이지만 그 밖에도 건물에서는 감옥을, 예술에서는 생명력 없음을, 운동선수에게서는 우아함을 의미할 수 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몸짓이라도 그 안에는 틀림없이 인간의 심장이 뛰고 있을 것이다. - P11

학교에 다닐 때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다가 깨어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로 유명했던 한 여학생이 기억난다. 저를 심판하러 오셨나요?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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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미렐라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모녀 사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가끔 절대적인 신뢰 속에 우리 둘이 강력하게 연결된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미렐라는 마치 병이 옮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 P286

"저도 많은 생각을 해요. 정말이에요.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되물어요. 엄마는 제가 냉소적이고 차갑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엄마와는 다를 뿐이에요.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엄마는 옳고 그름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을 따르기만 하면 돼요. 그러니 엄마는 운이 좋은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기 전에 제 기준에 따라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만 해요." - P296

우리 사이에는 아이들과 마리나와 칸토니와 평생토록 설거지한 산더미 같은 접시들과 남편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내가 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과 어젯밤처럼 냄비에서 나오는 김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끓인 수프가 있었다. - P323

과연 내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 부부의 생각이 아니라 나만의 생각이었다. 신혼 초에는 모든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침묵의 힘을 빌려 여전히 우리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몇 년 전부터 자주 남편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나 자신을 돌아보고 긴 글을 써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기에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남자를 생각하면서 아직도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이 생각이 끈질기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 P334

너무나 불안하다. 일기 쓰기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피곤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가끔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미켈레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사이에 사랑의 감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사랑만큼 가치가 있지만 전혀 다른 감정들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습관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 같다. - P335

미렐라가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고백하기 전까지 나는 미켈레를 향한 내 감정이 아직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행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켈레와 함께할 때의 행복은 얼어붙은 행복이다. 귀도가 내게 이야기를 걸어오고 그가 내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행복과는 다른 감정이다. 귀도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야말로 사랑이다. 미켈레와 함께하는 행동은 애정이나 연대감 혹은 습관일 뿐이다. 그와 가끔 나누는 가장 친밀한 행위마저도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자비와 연민에 가까운 행동이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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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나는 무지개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 호수 위에 서 있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무지개가 비쳤다. 그래서 나는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호수에 걸린 두 개의 무지개 사이에 서 있게 되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건 현실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그토록 충만한 행복은 오로지 꿈속에서만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실제로 나는 항상 뭔가가 꼭 부족했다. - P21

방으로 돌아왔다. 최근 들어 내가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할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특히 사소한 일에 대한 거짓말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이건 나쁜 징조다. 말하자면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고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두려울 때 거짓말을 하는 법이니까.
나는 바지를 입으며 결심했다. 오늘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 P22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열두 살짜리 이 아이들에게는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앞날이 창창하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게 어정쩡하기만 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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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앞에 서 있는 저 꼬마를 좀 보게.
작품을 세상에 드러나게 해주는 건 저 꼬맹이야.
저 아이가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대비가 아니었다면 저 형편없는 그림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지.
꼬맹이 덕에 작품을 둘러싼 분위기라는 것이 생기는 거라고.

맞는 말일세, 페르낭,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둘러싼 공간, 우리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소우주인 셈이지. - P46

핵심은 대비야, 콩스탕탱. 풍경을 깨뜨리는 저 광고판들을 보게나, 건축물을 가로지르는 전기 계량기들은 또 어떻고.
곡선, 강력하고 격렬한 기관차의 완벽한 원통형 몸체 같은 것 말이야.
바로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다네. 이 두 세계의 대립 속에. - P47

그들은 내가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하네.
왜 예술이 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나를 고귀한 장인이 아닌 예술가로 정의할 수 있기는 할까? - P48

당신네 건물 꼭대기에서 내 대답이 보이시나?
자연을 모방한 건 여기엔 전혀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자,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게나!
내가 여기서 만드는 것 순수한 자연이야!
고요함, 우아함, 균형, 이성.
삶의 행복 같은 것들 말이지! - P99

"세상을 바꾸는 생각들은 비둘기의 발끝에서 온다."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니체가 그랬다고! - P122

거창한 말들이나 나불대라지!
법률이 어쩌고 하는 것들 말이야.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순수한 기쁨이라고, 끝없이 오고 가는 파도가 만들어낸 저 절벽이나 조약돌이 주는 아름다움 말이지.
이토록 간단한 것 말이야! - P123

나무가 대리석보다 낫다.
자라나는 이름들을 볼 수 있으니. - P125

당신의 이름을 나무에 새기라,
저 끝까지 솟아오를 이름을.
장 콕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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