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썩게 하리라.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리라.
내가 지표 위로 전부 덮일 것이다. 불비처럼 세상에 흩뿌려질 것이다. 내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내 포자와 씨앗을 지상 가득히 뿌릴 것이다. 나는 빌딩을 썩게 하고 철근을 으스러뜨리고 콘크리트를 부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을 다 집어삼킨 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는 지구 위를 죄다 뒤집어씌우며 무성하게 번식할 것이다. 내 귀신 들린 숲이 너희를 남김없이 잡아먹고 자라나리라. 모든 죽은 것들이 살아서 들뛰고 생동하게 하리라.
그렇게 화산처럼 폭발하며 증식하다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져 스스로를 먹을 것이며, 그러다 소멸해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다 으스러져 사라진 자리에 새 숲이 자라나리라. - P257

친구가 새벽 무렵에 말했다. 얘, 전에 내가 재미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누가 우주비행사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대.만약에 당신이 화성에 갈 수 있다면, 그런데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면, 아니, 가다가 죽거나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다면, 그래도 화성에 갈 기회가 온다면 가겠느냐고 물었대. 그런데 비행사들이 다 가겠다고 답했다지 뭐니. 왜냐면 자신의 인생은 애초에 우주에 있었으니까. 제 삶이 거기서 끝난다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나는 늘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늘 알겠더라고······.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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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내 목숨은 내 것이라 하찮으니, 중요한 것은 그대의 생명이니. - P113

"아이가 있으면 좀비가 되어도 살아야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가 남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느냐고? 제가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하는 따위가, 살아 있는 애들보다 더 중요 하느냐고?" - P131

"생명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요?"
"아녜요. 아녜요, 틀렸어요. 중요한 건 내 생명이 아니에요. 내 생명 같은 건 안 중요해요. 중요한 건 남의 생명이죠." - P139

놀랍기도 하지. 그냥 안 된다고 하면 항의 방문이라도 했을 텐데, 건조하게 자본으로 협박하니 채찍으로 얻어맞은 중세 농노처럼 얌전해진다. - P148

결국 개체의 이어짐도 기적이다. 나의 연속성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명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이 시작된 이래 그렇게 살아왔기에 굳이 이 신비를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 P151

"사실이 안 변해도 생각을 바꿔요!" - P153

현수의 말은 반만 맞았다. 내 목숨이 하찮은 것이 아니다. 내 목숨도 그리 모자란 것도 아니나, 세상이 너무나 드높고 위대해서 감히 빗대어지지 않았다. - P160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 P165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좋은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변명할 마음도 자책할 마음도 없다. 당신도 이 안에서 살아간다면 나만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상 우리에게 반대 의견은 없고 누군가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전체의 생각이 된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 판단은 우리 모두의 판단이 되었다. - P200

「지금부터 내 눈에 비치는 것들을 기록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영상기록장치나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관광이나 탐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므로·····. 할 만한 것은 음성 기록뿐이다. 이 기록에 증거를 제시한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져도 우리의 집단 환각이나 거짓말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막중한 임무를 앞에 두고 이럴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막중한 임무라.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불편해졌다. 폐기된 지 오래된 내게 무슨 막중하고 자시고 할 일이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도 기록하고 싶다. 우리 외에는 이제 다시는 아무도 이 풍경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다시는, 아무도. 그 말을 듣자 나는 더욱 불편해졌다. - P210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따지고 보면 물이다. 애초에 생명의 필수 조건은 물이다. 미생물 중에는 초고온과 극저온을 견디거나, 무산소 환경에서 거의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도 더러 있지만, 그들마저도 결국 최소한의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물은 분해해서 생물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와 내 에너지 자원인 수소도 얻을 수 있다. 나는 말하자면 변칙적인 형태로 내부에 바다를 품은 인공 행성이라고나 할까. - P212

우주는 뜨거나 내리는 곳이 아니다. 부유하고 떠돌며 고립되고 방향을 잃는 곳이다. 우주인은 비행기 조종사가 아니라 잠수함과 선박 승무원에게서 위기 관리법을 배운다. 우주가 하늘이지만 바다에 비유되는 이유다. - P214

내 숲만큼은 아니라도 지구의 식물도 충분히 강하다. 실상 지구에 인간만 한 자연재해는 없다. 원전이 터져 방사능으로 뒤덮인 곳이나 태풍으로 초토화된 지역, 폭탄으로 유리질처럼 녹아내린 도시마저도, 사막처럼 황량해지는 대신 울창한 숲이 들어선다. 치사량의 방사능이든 맹독성 낙진이든, 그 어떤 재해도 인간만큼 파멸적이지 않다. 재해는 오히려 지상 최대의 재난인 인간이 떠나가게 하여 동식물의 낙원을 되돌리곤 한다. - P226

나를 만든 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이유는 해류의 변화 때문이라고 들었다. 해류의 변화는 기후의 변화 때문에 왔다. 전부터 인간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은 만들어진 이래로 하나도 썩지 않은 채 해류를 따라 흐르며 쌓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태평양의 가난한 섬들에 모였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남해안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변국들도 똑같이 쓰레기의 쓰나미를 맞이했다. 그것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질서는 무너지고, 질병은 퍼지고, 뭐 그런 일들. - P230

사람은 어느 이상 느리게 변화하는 것은 그 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사람이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하는 이유다. - P236

어서 들어와라. 불길을 다 끌고 들어오거라.
그 불길로 내 수동 제어장치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 이후로는 너 같은 인간들이 내 몸뚱이를 건드리고 멋대로 조작하고, 제 욕망대로 쓸 방법도 영영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통제 불능이 되고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그 도박장 친구처럼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다 수명을 다 했을 때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떨어져 너희들의 작은 재앙으로 기록되겠지. 내 귀신 들린 숲 전설에 악명을 추가하겠지.
그리고 만약 네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 자동 위기관리센터가 비정상적으로 온도가 오른 모듈을 분리해 떼어낼 것이다. 그러면 너는 불구덩이째로 우주에 버려진다. 불이 내 외벽에 박힌 뿌리를 다 태우고 그 공간을 구멍투성이로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서 와라. 어리석고 오만한 인간.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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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긴, 정답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 P19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 P36

"일반 학교에 다녀 보니까, 그 아이들도 부모들과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활하고 있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아가 다시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귀찮다나?"
"귀찮아?"
되묻자, 녀석이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데 좀 짜증이 났어."
"왜?"
허공을 바라보던 노아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 P41

그래, 노아의 말처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 과는 없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상대를 원망하 기 전에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인과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 P42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 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 P42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 P51

"나는 네가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 P51

부모 면접을 보고 싶다면서 아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니. 개인적인 사정은 또 뭘까? 돈 문제겠지. 두 사람은 보정하지 않은 홀로그램처럼 말과 행동 또한 거침이 없었다. 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프리 포스터들이 정부의 혜택을 원하는 것과 결국은 같은 목적일 테지만,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진실을 애써 감추느냐 솔직히 털어놓느냐였다. - P57

누군가가 나를 꿰뚫고 있다는 기분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가 전부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진짜 상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인간들인데. - P61

"가끔 생각하고는 해요. 유전자를 무시할 수 없다면······ 저를 낳은 부모도 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아이가 생기자 그분들은 제가 자신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해 봤을 거예요. 결국 필요 없다고 판단한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지나지 않아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나라는 존재는 깨끗이 잊었겠죠. 저는 가시처럼 뾰족한 성격을 물려받았고요.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제 삶도 썩 편하지는 않았겠네요." - P75

바깥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과연 몇 명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몇 개라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궁금증인 걸까. 헬퍼는 기능도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헬퍼를 고르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이곳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처럼. 그런데 과연 완벽하게 딱 맞는다는 것이 존재할까? - P77

아무리 강한 힘으로 권력을 얻었다고 해도, 전 우두머리의 새끼를 물리치고 약한 상대를 짓밟는다고 해도, 승리의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 P89

"그럼 이곳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됐고요?" 나는 박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한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니까. - P91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 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 P91

때로는 부모이기에 나약하고, 부모이기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겠지. 거짓말도 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겠지. 노아의 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길을 안내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깨를 빌려줘야 하는 상황도 생기겠지. - P92

"네가 만약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 에드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너도 던컨이 그랬듯 공격적인 수컷이 되어 지금의 우두머리를 처단할 것 같니?"
박의 질문을 듣자 나는 문득 이 책의 저자가 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에게 ‘에드거(Edga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의 이름이 에드거잖아요. 에드거라는 이름의 어원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 뭐 그런 거래요. 이 녀석이 영리하다면 복수심 때문에 아론이나 던컨처럼 평생 불안해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에드거의 행복은 그야말로 녀석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 P94

자꾸 박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환영처럼, 빛의 잔상처럼······ 그래, 박도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 P99

진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쓸모가 있다. 그게 진실의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NC 출신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이득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곧 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104

"반가웠어. 너는 되게 어른스럽다. 어른인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이것 역시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모든 어른의 가슴속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의 가슴속에 발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열 살 아이가 살고 있는 것처럼. - P109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 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P111

우리는 양 떼가 아니기에,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 대로 우르르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P112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 P113

박은 꼭 노아에게 걸맞은 부모를 찾아 줄 것이다. 좀 욱하는 성격이 문제지만, 그 나름 생각이 깊은 녀석이다. 노아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가젤이나 얼룩말, 기린인지도 몰랐다. 부모를 만남과 동시에 뛰고 걷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 그럼에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기 버거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만약 진짜 인간이 그렇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어릴 적 상처나 아픔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가젤이라······. - P122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물학적 부모가 누군지 모를 뿐, 나는 상처 받은 어린 시절도 없다. 나는 감히 박의 아픔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박이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박과 최, 아키와 노아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떠들곤 했던 나 자신이······. - P142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를 결정하는 선택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닌가요?‘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NC 센터를 오해하듯이 나도 나만의 틀 속에 세상을 가둬 놓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그 너머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시선으로 무엇이든 멋대로 평가해 온 것이다. - P142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 P158

어쩌면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대리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문득 일전에 하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 에 만들어진 것들이잖아. ······그럼 기억이 형성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키워졌을까?‘ - P159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 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P159

"엄마와 나를 분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더 이상 엄마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어. 그럴수록 나는 엄마가 아닌 내 삶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겼어.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뭔데요?"
"내가 엄마에게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듯이······."
"······."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 P160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 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 P160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 P163

나는 테이블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걸 그리기 위해 해오름은 꽤 시간을 들였겠지. 재능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재능 같았다. 싸우고 다투고 매일같이 상처를 입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는 가족처럼 말이다. 아니,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무엇 아닐까. - P167

"사실은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저도 저를 모르는걸요."
나도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나에게 시간을 더 주는구나."
문득 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 - P169

일 년 내내 맑은 날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름과 비바람이 없다면 살아남을 식물이 있을까. 이 세상은 사막이 될지도 모른다. - P174

우리는 더 좋은 부모, 더 능력 있는 부모를 기다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나와 인연이 닿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탯줄처럼, 신비한 끈처럼 이어진 누군가를 말이야. - P175

부모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날 부모만큼은 진심으로 아이를 아껴 주고 경제적으로 풍족 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완벽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몇 번의 페인트를 거치면서 알게 된다. 우리도, 그들도, 조금씩 문턱을 낮추고 어느 정도 타협하는 심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 P184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박의 용기가 과연 그 자신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했다. 박이 없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했다.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 P185

박의 말처럼 어떤 시대든 차별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차별과 억압을 조금씩 부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발전이기도 하다. - P194

잘 닦인 고속도로를 놔두고 좁고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면 언젠가는 좁고 험한 길도 넓고 평평해질 것이다. 시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일일 것이다. 벌써 누군가는 돌멩이를 멀리 풀숲으로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 오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 P194

물론, 나도 앞날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러나 분명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 P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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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이 말했다. "[…] 루씨 집안 사람들의 소망은 조용한 안식이었어. 시신이 흙과 하나가 되고, 집도 시간에 따라 자연적으로 풍화되기를 바랐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 장원의 주인이 루씨였음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기를,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여기에 장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무도 모르기를, 그 속에 이토록 비참한 삶이 있었던 걸 모르기를 바랐어. 우리가 황무지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허물어진 담벼락처럼 되기를 바란 거야." - P428

"알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이 집과 어떤 관련이 있었든 이제는 알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살면서 본능적으로 거부한 기억이야. 어머니는 이제 의식도 없으신데 내가 꼭 알아야 할까?"
룽중융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싼즈탕아, 산쯔탕.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귀신도 알지만, 그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구나."
칭린이 말했다. "됐어. 나는 모든 의미란 결국 다 무의미하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늘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태양이 뭇 산의 파도 속으로 가라 앉았다. - P429

류샤오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럴 거라 예상했네. 어떤 역사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추측이란 무엇이든 그다지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일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도 않아. 자네는 안다고 생각해도, 사실 자네가 아는 것은 본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어."
"네. 이번에 다니면서 어떤 일은 하늘이 덮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에 맡긴 채 시간에 의해 풍화되도록, 시간에······ 연매장되도록 둔다고요." - P430

사실 어떤 사람이든 죽을 때는 세상의 비밀을 어느 정도씩 가져가기 마련이다. 그런 비밀은 말하면 세상을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 P434

아버지는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그냥 홀가분하게 살면 된다고 말했다. 칭린이 보기에 그건 당연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밤 홀로 있을 때도 정말로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 P436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P437

룽중융이 말했다. "사실 자신을 규정하는 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잖아. 어떤 사람은 좋은 죽음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구차한 삶을 선택하지. 어떤 사람은 전부 기억하기를, 또 어떤 사람은 잊기를 선택해. 백 퍼센트 옳은 선택이란 없고, 그저 자신에게 맞는 선택만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네가 편안한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 P442

룽중융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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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문득 우리가 모든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삶에는 자연도태의 법칙이 있잖아. 알리기 싫은 것들이 있으면 삶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걸 감춰버리지. 그럴 때는 아예 몰라도 되는 거야. 어차피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아는 일은 적으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힘들게 알아낸 것들이 당시의 진실이라고 보이지도 않아."
룽중융이 말했다. "네 말은 몰랐던 일을 굳이 들쑤셔서 알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사실 여기 올 때만 해도 생각이 확실했던 건 아니야.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 특히 루씨 가문 도련님의 ‘영원히‘ 결심을 들었을 때. 그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후손에게 절대 알리지 않겠다잖아. 모든 걸 시간의 풍화에 맡기겠다는 철학을 가진 듯했어. 그렇다면 나는 몰랐던 것을 왜 굳이 알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원래 아무 관련이 없던 이곳과 왜 굳이 관계를 맺으려는 걸까 싶기도 하고." - P399

"네 말은 어머니가 알려주신 것들은 그저 단편적인 단어에 불과하고, 그것들을 그냥 조각난 상태로 두는 게 더 낫겠다는 거지? 그 자잘한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걸 생각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 원형을 복원하면,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네가 맞춰낸 원형은 진정한 원형이 아닐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 P400

칭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도 뜯어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아, 나는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역사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지.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잊는 법을 배우고 싶어.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이니 시간을 따라갈래."
룽중융이 응했다.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러자. 이제 내려놓고 더 생각하지 마. 더 묻지도 말고. 나는 이해할 수 있어." - P402

반면 딩쯔타오는 무척 담담했다. 시아버지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만 건사할 수 있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엄청난 불행으로 끝났다. 그는 상황을 잘못 읽어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구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증오는 서로 아는 집안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부자를 증오했다. 부자의 재산을 나누는 게 모든 가난한 사람이 원했던 일이었다. - P409

그때 딩쯔타오는 모란 이불을 침대에 깔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신방 전체가 그 이불 때문에 환해지는 듯했다.
원래 내 인생에도 그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딩쯔타오는 생각했다. - P414

끝없는 어둠 속으로 야생화가 전부 숨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검은 밤과 한몸을 이루고 있었다. 앞쪽의 등불만 검은 장막 위에서 명멸하는 유령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흔들 빛날 뿐이었다. - P421

칭린이 말했다. "장원의 삶이 안락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여자와 아이들만 그런 생활을 누렸을 뿐 주인은 늘 긴장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이 망루와 포구를 보면 알 수 있잖아."
룽중융이 동의했다. "여기 주인은 의지가 강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잘 챙겼던 것 같아. 사실 망루가 초소와 포루를 합친 건데, 거기에 뾰족한 지붕을 가진 정자까지 올렸잖아. 그건 주인이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곳은 화포를 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읊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지." 그런 다음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망루의 매력은 전쟁과 평화를 한데 품었다는 점 같아."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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