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초인종을 누르자, 벨소리가 공동묘지 같은 정적을 깨고 건물 전체에 소름처럼 번져 나갔다. "됐어, 이제 그만 눌러." 앙토니가 엄마의 팔을 붙들며 저지했다. 앙토니의 말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건물 안에 울리자, 두 사람은 얼음처럼 굳어 꼼짝하지 않았다. 벽 사이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두 사람에게는 선전 포고나 규탄처럼 들렸다. 문제의 아파트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앙토니와 엄마는 급속히 졸아드는 대범함과 두려움으로 동시에 무장하고 적의 영토에 서 있는 셈이었다. - P173
혹시 하신이라는 아이가 있는지 엘렌이 묻자, 남자의 이마에 돌연 주름이 깊어졌다. "없어요. 그 애는 여기 없는데." "곧 돌아올까요?" " 원하는 게 뭐요?" 엘렌과 앙토니의 등 뒤로 텅 빈 계단참과 건물의 말 없는 수직성, 침묵 속에서 꿈지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전부 그 건물 어딘가에서 TV를 보거나 마약을 하거나 이런저런 유희를 즐기면서 열기 및 권태와 싸우며 매복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도 언제든 우르르 모여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74
엘렌이 하신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도. "무슨 일이라고요?" 남자가 물었다. "아드님이 돌아오면 같이 듣는 게 좋겠어요, 부알리 씨." 엘렌의 정중함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것은 공중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철저히 계산된 거리감 혹은 좋지 않은 결과를 전하는 의사의 어조를 연상시켰다. - P174
엘렌은 ‘도둑‘이라는 단어를 두 번에 걸쳐 사용했는데, 물론 다정한 위로가 담긴 어두를 잊지 않았다. 남자의 표정이 점차 변해 갔다. 남자는 불현듯 터무니 없이 늙어 버린 자신의 신세를 절감하며 끔찍한 책임 의식에 사로잡혔다. 남자와 라니아는 가난한 조국을 떠나 에일랑주에 정착했고, 이곳은 두 사람에게 그럭저럭 살 만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남자는 공장에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어수룩하나 묵묵하게, 아랍 사람이라는 사실에 순종하며 사십 년 세월을 바쳤다. 직장의 위계질서를 좌우하는 것은 능력이나 근속 기간, 학위만이 아님을 남자는 아주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공장 직원들 사이에는 세 가지 계급이 존재했다. 제일 낮은 계급은 흑인 그리고 남자와 같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차지했다. 그 위에 폴란드인, 유고슬라비아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덜 능숙한 프랑스인이 있었다. 가장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려면 프랑스 출생이어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기능공이 될 경우, 그에게는 늘 의심의 오라와 비난이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 P176
공장은 전혀 순수하지 않은 방법으로 돌아갔다. 원칙적으로는 업무 효율성이 노동자들과 직책의 분배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논리, 이런 횡포, 생산성, 강행군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시가 경쟁력을 잃어 갈수록 더 높은 차원의 협박을 가하는 집단 논리 뒤에 암묵적 규칙,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강압적 방법, 굴욕적인 지침만을 보장하는 제도화된 폭력, 겉보기에는 그지없이 자연스러운 계급화에서 비롯된 혼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계급의 제일 밑바닥을 차지하는 건 북아프리카 출신의 곱슬머리 아랍인과 흑인들, 다시 말해 말렉 부알리와 그 동료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알리와 동료들을 향한 경멸은 어느 정도 은폐되는 듯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부알리는 진급도 했지만, 내장 깊은 곳에는 사십 년 동안 안고 살아온 분노의 찌꺼기가 이글거렸다. - P177
"그쪽은 방금 나를 모욕했어요 "그렇게까지 한 것 같지는 같은데요." 엘렌이 받아쳤다. 창밖에서 티티새 한 마리가 고집스럽게 울어 댔다. 앙토니는 이 영감이 무슨 짓이라도 할 기미를 보이면 당장 머리통을 뽑아 버리겠다고 마음먹던 중이었다. 안달이 난 앙토니는 두 허벅지를 들썩이고, 의자 아래에서 발뒤꿈치를 쉴 새 없이 부딪쳤다. 하신은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전개될까. 이어질 이야기들, 복수, 얼굴에 후려갈길 주먹을 앙토니는 내내 상상했다. 그러나 말레 부알리는 그저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 P179
교육이란 꽤 엄숙한 단어여서 책이나 지침에 쓰일 뿐,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피 터지게 싸우든 신경조차 쓰지 않든, 현실에는 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는 법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고, 부모는 그 아이를 위한 계획을 세우며 밤을 새우기도 한다. 십오 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식탁 앞에선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고 씹으면서 말하면 안 된다고, 똑바로 앉으라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킨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취미 생활을 찾아 주고, 새 운동화와 속옷을 사 주기도 한다. 때로 병에 걸리거나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아이를 기르면서, 부모는 길을 잃기도 하고 잠잘 시간을 빼앗기기도 하며 늙어 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아이가 자식이 아니라 웬수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부모로서 다른 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다. 이제 진정한 골칫거리가 시작 되고, 부모는 평생을 바쳐 대가를 치르거나 법정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 P180
그들은 끈적거리는 몸, 짐승처럼 떡 벌어진 어깨로 스테파니의 주변을 서성였다. 진한 담배 냄새, 온몸을 뒤덮은 털, 두툼하고 역하고 섹시한 손. 정말 이상한 것은 사춘기 소녀 스테프가 이런 남자들의 시선을 한편으로는 무시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은근히 기다리고 즐긴다는 점이었다. 스테파니는 그들이 가진 사회적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독일제 세단과 그들의 신용 카드에 대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는 자식들을 등록금이 턱없이 비싼 비즈니스 스쿨에 보내고 남프랑스 어딘가에 배를 소유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고 한 번쯤은 도지사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꿈을 꾸는 남자들의 야심과 능력. 그들의 내연녀, 빚,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여린 심장, 위스키, XXL 사이즈 랄프 로렌 셔츠. 이 모든 능력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건 스테프가 아직 십 대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 P190
그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깐깐하고 거만한 그들은 처음엔 스스로를 과신하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제풀에 화내는 버럭쟁이가 되었다.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는 늘 벗어날 수 없는 업무와 암적인 책임감이 함께했다. 과거 어느 날 날렵한 소녀들이 봉긋한 가슴과 거푸집에서 삼 초 전에 꺼낸 듯 아직 따끈따끈한 다리로 아직 소년이던 그들과 한 침대에 들었을 것이다. 소녀들은 허벅지를 벌리고 소년의 장밋빛 성기를 입에 넣었을 것이다. 숨 돌릴 새도 없이 긴박하게 진행된 그 일로 소년들은 망연 자실하고 위로받을 수 없는 비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흘리는 땀 속에 순수함이 질식해 사라졌을 때, 어쩌면 소년들은 한 번만 더 순수함을 간직하길 바랐을 것이다. 어린 소녀들의 몸은 이제 막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소년 들은 살집 없는 배, 방금 도색한 자동차 같은 피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시작뿐임을 깨닫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돈벌이를 해 온 것이다. - P190
그 시간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월급쟁이들은 사무실 또는 기계 앞에 앉아 있거나 이미 바캉스를 떠나 캠핑을 즐기는 중이었고, 노인들은 날이 더워서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는 오후의 열기에 힘입어 뭔가 짜릿한 일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십 대 청소년들뿐이었다. 스쿠터가 속도를 낼수록 열기는 잦아들고 그 대신 유연한 바람이 몸에 닿았다. 바람 자락이 소녀들의 맨발을 비단결처럼 간질였다. 스테파니는 친구의 한쪽 어깨 너머로 앞에 뻗은 도로만 응시했다. 미끄러지듯 작고 가볍게 지방 도로 위에 던져진 소녀들은 자유를 느끼며 삶이 그들에게 약속해 준 것들을 말없이 생각했다. - P198
스테파니는 너무 망가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엄마는 늘 부드러운 염려 대신 세관원 같은 눈매와 초시계를 들고 기다렸다. 저녁 7시를 넘겨 게슴츠레한 눈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존중이니 미래니 하는 끝없이 쏟아지는 훈계를 감수해야만 했다. 오 분 지각은 잠정적 외박으로 간주되었다. 겨우 오 분 늦는 것만으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미래, 원치 않은 임신, 술독에 빠져 사는 어린 남자, 장래성 없는 한심한 직업 따위의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엄마는 스테파니가 사회학을 전공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기를 바랐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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