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 P20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본인을 변명하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장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오든은 언제나 그렇듯이 같은 말을 조금 더 점잖게 했다. "우리 심장의 갈망은 나선형의 코르크따개와 같으니." 관객의 심장이 원하는 것 또한 나선형의 코르크따개 같다.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버리지 못한다. - P24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일들이 앞으로 몇 년간 더 가시화될 것이었다. 마치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 악당처럼 시야에 잡힐 것이었다. 물론 이 잔인성은 새롭지 않았다. 이곳에 늘 있어 왔다. 우리 중 일부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 P25

1992년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월터 아이작슨이 새로운 관계에 대해 묻자 앨런은 이후 대단히 유명해진 대사를 날린다. 그것은 반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어리석은 일축이었다.
"마음이 원하는 걸 원하는 거죠."
한번 들으면 영원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원하건 아니건 그 즉시 외우게 된다.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자의 발언이다. 불합리함을 오만하게 내세우고 있다. 우디는 말을 이었다. "이런 일에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 그것으로 끝인 거죠." - P51

나는 앞서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 즉 동의를 암시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에 불만을 표한 바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에서는 ‘우리‘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 ‘우리‘는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돋보기였고 확성기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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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함께 머리도 틀림없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은 강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항상 계속 살아가려고 하지. - P385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 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 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 P386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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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승리였지만, 그는 항상 재미있어하면서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마치 권태와 무관심 덕분에 얻어낸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P320

공격이 끝난 뒤 아이는 한가할 때마다 거의 항상 제 방에 혼자 틀어박혀 아버지가 열두 살 생일선물로 준 작은 라디오를 들었다. 정리하지 않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거나 책상에 꼼짝 않고 앉아서 협탁에 놓아둔 땅딸막하고 못생긴 기계의 소용돌이무늬 속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그 목소리, 음악, 웃음소리만이 그녀의 정체감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체감마저 그녀가 다시 불러올 수 없는 저 먼 침묵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 P329

아이가 워낙 섬세한 도덕적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계속 그 본성을 보살피고 키워주어야 하는 드물고 사랑스러운 인간에 속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과 이질적인 본성이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부드러운 애정과 조용한 생활을 갈망하는 본성이 무관심과 무정함과 소음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런데 그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그 이상하고 유해한 환경 속에서도 사나움을 얻지 못해서 자신에게 맞서는 잔혹한 세력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고 그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작게 웅크린 채로 독하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330

그는 아주 깊고 강렬한 여러 감정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 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사막에 홀로 솟아 있는 무덤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광활한 사막 때문에 더욱 외롭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 P341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캠퍼스로 몰려오는 바람에 학교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에 없는 생기가 넘치고, 강렬함과 소란스러움이 합쳐져서 학교의 변신을 이루어낸 것이다. 스토너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나이가 많아서 이상해 보이는 학생들은 열렬하고 진지했으며, 시시한 것들을 경멸했다.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한 그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스토너가 예전에 꿈꾸던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 P348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 P349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 P350

그는 늙은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온 세상과 자기 조국의 병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증오와 의심이 일종의 광기가 되어 신속히 퍼지는 역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젊은이들은 또다시 무의미한 파멸을 향해 열렬히 행진하며 전쟁터로 향했다. 악몽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가 느낀 연민과 슬픔은 너무나 오래돼서 그의 나이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사가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351

그는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시 홀 1층의, 나무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바닥에 붙여 장식한 긴 복도에서 있었다. 멀리서 새들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붕붕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들렸다. 어두운 복도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빛이 흐릿하게 빛나며 그의 심장박동처럼 깜박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직접 알고 있는 그의 몸은 그가 빛과 어둠이 뒤섞인 공간을 향해 일부러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순간 저릿거렸다. - P362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후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주름 없는 젊은 얼굴처럼 보였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 P381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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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 P251

그는 자신이 그처럼 비현실적인 상태를 맛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이 고민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멍하기만 했다. 이 일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 P252

최근에 빈번히 그러는 것처럼, 연구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캠퍼스 풍경을 지긋이 바라 볼 뿐이었다. 아직 밝은 낮이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제시 홀의 그림자가 직사각형 안뜰 한복판에 강하지만 고독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서 있는 다섯 기둥의 뿌리 가까이까지 옮겨가 있었다. 안뜰 중에서 그림자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은 어렴풋이 갈색을 띤 짙은 회색 이었다. 그림자 너머의 겨울 잔디밭은 밝은 황갈색이었지만, 연하디 연한 초록색이 아주 흐릿하고 얇은 막처럼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대리석 기둥들은 제 몸을 거미줄처럼 휘감은 검은 덩굴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곧 그림자가 저 기둥들 위로 기어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기둥의 뿌리 부분은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이고, 그 어둠이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더 빨리 위를 향해 기어올라서 마침내······. - P253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스토너가 심호흡을 하자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쭉날쭉한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개 속에서 반짝였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힘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나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는 안개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P262

그는 자신을 조금 바보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든 일반적인 감정 외에 특별한 감정을 품기 힘든 사람. - P264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 P270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 P272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관념을 고수하는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두 사람이 야단스럽지는 않지만 감동을 느끼면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 P277

그는 의지력을 동원해야 비로소 자신이 이디스를 속이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영위하고 있는 두 개의 삶은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기성찰에 약하고 자기기만 또한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 P279

가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항상 자기 마음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사실을 입에 담을 때가 있었다. 다정하게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말할 때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화제를 입에 올리듯이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을 때도 있고, 뭔가 사소한 일에 기분이 상했을 때처럼 까다롭게 굴 때도 있었다. - P281

흡연실에서 언뜻언뜻 화제에 오르는 자 신의 모습,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젊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와 사귀면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 젊음을 향해 원숭이처럼 서투르게 손을 뻗는 비루한 중년남자.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어리석은 광대 같은 그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불편함, 연민, 경멸을 느끼며 웃음을 터뜨릴 터였다. 그는 이 남자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살펴보면 볼수록 그 남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 P281

두 사람은 몸짓에 대해 생각하고, 반항을 입에 담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 남들에게 여봐란 듯이 과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서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도 없었다. 그저 둘만의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둘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P282

두 사람은 빛이 절반밖에 들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상, 변화와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그 세상이 비현실적인 거짓 세상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이 두 세계에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 P293

그는 길고 어두운 복도로 나가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햇빛을 향해 걸었다. 세상은 탁 트여 있었지만, 그에게는 어디를 돌아봐도 감옥 같았다. - P298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 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 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 P298

"[…]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 P301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 P307

1937년 여름에 그는 학문에 대한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젊음이나 나이와는 상관이 없고 현실과도 유리된,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으로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절망의 순간에도 자신이 그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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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는 제시 홀 남관 지하의 작은 강의실에서 열렸다. 습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냄새가 시멘트벽에서 스며 나오고, 아무것도 깔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서 사람들의 발이 공허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천장 한가운데에 하나밖에 없는 불빛이 아래를 비추고 있어서, 강의실 복판의 책상 겸용 의자에 앉은 학생들은 환한 빛 속에 풍덩 빠져 있었다. 하지만 벽들은 흐릿한 회색을 띠었고, 강의실 네 귀퉁이는 거의 새카맣게 어두웠다. 마치 색을 칠하지 않은 매끈한 시멘트 바닥과 벽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 P184

그동안 스토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핀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이 무거운 가면처럼 변해 있었다. 러더퍼드는 눈을 감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홀랜드는 워커의 정중하지만 경멸 어린 태도와 로맥스의 열광적인 활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토너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이 점점 강렬해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들 중 누구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18

스토너는 맞은편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 P233

이디스가 앙심을 품은 듯한 목소리를 이끌어내서 냉담하게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도 가난하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죠. 일찌감치 생각해 보지 그랬어요?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 불구자처럼 무능력해지겠죠.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바뀌더니 그녀가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애정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한테는 그런 일들이 아주 중요하죠. 그러니 달라져봤자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 P242

결국 그는 제시 홀의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런저런 강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공부의 방향을 미리 정해놓을 필요도 없이 자유로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순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그가 수년 전부터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 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 P249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 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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