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들이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보다 그들의 일기를 선호할 때가 많다. 뭐랄까, 문체나 형식이라는 방해물 없이 내용과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글은 문체와 형식을 품고 있고, 좋은 글에서는 그런 것이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 P21

노트북에 비밀번호를 설정하거나 문서를 잠가두거나 아예 노트북을 숨기는 식으로 내 일기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귀찮은 일을 감수할 만큼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일기장은 비밀이 담긴 보물 상자가 아니다. 그건 단지, 모든 것이다. 어쩌면 일기에 나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가 내 일기를 읽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 - P24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떠난 건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과거의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작과 끝이 전부였다. 살아가는 순간, 기록하는 순간, 그리고 기록한 후에는 안전하게 잊는 순간. 그게 전부였다. - P28

한 친구는 이렇게 썼다. 금이 헬륨과 비슷하면서도 헬륨 이상의 무언가이듯, 결혼은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그 이상의 무언가다. 전자(電子)의 내부 껍질이 꽉 차면 다음 전자가 다음 껍질을 채우면서 결국 원소의 성질 자체를 바꿔버린다. - P30

과거의 교훈을 기억하라.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라. 그리고 현재에, 기억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에 몰두하라. - P32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억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뇌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기억함으로써 오염시킬 수 없는 사람의 뇌 속에 말이다. 기억을 회상할수록, 그 기억에 관한 기억은 더 희미해진다. 기억 그리고 세상의 모든 키스는 어쩌면 두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4

언젠가,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의 조상 중 한 명을 낳은 존재로서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과 내 이름이 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밖의 나에 관한 기억은 더 이상 그 누구의 짐으로도 남지 않고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 P35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내가 가진 오랜 기억의 무게뿐 아니라 부모님이 가진 오랜 기억의 무게까지 느껴질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 P36

내가 잊고 싶은 기억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다. 이토록 끈질긴 기억으로 남은 것들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아무것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사라진다 해도 완전히 잊히는 건 아니니까. 이미 벌어진 모든 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긴다. - P37

나는 지금껏 내가 가진 초기 기억의 배경이 주방 한구석이라고 주장해 왔다. 당시 나는 쿠키 단지에서 쿠키를 꺼낸 일로 야단을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주방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의 뇌가 처음으로 학습하고 간직한 기억은 그게 아니다.

육아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나에게 처음으로 입력된 기억은 엄마라는 존재였을 것이다. - P38

열두 살 때 나는 사진이 내 기억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사건을 담은 사진을 들여다보다 보면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을 차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많은 기억을 잃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뷰파인더를 통해 내 삶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사진 찍기를 그만두었다. 그 후 20년 동안 내 삶이 담긴 모든 스냅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준 것이다. 사진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 P40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 그토록 광대하고 지속적인 공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 죽음 같다. - P42

어떤 기억을 소환할 언어가 없어도 그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시 나는 기억을 소환할 언어를 갖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척하며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인식은 불완전하다거나 기억은 그보다 더 불완전하다는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을 왜 기억하기로 했는지, 혹은 왜 기억한다고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신경 쓰인다. - P44

부단히 애를 쓰면 아주 잠깐 동안은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죽을 때 내가 가진 의지가 소멸하지 않고 일종의 힘으로 재분배된다는 것. 모든 생명은 이런 힘을 품고 있고, 내가 삶에서 져야 할 막중한 책임은 한동안 이런 힘을 품고 있다가 놓아버리는 일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임박한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 P46

금붕어의 단기 기억 지속 시간은 믿기 어려울 만큼 짧다고들 하지만, 사실 금붕어는 정보—가령 특정한 소리—를 최대 5개월 동안 기억할 수 있다. 한 보고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심지어 신생아도 엄마의 몸 밖으로 나온 직후 몇 달 동안 자궁 안에서 들은 수중음을 기억한다고 한다. - P52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야, 전부 다 잊어버린 건 아니었어. - P53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다 보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허비되고, 너무나도 많은 텅 빈 시간이 생겨난다. 밤에 젖을 먹이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낮에 젖을 먹이는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아무것‘이란 수년 전 기록 없이 흘러간 ‘아무것‘과는 달랐다. 이 새로운 ‘아무것‘에는 주관적인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늘 잠들어 있거나 거의 잠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 P58

내 몸, 내 삶은 내 아이의 삶을 이루는 풍경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세상이다. - P59

내게는 아무런 생각도, 어떤 자의식도 없었고, 다만 소리를 빽빽 지르고 또 소리를 빽빽 지르는 자그마한 생명체와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만 생겼다. - P62

한때 나는 더 온화하고 더 강인했다. 강인함은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이고, 강인함이 있어야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 온화함을 간직할 수 있다. - P63

나는 물리적인 세상에 대해 그야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때의 기분을, 내 몸이 언어를 위한 도구가 되기도 전에 기억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쓰고 있었다. - P73

시간 속에 홀로 남겨진 기억들은 요약본의 형태로 굳어진다. 원본은 복구가 불가능하다. - P80

더 많은 감정을 기억할수록 그 감정은 강해진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커진다. 새로운 사랑이 낳은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 P80

어쩌면 문제는 삶의 형태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사실, 그에 따라 우리가 다양한 층위의 충만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삶의 충만감을 판단하는 우리의 능력이 형편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허감과 충만감이라는 개념이 행복에 대한 형편없는 은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이 행복이라면 말이다. - P83

어쩌면 모든 불안은 순간에 대한 병적인 집착, 인생을 지속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 P86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을 다 써버리는 특권, 필멸의 파도가 나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위로 부서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더 이상의 시간도, 더 이상의 잠재력도 없다. 모든 것을 배제하는 특권. 끝내는 특권. 내가 끝났음을 아는 특권. 그리고 나 없이도 시간은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아는 특권. - P88

결과를 바라보며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막상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순간, 내 모든 기쁨은 결과를 위한 길을 닦고 그 길을 밟는 데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끝이라는 형식은 매력적이지 않다. 내가 시작이나 끝보다 지속하는 과정을 즐긴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 P90

지금 나는 일기가 내가 잊은 순간의 모음집이라고, 내가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어가 끝낼 수도 있는 기록이라고, 말하자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P96

개인적 기록인 일기가 그 자체로 말이 되게 쓰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일기는 어제에서 벗어나지도, 내일로 향하지도 않았다. 일기는 상위의 형식에서 분리된 형식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기 자체에는 형식이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일기는 그저 축적, 그저 하루 하루 하루 하루의 축적이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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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어쩌고요? 나는 애들을 사랑해요."
"욕심도 많군요. 하긴 이기주의자에게 자식은 자기 자신의 일부죠. 선생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식이 선생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나쁘지 않아요." - P84

"5년만 더 지나면 두 분은 서로를 지긋지긋해하는 노인으로 변할 겁니다. 뒤를 돌아보면 후회로 점철된 삶이 있죠. 그다음은 죽음을 기다리며 버텨야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런 삶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때는 돈 자체가 필요 없어질 테니까요."
"왜 그렇죠?"
"돈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늙으면 하고 싶은 일이 없어져요. 돈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필요해지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알고 보면 굉장히 단순하거든요. 인간은 어린 시절, 유년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서 쇠퇴기로 향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어요. 그 후에는 자신이 차지한 공간을 비워 주는 거죠." - P85

니콜라이는 문득 ‘존재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를 구별하는 경계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깨달았고,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라는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뭔가를 해야 할 의무를 갖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쓰나미가 그를 쓸어가 버릴 수도 있었고, 비행기와 함께 추락할 수도 있었고, 병에 걸릴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남자는 수명이 짧다. - P88

"무슨 일이 있어도 재혼은 안 됩니다." 사회혁명당원은 공표하듯이 말했다. "아내는 어디까지나 자녀를 낳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선생님한테는 이미 자녀가 있어요. 그렇다면 아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애인이 필요한 겁니다. 양질의 오르가슴과 영감으로 충만한 비행이 필요한 거죠. 여자는 남자가 쉽게 질리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싫증 나면 애인을 바꾸세요. 절벽 근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삶을 누려 보세요. 만약에 모든 것이 싫증 나면 그때는 홀로 고요한 심연에 갇혀 노후를 맞이하는 겁니다. 노년도 인생에서 좋은 시기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 P91

"당신은 그냥 등골이 휘도록 일만 한 게 아니잖소." 인노켄치가 반박했다. "당신은 일과 자신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운명에 일조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잖소."
*뭘 그렇게 거창하게······."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한 손을 저으면서 부인했다. - P95

그녀는 두 부류의 남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돈 많은 남자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은 아내한테 붙어서 살아간다. 그러면 여자는 둘이서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힘든 일이다. 반면 돈 많은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무례하며 결국은 아내를 버린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당나귀로 살 것인지, 자기를 마구 짓밟고 척추를 부러뜨려도 참고 살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물론 지조와 성공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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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다.

기억할 만한 샌드위치 하나, 기억할 만하지 않은 층층의 계단.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수다스러운 말소리로 가득한, 기억할 만한 잠깐의 대화. - P10

나는 어느 공책 표지 안쪽에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 삼아 시 몇 구절을 필사해 두었다.

그대가 다 늙어 머리는 허옇게 세고 잠이 늘어 난롯가에서 꾸벅꾸벅 졸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떠올려봐요. 한때 그대 눈이 지녔던 그 유순한 눈빛과 깊은 그림자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그대가 늙거든(When You Are Old)』 - P11

그때는 일기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잊는지를 아직 모르던 때였다. - P13

간혹 일기 쓰기를 매일 하는 운동이나 기도나 자선 활동처럼 고결한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시도만 몇 년째예요, 라고 그들은 말한다. 매년 1월이면 일기를 쓰기 시작해요, 라거나 전 기본자세가 안 돼 있어요, 라고도 말한다. 그들은 나를 의지력이나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일기를 쓰지 않는 편이 더 힘든 걸요, 하고 해명해 본다. 내게 일기 쓰기는 (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지긋지긋한 숙제 같은 것이 아니다. 운동을 하거나 돈이 되는 일을 하거나 불운한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 나는 일기를 쓸 따름이다. 하나의 악습인 셈이다. - P14

오늘이라는 시간은 몹시 벅차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이 아니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이 없다면 나는 오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하루하루 사이에 여분의 하루하루가, 완충 역할을 하는 하루하루가 필요하다.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목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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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한 사람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그것도 돈을 벌겠다는 꿈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 P3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살뜰한 보살 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했나?" - P36

인노켄치도 신이 난 건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텅 빈 집에 고양이처럼 홀로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고 숨도 쉬고 노크도 했으며, 심지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이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다 갑자기 죽음과 마주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 뛰어와서 손을 잡고 저세상 가는 그를 배웅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를 위해 눈물도 흘려 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여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는 계단을 따라 홀로 내려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P36

안젤라는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보곤 갑자기 떠올렸다.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람? 과거의 아름다움과 지식,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뇌 기능이 퇴화되어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할 바에야······." - P40

노브이 루스키의 저택은 지붕이 독특한 3층짜리 벽돌집이었다. 별장 밀집 지역이 아니라 평범한 시골인 마리에, 그것도 기울어져 가는 농가들 사이에서 혼자 바보처럼 튀는 건물이었다. 자랑하듯 혼자 우뚝 서 있어서 단연 사람들 눈에 띄었다. 안젤라는 그 집을 보고 ‘불타 버리면 끝인 것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 P41

책은 좋은 책과 나쁜 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책과 맞지 않는 책으로 나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처럼 말이다. 자기 자식은 누구든 좋아하지만, 남의 자식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칭찬해도 무심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어떤 감정을 찾아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병적인 상상력을 말이다. 반면 바보들도 이해할 만큼 쉽게 쓰는 작가들도 있다. 그런 글의 특징은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모든 것이 잿빛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 P44

안젤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당신네보다 적으니까." 디아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안젤라는 ‘우리‘니 ‘당신네‘니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란 돈을 가진 쪽, 그러니까 저택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한편 ‘당신네‘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과 시골 마르트노프카에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팔을 뻗어 돈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돈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분류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골라 가면 그만이라는 논리였다. - P48

"집으로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공간을 보여 준다는 걸 의미하죠. 레스토랑에 초대하는 건 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요."
안젤라는 적이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54

안젤라는 모든 모스크바 여자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마르트노프카에서는 아무도 다이어트에 관심이 없었다. 안젤라는 개도 큰 개가 있고 작은 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덩치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는 것일 뿐 이런 점이 누군가를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말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 P57

하지만 괜찮다. 안젤라는 사지가 멀쩡하고, 머리는 정상으로 어깨에 붙었고,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이 있었다. 게다가 적어도 발아래 땅이 있고 머리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등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영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파베르제의 달걀을 가진다 해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다. - P59

밤마다 달빛이 집 안까지 들어왔고, 근심 어린 그림자가 벽을 따라 움직였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시간이었다. 어서 빨리 노 래를 받고 싶었다. 한편 그냥 사랑을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철창에 갇힌 알료시카 셀리바노프조차 왕자로 보이고 그가 철가면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심장을 꿰뚫던 그의 거친 입술도 떠올랐다. 이어서 머리, 가슴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신체 부위를 포함하여 온몸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창피하고 말고 하는 것도 누군가 옆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 P60

그런데 레나는 어떤가? 키프로스섬에 갔다가 좋은 물을 마시러 키를로비바리에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생트로페의 바다에 가 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쿠셰빌에 가면 그만이었다. 이런 여행은 그녀의 단조로운 갈색 톤 삶에 묻은 얼룩 정도에 불과했다. 레나는 사랑에 목말라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사랑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봉사하고, 만족시키고, 포옹하고, 말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온갖 천상의 향기를 내뿜는 거였다. - P61

니콜라이는 사색에 잠긴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의 뒤통수는 무언가 미성숙한 면이 있었다. 안젤라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생의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굳이 맛을 찾자면 서운함이랄까. 모든 게 니콜라이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관망할 뿐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니까. 그가 원인을 제공했지만 사실은 그도 피해자였다. 브론스키처럼. - P69

‘맙소사,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잠이 들까. 사람 꼴이 말이 아니네. 사실 늙는 걸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돈으로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 P71

지금의 안젤라는 노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 한 마리를 잡겠다며 남이 싸 놓은 똥을 치우고 끊임없이 닦고 청소하느라 세 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어두운 곳을 밝게 만드는 일 그리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식재료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점심을 만드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모두 앉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그럴 때면 그들의 얼굴도 밝아진다. 위는 음식으로 가득 차고 도파민이 분비된다. 사실 인간에게 노래와 점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75

이제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남편도 옆에 있고 일도 마음에 들었으며 몸도 건강한 편이었다. 이 이상 무언가를 더 바란다면 욕심일 듯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감사 속에 몸을 녹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이다. 남이 봤을 때는 시답지 않은 행위라도 말이다. - P76

안젤라는 부자들의 삶은 파티와 유희 그리고 연애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그녀의 삶은 첫째도 노동, 둘째도 노동, 셋째 도 노동이었다. 그것도 아침부터 밤까지. 밤에 잠깐 잠드는 것 빼고는 또다시 쳇바퀴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것은 언제든 이룰 수 있었다. 삶은 연극이고, 그는 그 삶의 연출가였다. - P80

"난 우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우정은 게오르기만으로 충분해요. 난 열정이 필요하다고요."
"열정은 돈을 주고 사면 되죠." 라이사가 지적했다.
"대가성이 있는 사랑 말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바보 이반이 세 개의 솥에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이반 왕자로 변한 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다고요."
"당신의 솥들은 똥으로 가득 찼을 거예요. 그 안에서 헤엄칠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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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레일라, 그곳의 문제는 단 하나뿐이지만, 그 뿌리가 너무나 깊어서 도무지 근절할 수가 없다네. 법정은 인간에 의해 돌아가지만 정의는 그렇지 않으니까. - P190

루퍼트 결국 중요한 건 살인의 범위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작은 규모의 살인엔 공포를 느끼고 치를 떨지만, 대규모의 살인엔 존경과 숭배를 표하지. 그게 바로 살인과 전쟁의 차이야. 예컨대, 한 남자가 런던의 어두운 골목에서 어떤 남자를 살해했다고 가정해 보세. 레일라의 말대로, 그의 금니가 탐나서 말이야. 사회 전체가 떠들썩해지고, 그 악한을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고 온통 야단법석일 거야. 우리는 그걸 살인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한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가 모조리 봉기해서 다른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를 전부, 그것도 상대의 금니가 탐난다는 허접한 이유조차 없이 몰살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 같은 행위를 용인하고 심지어 박수를 보낸다네.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나? 지난 세계 대전 동안에, 나 역시 그러한 전제 아래서 행동했는데 말이야. 참으로 비통한 노릇이지. 그 때문에 나는 오늘도 자네들과 함께 축음기를 들으며 마음껏 즐기고 싶었건만, 무슨 늙은이처럼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되었다네.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일세, 내가 살인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는거지. 그렇지 않은가? - P190

루퍼트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사실 십계명은 본래 그것을 부여받은 민족의 유목 생활에 있어서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거야. 다만 그것이 오늘날의 생활 방식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까닭에 우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거지. 이따금 나는 그중에, 혹시 하나라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있을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네. 우선 ‘부모를 존경하라.‘라는 계명인데, 물론 존경하지. 그러지 않으면 어쩌겠어? 실제로 나는 내 생일마다 항상 부모님께 축하 전보를 보낸다네. 비록 그러는 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연장해 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다른 것들도 살펴보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난 이건 지키지 않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이건 지키지. ‘살인하지 마라.‘ 좀 전에 말했듯이 이건 벌써 어겼어. - P190

루퍼트 왜냐하면 이 시간이야말로 런던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 같거든. 모든 것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쾌락의 어리석음이 똑같이 투명해지는 시간이라는 말일세. 직장을 잃은 하녀들과 슬럼가의 타락한 미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거리를 헤매는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야. 또 광고판이 번쩍이고, 택시와 버스가 뒤엉킨 교통 체증의 시간이지. 그리고 공연장에 몰린 런던의 관객들이, 연극의 뻔한 결말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자리를 잡는 시간이라네. 막이 내리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그들은 추운 데다 비까지 내릴지도 모르는 밤거리로 쏟아져 나오겠지. 그러고는 택시를 잡느라 아우성치거나 기차역으로 걸음을 재촉할 거야.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서 식은 저녁을 먹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그런가 하면, 아직 조금 더 험한 꼴을 봐야 하는 이들도 있다네.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는 여태 문을 열지 않았지만, 곧 영업을 시작할 테고······. 아무튼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질 때도 있다네. 11시 이십오 분 전. 지독한 시간이야. 섬뜩한 시간이지. 쾌락이 끝나는 시간일 뿐 아니라, 쾌락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야. 자, 내게는 지금 이 시간이 그러하다네. 게다가 오늘 밤엔 천둥까지 치지 않았나. 11시 이십오 분 전에······. - P208

루퍼트 그래, 알아들었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세상은 기이하고,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니 말이야. 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 그럼에도 늘 서투른 논리를 적용하려 들다 보니 이상한 길로 들어서게 돼. 이번 경우도 그런 거 같군. 자네는 내가 했던 말을 내 면전에 들이밀었고, 따라서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네. 앞으로 다시는 논리를 맹신하지 않을 거야. 자네는 내가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고 말했어.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나는 그런 인간이지. 그런데 거기엔 자네의 생명도 포함된다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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