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여름에 이르다. 그러니까 영원히 하지만 계속되는 거지." "하지만 혼자서, 영원히 하지만. 그게 좋겠냐?" 지훈의 말에 친구가 재치 있게 받아쳤다. "마음만 없으면 돼. 모든 건 마음의 문제니까." "몸의 문제는 아니고?" 검지를 들어 지훈의 가슴을 찔러대는 시늉을 하며 친구가 말했다. "몸은 무죄야." 지훈이 말했다. - P194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대학 시절, 담배 연기는 눈에 보이는 한숨이라서 담배를 피운다는 여자 선배가 있었다. 같이 담배를 피우며, 그거, 꼭 보여줘야 하나요?, 라고 물었더니 바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나만 아는걸, 그게 한숨이라는 거······ 어차피 나만 아는걸. 그때의 선배를 흉내내어 지훈이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다는 거······ - P196
"술 한 번만 안 마시면 비행기표 살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내가 지금 사업 계획서를 짜다보니까 말이에요, 권대리, 내년 봄에도 자네는 하나의 조직원으로서 취소를 선택하는 용단을 내려야만 할 것 같은데? 듣고 있나, 엉?" 부장 말투를 흉내내 지훈이 말했다. "월급에 목 매인 노예 인생이 별수 있나요? 취소하라면 취소해야죠." "노예 주제에 애당초 비행기표는 왜 끊어?" "아직도 꿈이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렇게 내 꿈의 일부를 타지 못한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거죠." 권대리의 말에 갑자기 지훈은 말문이 턱 막혔다. - P198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앨리스인가요?" 지훈이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Alice‘s Attic〉이란 단편영화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Alice‘s Attic. 지훈은 기억하기로 했다.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못 봐요." "네?"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이에요." 그녀는 웃었다. "아, 네." 지훈은 돌아섰다. 그러나 떠날 수가 없었다. 거기,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았던 자리, 조명이 꺼진 그 테이블에 고요하고 은은한 광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달빛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보지 못한, 그 빛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 P200
서른한 살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는 "튤립은 맨 먼저 너무 빨개서,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썼고, 무대의 모리타 도지는 죽은 친 구를 기억하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으며, 기억을 모두 지운다고 해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지훈은 전혀 몰랐을 뻔했다. 뿐만 아니라 겨울 서귀포의 눈송이와 봄 통영의 벚꽃과 여름 경주의 물안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어떤 여자를 생각하면 왜 어깨의 주사 자국과 등의 점들과 콧잔등의 주근깨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지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 P201
그 순간, 지훈은 언젠가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안나와 오토는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부모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되고 어느 날 안나가 오토에게 몰래 종이 한 장을 쥐여준다. 거기에는 ‘valiente‘라는 스페인어가 적혀 있었다. 스페인어 사전을 뒤져보니 그 단어의 뜻은 ‘용감한, 용기 있는, 멋진, 희한한‘이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 단어는 ‘이따가 밤에 내 방으로 와‘라는 뜻이었다. 잊지 말 것. 영화를 보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할 용기를 낸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 P203
꽃이 지는 건 꽃철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는 건,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에. - P206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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