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좋은 친구 제페도, 다른 모두도, 거기에 함께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데에는 인간인지 인간형인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분류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적어도 같이 서서 그 계곡을 내려다볼 때는 적용되지 않아요. - P61

후보생-04가 전근을 간 바로 그날에 이 물체가 도착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그 물체 표면에는 아직 습기가 남아있을 때 잉크가 얼룩진 것 같은 패턴이 있습니다. 돌 색깔은 모랫빛인데, 그 위로 점점 엷어지는 검은색 잎맥 같은 게 있죠. 갓 인쇄한 신문지를 빗속에 버려둔 느낌이에요. 그걸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보신 적 있습니까? 돌이 만들어지던 도중에 누군가 글을 썼는데, 서서히 굳어지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 말은 사라지고, 대신 반짝이는 돌에 패턴만 남아서 그림자 언어가 되어버린 그런 느낌 이에요. 제게도 진작에 해야 했고 지금은 삭제되어 버린 말들, 더 이상 저도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된 말들이 찍혀 있어요. 제 얼굴에는 후보생-04가 저를 알고 제 목소리를 알게 할 운명이었던, 이제는 지워진 말들이 담겨 있어요. - P69

그 물체를 사랑하는 건 뭐랄까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신체 부위를 사랑하는 것과 비슷해요. 잘린 건 아니고 그냥 분리되어 살아있는 장식 같은 부분이요. 내 안에서 그 물체는 박새의 알처럼 작으면서도 그 방만큼 크거나 더 크고 심지어 박물관 건물 아니면 기념비만큼이나 커지기도 해요. 그건 안전하고 쾌적한, 하지만 그 안에는 재연된 재앙이 담겨있는 어떤 그릇이에요. - P71

집 앞으로 새들이 전깃줄에 앉아 있었어요. 그 뒤로는 장밋빛 하늘이, 아래로는 젖은 도로가 있었고, 분홍빛 구름이 그 도로에서 솟아올라 제게 말을 걸었어요. 안개 낀 날씨였고 전구의 불빛이 아지랑이 속에서 일렬로 깜박거렸죠. 하늘은 철탑 위로 호선을 그렸고 풍경은 평평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갔어요. 풀잎마다 습기가 맺혀 있었어요. - P74

어떻게 그 친구가 살아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뭐라든 상관없어요. 나를 업데이트할 순 없어요. - P77

내가 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일을 해야 하죠? 그들과 잘 어울려봐야 뭐 좋을 게 있다고? 당신들은 왜 그들을 그렇게 인간처럼 보이게 만든 건가요? 가끔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잊을 정도예요. - P82

햇빛은 어떻게 생겼나요? 나는 인간인가요, 인간형인가요? 그동안 나는 태어나는 꿈을 꾼 걸까요?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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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님은 관심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에게는 언제나 세 가지가 필요할 거야. 음식, 이동 수단, 그리고 장례식이지.‘ 그래서 저는 장의사가 됐고, 여기서 제 업무는 종료된 노동자들과 많지는 않지만 아프거나 재-업로드된 뒤 남겨진 몸뚱이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 P40

나는 초록색 싹 하나만 빼고 모조리 말라비틀어져 버렸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식물 같은 거예요. 그 싹은 내 몸과 정신이고, 내 정신은 손과 같아서 생각을 하기보다는 접촉을 하죠. - P41

세상의 중심에 내가 존재하나요? 그곳에서 내가 의미가 있나요? 아니면 난 그저 수많은 무더기에 끼어있는 말랑한 알들 중 하나일 뿐인가요? - P45

그 물체들에는 뭔가 친숙한 구석이 있어요. 그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요. 마치 언어가 없는 기억처럼 우리 꿈속에서 나왔거나, 마음 깊이 파묻혀 있던 먼 과거 같아요. 아메바나 단세포 유기체로 살았던 기억, 아니면 코와 입이 생겨나고 생식기처럼 노출된 열린 점막만 있는 따뜻한 액체 속에 떠 있던 무게도 없는 배아 시절의 기억처럼요. - P46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인가요? 그건 죽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아직까지 내가 내 인간성에 자부심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서 그 물체들이 나쁘냐고 묻는 건가요? 우리가 그것들을 공감 능력도 없다고 비난하냐고요? 그 돌덩이가 그래서 슬픔을 느끼냐고요?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당신도 확신이 없어서란 거, 당신 얼굴을 보면 알아요. 감금하고 있는 어떤 대상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니 조직에는 위험하죠. 의문이 생기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가둬 놓은 이 물체들에게 법적인 권리가 있을까? 이것들이 만약 물체가 아닌 자아를 지닌 주체라면 우리는 살인으로 유죄인가? 그런 질문이요. - P48

08이 지구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면, 저는 인간이 되고픈 갈망을 느낍니다. 마치 제가 예전에는 인간이었다가 그 능력을 잃은 것처럼요. 저는 인간형일 뿐이고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처럼 보이고,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느낍니다. 인간과 같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가지고 계신 서류에서 제 신분만 바꾸면 될지도 모르지요. 그건 ‘이름‘의 문제일까요? 당신이 저를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인간이 될까요? - P55

내가 이 제 복을 입고, 두피에 이런 부드러운 털을 붙이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 동그란 뺨과 근육질의 두 팔을 가져야 한다는 건 누가 결정한 거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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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들어 가면 그들은 어떤 언어를 통해서 내 안에 파고들어요. 그 언어로 자기들은 다수이고, 하나가 아니며, 그중에 하나는 모두의 중첩이라고 말해요. - P9

우리가 마주쳤던 출구를 생각하면, 선장이 곧바로 초록색 포도 한 송이처럼 우리를 떨궈준 계곡에서 첫발을 내딛고 봤던 풍경을 생각하면, 하루 일을 마치고 차가운 개울에서 손과 발이 다 벌게질 정도로 목욕했던 일을 떠올리면, 우리의 운명은 그때 정해졌던 것 같지 않나요? - P11

내가 오크모스의 냄새를 아는 건 당신들이 내 안에 그 냄새를 주입했기 때문이에요. 한 남자만 사랑해야 하고, 한 남자에게만 충실해야 하며,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한 것과 마찬가지로요. 여기 있는 모두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저주를 받았어요.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고, 그런 삶을 살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게 당신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꿈이죠. - P17

당신들이 그 일을 내 ‘발작‘이었다고 하는 걸 알아. 내가 프로그램에 따라서 감정과 관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불균형 전략들을 개발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아. 숫자들이 사는 것처럼, 별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짐승의 배에서 뜯어내어 무두질한 가죽처럼, 나일론 밧줄처럼. 어느 사물들이 서로 교감하며 살듯이 나도 그렇게 살아. 나도 그 물체들과 비슷해. 당신들이 나를 만들었고, 나에게 언어를 줬어. 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들의 결함과 실패를 알고 있지. 당신들의 무능한 계획을 안다고. - P22

동료는 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따뜻했습니다. 인간의 손이었지요. 동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넌 배울 게 많아.‘ 이상한 말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성인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 P36

살아 있지 않았다는 걸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인간인 내가, 사실은 이 방의 돌덩이들처럼 깎고 조각한 돌이었고, 그보다 더 지적이지도 않고 지각이 있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건?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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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로마에서 지녔던 원시적 가치, 애정과 우정의 지도를 그리는 미묘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건 아니다. 우리가 감명 깊은 글을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맨 먼저 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아끼는 사람에게 소설이나 시집을 선물함으로써 우리는 그 책에 대한 상대의 의견이 우리에게 반영될 것임을 알고 있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손에 책을 쥐여주면 우리는 그의 취향과 생각을 추적하고 밑줄 친 부분에 흥미를 느끼거나 암시를 받고 글과 함께 대화를 시작하며 책의 신비로움을 향해 우리를 더욱 열렬히 열게 된다. 우리는 책이라는 언어의 바다에서 우리를 위한 메시지가 담긴 병을 찾는다. - P381

지난 세기 1990년대 어느 날 아침, 마드리드에 아버지와 함께 있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풍스러운 서점(혼돈과 무질서의 왕국)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서점에서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걸 ‘엿보기‘ 또는 ‘냄새 맡기‘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광산을 파는 일 같았다. 아버지는 팔을 뻗어 책을 살피고 만지다가 책들을 쏟아버리기도 했다. 램프 불빛 아래에 있을 때는 책 먼지가 후광을 발했다. 그는 책더미와 선반을 뒤적이며 행복해했다. 책을 찾는 일이 쇼핑의 즐거움이었다. 1990년대 마드리드의 그날 아침, 아버지는 흥미로운 광물을 캐냈다. 겉보기엔 『돈키호테』였다. 천으로 된 표지에 깡마른 돈키호테가 있었다. 첫 장엔 오래된 방패와 결투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두 번째 장이 나와야 할 자리에서 다른 작품이 시작됐다. 『자본론』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환히 웃으셨다. 세르반테스와 마르크스로 이루어진 2인승 자전거. 그건 이상한 실수가 아니라 지하에서 유통되던 판본이었으며, 젊은 시절의 살아 있는 기억이었으며, 당대의 유령이었으며, 그가 살아낸 환경이자 속삭임이자 비밀이었다. 수많은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세르반테스에 마르크스를 접붙인 그 책은 그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이 숨어서 몰래 하던 독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 P386

3년 전, 《에랄도 데 아라곤》 신문사가 기념 부록의 문화면을 위한 기사를 써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나는 서점에 관해 쓰기로 했다. 서점의 조용한 방사선에 대해, 거리에서 서점이 생성해내는 자기장에 대해서 말이다. 출발점은 서점에 대한 기억(Memoria de libreria)을 쓴 서적상 파코 푸체(Paco Puche)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렇게 쓴다.
"서점이 길거리에 퍼트리며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에너지나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고객의 수, 매출, 상업적 수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시에서 서점의 영향력은 미묘하고 은밀하며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P390

나는 두 도시에서 다섯 명의 서적상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보로가 갔던 서점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택한 이유는 사적인 것이었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각기 다른 시기에 그들로부터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서점의 문턱을 넘어 무수히 많은 책 속에서 파수꾼처럼 서 있는 서적상을 만나는 게 좋았다. 그곳에선 책장을 넘겨보고 냄새를 맡고 쓰다듬을 수 있으며, 정돈된 책들, 정돈 되지 않은 책들, 성공한 책들, 버려진 고아 같은 책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선반 등반가가 되어 종이와 먼지로 뒤덮인 산맥을 바라볼 때마다 깊이 숨을 들이쉰다. 북적거리는 것 같아도 서점은 넉넉한 공간을 준다. - P391

신비로운 숲 같은 안티고나 서점의 훌리아와 페피토는 자신들이 독서라는 약을 처방하는 주치의 같다고 했다. 집요하고 쾌활한 선원이 조종하는 배의 분위기를 풍기는 신화적인 파리스 서점의 파블로는 "카운슬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관점은 동일했다. 책-약국을 운영하는 일은 독자의 취향과 경향을 이해하는 것이며 독자의 감탄과 열정과 행복 혹은 불만의 이유를 파악하는 일이자 개인의 변덕과 집착의 영역에 잠입하는 일이었다. 또 매일 셔터를 올리고 장시간 일을 해야 하며 등이 아프도록 책을 옮겨야 했다. - P392

사실, 책의 파괴에 대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세상을 보는 기이한 방식(오아시스, 특이한 낙원, 샹그릴라, 로슬로리엔의 숲 등)임을 알 수 있다. 문자는 수 세기 동안 가혹한 박해를 받아왔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서점의 창문을 깨뜨리거나 불을 지르는 사람도, 금지하려는 격렬한 열정에 빠진 사람도 없는, 그저 평온한 방문객만 있는 평화로운 시대의 서점이 오히려 낯설다 - P396

아우스터리츠는 마침내 땅도 나침반도 없이 어디서나 길 잃은 쓸쓸한 행인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알게 된다.
그날 아침 서점에서부터 우리는 빼앗긴 정체성을 추적하며 유럽의 도시를 헤매는 주인공을 따라간다. 자크는 배우였으며 테레지엔슈 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어머니의 모습을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프라하에선 부모님의 오랜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낡은 사진을 복원한다. 그는 나치의 선전용 다큐멘터리를 천천히 살펴보고 자신의 기억에 상처로 남은 한 여인의 얼굴을 찾는다. 도서관, 박물관, 문서고, 서점을 뒤진다. 사실이 소설은 망각의 영토에 대한 서사이다. - P398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비교할 때(예컨대 책과 태블릿 또는 지하철에서 채팅하는 10대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수녀) 우리는 새로운 것이 더 미래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물이나 관습이 우리 안에 오래 머물수록 더 많은 미래가 있다. 평균적으로 최신의 것이 더욱 빨리 소멸된다. 22세기에도 수녀와 책은 있겠지만 왓츠 앱과 태블릿은 없을 수도 있다. 미래에도 탁자와 의자는 있을 것이지만 플라즈마 스크린이나 휴대폰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외선A로 태닝을 하지 않는 시대에도 겨울날 동지를 맞아 파티를 열 것이다. 돈과 같은 발명품은 3D 영화, 드론, 전기자동차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멈추지 않는 소비주의에서 소셜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다양한 경향이 사라질 것이다. - P400

새로운 것이 전통을 제거하고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류다. 미래는 늘 과거를 바라보며 진보한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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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작가에게 학교에 대한 기억은 폭력과 공포였다. 4세기 시인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는 손자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선생님을 만나는 걸 두려워 말거라.",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목소리로 가혹하게 꾸짖어도 적응하거라. 학교에서 채찍질 소리가 들려도 겁먹지 말거라. 매가 진동하고 네가 앉은 의자가 두려움에 흔들리며 고함이 들려도 동요하지 말거라." 아마도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한 이 말이 아이에겐 악몽 같았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고통을 잊지 못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일흔두 살의 나이에 이렇게 썼다. "죽음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중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린 시절의 공포에 기겁하여 죽음을 택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 P361

반면에 나는 헝가리 저널리스트 비로 라슬로(Biro Laszlo)의 천재적 발명품인 볼펜의 시대에 속한다. 라슬로는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금속으로 만든 공으로 새로운 필기구를 만드는 초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물웅덩이에 빠진 공이 구르면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 오는 도시에서 공을 차며 소리를 지르고 웃는 아이들과 공의 젖은 발자국을 상상해본다. 거기에서 내 어린 시절의 육각형 빅 크리스털 볼펜이 유래했다. - P364

약 38억 년 전, 지구에서 특정 분자가 모여서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가 생성됐다. 현생 인류와 매우 유사한 동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250만 년 전이다. 30만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불을 길들였다. 그리고 인류가 말을 정복한 건 10만 년 전이다.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익명의 수메르인 천재들이 점토에 기호를 씀으로써 음성의 시간적, 공간적 장벽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언어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5000년 이상이 지난 20세기가 되어서야 글쓰기가 대부분의 인구가 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기술이 되었다. 따라서 글쓰기는 아주 최근의 일이다. - P368

아이티 태생의 흑인 청년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는 1980년대에 미술관에 그래피티를 전시하기 전까지 노숙인처럼 살았다. 주변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시스템 속에서 자기확신을 표현하듯 그의 작품에는 문자가 폭포수처럼 스며있다. 그는 글을 쓴 뒤 더욱 잘 보이도록 몇몇 글자를 그어버리곤 했다. 그는 바로 그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의 깊게 읽도록 강제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 P369

흥미롭게도 그래피티(관련자들은 ‘글쓰기‘라고 부른다)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의 건물, 지하철, 벽, 광고판에 그려졌고, 뒤이어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파리, 런던, 베를린 등지로 퍼져나갔다. 정보 혁명이 실리콘밸리의 뒷마당에서 일어난 시기에 말이다. 새로운 기술 전문가들이 사이버 공간의 경계를 탐험하는 사이, 도시 청년들은 처음으로 벽과 차에 글자를 그리는 즐거움과 글쓰기라는 물리적 행위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키보드가 쓰기의 몸짓에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기에 대안 청년문화는 당시까지 소수의 즐거움이었던 캘리그라피를 열정적으로 발견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힘, 글자가 담고 있는 창의적 가능성, 글쓰기에 담긴 위험(이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행위였다)에 매료된 청년들은 손으로 쓴 알파벳을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는 방편으로, 또래에게 인정받는 방법으로 채택했다. 바로 지금 이런 전유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건 인류의 긴 여정에 견줘 글쓰기가 너무나 젊다는 사실로서만 설명된다. 글쓰기는 우리 종족의 마지막 떨림, 오래된 심장의 가장 최근 박동이다. - P36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에서 이 엄청난 혁신에 놀라지 않는 우리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불멸의 이미지, 사고의 진화, 그리고 말하고, 웃고, 웃는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문자라는 기적에 터무니없이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언젠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전혀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건 기호로 그려진 목소리와 말 없는 단어들의 기적이 있기 전의, 그리 멀지 않은 시대로의 회귀가 될 것이다. - P370

로마의 귀족들만이 그러한 호화로운 도서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니는 사람처럼 재산을 과시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시인, 현자, 철학자는 그 특권 집단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다운 책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식한 책 수집가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중에는 루키아노스의 『많은 책을 산 무식자를 비판하며』라는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책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하는 자는 책을 쥐에게 헌납해놓고도 그 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노예만 채찍질할 것이다. 책을 두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바에야 제 대로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편이 낫다. 그건 먹지도 않을 보리를 마구간에 놔둔 채 말도 못 먹게 하는 개나 마찬가지다." 이 모욕 의 걸작은 독서가 과분한 특권의 표시인 시대에 책의 결핍을 분노로 표출하고 있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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