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저녁 식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고 나의 삶은 마침내 평범해지리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었다. 하지만 시칠리아의 저택에서부터 제노바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오르시니 집안에서도 식사 자리는 역시 단순한 식사 자리 이상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무대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비극을 익살극처럼 연기했다. 이야기가 심각해질수록, 더 우스꽝스러워졌다. - P562

「말에는 의미가 있어, 미모. 명칭을 불러 주는 건 그걸 이해 한다는 거야. 〈바람이 부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죽음을 몰고 오는 바람인가? 파종의 바람인가? 수확하기도 전에 식물을 얼려 죽이거나 태워 죽이는 바람인가? 만약 말들에 의미가 없다면 내가 어떤 의원 노릇을 할까? 다른 의원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겠지.」 - P566

엠마누엘레는 하나의 관념이었다. 조금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어긋남, 비정상이랄까. 혹은 아직 도래한 적 없는 정상성의 표현, 다른 세상을 알리는 선구자로서, 그 세상에서는 엠마누엘레와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는 지나치게 열렬하게 상대방을 끌어안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관념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P571

17시 56분 기차를 타고 이틀 뒤 피렌체에 도착했다. 치오가 나를 팔아넘겼을 때와 거의 같은 시각. 이제는 겨울이 아니라 봄이기는 했지만, 기차에서 내리면서 받은 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도시는 사람을 농락하며 수줍음을 가장했다.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황혼, 살짝 열린 문 등 미묘한 표시를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거리로 섞여 들라고 권했다. 나는 피렌체를 사랑했다. 프랑스어로는 도시와 여자 사이에 철자 하나 차이밖에 없다. - P579

마을 사람들의 약식 재판은 적어도 한 가지의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강도들의 급습이 그치면서 길이 다시 안전해졌다. 아마도 제거당한 자들이 진짜 범죄자였던 모양이었다. 혹은 이처럼 평온한 고장에서는 몹시 뜻밖이었던, 그런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조차 뜻밖이었던 폭력성에 나머지 강도들이 그런 짓을 그만두었던가. - P582

산피에트로 델레 라크리메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균열이 생긴 뒤로 후작은 더는 전과 같지 않았다. 일요일 미사에 데려다 놓으면 매번 긴 비명을 지르고 아직 유일하게 움직이는 한 쪽 팔을 지옥과 천국 사이가 담긴 손상된 천장화를 향해 내두르며 휠체어에서 버르적거렸다.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는가? 자신을 기다리는 여행? 예전 젊었던 시절에 수도 없이 응시했던 그 말끔했던 둥근 천장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한없이 긴 성사를 보는 동안 꾸벅꾸벅 졸고 후작 부인과 결혼하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장남의 장례를 치르는 그를 내려다봤던 그 말끔했던 둥근 천정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길게 뻗어 나간 시커먼 균열 때문에 볼썽사납게 된 그 둥근 천장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 P584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순진하지 않았고, 고작 70년쯤 된 국가가 통합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이런저런 조직들이 그러한 실망을 이용하기 위해 생겨난다는 것도. 전쟁과 전후는 그런 조직들에게 엄청난 부를 쌓을 수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도. - P591

「나는 교회를 믿어,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지만. 정권이나 독재자와는 반대로 교회는 사라지지 않아.」
「그거야 교회의 약속이 지켜졌는지 아닌지를 말해 주러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이제껏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희가 이걸 알까? 미치광이들 천지인 너희 가족은 정말이지 신물이 나는 것 이상이야.」 - P592

「독서할 때 안경이 필요한지는 몰랐네.」 내가 안경을 들어 올리면서 한마디 했다.
비올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기만 했다. 나는 책 겉표지 위에 안경을 다시 내려 놓았는데, 가족의 서재에서 나온 그 책은 가죽 장정에 영어로 된 제목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 램프가 방 안의 유일한 불빛이었고, 비올라는 그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둠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녹색과 종이꽃들과 커튼의 장식 술을 슬금슬금 잡아먹었는데, 그 번잡스레 화려한 세계는 어느 모로 봐도 비올라와 닮지 않았고, 내가 이 방에 요란하게 처음 뛰어들었던 이래로 전혀 변화가 없었다. - P593

「빌어먹을, 넌 정상적일 순 없는 거야? 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저 정상적인 거 말이야.」
[…]
「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 P594

「떠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최악의 폭력, 그건 관습이지. 나 같은 여자, 똑똑한 여자, 난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습. 그런 말을 하도 듣다 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그 유일한 비밀이라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더라. 내 오빠들, 그리고 감발레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보호하려고 애쓰는 건 바로 그거야.」 - P595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난 모든 걸 겪 었어. 누가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줄 알아? 나야. 나도 그들 식으로 해보려고 애쓰다가, 그들이 옳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다가. 내가 지붕에서 뛰어내렸을 때, 미모, 내 추락은 고작 몇 초가 아니었어. 그건 26년 동안 계속됐지. 이제야 그게 끝나는 거야.」 - P595

고작 한 시간 전만 해도 나의 분노는 화강암 덩어리였다. 검게 번들거리며 모가 난. 하지만 그것은 환영으로, 비올라가 거는 그런 마법에 속했다. 우리가 피에트 라에서 멀어질수록 주술은 약해져 나의 화강암 덩어리는 진짜 모습으로, 단순한 모래 더미인 걸로 드러났다. 분노를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써봤자 허사였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다. - P599

고원은 그날 아침 그 어느 때 보다도 장밋빛이었는데, 마치 부서지고 조각이 난 돌이 마지막 숨 대신 그리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색채를 흘려보내는 듯 했다. - P607

메티가 작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마리아의 얼굴을, 내가 알았던 그 무한한 온화함을 쓰다듬었고, 그러고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손이 존재하지 않는 오른팔을 향해 움직였지만, 좌절될 행위였다.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 - P612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 P613

어머니는 나의 뺨에 손을 갖다 대면서 중얼거렸다. 「나의 큰아이.」 - P614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아야만 한다. 비올라를 보아야만 한다. 나는 그날 폐허에서 봤던 그녀를, 살짝 어긋난 다리와 눕혀 놓았기에 더욱더 납작해져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망가진 모습 그대로 숭고한 육신을 조각했다. 하지만 거기 누워 있는 건 아무리 양성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분명 여자로서, 여자의 쇄골과 여자의 가슴과 여자의 엉덩이를 지니고 있다. 눈이 남자를 기대하면 남자가 보이겠지만, 감상자의 온 감각이 담아 내는 것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고 은밀한 만큼 더욱더 폭발적인 여성성, 맹신자들의 박해로 단절되었다가 분출하는 여성성이다. 어떤 관객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극도로 민감한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오고, 그러한 반응은 이해하지 못한 자들, 결국 모두에게서 엉뚱하고 설명할 길 없는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악마와 과학과 기타 등등을 찾아다녔지만, 사실 비올라만 존재 했다. 본의 아니게, 베드로 성인도 울고 갈 정도로 나 스스로 보기 좋게 배신했고 부인했던 비올라. - P616

하지만 봐라. 만약 그리스도가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자가 아니겠는가. - P617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고 싶다. 문턱을 넘어서기, 마지막으로 내쉴 숨. 시작한 문장을 미처 맺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걸까? 허공에 걸린 말들, 그러고는 더는 아무것도 없고 아름다운 침묵, 뒤따르는 안도? 아니면 내 육신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빼내어 가는 동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 P618

나는 나의 삶을, 겁쟁이와 배신자와 예술가의 삶을 사랑했고, 비올라가 내게 가르쳐 줬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어떤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그것과 이별하지 않는 법이다. - P618

나중에 그는 피에타를 보러 다시 돌아갈 거다. 그러고 나서도 이해할 때까지 보고 또 보리라. 아마도 조각가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하려던 말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또 봐라. 어쩌면 사소한 것을, 정말로 별것 아니지만 모이면 혁명을 만들어 내는 그런 작은 뭔가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 P620

시계추의 마지막 움직임, 마지막 째깍째깍, 추시계가 곧 멈추려고 한다. 멀리서 알프스산맥이 지평선에서부터 떨어져 나온다.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는 빛나는 한 점이 께느른하게 궤도를 그린다. - P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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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항과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카르티에 때문에 잠깐 실랑이가 있었는데, 내가 선사한 시계의 호사로움에 그가 당혹스러워해서였다. 별항은 그에게 가장 관심 있는 시간인 나무의 시간은 그런 도구로 잴 수 없는 만큼, 그 시계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내게 돌려줬다. 나는 별항을 시골뜨기로 취급했다. - P403

나는 피렌체에서 발달시키고 로마에서 벼린 본능을 발휘해 타일 바닥과 양철 카운터로 된 암초를 금방 찾아냈고 그곳에 이 도시의 난파당한 모든 자가 매달려 있었다. 자동차 정비소와 오래전 폐업한 세탁소 사이에 끼어 있는, 셔터를 반쯤 내린 선술집. 비올라는 입술에 묻히는 정도로 찔끔찔끔 한 잔을 마셨고, 두 번째 잔과 세 번째 잔도 내켜하지 않으며 마셨고, 네 번째 잔은 스스로 주문했고, 그 나머지 잔들은 그 밤의 분위기에 속했다. 잠깐 동안 모든 것이 다시 예전처럼, 조각하는 미모와 하늘을 나는 비올라로 돌아갔고, 새벽 3시경에 곤죽이 되도록 취한 비올라가 한 일은 바로 카운터에 올라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뱃사람 무리의 푹신한 팔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였다. - P406

나는 비올라에게 내가 파시스트들만을 위해 일하는 건 아니라고, 게다가 그들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비올라는 독일 내 유대인 문제를 거론하고 여러 도시들과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 대고 이런저런 장소들과 살인들, 내 눈앞에 있지만 내가 보지 않는 편을 택하고만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했는데, 그로 인해 그 몇 해를 수놓았던 수 많은 다툼에 또 다른 다툼을 하나 더 보탰다. 우리의 불만은 훌륭한 우주적 쌍둥이답게 완벽한 대칭을 이뤘다. 비올라는 내가 새로운 세계의 탄생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의 주요 행위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비올라가 정확히 그와 반대라서 그녀를 비난했다. 어느 날 관객 앞에서 비틀거렸다는 핑계를 대고 무대를 떠났다고. - P408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존재 사이에서 점점 커져 가는 그 구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왔다. 살다 보니 어느 결에 피부밑에 박혔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는—누가 가시 하나 박혔다고 걱정하는가?—가시들, 하지만 어느 날 보면 곪게 하는 그런 가시들에 대해. - P413

사람들이 나의 성공을 비난할 때마다 그랬듯이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나는 돈이 있다, 그래서? 마치 그 돈을 내가 벌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내가 그걸 누릴 자격이 없기라도 하다는 듯이! 변한 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다. - P415

「위대한 남자 같은 건 없어. 너희 모두 일상의 평범한 존재 들이니까. 자, 얘기해 봐, 홍미로운 주제니까. 너희들의 폭력성은 어디서 오는 거니? 응?」
비올라는 정말로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이 우리를 응시했다.
「어쩌면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누가 너희들을 버렸는데? 어머니가? 만약 그런 거라면, 대체 왜 세상의 어머니들과 미래의 모든 어머니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건데?」
「넌 여자들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비토리오가 중얼거렸다.
「물론 우리도 그렇지. 그런데 그 폭력은 우리 자신을 향해. 누군가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지만, 우리가 들이마시고 우리를 중독시키는 이 폭력을 어디에선가는 분출해야 할 테니까.」 - P419

「모리셔스섬의 드론테가 뭔지 알아?」
[…]
「사라진 새지. 그리고 날지 못한다는 게 그 특성이고. 나는 도도 새야, 미모.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무덤에 눕고 허공으로 뛰어내리는 비올라가 아니라고 나를 원망하는 거 알아. 하지만 도도 새는 바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졌어. 너무 쉬운 먹잇감이었던 거지.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나 자신을 잘 돌봐야 해.」
「네가 사라지게 절대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 P419

어느 겨울밤, 지금은 서로 모셔 가려고 다투는 예술가가 되었다지만 나를, piccolo problema (작은 문제)를, 그런 하찮은 것을 그 거친 돌 위에 던져 놓았던 여자에게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러다가 부끄러움이, 여전히 진지하게 아버지가 나보다 더 재능이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 누구도 내 아버지에게는 지불한 적 없으나 내가 누리는 그 돈들을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왈칵 치밀었다. - P421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P422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어도, 네가 아무리 성공을 거뒀어도, 네가 밤에 주색에 빠져서 수많은 여자를 더럽혔어도, 네가 엄청난 술을 들이켜고 토해 냈어도, 네가 지금도 수많은 나쁜 짓들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네 어머니는 늘 네가 여섯 살이라고 생각하셔. 어머니와 관계가 좋은 아들은, 어머니에게 여섯 살이 아니라고 설득하기를 포기한다고.」 - P424

예술가의 생애를 시기별, 단계별, 시대별로 쪼개는 것이 관레인데, 생애를 진열한 매장에 분류 푯말이 없는 매대만 잔뜩 있으면 무척 당황할 구매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 몇 해 전 마그리트가 파이프가 아닌 파이프로 그들을 조롱했지만 그에 대해 뭔가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관객은 이해를 못 할수록 더더욱 열광했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문제 삼겠는가? 시기, 단계, 시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 P425

파첼리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파첼리는 나를 칭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말은 열여섯 살 적과 똑같은데, 더 나아졌다는 게 전부였다. 인간은 어디 있는가? 신들의 비밀에 손끝을 갖다 대는 인간은? 그러니까, 이런 건가, 자란다는 건? 돈을 벌고, 돈을 버는 데 성공하면 약간 나아진다는 것? 나는 비올라를 비난했지만, 결국 내가 비올라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간 건 아니었다. - P426

나는 부자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기이한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건 겪어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교수 봉급의 열 배를 벌었고 기업 총수만큼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직원들을 거느렸고 운전사가 필요했고 취향과 고객을 고려해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어야 했다. 벌어들인 모든 돈을 지출했다. 이런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더 벌어야만 했고, 이는 더 많은 지출로 이어졌다. 이 방정식의 성격이 변화하는 것은 오로지 진정으로 부자가 될 때뿐이었고, 번 만큼 쓰는 것이 어려워질 때뿐이었는데, 로마에 체류하던 시기에 그런 능력이 뛰어난 인물 몇몇을 만나 보기는 했었다.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았고 종교에 귀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종교는 피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치는 퇴폐적인 애인이라 그 열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 P427

르네상스가 낳은 딸은 세상에 대해 책에서 얻은 지식만을 갖고 있었다. 오르시니 가문 사람들은 서품식 전날 도착했던 터라, 나는 비올라를 데리고 서품식 앞뒤로 빈 시간을 활용해 가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방문했다. 도시 구경을 시작하자마자 곧 우리의 역할은 뒤바뀌었다. 비올라는 이 기념물 혹은 저 기념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 얽힌 역사를 설명했고, 나는 곧 내가 관광객이 가이드를 따라가듯 비올라를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장서의 힘을 과소평가했지만 사실 장서 덕분에 무지몽매에서 빠져나왔고 심지어 약간의 위안을 누렸었다. 나는 배은망덕했다. 죽도록 취해서는 진정한 삶은 여기, 나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영원의 도시에 있다고 되뇌면서 얼마나 많은 밤 시간을 파티로 흘려보냈던가?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까지 나온 비올라가 새로운 교훈을 내게 줬다—진정한 삶은 책 속에 있었다. - P441

「거짓말이야.」 비올라가 대꾸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모르고 거짓말하는 걸 수는 있겠지.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어.」 - P445

루이지 프레디는 성공을 거뒀다. 미국인들과 경쟁하고 싶다던 그의 꿈은 도시 바깥의 이 도시에서, 착시의 예술에 전적으로 바쳐진 이 성채에서 구현되었다. 사람들이 곧 테베레 강가의 할리우드라고 부르게 될 이곳은 상냥하고 옷 잘 입고 미소가 끊이지 않는 이 상냥한 남자의 정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었다. 치네치타는 일종의 무기였다. 정부의 온갖 자산을 동원해 이 계획을 뒷받침했던 두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국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 - P451

나는 다시 호텔에서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두 발은 예전의 발자취를, 내가 닳게 했던 포석의 미미한 흔적을 되찾아 그 자리에 가서 놓였다. 전차의 선로가 번들거렸고 번개가 칠 때마다 번쩍거리는 길이 드러났다. 두 발이 나를 장마당까지 인도했고, 그곳에는 낡은 서커스단의 천막이, 전보다 더 기운 자국이 많고 더 색이 바랜 천막이 서 있었다. 가장자리의 올이 풀린 비차로 서커스단의 깃발이 폭풍우 속에서 춤을 췄다. 두 대의 트레일러가 거기 그대로 있었는데, 사라의 트레일러는 불이 꺼진 상태였다. 비차로의 창가에서 불빛이 반짝였고, 잠시 어두운 형체가 그 빛을 가렸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내 삶의 이 부분은 끝났다. 고통, 가난, 뱃속 깊숙이 쌓이던 그 부재들. 어머니의, 비올라의, 미래의 부재, 내가 이 도시의 싸구려 술집마다 들러 메우려고 시도했던 그 헛헛함들. 두 번 다시는 안 하리라. - P462

각주에서 윌리엄스 교수는 모순적인 지점을 강조한다. 사건을 아만티니 신부에게 위임한 이 때늦은 종교 재판소, 비록 명칭이 변경되었다고는 하나, 이 종교 재판소가 1573년에는 베로네제가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는 예수님」에 감히······ 난쟁이들을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그를 출두시켰다. 난쟁이들, 화가가 그린 장면의 성스러운 성격에 반하는 우스꽝스럽고 기괴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 그로부터 거의 4백 년이 흐른 시점에 바로 그 동일한 종교 재판소가 이번에는 난쟁이에게 지나치게 신성하다며 비난을 하게 된다. - P468

Habemus papam(교황이 새로 선출됐습니다).

17시 30분,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교황이 된다. 내가 경력을 쌓게 도움을 베푼 사람. 교황명은 비오 12세로, 그는 저녁에 침실로 들어가 자신의 가정부를 돌아보고 교황의 흰색 수단을 벗으며 중얼거린다. 「대체 저들이 나를 갖고 무슨 짓을 했는지 봐요.」 - P471

「리튬도, 전기 충격도 없을 거야.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나는 캄파나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미치광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본데, 나야 좋지, 어서 해보자고.」
캄파나는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이 빈약한 승리가 내게 불어넣어 준 생각은, 비올라는 내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부당하게 나를 배척한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할 수 있는 한 타협하기 마련 아닌가. - P474

「아주 논리적이라고. 자신의 빛을 절대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면 왜 미워하겠어? 누군가를 찬미한다는 것, 그건 조금은 그를 싫어한다는 소리이고, 그 역도 성립이 돼.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고, 스키아파렐리는 샤넬을 싫어하고, 헤밍웨이는 포크너를 싫어하지. 따라서 자코메티는 비탈리아니를 싫어하고. 우리가 같은 분야에 있는 한 나도 자네를 싫어하네. 하지만 우리, 루마니아 사람들은 못되게 싫어하지는 않아. 그래서, 뭘 마실 텐가?」
「충분히 마신 것 같아.」
「농담해? 지금 자네가 얼마나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봤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 번째, 여자.」
「두 번째는?」
「여자.」 - P479

우리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우스꽝스러워, 이 모든 일이.」
「뭐가 우스꽝스러워, 미모?」
「너와 나. 우리의 우정이. 하루는 서로 좋아하다가, 그다음 날이면 서로 미워하고·····. 우리는 두 개의 자석이야. 서로에게 다가갈수록 서로를 밀어내지.」
「우리는 자석이 아니야. 우리는 심포니야. 그리고 음악조차도 침묵의 순간을 필요로 해.」 - P488

「당신은 늘 상상력이 부족했어, 리날도. 이 모든 게 당신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겠지? 그래요, 평행 세계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혹은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우리는 어떤 곰이 꾸는 꿈속에서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 P495

어느 날 저녁, 불안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삐걱거리며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이마에 손을 얹고 쉿, 쉿, 괜찮다, 속삭이더니 오래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아주 먼 옛날에, 사부아에 살던 때 들었던 모양인 게, 편안함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계속 달려야만 하는 건 아니란다.」 어머니가 속삭였다. - P508

「이봐, 미모, 넌 내가 예전에 줬던 책들을 제대로 읽지 못했나 보다. 유감이야. 안 그랬더라면 조르다노 브루노가 이런저런 이단적 주장들 가운데에서도 지구가 너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상을 옹호한 바람에 죽임을 당했다는 걸 배웠을 텐데.」 - P516

「난 이걸 누릴 자격이 있고, 그 누구도 내게서 그걸 빼앗지 못할 거야.」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거짓말을 하는구나, 비올라. 넌 이 정권을 싫어하잖아. 하지만 그 정권이 내게는 잘해줬거든.」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내 치명적 무기를 사용했다. 손짓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날 비난하지 마.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비올라가 똑같은 동작을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비올라는 낚싯바늘로 약간 멍청한 물고기를 낚은 뒤 잔챙이 따위로 번거롭기 싫어서 물고기를 다시 강물에 던지는 어부처럼, 만족스러운 듯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벽난로의 불을 향해 몸을 돌렸다. - P517

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비차로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내가 그를 모른 척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비올라와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그를 찾아가서도 만나지 않고 그냥 와버렸던 그때의 이유와 똑같았다. 비차로와 사라는 시궁창에 처박힌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내 최악의 모습을 알았던 누군가와 길에서 엇갈렸다가, 그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임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저 두려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카르티에의 탱크 시계를 차고 맞춤복을 입는 오늘날의 미모 비탈리아니는 사기꾼에 불과하니까. - P522

「당연히 우리는 유대인이지. 설마 내 이름이 정말 알폰소 비차로라고 믿었던 건 아니겠지? 나는 톨레도 근처에서 이삭 살티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어. 문제는 네가 알았더라면 네가 했던 몇 가지 선택들이 뭔가 바뀌었을 거냐를 아는 거지. 이봐, 친구, 난 자네가 조각가로서 경력을 쌓아 나가는 것을 지켜봤어. 어느 날 『코리에레』지에 네 사진이 실렸는데,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 널 봐, 맞아, 넌 난쟁이가 아니야. 넌 성공했어.」 - P525

「오, 칼을 놀리기엔 난 너무 늙었어. 네가 거절하면 나는 쓸쓸히 홀로 떠날 거야. 그저 이 말은 해두지. 아마도 네 양심이 네 손목에 찬 그 시계보다 더 값이 나갈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전 재산을 동원해도 되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거고.」 - P527

악의 아름다움은 바로 악이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결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저 악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P528

자기 마음에 드는 건 갖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버릴 수는 없어. - P530

「네 선택을 비난하지 않아, 미모. 내 친구 중 어떤 이들이 말하듯,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 네가 그들을 쓰러 뜨릴 수 없다면, 그들 편에 서라. 넌 아카데미의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어.」 - P531

비차로가 발판에서 꾸물댔고, 나는 그와 나란히 서서 걷다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 기차는 전기로 가는 기차가 아니었다. 1916년도를 떠올리게 하는 끈적이는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우리 사이로 지나갔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기차가 레일 위에서 삐걱대고, 끽끽대고, 덜커덩거렸다. 나는 비차로 옆에 조금 더 머무르려고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
플랫폼이 끝나는 지점에서 숨이 턱에 닿은 나는 내 젊은 날의 일부가 구불구불 길게 그을음을 끌며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 - P532

내가 내린 결정의 타당성을 재검토해 볼 만도 했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나의 길을 선택했기에, 가던 길을 뒤돌아오지는 못한다. 만약 그 길이 불타는 숲을 지나간다 해도 그 숲을 통과해야 하리라. - P544

독일군의 침공 이후 수용소들은 가혹하게 바뀌었다. 트리에스테에 있는 리지에라 디 산사바나 슈탈라크 339는 폴란드의 최악의 수용소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내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일했다. 악이 지나가도 모른 척 눈감았다. 나중에 가서야 징징거리며 자신들은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면, 그건 바로 내가 징징거리지 않았다는 것, 그 어떤 변명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 P545

그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일주일 동안 나를 훈훈하게 했다. 그는 나를 보러 와서는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많이 덜어 갔는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더는 죄책감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 찌꺼기, 잔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침전물은 있었지만, 죄책감 때문에 나의 꿈들이 핏빛 하늘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일이 더는 없었다. - P546

비올라는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비올라가 입원해 있으면서 왜 나를 멀리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이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모든 감옥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수감자들 역시 동일한 죄를 저질렀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믿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냈다는 죄. - P546

자유를 잃는 것보다 더 고약한 게 있었으니, 바로 자유에 대한 의욕을 잃는 거였다. - P553

평소처럼 정말이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 않았던 길인 데도, 평소라는 말을 떠올렸던 게 기억난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저녁의 대기는 온화했고 봄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비밀스러운 기쁨과 짓궂은 농담과 더 늦게 사그라드는 빛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5분 뒤 그녀가 나타났다.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 그 감정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숲에서 나온 비올라는 새처럼 날아 보겠다는 꿈이 전나무 발치에서 부서져 버린 소녀가 아니었다. 아보카토 캄파나의 유순한 아내가 아니었다. 완벽한 오르시니 후작 영애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그녀였다. 비올라. - P555

비올라가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저런, 기억이 안 나네······.」
비올라는 예전의 그 웃음을, 고개를 젖히고 달을 향해 발사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겨 작은 샛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이가 들어 몸의 유연성을 잃고 흰 머리카락이 생기고 마침내, 마침내, 무언가를 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은밀한 기쁨을 느끼며. - P560

그러니까 그런 일이 바로 내게도 일어났던 거였다. 내가 처음 생긴 흰 머리카락에 충격을 받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한 변화는 천천히 진행되면서 교활하게도 당신의 귀에 대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속살거리지만, 그러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닥친다. - P560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기운찼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만났던, 살짝 위압적이기까지 하던 그 열정적인 신부는 어디 있는가? 신부는 피부에 갈색 반점이 여기저기 돋았고 손을 살짝 떨었다. 눈을 깜빡했을 뿐인데 그들 모두 늙어 버렸다.
「난 이 가여운 성당과 같아.」 그는 둥근 천장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는데, 그곳에 그려 놓은 프레스코화는 칠이 다 일어나 있었다. 「여기저기에 바람이 들었어.」 - P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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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와 처음 만난 지 11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은밀했던 11년. 살을 저미듯 아렸고 뒤뚱거렸던 우리의 우정, 야행성의 우정이 마침내 햇볕에 의해 복권되고 그 위로 처음으로 햇살이 환히 부서졌다. - P369

비올라가 앞장서서 담벽에 난 비밀 문을 향해 걸었는데, 우리가 저택 지붕을 고치러 왔을 때 나는 그 문을 통해 처음으로 정원으로 들어왔었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안개와 뒤섞여 이전에는 무성했으나 지금은 앙상한 오렌지나무의 가지에 장밋빛 줄무늬로 걸려 있었다. 공기는 침묵에 어쩔 줄 모르며, 잎이 떨어진 거무스레한 오렌지나무의 줄기들 사이로 전장의 강아지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어떤 나무들에는 아직 열매가 달려 있었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방치의 새로운 신호들이 눈에 띄었다. 고랑은 더는 예전만큼 경계가 뚜렷하지도, 청소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나무들이 늘어선 이랑 역시 이제는 잡초를 뽑아 주지 않았다. 나무들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죽었다. 죽지 않은 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전지가위 코빼기도 보지 못한 터라 가지들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 P369

바람이 일면서 마지막 남아 있던 몇 조각의 안개들을 몰고 갔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지? 시로코인가? 포넨테인가, 미스트랄인가, 그레크인가? 혹은 비올라가 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바람일 수도? 나는 비올라를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보다 단순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을 붙이는 세상에 단순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 P376

파드레 빈첸초는 수련 수도사의 사무실 난입에 아침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문서에서 고개를 든다. 그가 그 수납장을 열 때마다 이렇게 된다. 똑같은 불가사의에 또다시 사로잡혀서 자료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열정적으로 그 서류들을 조사한다. 마치 탈무드의 각각의 말은 하나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하나의 진실, 올바른 조합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시바의 랍비 혹은 초창기 신학자 같다. - P378

「미모. 난 네가 필요해. 하지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해하겠어?」
쀼루퉁한 내 표정을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열두 살의, 열여섯 살의 비올라가, 모든 것이 불안과 열광 등의 흔적을 남기던 그 존재가 갑자기 내 앞에 서 있었다. - P391

우리의 우정은 허공에 서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지만, 하루살이 특유의 반짝거림과 가벼움 또한 지니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돼지처럼 상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는 나를 퇴화된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여겼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인간쓰레기들의 상호적 존중을 보여 줬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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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에트라달바의 뭔가를, 8월이니만큼 만약 창문이 열려 있다면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기다렸다. 하지만 종소리, 차임벨 소리, 포스타가(街)에서 경적을 울려 대는 자동차 소리 등 바깥의 소음이 나를 로마에 굳건히 묶어 두었다. 부스 안에서 사람들의,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서 우아하게 춤추듯 움직이는 속인과 성직자의 오고 감을 관찰하고 있자니 숨이 막혀 왔고, 수화기에 갖다 댄 귀가 축축해 졌다. - P346

「여보세요?」
살짝 쉰 듯하고 어쩌면 조금 더 낮은 듯하나, 어쨌든 그 목소리에 비올라가 통째로 들어 있어서, 피에트라달바가 여름의 열기와 태양 아래에서 지글거리는 들판의 향기를 몰고 전화 부스를 덮쳤다. 나는 부스 벽을 따라 몸을 미끄러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올라, 나야.」
「알아.」
송진과 강렬한 기쁨과 두려움으로 묵직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 P347

여러 차례, 어머니를 보러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오만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서 계속 그 계획을 미뤘는데, 일이 있어서, 거리가 멀어서, 그러다가 결국엔 이런 변명까지 했다. 모든 비용을 다 대주면서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제안까지 하지 않았던가. 진짜 이유는 빼놓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 어머니가 우리 사이에 만들어 놓은 그 구렁, 1916년 이래로 삐죽삐죽한 가장자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그 갈라진 땅을 건너기 위한 첫걸음을 먼저 내디뎌야 하는 건 어머니라는 생각이었다. - P352

피렌체에서 보낸 세월을 후회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리라. 로마에서 보낸 세월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내 영혼의 짐을 덜고, 스틱스강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능숙한 늙은 사공 카론을 구슬려서 보다 편안한 저승길을 보장받기 위해 그런 척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무가 나이테를 떨쳐 낼 수 없듯이, 나는 내 과거를 떨쳐 낼 수 없다. 피렌체와 로마는 여기, 기우는 햇살을 받으며 네 명의 수도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열에 들떠 투덜거리는 이 몸뚱어리 안에 들어 있다. 피렌체와 로마는 이 안에 있고, 나의 심장이나 신장 혹은 보나 마나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을 간이나 마찬가지로 뽑아낼 수가 없다. - P353

나는 평생을 본능에 따라 행동해 왔다. 그러니까 이성이 내 삶의 훌륭한 가늠자는 아니었다.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 P361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흘러간 8년이라는 긴 세월. 비올라는 더는 청소년이 아니었고 완전한 여자였다. 얼굴 윤곽이 더 확실해졌다. 그녀를 창조한 조물주의 둥근 끌이 몇 번 더 오가면서 아직도 드러나게 될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없이, 비올라의 열여섯 살 적 얼굴이 완성된 형태에 도달한 거라고 맹세할 뻔했다. 비올라는 조각 교본이었고, 그런 만큼 멀리 떨어져서 지낸 8년 세월을 더욱더 후회했다. 한 해 한 해 드러나는 그러한 변화를 지켜보고, 어느 날 변화를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분석해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 P362

비올라를 위해 조각했던 곰은 여전히 분수대 근처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열여섯 살 미모의 선택 몇 가지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움직임은 생생히 드러났지만 과장됐다. 이제 나는 더 적게 보여 주면서 더 풍부하게 말할 수 있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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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그랬듯이 내 친구들에게도 피렌체 시절을 미화해서 소개했다. 그러니까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발치사 저리 가라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 두 해를 담은 사진에서 비차로와 사라와 다른 친구들을 긁어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잘라 내면서 내가 상처 입히고 있는 건 나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벼운 자책감만 느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열여덟 살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기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 P317

나는 거울을 좋아하지 않았고—내 외모 때문에—면도를 할 때조차도 가능한 한 거울과는 덜 마주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옳았다. 나는 잘 생겨서, 뜻밖에도 내 용모는 균형 잡힌 반듯함을 보였으며 눈에는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그 빛깔이, 거의 보랏빛 도는 푸른빛이 담겼다. 강인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체념을 배우지 못한 남자의 얼굴. 그것은 또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의 얼굴이기도 했으니, 체념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우리의 꿈들을 살해하는 수많은 죽음을 체념이 감내하게 하지 않는가. 뼛속까지 비에 젖고 험상궂은 모습으로, 오래전부터 시끄럽게 알려 대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나머지 이제는 그러한 패배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남은 남자. 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 P324

나는 우리의 이야기에 이런 빈 구멍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올라를 원망했다. 티끌 한 톨 지나갈 틈 없을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가까웠는데, 나를 밀쳐 내고 멀리 보내 버렸다고, 나는 그녀를 원망했고, 그렇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떠나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을 찾아내지 못했다. […] 비올라는 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나는 비올라에게 욕하고 격노했고, 그 애도 그곳에서, 겨울의 차갑고 짙은 안개가 밀려들면 오렌지에 서리가 내리는 그녀의 고원에서 똑같이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똑같은 격분한 몸짓, 똑같은 쓸데없는 비난. 우리는 둘 다 옳았고, 우리는 누가 누구의 거울인지 더는 알지 못했다. 스스로를 탓할수록 내가 스스로를 탓하게끔 만든 비올라를 더더욱 원망했다. 그 애가 사과하지 않는 한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착실한 그림자로서, 그 애도 그쪽에서 나만큼 그러고 있을 터였고,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서로의 삶에서 빠져나왔다. 이 끔찍한 악순환, 이 희비극적 우로보로스가 그 뒤로 이어진 여러 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P330

나는 그 표정의 강렬함을 포착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나 역시 소중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예전에 본 적이 있으니까. - P335

드디어 나는 탐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으며 무시했고, 나는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평생 간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수록, 심지어 차갑게 거절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의, 즉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을 더더욱 원했다. - P336

갑자기 모든 것이 전과 같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서약, 맞잡은 손, 불타는 화주를 조금씩 할짝거리듯이 차가운 공기를 받아들이던 그 겨울밤들, 그 밖의 모든 것. - P342

나는 곧 스물 한 살이 될 터였고, 이는 이전이 더 좋았다고 생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리워하게 될 그 이전을 지금 살아 가고 있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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