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대꾸도 없다. 햇볕을 받은 서까래가 살살 부풀어오르며 삐걱거리는 소리, 문 아래로 방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한숨소리, 아마포 커튼이 휘날리는 소리,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텅 비어 고요히 쉬고 있는 집의 뭐라 말하기 어려운 소리뿐. - P17

하늘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도 아이는 말하던 도중에 말을 멈춘다.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맞고 순간 벙어리가 되기라도 한 듯 정지해버린다. 곁눈으로 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먹던 중이든 읽던 중이든 숙제하던 중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중요한 일로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을 보듯 빤히 쳐다본다. 아이는 현실의 테두리, 주변 물질세계의 반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버릇이 있다. 몸은 방안에 앉아 있는데 정신은 자기만 아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정신 차려, 할머니는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탁 튕기며 소리친다. 뭐하니, 누나 수재나는 귀를 당기며 쏘아붙인다. 집중해, 선생님들은 호통을 친다. 어디 갔었어? 마침내 햄닛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집에, 식탁에, 식구들 사이에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주디스가 이렇게 속삭인다. 어머니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마치 햄닛이 어디에 갔다 왔는지 훤히 아는 것처럼 바라본다. - P19

삶에는 어떤 알맹이, 핵심, 중심이 있어서 모든 게 거기서 비롯되고 다시 거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 순간은 부재한 어머니의 순간이다. 아이, 빈집, 텅 빈 마당, 듣는 사람 없는 외침. 아이는 뒷마당에 서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얼러 재우고 첫걸음을 뗄 때 손을 잡아주고, 숟가락을 어떻게 쓰라고, 먹기 전에 수프를 후후 불라고, 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잠자는 개를 깨우지 말라고, 물을 마시기 전에 컵을 헹구라고, 깊은 물가에 가지 말라고 일러주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이 순간은 어머니의 중심 바로 그 자리에, 평생 남을 것이다. - P22

할아버지는 계속 종이를 훔치며 말한다. 종이가 젖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가느다란 검처럼 칼집에서 빠져나와 날카롭게 뻗는다. 햄닛은 분노의 칼끝이 방안을 더듬으며 상대를 찾고 있음을 느낀다. 수맥이 있는 쪽으로 뻗치는 어머니의 개암나무 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햄닛은 땅속 수맥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분노도 파르르 떨리는 수맥 탐지봉이 아니지만. 날카롭고 뾰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분노가 다가온다. 햄닛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 P27

애그니스는 연기를 내며 타는 로즈메리 한 다발을 벌집 위에서 살살 흔든다. 고요한 8월의 대기에 연기가 꼬리를 남긴다. 벌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애그니스의 머리 위에서 맴돈다. 가장자리가 없는 구름처럼, 계속해서 허공에 던져지고 또 던져지는 그물처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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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차르트 기념비의 그림자가 조용히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졌고, 페스트에 대한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에게는 빈이 그리운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오후 3시가 지나면, 이 도시에는 마르기트가 없을 것이고, 12월의 소심한 채광이 더 큰 슬픔에 잠길 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60

빈 중앙 묘지에 내리는 비는 후두둑 졸탄의 우산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꼼짝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넌 이십오 년 전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었단 말이니?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캐나다에 산다면? 졸탄은 그녀가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해 그곳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264

불쌍한 안나, 나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위해 울었다.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남은 자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듯, 안나는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그를 사랑했으며, 그의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복잡한 설명, 어쩌면 불가능한 설명 들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그저 존중한, 그런 여인의 소리 없는 퇴장이었다. - P267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가곡 「유럽 칼새」의 미출관본을 간접적으로라도 언급하지 않을까 책의 페이지를 대충 뒤적었을 때. 누런색을 띠고 너탈너덜해진, 동물 형상이 새겨진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꽂혀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갈피는 마침 슈베르트의 무덤이 나온 세피아색 사진이 들어 있는 페이지에 꽂혀 있있다. 그 즉시, 수술용 거즈가 풀어지며, 그의 모든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 P271

그는 주춧돌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려, 슈베르트의 비석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예져, 그러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 속을 헤매이며 걸었네,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저곳의 푸른 풀밭을 함께 거닐었을 때 남긴 발자국을 찾아." 그는 생각했다. 그가 노래를 알았다면,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의 징표가 하나라도 없을까?
내 고통마저 침묵할 때면,
무엇이 나에게 그녀를 기억토록 해 줄까?

라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노래를 불렀을 테지만, 마르기트만이 부여할 수 있는 생명력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 P273

그제야 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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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하군. 나의 시간이 끝나고 있어······." 소년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자,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카스파어?"
"문턱을 조심하세요, 스승님." - P146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은 그 불길했던 오후에 써 내려간 모든 악보를 거두어 일렬로 쌓았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음표를 모두 잊을 수 있다는 듯, 이마를 문질러 악마의 음악에 관한 기억을 남김없이 지우려 했다. 이어 분노로 구겨 버린 악보 더미를 들고 방에서 나가, 부엌의 난로 앞에 섰다. 불복종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죄를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는 한 장씩 한 장씩, 종이를 불 속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종이와 함께, 한 광인의 꿈은 불에 타 굴뚝의 연기가 되어 라이프치히의 회색 하늘로 사라졌다. 누군가의 인생처럼. - P147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 소굴 속에서의 삶을 챙겨 보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모든 것이 시작된 이래, 어떤 운명의 순환 고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신의 자비로움에 감사를 올리며 하루가 지날 때마다 옥죄어 오는 고리에 적응해 보려 했지만, 그 고리가 더욱 옥죄어 죽음만큼 작아진 후 더 이상은 신에게 감사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152

위험의 기운이 서린 침묵이 그의 침묵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기침이 시작되었다. 피할 수 없었다. 기침 소리에 공포는 다시 찾아왔고, 그는 마치 기도문을 외우듯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스치는 기억 속, 트레블링카에서 고통에 괴로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 P158

그가 놀라 입이 벌어진 채 총과 탄약을 들고 꿈쩍 않고 서 있자, 검은 머리의 소녀가 이불을 들고 그에게 웃으며 다가와, 이자크 이 이불은 네 피부야라고 말했다. 네가 보초를 서는 동안, 유일한 벗이 되어 줄 거야. 그녀의 흑옥 같은 눈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로, 키부츠의 여러 장비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날 밤에는 보초를 서게 되었다. 못생기고 소심한 자신이, 유리컵 밑바닥으로 만든 것 같은 안경을 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줄도 모르다니. 그녀가 웃음을 띠고 이불을 준 후 멀어졌을 때에야, 이자크는 조용히 미안해, 미안해······ 하고 혼자 되뇌었다. - P159

문득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모두가 네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강인한 네가 삶을 이어 가며 우리의 눈과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이자크 우처는 부모의 끔찍한 합리화를 수백 번 넘게 되새겨 보았다. 누구에게, 신이시여, 누구에게 지옥을 탈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누가 우리의 오르페우스가 되어야 합니까. - P162

사람들은 역시 둔해. 길도 살필 줄 모르고, 행인들에게는 관심도 없지. 마치 그가 인간 모두를 무시하듯 말이야. - P176

제스로 툴. 음, 좀 낫네. 좀약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그래도 들어 줄 만해. 그런데 말이지, 옆자리 사람들은 코보스를 들으면서도, 이 펍을 망치지 않고 얘기를 잘 나눈단 말이야. 정말 사람들의 무감각함이 도를 넘은 거야. 생각하기 싫어서 하루 종일 히히덕거리다가, 밤이 되면 피곤하다며, 혹시나 모르니 알약 하나를 먹어 두는 거지. 그러면 기억의 공책을 열 필요도, 소화 불량에 시달릴 일도 없으니까. - P181

검은 집에 속한 부지와 그 주변은 언제나 조용했다. 마치 집의 벽들이 몇 년 사이 그들에게 닥친 죽음을 예견하거나 기억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웃들은 탁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조르카의 흐느낌을 알아채지 못했고, 몇몇 이웃 여자들은 불쌍한 저 여자가 저렇게 오랫동안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뭘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며, 돌덩이처럼 눈물 속 씁쓸함만으로 매일 배를 채우고, 어떻게 그렇게 큰 인생의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지 그저 십자가를 그을 뿐이었다. - P192

그녀는 강가의 뾰족한 바위에 앉아 몇 시간이고 떠내려오는 죽은 자들을 살피며, 그녀의 어린 시절, 강이 잉어와 기쁨을 선물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혹시 아들을 찾지 않을까 초조해하며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한 것은 익사한 이들의 눈에서 어두운 죽음을 읽으며, 손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안녕, 내 아들들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바꼭질을 했을 너희들이 왜 죽어 있느냐,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P193

내가 특별히 시벨리우스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거의 고문처럼 괴로운 수준으로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게 문제라면 문제지, 젠장. 어떤 음악이든 들리기만 하면, 다른 걸 못 하고 그 음악을 들어야만 하거든. 그리고 그걸 바로 암기하고 영원히 외워 버린단 말이야. 내 안에는 음악이 너무 많아 웬만하면 그걸 위장 속에 보관해 두려 하지. 하지만 그 음악들이 머릿속에서 멜로디로 변해 튀어나올 때면, 난 정말 미쳐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전철역에서 다시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날 약 올리려는 건지, 음악이 사라졌지 뭐야. 내가 보기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 미로 속 어디엔가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오페라의 유령처럼 웃음소리를 질식사시켜 버린 것 같았어. - P217

하지만 그림 없는 빈자리를 감상하는 것이 진정으로 영혼을 살찌우는 법. 렘브란트에 의해 감춰졌던 벽과 그렇지 않은 벽의 색깔 차이가 세월의 흐름을 여과 없이 드러내더군.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구나(라틴어) 수없이 거쳐 가며 눌어붙었을 노르웨이인들의 시선들, 양파 껍질처럼 들러붙었을 거리의 매연들. 뭐, 노르웨이산 자동차나 난로가 그런 매연을 뿜어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벽은 전시된 작품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푸르죽죽한 색을 띠고 있었어. 그 반대로, 그림에 가려졌다 이제는 노출된 벽은 용감하고, 생생하며, 좀 더 밝고, 긍정적인, 이젠 좀 물러서세요, 내 차례예요 같은 종류의 색상을 띠고 있었지. 그리고 경계, 두 초록 사이의 경계는 렘브란트의 정확한 실루엣을 표시하고 있더란 말이야. 브라보. 훌륭해. - P219

"하지만 범죄자를 어떻게 도망가도록 둡니까······?" 그는 더 나은 설득 방법을 찾지 못하자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주교여." 가우스 주교는 차갑고, 날카롭게, 화가 났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수십억이 걸린 협상의 기술을 배우고 싶거든, 일단 혀는 주머니에, 도덕은 엉덩이에 처넣으시오." - P236

그는 작은 경의를 표했다. "적의 목을 그렇게 조여서는 안 돼.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도망가게 하려면 말이지."
"도망갈 생각은 없소."
"그런 옛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부지런히, 앙금 없이 같이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P251

졸탄은 더 이상 고향이 그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슈베르트링 거리나 시립 공원을 산책할 때도 기쁨이 바로 옆에 있었고,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냥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할 때도, 그의 인생에 어떻게 그런 보석이 존재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던 조용한 마르게리타는, 슬픈 눈빛으로 불가능이라도 뚫어 버릴 듯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한 눈길이 느껴지면 부드럽게 웃음 짓곤 했다. 그는 독일어 수업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피아노를 연습하고 남은 모든 에너지는 넘치는 행복에 숨 막혀 죽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는 데 써야 했기 때문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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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피운 바람에서 세기에 남을 오르가슴을 경험했다. 일전에 네우스는 그것을 한번 경험하면 환희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리카르트에게 들킬 두려움,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또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거리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다. 하지만 오르가슴에 관한 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P63

천천히 가더라도 꾸준히 가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 P71

굳게 닫혀 책장에 꽂힌 책은 책으로 말한다.
책등의 절망 섞인 무력감은
매복한 자들이 입을 싸매 버린
두 눈을 부릅뜬 감옥에 갇힌 자의 그것과 같다.
—가스통 라포르그 - P74

그리고 차. 책 말고 차도 있었다. 그는 하루에 예닐곱 번 정도 차를 마셨다. 그는 녹차를 마시면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탁 트인다고 했다. 그녀가 몰랐던 것은 독서에 특별히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아드리아 선생이 채식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가 깔끔하고, 월급을 잘 주고, 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돈을 두 배나 주고, 잔소리하지 않으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충분했다. 마치 그의 나이쯤 되면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했다. 불필요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절대. 그녀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지만, 완벽한 남자였다. - P78

토니야말로 자주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고, 토니의 그러한 열정에 그녀는 사실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가 아닌 아드리아 선생이 그랬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왜 토니는 다른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거지? 왜 한 번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까? 토니의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전화번호부(총 두 권)뿐이었다. 한쪽은 너무 없고, 다른 쪽은 너무 많고. 그녀는 생각했다. 책을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니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최근 세 번의 월요일 오후에 뭘 했는지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을 빼곤. - P79

책을 손에 넣고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사용 흔적이 아주 많은 가죽 책갈피가 표지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황색은 거의 옅어져 있었고, 돋을새김으로 정확히는 알 수 없는 환상의 동물을 그려 놓은 것 같았다. 특이 사항을 적는 노트에 어떤 책을 살펴보았는지 꼼꼼하게 적고선, 유리병에 노트를 넣어 두는 걸 깜빡했다. 그 옆에는 열일곱 개의 책갈피, 열두 개의 저자 사인 및 헌정 메모, 무명의 독자가 남긴 속 깊은 감상(그중 두 개는 인덱스카드로 옮겨질 만했다.), 구매 목록, 회계 내역, 책 페이지 사이에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던 문서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서 하나가 마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1929년 봄 바르샤바의 모이세스 우처라는 보석상이 이디시어로 쓴 편지가, 자신과 부인이 외아들 요세프가 최근 의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예루살림스카야가에 사는 레비 가문의 미리암 레비와 약혼을 한다는 소식에 매우 기쁘며, 새 출발을 하는 부부의 앞날에 축복과, 번영,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수신인에게 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물건들에 대해 거의 성찬식급의 경외를 갖고 있는 아드리아 선생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유리병을 쓰다듬고 크게 숨을 쉬더니 슈바르츠의 책과 첫 만남을 가졌다. - P81

최근 안드로마케의 엉덩이를 좀 더 지켜보고, 아리아드네의 깜짝 놀랄 가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앞쪽으로 풍부하고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무시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먼지를 털어 내고, 아드리아 선생의 가까이에 있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인덱스카드를 채우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문단을 보려 수십 번 몸을 기울인 끝에, 아리아드네의 가슴이라는 관찰 대상 하나가 탄생했고, 그는 자신이 캉드쉬의 『전원 음악』 (안트베르펜, 1902)에 나오는 양치기 여인 피다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기 직전의 폰키엘로가 된 듯한 상상에 빠졌다. - P84

푹푹 찌던 어느 날, 아드리아 선생은 몸살로 누워 있었다. 아드리아 선생이, 침대에, 분홍색 잠옷을 입고 누워 있음. 드디어 새로운 소식이었다. 넓은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는 대여섯 권의 책을 빼고선, 완전히 다른 남자 같았다. 수염이 좀 더 허예진 건가? 조명 때문이겠지. 아드리아 선생은 그녀에게 침대의 가장자리로 와서 앉아도 좋다고 했다. 인덱스카드를 채울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몇 초간 조용히 팔을 뻗더니 말했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말아요, 뭐라도 옮으면 안 되니까. 토니하고 어쩜 이렇게 다를까, 그녀는 생각했다. 별로 심하지도 않은 감기에 걸린 어느 날, 토니는 그녀에게 추워서 몸을 덥혀야겠으니 침대 옆에 와서 누우라고 오후 내내 졸랐다. - P85

"이유가 뭔지 알아요?" 분홍색 잠옷을 입은 아드리아 선생이 현관의 계단에서 멈추었던 712권의 책에 대한 대화를 재개하며 말했다.
"아니요. 모릅니다."
"지식을 좇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지식이란 소심해서, 어딘가에 숨어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습성이 있어요. 전 그렇게 발견되지 않고 언제나 숨어 버리는 지식을 좇으려 합니다······." - P86

그제야, 그 앞에 진짜 빅토리아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침대 옆에 앉아 200년은 보낸 것 같은 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식으로 가공한 다이아몬드처럼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강렬하게 반짝였고, 그런 그녀가 정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아름다운 가슴과 엉덩이의 곡선이 강조되었다. 아드리아는 많은 독서를 통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인생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모든 것이 당신의 아름다움만을 빛나도록 하는 데 쓰이는 나이가 있다는 걸, 예를 들면 귀니첼리의 노래 『거미와 나비』 (밀라노, 1800) 같은 작품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로 빅토리아가 그 나이였다. 아드리아 선생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 P86

질투는 세상을 바꾸어 왔다. 머리에 씌워진 왕관의 주인을 바꾸었고, 몸에 달린 머리를 날려 버리기도 했다.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움직인 것은 결국 야망이 아닌 질투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질투는 부자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가난한 자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무심한 자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 아드리아 선생은 살면서 처음으로 질투라는 것을 실제 느꼈다. 어둡고, 지칠 줄 모르며, 곡해하며, 신맛에, 잔인하며, 쓰디쓴 질투. - P88

"그럼 그걸 카드에 적거나, 아니면 당신이 적는 거죠. 예를 들면······" 그리고 책을 펼치더니, 그가 원하던 페이지까지 재빠르게 넘겼다. "번역해 보죠." 그는 경고했다. 그리고 목청을 다듬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오, 여왕이시여.‘ 왕자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주먹으로 이를, 칼로 콩팥을 날려 버릴 거예요. 그래도 일부가. 당신의 일부가 남아 있다면, 오 내 사랑, 당신을 향해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할 거예요.‘ 당신도 알아주기를, 오, 인간이여,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정말 얇은 피부와 같은 작은 차이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미 상황을 짐작했던 디도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르고, 고꾸라지며 자신의 배에 칼을 꽂았다." 얼마간 침묵만이 맴돌았다. - P90

"선생님은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이 책들을 읽을 뿐이에요. 망각과 잊힌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게 분명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드로마케는 페레스 하라미요의 작품 『가지에 달린 금』(부에노스아이레스, 1931)에서 벨리 사리오가 적의 심장을 부숴 버리듯, 아주 쉽게 그의 큰 비밀을 간파해 냈다.
"그 잊힌 것들을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되살려 내고 싶은 거죠." - P92

"그러니까 형식에 좌우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는 팔을 들었다. "잘 쓰인 작품의 단어들 사이에는 그것을 쓴 사람이 들어 있다는 말이죠."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이 형상화하는 이미지에 그녀는 매우 놀랐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드리아 선생은 계속했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글의 형식에는 영혼이 있어요. 잘 쓰인 책은 잊힐 수가 없지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
"아주 평범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와 같은 어구조차 강한 의지와 형식적 성공이 뒷받침되는 문장 안에 잘 직조되면, 어떤 영혼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죠? 당신을 사랑합니다." - P94

그녀는 고통받는 자의 위로였으며, 아픈 자의 건강이었고, 죄인의 안식처였으며, 이상향, 천사들의 여왕, 상아탑, 성 빅토리아, 구슬픈 아리아드네, 동정녀 중의 동정녀, 그리고 슬픈 안드로마케였다. 심지어 새로운 연인이 반쯤 잠들게 했다. 마치 신비주의적 계시처럼, 불가사의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아드리아 선생 이마의 활활 타는 불이 가라앉아. 빅토리아는 마치 새로운 니케처럼, 『마법사의 제자』에 나오는 훌륭한 견습생을 넘어서는 것처럼, 그녀는 새롭고 깊고 그리고 초월적인 힘을 통해, 서서히 그리고 단호하게 기름 부음을 받아, 권위를 얻고, 성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안룬드의 『숲』 참조.) 심지어 그녀의 눈빛조차 새로운 힘을 가진 아름다운 사제의 것으로 변했다.
"곤사가가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빅토리아는 처음으로 의례를 집행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의 열을 제거 할 것이니, 너의 고통을 나에게 바치거라.‘ 수련을 시작한 수사는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았고,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아드리아 선생이 갑자기 눈을 떴다. 마치 그 단어들을 말한 자가 빅토리아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듯. 몇 줄의 침묵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비판으로 이해하고, 얼른 경구를 끝마쳤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주세페 그릴리, 나폴리, 1912." - P95

3페이지에서 이미 좋은 경구 하나가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네, 코임브라여, 커튼이 쾌활한 웃음으로 벽을 치고 오르며, 너의 집 창문이 매일 열린다면." 커튼의 쾌활함, 코임브라의 새날을 열어젖히는 여인의 쾌활함······. 세아브라 핀토가 이 발상을 써 내려갈 때, 빅토리아는 그 앞에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죽었을 때, 이 부분을 읽게 된다면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 P99

복도에서는 『아프리카 시선』의 먼지를 뒤집어쓴 아드리아 선생의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그는 책 하나하나, 책등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청소하는 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안드로마케의 멋진 도서관이 불명예와 망각이라는 소홀함에 무너지지 않도록. - P100

렘브란트 선생은 이제 너무나 큰 듯한 내 방, 그리고 아 슬프구나, 외로움만 가득한 방을 택했지. 햇살이 비치면 가장 아늑한 방이니까. 그림을 잘 보관했으면 좋겠구나, 사랑하는 아들아,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항상 지녔으면 한다. 그곳에서 네 일이 잘되니 네가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니 내 늙은 형상을 기억하는 의미로,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전 네 어머니가 너에게 세상 빛을 처음 보여 준 방을 기억하는 의미로 간직하기 바란다. 그래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항상 잘 보관하다가 네 자식들, 그리고 네 자식의 자식들에게 보여 준다면, 언젠가 한번은 네 할머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겠니, 가여운 사람. 그리고 네게는 너의 기원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의 상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은 없으니까. - P110

"새로운 소식이란 말입니다. 사제여." 바루크 베네딕투스 안슬로 올손이 끼어들었다. "언제나 진실보다 느린 법이지요." - P112

"굶겨 죽이는 것은," 하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많은 마을에서 사기꾼들과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방법이지요. 자신의 거짓말로 영원히 배고픔을 채우며 살도록 두는 것입니다." - P116

"자긍심과 자만심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 P127

그건 음악이야. 심장에서 나왔으니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P134

갑작스레 힘을 쓴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벽에 기대어, 벽아, 그저 행복한 벽아, 내가 다시 너에게 기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라고 말했다. - P139

"어디서 시작했든 상관없어. 조성이란 없어. 주제와 발전부는 신기루일 뿐이야······. 예상치 못한 음악이 음악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렇다면 불협화음은요?"
"그것도 신이 창조하신 것이지." - P142

스승은 분노, 그리고 무엇이든 남기지 않고는 생을 마감할 수 없다는 죽어 가는 자의 급한 마음을 담아 음표를 불러 댔다. 마치 기억, 그의 마지막 생각, 그의 대담함으로 탄생한 생각의 닻이라도 내리겠다는 듯, 시작 주제의 광기가 끝나자 푸가 부분 간의 완벽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정석적인 대위법이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다시 여섯 개의 주제가, 모두 한결같이······ 한결같이 조성이 없었다. 마치 모든 조성이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고, 으뜸음도, 딸림음도, 버금딸림음도, 어떤 음의 위계도 없다는 듯이. - P143

이제 전부를 오르간으로 연주해 보겠어, 카스파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풀무질을 하며 들어 보게, 혹시 자네가 실수한 게 있는지.
"실수하지 않았어요, 스승님. 카스파어는 으스대지 않고 말했다. 그는 그저 음악이라면 언제나 잘해 냈다. "만약 실수한 게 있다면······."
"생각 자체에 실수 같은 건 없어, 카스파어." 그는 다소 퉁명스럽게 제자의 말을 끊었다. "좀 더 너그러워지려 노력해 보게.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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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림에 푹 빠진 동안 시간이라는 관념은 증발해 버렸고, 마침내 시계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원 약속에 한참 늦은 후였다. 소름 돋는 경험을 안고 현대 미술관에서 나온 그는, 아주 신나게 여러 자동차의 주차 위반 딱지를 끊고 있는 단속원을 헉헉거리며 지나, 십칠 분이나 늦었으니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십사 시간을 더 처벌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여전히 헉헉거리며, 의사를 만날 수 있는지 창구에 물었다. 의사 누구 말인가요. 내 사망 날짜와 시간을 알려 줄 의사 말입니다. 3층으로 가세요. - P37

외로움이라는 맹수의 발톱이 얼마나 잔인한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 지금, 혼자서 울 시간은 앞으로 충분할 것이다. - P38

입이 딱 벌어진 아구스티는 생각했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들 앞에 펼쳐진 미래 또한 매우 끔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 P42

태양이 바다에서 목욕한다는 게 거짓이라고 말하지 말아 줘.
—펠리우 포르모자 - P43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서사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제멋대로 보여 준 채, 아닌 척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속이려 든다. - P49

"편지는 읽히기 위해 존재하지. […]"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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