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 나는 밤이 새도록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헛일이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몸을 세운 채 레너 호텔을 떠났고, 그렇게 노자의 말도 실현되었다.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그녀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명백한 사례다······ 나는 『도덕경』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 희생물을 바치는 사제처럼 지저분한 빵 종이와 시멘트 부대로 꽉 찬 압축통 한복판에 놓아둔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오물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다. 절망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꽉 맞잡은 양손처럼 내 압축기의 아가리가 『도덕경』을 분쇄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 P56

무수히 많은 푸른 파리들이 사방에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날개와 몸이 금속성을 내며 소용돌이무늬의 살아 있는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다. 얼룩으로 가득한, 잭슨 폴록의 커다란 그림들 같았다. - P60

나는 그 둘의 출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내 조상들 역시 술을 좀 과하게 마셨을 때는 환영을 보았고, 동화 속 인물들의 방문을 받곤 했으니까.
[…] 그러니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 두 사람이 방문했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파리들의 광무, 그 성난 날갯짓이 점점 활기를 띠면서 내 작업복도 피로 물들었다. 내가 압축기의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번갈아 누르는 동안에도 산등성이를 쉬지 않고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노자는 이미 산 정상에 올라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적인 젊은이와 체념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노인. 삶의 근원으로 회귀함으로써 안감을 두둑이 댄 영원의 옷이 만들어진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 P60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피 묻은 종이에 극도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와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 P62

그 순간 난데없이 소장의 모습이 보였고, 분노와 증오가 가득 서린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고함을 지르는 소장의 손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한탸, 그 떠돌이 점쟁이 년들이 거기 남아 무슨 짓을 한 게지?" 늘 그렇듯 나는 깜짝 놀라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아 양손으로 내 압축통을 꽉 잡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장이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 왜 나만 보면 그렇게 험상궂은 표정만 짓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은 고통의 낙인이 뚜렷이 새겨지고 부당한 분노가 서려 있는 얼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한없이 비참한 심경에 젖곤 했다. 그지없이 고결한 주인에게 추악한 골칫거리나 떠안기는 밉살스러운 고용인,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나인가 싶어서······ - P70

집시 여자들이 와 있던 내내 예수와 노자가 내 압축기 옆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나는 혼자였다. 줄처럼 감겨오는 검정파리들의 공격을 쉴새없이 받으며 버림받은 자가 되어 무작정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막 거머쥔 테니스 선수처럼 의기양양한 예수가 보였다. 반면 초라한 외관의 노자는 재고를 넉넉히 두고도 빈손처럼 보이는 장사꾼 같았다. 예수에게서는 상징과 암호로 이루어진 피 흘리는 현실이 읽혔지만, 수의에 싸인 노자는 엉성하게 다듬은 들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만 있었다.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예수는 오만한 손과 힘찬 몸짓으로 적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노자는 체념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었다······ - P72

우리가 아직 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며 염소를 치던 시절, 집시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국가를, 이미 두 차례나 쇠락을 경험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불과 두 세대째 프라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 집시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에 제의의 불을 지피는 걸 좋아한다. 오로지 기쁨을 위해 타오르는 유목민의 불이다.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방황하는 눈과 영혼을 덥혀주려고 장작개비들을 태우며 프라하 거리의 구덩이들에서 태어난 불이다······ 눈과 영혼을 덥혀주면서 추운 날에는 손도 그렇게 녹여주는 불이라고, 나는 후센스키 주점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 P76

트럭 한 대가 작업장 안마당으로 후진해 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뒷문을 통해 내 지하실로 돌아왔다. 그날 작업한 꾸러미 열다섯 개가 화물용 승강기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꾸러미들 모두가 폴 고갱의 복제화 〈안녕하세요, 고갱 씨!〉로 장식되어 저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 화물용 승강기가 내 꾸러미들을 하나씩 실어갔고, 뒤따르는 파리떼를 두고 짐꾼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꾸러미가 떠나자 파리들도 성난 광기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내 지하실 역시 갑자기 버림받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꼭 내 모습처럼.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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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권도 더는 올려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내 방의 침대 둘을 합쳐 그 위로 관 뚜껑처럼 닫집 형태의 선반을 짜 넣었고, 거기에 지난 삼십오 년 동안 찾아낸 2톤의 책을 쌓아두었다.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짓눌러오는 책들이다······ 나는 잠결에 돌아눕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몸을 뒤척이다가 책들이 미끄러져내리는 소리에 질겁하곤 한다. 몸이 살짝 스치거나 소리만 질러도 눈사태처럼 책들이 선반에서 와르르 떨어져 나를 덮칠 것이다. 풍요의 뿔에 담겨 있던 희귀한 책들이 쏟아져내려 나를 한 마리 이처럼 뭉개놓고 말 것이다. - P33

변두리 구역으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소시지 하나를 샀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저 턱을 내리기만 해도 소시지가 내 뜨거운 입술에 와닿는 게 느껴졌다. 소시지를 내 허리 높이에 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경악했다. 소시지 한쪽 끝이 신발에 닿을락 말락 했다. 양손으로 잡고 보면 그저 보통 크기의 소시지였다. 결국 내 키가 줄어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내 몸이 찌부러진 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방 문틀을 가린 백여 권의 책을 치웠다. 내 키를 날짜와 함께 잉크로 표시해둔 문틀이었다.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책을 갖다대어 키를 잰 뒤 돌아서서 선을 그었다. 팔 년 새에 9센티미터가 줄었다는 걸 맨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 P39

어쨌거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단연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 […]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전면적인 회색 쥐들과 검은 시궁쥐들의 전쟁과 관련해 그들이 쓴 기사였다. 그 전쟁 중 하나가 회색 쥐들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 P43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P44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 P4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을 두고 괴테라면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용서해주었겠고, 셸링이라도 카롤리네를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의 아름다운 정부 조피 샤를로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민한 횔덜린 역시 곤타르트 부인에게 그랬을 테지만······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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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본가를 떠날 때 아버지가 그랬다.
"힘들 때는 너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둬라. 이제 네가 네 보호자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비슷한 글이 남아 있다.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있어요, 아버지. 내가 내 보호자라는 게 가끔 쓸쓸하지만, 뭘 잃는지도 모르면서 재차 잃어가고 있지만, 이제 잠결에 돌아누우며 웃기도 하니까요. - P198

주디스 버틀러가 그랬다. ‘나는 누구인가‘ 말고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어 사이에서 이동하는 법‘을 제안한다. 언어 사이를 이동하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견딜 수 없이 졸린다.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처럼 홧홧하다. 진흙을 씹은 것처럼 침을 모은다. 뱉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함께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존재들. 도무지 회복되지 못하고 그렇게까지. - P199

지속적으로 피로하고, 노력이 필요한 일에 무력감을 느끼고, 장애에 직면했을 때 혼란을 느끼며 현실과 현재에 동화할 수 없는 곤란함,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현실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상실된 상태. 자넷이라는 연구자에 따르면 이는 노이로제의 특징이다. 노이로제라니. 나는 속으로 조금 발끈해서 이 상태를 자넷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넷은 자주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발작적 근심에 휩싸여 다시 슬퍼진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걱정을 많이 하는 나를 걱정한다. 내가 지렁이 같다. 말 대신 꿈틀. 말없이 걱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침묵으로 쓰는 법, 숭고한 걱정을 쓰는 법을. 새벽이 조용히 뜨거워진다. 자글자글 끓는 소란도 없이 이상하게 묵음으로 불탄다. - P204

마흔셋에 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둔 친구는 얼마 전 만 사십 세를 맞아 우리에게 오랜 불안을 고백하고 와르르 울었다. 사십대를 살아 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누구도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낼 자신이 필요한 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였을 텐데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기에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 가만 그의 등을 쓸었다. 살 자신 같은 건 누구도 없을지 몰라. - P209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먹어야 해."
"고마워. 이건 제주에서 아는 사람이 사온 감귤초콜릿이야. 줄게."
"안 돼, 그럼 선물이 아니라 교환이 되잖아." - P210

감귤초콜렛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오는데 그가 한 말들이 코끼리와 삼십 분에 찰싹 달라붙었다. 삼십 분, 한 시간의 반, 다 왔다는 뜻, 네 다리로 우뚝 서 첫걸음을 걷는 코끼리, 그래, 다 왔어. 엄마에게 출산을, 아이에게 세상을 맞교환한 순간에서부터 그 생명이 세상을 꽉 채우기 위해 일어서기까지 삼십 분. 그러네, 말이 되네. 나만 말이 되나? 신이 허락한 음식으로 둘러싸인 상점 주인의 말이니 의미가 있겠지. 그도 몸이 둘이어서 진실을 담는 몸과 진실을 피하는 몸으로 나누어 사는지도 모른다. 그 무게가 너무 달라 한쪽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뿐일지도. 삼십 분이 지났다. 교환에서 선물이 되는 길을 나선다. 아기코끼리처럼 우선 일어나. - P212

내가 일찍 자리를 뜨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주 앉아 그는 재차 물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덧붙이면서. 자기는 사람에게 실패하고 동물에게 대리만족하는 부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지겨울 정도로 그러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왼쪽 손목을 긁었던가. 사람이기가 지독하다. 지긋지긋하다.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이 새벽의 고통을 언어화하면 그랬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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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소장이 이따금 갈퀴로 폐지 사이에 길을 내고는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뚜껑 문 안으로 들이밀며 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탸. 거기 있나? 맙소사, 책에 한눈팔지 말고 좀 움직여봐! 마당이 종이로 뒤덮였는데 자넨 밑에서 바보 같은 짓거리에나 빠져 있긴가!"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P18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 P19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릎을 스치는 축축한 내 입술이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만 나는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자정까지 몸을 웅크린 채 있기도 한다. 잠에서 깨어 머리를 들면 바지의 무릎 부위가 침에 축축이 젖어 있다.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의자 나무를 같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 P21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열차의 차량들에도 화물을 실었고, 수많은 열차가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짐을 싣고 서방으로 떠나갔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마지막 차량의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기마상을 산산조각내려고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순간의 나처럼 다빈치 역시 거기 남아 그 끔찍한 광경을 주의깊고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겠지.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26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차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굉장한 화물을 싣고 떠났을 때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 P28

그 무렵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고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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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9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 P10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부질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국수 그릇처럼 여기,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P10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 P11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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