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어야 하리라. 최적의 조건은 신학 학위가 아닐까 싶지만.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웅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스 아드 푸투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 - P69

어제는 그 선로 변경 초소에서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은 외삼촌의 장례를 치렀다. […] 그렇게 수습한 것들을 관 속에 놓인 삼촌의 옷에 몽땅 쑤셔넣었다. 그리고 아직 못에 걸려 있는 철도원 모자를 삼촌의 머리에 씌우고 삼촌의 손가락 사이에는 이마누엘 칸트의 아름다운 글귀를 끼워넣었다. "나의 생각을 언제나 더 크고 새로운 감탄으로 차오르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도덕률이다······" 언제 읽어도 변함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글귀였다.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젊은 칸트의 책을 들척이다가 더 아름다운 문장을 찾아냈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 P70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거나 후진했다. 기계가 멈출 때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칸트의 『천계론』을 읽었다. 한 불멸의 정신이 침묵 속에서, 밤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녕 설명할 수는 없는 개념들이다. 너무도 놀라운 글귀들이어서 나는 저 높은 곳의 별이 총총한 하늘한 자락을 보려고 건물의 배기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러고 나면 역겨운 종이 더미와 솜뭉치에 둘러싸인 생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을 갈퀴로 찍어 압축통 속에 던져넣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P74

처음에 나는 그녀가 항시 불을 지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사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은 그녀 안에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없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저녁마다 우리는 말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내 집 열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 P79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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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일상이 이상한 양상을 띠었다. 전날 밤보다 더 피곤한 아침을 맞이할 때도 있었다. 앙토니는 점점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주말이면 더 심해서 엄마의 분노를 샀다. 농담을 건네는 친구들에게 버럭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일 초도 쉬지 않고 몸을 부딪쳐 일부러 아픔을 느끼고, 벽 속에 처박히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워크맨을 귀에 꽂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 똑같은 슬픈 노래를 스무 번도 넘게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가 TV로 「베벌리힐스」를 보고 있자면 멜랑콜리가 정점을 찍었다. 다른 세상, 캘리포니아라는 지역, 그 곳 사람들은 여기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앙토니가 가진 것은 여드름, 구멍 난 운동화, 부실한 오른쪽 눈이 다였다. 그의 생활을 침범하는 부모도. 물론 부모의 명령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며 그 권위에 끈질기게 도전했지만, 앙토니가 원하는 삶은 여전히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처럼 살다가 아버지처럼 인생을 끝낼 수는 없었다. 술에 취해 하루의 절반을 TV 뉴스 앞에서 투덜거리거나 무슨 말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여자와 으르렁거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 P212

"혹시 나랑 사귈래?"
스테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사뭇 진지해 보이는 소년 앞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소년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집스럽고 잘생긴 아이였다. 보드카의 효력인지 스테파니의 눈에 소년은 그다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옆모습을 보니 소년에 대한 선입견이 점점 사라지고 정면에서는 도드라져 보였던 부실함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속눈썹이 길었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소녀는 소년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잊었다. 관찰당한다는 느낌에 소년이 소녀를 돌아보자, 반쯤 감긴 오른쪽 눈이 다시 드러났다. 하지만 소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 P220

"데려다줄까?"
스테파니는 도움닫기라도 하듯 팔을 살짝 뒤로 휘둘렀다가 빈 술병을 마을 쪽으로 멀리 던졌다. 술병은 탄도 미사일처럼 아름답고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소년과 소녀는 술 병이 마른 잎사귀의 바스락거림과 함께 10여 미터 아래에 떨어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아니야, 됐어." 스테파니가 말했다.
소녀가 떠난 뒤 양토니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울고 싶어졌다. - P222

그녀의 피부는 서서히 복잡한 표층이, 추억이 되었다. 변화는 매일매일 들여다본다고 감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변화와 주름은 어느 날 아침 문득 눈에 띄었고, 검붉은 소정맥이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자기만의 은밀한 생애를 누리며 느린 반발을 일으키듯이. 또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렌도 계절마다 다이어트를 했다. 그건 그녀와 그녀의 몸 사이에 맺어진 야릇한 협약이었다. 다이어트는 지난 시절로 돌아가려는 경제학을 허락하는 합법적인 유통 수단이었으며, 그 속에서 활력과 고통을, 주름과 공허를, 충만함과 절제를 맞교환했다. 요컨대 엘렌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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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초인종을 누르자, 벨소리가 공동묘지 같은 정적을 깨고 건물 전체에 소름처럼 번져 나갔다.
"됐어, 이제 그만 눌러." 앙토니가 엄마의 팔을 붙들며 저지했다.
앙토니의 말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건물 안에 울리자, 두 사람은 얼음처럼 굳어 꼼짝하지 않았다. 벽 사이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두 사람에게는 선전 포고나 규탄처럼 들렸다. 문제의 아파트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앙토니와 엄마는 급속히 졸아드는 대범함과 두려움으로 동시에 무장하고 적의 영토에 서 있는 셈이었다. - P173

혹시 하신이라는 아이가 있는지 엘렌이 묻자, 남자의 이마에 돌연 주름이 깊어졌다.
"없어요. 그 애는 여기 없는데."
"곧 돌아올까요?"
" 원하는 게 뭐요?"
엘렌과 앙토니의 등 뒤로 텅 빈 계단참과 건물의 말 없는 수직성, 침묵 속에서 꿈지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전부 그 건물 어딘가에서 TV를 보거나 마약을 하거나 이런저런 유희를 즐기면서 열기 및 권태와 싸우며 매복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도 언제든 우르르 모여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74

엘렌이 하신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도.
"무슨 일이라고요?" 남자가 물었다.
"아드님이 돌아오면 같이 듣는 게 좋겠어요, 부알리 씨." 엘렌의 정중함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것은 공중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철저히 계산된 거리감 혹은 좋지 않은 결과를 전하는 의사의 어조를 연상시켰다. - P174

엘렌은 ‘도둑‘이라는 단어를 두 번에 걸쳐 사용했는데, 물론 다정한 위로가 담긴 어두를 잊지 않았다. 남자의 표정이 점차 변해 갔다. 남자는 불현듯 터무니 없이 늙어 버린 자신의 신세를 절감하며 끔찍한 책임 의식에 사로잡혔다. 남자와 라니아는 가난한 조국을 떠나 에일랑주에 정착했고, 이곳은 두 사람에게 그럭저럭 살 만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남자는 공장에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어수룩하나 묵묵하게, 아랍 사람이라는 사실에 순종하며 사십 년 세월을 바쳤다. 직장의 위계질서를 좌우하는 것은 능력이나 근속 기간, 학위만이 아님을 남자는 아주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공장 직원들 사이에는 세 가지 계급이 존재했다. 제일 낮은 계급은 흑인 그리고 남자와 같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차지했다. 그 위에 폴란드인, 유고슬라비아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덜 능숙한 프랑스인이 있었다. 가장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려면 프랑스 출생이어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기능공이 될 경우, 그에게는 늘 의심의 오라와 비난이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 P176

공장은 전혀 순수하지 않은 방법으로 돌아갔다. 원칙적으로는 업무 효율성이 노동자들과 직책의 분배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논리, 이런 횡포, 생산성, 강행군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그러나 현실에서는 도시가 경쟁력을 잃어 갈수록 더 높은 차원의 협박을 가하는 집단 논리 뒤에 암묵적 규칙,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강압적 방법, 굴욕적인 지침만을 보장하는 제도화된 폭력, 겉보기에는 그지없이 자연스러운 계급화에서 비롯된 혼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계급의 제일 밑바닥을 차지하는 건 북아프리카 출신의 곱슬머리 아랍인과 흑인들, 다시 말해 말렉 부알리와 그 동료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알리와 동료들을 향한 경멸은 어느 정도 은폐되는 듯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부알리는 진급도 했지만, 내장 깊은 곳에는 사십 년 동안 안고 살아온 분노의 찌꺼기가 이글거렸다. - P177

"그쪽은 방금 나를 모욕했어요
"그렇게까지 한 것 같지는 같은데요." 엘렌이 받아쳤다.
창밖에서 티티새 한 마리가 고집스럽게 울어 댔다. 앙토니는 이 영감이 무슨 짓이라도 할 기미를 보이면 당장 머리통을 뽑아 버리겠다고 마음먹던 중이었다. 안달이 난 앙토니는 두 허벅지를 들썩이고, 의자 아래에서 발뒤꿈치를 쉴 새 없이 부딪쳤다. 하신은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전개될까. 이어질 이야기들, 복수, 얼굴에 후려갈길 주먹을 앙토니는 내내 상상했다. 그러나 말레 부알리는 그저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 P179

교육이란 꽤 엄숙한 단어여서 책이나 지침에 쓰일 뿐,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피 터지게 싸우든 신경조차 쓰지 않든, 현실에는 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는 법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고, 부모는 그 아이를 위한 계획을 세우며 밤을 새우기도 한다. 십오 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식탁 앞에선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고 씹으면서 말하면 안 된다고, 똑바로 앉으라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킨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취미 생활을 찾아 주고, 새 운동화와 속옷을 사 주기도 한다. 때로 병에 걸리거나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아이를 기르면서, 부모는 길을 잃기도 하고 잠잘 시간을 빼앗기기도 하며 늙어 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아이가 자식이 아니라 웬수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부모로서 다른 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다. 이제 진정한 골칫거리가 시작 되고, 부모는 평생을 바쳐 대가를 치르거나 법정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 P180

그들은 끈적거리는 몸, 짐승처럼 떡 벌어진 어깨로 스테파니의 주변을 서성였다. 진한 담배 냄새, 온몸을 뒤덮은 털, 두툼하고 역하고 섹시한 손. 정말 이상한 것은 사춘기 소녀 스테프가 이런 남자들의 시선을 한편으로는 무시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은근히 기다리고 즐긴다는 점이었다. 스테파니는 그들이 가진 사회적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독일제 세단과 그들의 신용 카드에 대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는 자식들을 등록금이 턱없이 비싼 비즈니스 스쿨에 보내고 남프랑스 어딘가에 배를 소유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고 한 번쯤은 도지사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꿈을 꾸는 남자들의 야심과 능력. 그들의 내연녀, 빚,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여린 심장, 위스키, XXL 사이즈 랄프 로렌 셔츠. 이 모든 능력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건 스테프가 아직 십 대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 P190

그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깐깐하고 거만한 그들은 처음엔 스스로를 과신하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제풀에 화내는 버럭쟁이가 되었다.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는 늘 벗어날 수 없는 업무와 암적인 책임감이 함께했다. 과거 어느 날 날렵한 소녀들이 봉긋한 가슴과 거푸집에서 삼 초 전에 꺼낸 듯 아직 따끈따끈한 다리로 아직 소년이던 그들과 한 침대에 들었을 것이다. 소녀들은 허벅지를 벌리고 소년의 장밋빛 성기를 입에 넣었을 것이다. 숨 돌릴 새도 없이 긴박하게 진행된 그 일로 소년들은 망연 자실하고 위로받을 수 없는 비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흘리는 땀 속에 순수함이 질식해 사라졌을 때, 어쩌면 소년들은 한 번만 더 순수함을 간직하길 바랐을 것이다. 어린 소녀들의 몸은 이제 막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소년 들은 살집 없는 배, 방금 도색한 자동차 같은 피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시작뿐임을 깨닫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돈벌이를 해 온 것이다. - P190

그 시간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월급쟁이들은 사무실 또는 기계 앞에 앉아 있거나 이미 바캉스를 떠나 캠핑을 즐기는 중이었고, 노인들은 날이 더워서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는 오후의 열기에 힘입어 뭔가 짜릿한 일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십 대 청소년들뿐이었다. 스쿠터가 속도를 낼수록 열기는 잦아들고 그 대신 유연한 바람이 몸에 닿았다. 바람 자락이 소녀들의 맨발을 비단결처럼 간질였다. 스테파니는 친구의 한쪽 어깨 너머로 앞에 뻗은 도로만 응시했다. 미끄러지듯 작고 가볍게 지방 도로 위에 던져진 소녀들은 자유를 느끼며 삶이 그들에게 약속해 준 것들을 말없이 생각했다. - P198

스테파니는 너무 망가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엄마는 늘 부드러운 염려 대신 세관원 같은 눈매와 초시계를 들고 기다렸다. 저녁 7시를 넘겨 게슴츠레한 눈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존중이니 미래니 하는 끝없이 쏟아지는 훈계를 감수해야만 했다. 오 분 지각은 잠정적 외박으로 간주되었다. 겨우 오 분 늦는 것만으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미래, 원치 않은 임신, 술독에 빠져 사는 어린 남자, 장래성 없는 한심한 직업 따위의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엄마는 스테파니가 사회학을 전공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기를 바랐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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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이 뒤에 올라탔고, 소년들은 비로소 953번 지방 도로로 나섰다. 앙토니는 커브를 돌며 한쪽 다리를 쭉 뻗은 다음 앞으로 나가면서 속력을 냈다. 속도가 높아지자 눈물이 찔끔 나오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젊고, 사고를 낼 깜냥조차 없는 두 소년은 열기가 식은 도로 위를 헬멧도 없이 세차게 달렸다. 어느 순간 사촌이 속도 좀 줄이자고 말했다. - P60

앙토니는 혼자가 되었다. 스테파니와 친구는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앙토니는 초조함을 감추려 새 맥주 캔을 땄다. 다섯 캔째였고 이미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마침 오줌이 마려웠고, 화장실을 찾느니 차라리 수영장으로 내려가 호젓한 구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저 위에는 달빛이 환했다. 앙토니는 비교적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내일 그리고 몇 주 동안은 아직 방학이었다. 앙토니는 가슴 가득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결국 삶은 그다지 나쁠 게 없었다. - P64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뻘쭘해진 앙토니가 잇새로 침을 뱉었다. 소녀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눈짓을 주고받자 앙토니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윽고 소녀들은 앙토니를 내버려 두고 테라스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멀어지는 소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좁은 어깨, 청바지에 가려진 엉덩이, 새처럼 가느다란 발목, 어딘지 오만한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는 포니테일. 마리화나 기운이 조금씩 퍼지면서 불쾌감, 현기증,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조금 전의 흥분 대신 앙토니의 몸을 엄습했다. - P65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산업화가 해제되어 버린 도시마다, 가난한 마을마다, 이렇다 할 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이면 누구나 시애틀 출신의 그룹 너바나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들었다. 머리를 제멋대로 기른 이 그룹은 일렁이는 마음을 분노로, 우울을 데시벨로 바꿔 주었다. 낙원은 완전히 사라졌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제 남은 일은 온몸으로 힘껏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 P79

집 안에 들어가 보니 1층에선 끼리끼리 모여 여전히 나지 막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머리칼이 젖은 채,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거친 목소리로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폭신한 비치 타월을 몸에 둘둘 만 여자애들은 남자 친구에게 몸을 바싹 기댔다. 공기 속에 수영장 락스 냄새가 떠다녔다. 이제 새벽이 올 테고, 앙토니는 이어질 슬픔, 그를 기다리는 창백하고 괴로운 아침을 생각해 보았다. 엄마에게 된통 야단맞을 일만 남았다. - P80

청소년기에서 벗어난 이들은 대부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카글라스 또는 전자 제품 전문점 다르티 같은 데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했다. 기차역 근처에 케밥 가게를 새로 열었다는 사미가 지나가자, 아이들은 장사가 잘되는지 물었다. 낯빛이 썩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이들 모두 지난 번 도산 이후 강박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고민의 실체를 짐작 못 하는 바 아니었다. 한때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던 약 도매 상이었으나 이제는 낡은 푸조 205를 끌고 다녔다. 머쓱해진 소년들이 나중에 한번 들르겠다고 한마디씩 거들자, 사미는 올랭 피크 드 마르세유 유니폼 셔츠 아래로 삐져나온 뱃살과 두 명의 아이와 채무를 이끌고 다시 케밥 가게로 떠났다. 그러고 나자 수영장에 갔던 조무래기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희미한 농지거리가 오고갔지만, 다들 회전목마가 문 여는 시간을 기다릴 뿐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종 한낮의 열기와 권태가 알코올 효과처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주먹다짐조차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치명타 같은 고요가 다시 내려앉았다. - P93

오후 3시가 좀 넘어가면서 시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매일이 똑같았다. 오후의 빈 구멍 사이로 산만한 무력감이 신시가지 전체를 장악했다. 집집마다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이들 소리도 TV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시가지 한복판에 우뚝 선 타워들도 오후의 열기가 만들어 낸 안개 같은 적막 속에서 비틀거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따금 세발자전거를 연습하는 꼬마 여자아이가 정적의 모퉁이를 도려냈다. 소년들은 눈을 끔벅끔벅하다가, 야구 모자에 얼룩을 남기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쳤다. 그 안에서 아이들의 신경질이 푹푹 익어 갔다. 다들 반수면 상태였고, 뭔가를 증오했으며, 혀끝으로 담배의 신맛을 느꼈다. 여기 말고 다른 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 같은 데 일자리를 얻으면 짱일 텐데. 아니면 바다도 좋고. - P95

놀이동산에 전기 차단기가 내려지고, 마지막 손님들도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흩어졌다. 매표소의 두 모녀도 소년들에게 잘 가라고 손짓하며 이동식 금고를 들고 떠났다. 고층 아파트들이 일렬로 푸른빛을 뿌렸고, 신시가지의 시간이 밤 속으로 흩어졌다. 남은 건 형체 없는 사람들 무리와 모서리, 불 켜진 창, 여전한 권태뿐이었다. - P107

탐욕스러운 공장의 몸체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텼다. 선택의 기로에서 공장은 출퇴근길과 노동자들에게 쌓인 피로를 쥐어짜 연명했으며, 물건들이 일단 부려졌다가 무게 단위로 팔려 나간 다음에는 이 도시에 잔인한 출혈만 남긴 운송망들이 공장을 먹여 살렸다. 유령 도시처럼 변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이곳은 벽을 창백하게 뒤덮은 항의 문구, 산탄이 곰보처럼 박힌 표지판의 기억에 의지하며 잡초에게 먹힌 자갈처럼 살아갔다. - P139

클레망아데르 거리에 막 접어들 무렵부터 앙토니는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불안이 다시 엄습하면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억압, 유년, 치러야 할 대가고 뭐고 전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순간 기분이 너무 나쁜 나머지, 이런저런 생각이 화살처럼 빠르게 머릿 속을 통과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균형 잡힌 머릿속과 몸에 잘 맞는 옷, 자가용까지 두루 갖춘 사람들이 잘도 등장하건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앙토니는 자책감이 들었다. 학교에선 꼴찌에 뚜벅이 신세,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 조차 서툴기 짝이 없는 신세가 미워졌다. - P155

한 모금 빨았을 뿐인데 앙토니의 입안이 건조하고 텁텁해졌다. 스테파니에게 권한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곧 후회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래도 그녀에게 키스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에 사로잡혔다. 스테파니의 팔찌, 흠잡을 데 없는 머릿결, 부드러운 피부를 곁눈질하며 앙토니는 그녀가 속한 굳게 닫힌 멋쟁이들의 세상을 그려 보았다. 여름 별장, 가족사진, 덱 체어, 벚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덩치 큰 개 등 언젠가 치과 대기실에서 훑어본 잡지 속의 ‘클린‘ 하고 ‘해피‘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혼란스러우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부러워졌다.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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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한 대가 작업장 안마당으로 후진해 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뒷문을 통해 내 지하실로 돌아왔다. 그날 작업한 꾸러미 열다섯 개가 화물용 승강기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꾸러미들 모두가 폴 고갱의 복제화 〈안녕하세요, 고갱 씨!〉로 장식되어 저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 화물용 승강기가 내 꾸러미들을 하나씩 실어갔고, 뒤따르는 파리떼를 두고 짐꾼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꾸러미가 떠나자 파리들도 성난 광기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내 지하실 역시 갑자기 버림받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꼭 내 모습처럼. - P65

짐꾼의 푸른 작업복은 날염된 천처럼 등에 마른 핏자국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가 운전사 옆에 자리를 잡자 운전사는 역겹다는 얼굴로 장갑을 벗어던지고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고갱의 동일한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행인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안녕하세요. 고갱 씨!〉였다. 울긋불긋한 이 멋진 트럭과 마주치는 행인들 모두가 기쁨을 맛보리라. 광기에 사로잡힌 파리들은 트럭과 함께 작업장 안마당을 떠났지만 스팔레나 거리의 햇빛에 다시 활기를 띠고 트럭 주위를 정신착란에 걸린 듯이 날아다녔다. 푸른색과 녹색, 금갈색의 저 미친 파리들은 큰 상자들 안에 고객 씨와 함께 갇혀 있다가 제지 공장에서 산과 알칼리 용액 속에 용해될 운명이었다. 녀석들에겐 이미 부패한 이 피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없었으니까. - P66

지하실로 도로 내려가려다가 소장과 마주쳤다. […] 그렇게 그의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것이 느껴져 나는 또 한번 용서를 빌었다. 무얼 용서해달라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무겁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내 지하실을 바라보면서 터키옥색 집시 여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움푹한 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거리의 소음에, 현실의 저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귀기울였다. 건물 다섯 층에서 폐수가 쉴새없이 꾸르륵대며 빠지는 소리와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렸다. 땅 밑 깊은 곳으로 주의를 돌리자 시궁창과 하수구에 콸콸 흐르는 똥과 오수의 희미한 소리도 또렷이 분간되었다. 파리떼는 떠나가고 없었지만 콘크리트 포석 밑에서 쥐들이 찍찍대며 이 도시의 모든 하수도에서 절망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하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변함없이 창궐해 있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밖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고갱 씨! - P67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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