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롱은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밖으로 나와서, 강을 보고, 바깥공기를 마시니 얼마나 좋은지. 부두로 가니 거대한 갈매기 떼가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들었다가 펄롱을 지나쳐 줄줄이 떠나갔다. 문 닫아버린 조선소로 먹이를 구하러 헛걸음을 하는지도 몰랐다. 마음 한편에는 오늘이 월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건 다 잊고 그냥 도로로 나가 평일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 P92

펄롱이 가기 전에 네드가 차를 끓였고 ‘콘서티나‘를 꺼내 몇 곡을 연주했고 다음에는 콘서티나를 내려놓고 눈을 감더니 「까까머리 소년」을 불렀다. 네드가 부르는 노래가 하도 처연해서 펄롱은 목덜미에서 털이 쭈뼛 솟는 느낌이었고 네드에게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청해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 P95

여자가 문을 닫자, 펄롱은 표면이 반들반들 닳은 화강암 디딤돌을 내려다보며 신발 바닥을 갈듯 그 위를 가로지르고는 고개를 돌려 어둑한 마당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마구간과 건초 헛간, 외양간, 말 여물통, 어릴 때 펄롱이 놀던 과수원으로 나가는 연철 대문, 곡물창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뜬 돌길.
펄롱이 트럭에 올라타 문을 닫기 전에 마당 불이 꺼졌고 공허함이 펄롱을 덮쳤다. 한동안 펄롱은 그대로 앉아 굴뚝 통풍관보다 더 높이 솟은 헐벗은 나무 우듬지, 바람에 움찔 거리는 나뭇가지를 지켜보다가, 갈색 종이로 손을 뻗어 민스파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거의 반 시간 정도, 어쩌면 더 오래 그렇게 앉아서 여자가 한 말, 닮았다는 말을 곱씹어 보며 생각 속에서 불을 지폈다. 생판 남을 통해서 알게 되다니. - P98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펄롱이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던 일 꾼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게으름 피우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윌슨이 말하곤 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딸들을 두 군데 무덤에 데려가 펄롱의 어머니뿐 아니라 미시즈 윌슨의 무덤에도 꽃을 놓게 하길 잘했다, 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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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장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타일이 깔린 복도를 따라 계속 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원장님, 저희 때문에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습니다." 펄롱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수녀원장이 말했다. "더러움이 있는 곳에 복도 있다는 말도 있죠." - P74

"딸이 다섯인가요, 여섯인가요?"
"다섯입니다, 원장님."
그때 수녀원장이 일어나 찻주전자 뚜껑을 열고 찻잎을 저었다. "그렇긴 해도 섭섭하겠지요."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섭섭하다고요?" 필롱이 물었다."어떤 게요?"
"이름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거요." 수녀원장이 심각하게 말했지만 펄롱은 그런 말을 오래 전부터 늘 들어와서 익숙했다. 펄롱은 몸을 살짝 뻗으며 신발 끝을 반들거리는 놋쇠 벽난로 펜더에 댔다.
"저는 제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았는데요. 그래서 안 좋았던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랬나요?"
"딸이라고 섭섭할 이유가 있나요?" 펄롱은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딸이었죠. 감히 말씀드리지만 원장님도, 또 원장님 식구, 제 식구들도 전부 마찬가지고요." - P76

"펄롱 씨 선원들이 이번 주에 시내에 왔었나요?"
"제 선원은 아니지만요, 저 부두에 화물이 들어왔었지요, 네."
"외국인들을 들이는 게 신경 쓰이지 않나 보네요."
"누구나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펄롱이 말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 - P80

그날 미사는 길게 느껴졌다. 펄롱은 딱히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멍하니 한 귀로 들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았다. 강론 동안에는 눈으로 「십자가의 길」 성화를 훑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성모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고, 두 번 넘어지고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히는 그림들. 축성이 끝나고 앞으로 나가 영성체를 받아야 할 때가 되었으나 펄롱은 벽에 붙어 서서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P89

펄롱은 벌떡 일어나 석탄통을 광으로 가져가 무연탄을 채우고 장작을 가지고 들어왔고 빗자루를 집어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그거 지금 해야 해?" 아일린이 말했다."이제 케이크 장식하려는데."
펄롱이 바닥에서 쓸어 담은 먼지, 흙, 호랑가시나무 잎, 솔잎을 스토브에 쏟아붓자 불이 확 타오르며 타다닥 소리를 냈다. 방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뜻 모를 무늬가 반복되는 벽지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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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 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53

"오늘 뭣 때문에 화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무슨 어려움 말야?"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 P56

다음 날 아침 펄롱이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을 때 하늘이 이상하게 가까워 보였고 흐릿한 별 몇 개가 떠 있었다. 거리에서 개 한 마리가 깡통을 핥으며 코로 밀었고 얼어붙은 보도 위로 구르는 깡통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벌써 까마귀들이 나와 줄줄이 앉아서 쉰 목소리로 짧게 악악거리거나 길고 유려하게 까아아아 울며 세상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냈다. 한 마리는 피자 상자를 뜯고 있었다. 종이 상자를 한 발로 누르고 미심쩍은 듯 쪼아대더니 피자 테두리를 부리로 물고 날개를 퍼덕여 후다닥 날아갔다. 어떤 녀석들은 말쑥하게 보였다. 날개를 접고 성큼성큼 돌아다니면서 땅 바닥과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뒷짐을 지고 시내를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젊은 보좌신부와 닮아 보였다. - P61

펄롱은 소박한 방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은 채 잠시 서서 머릿속 한편이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P64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 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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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한테도 산타할아버지 왔었어?" 실라의 질문에 오싹했다.
가끔 까만 머리카락에 눈빛이 똘망똘망한 딸들이 작은 마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 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펄롱은 결혼해서 같이 살던 중 아일린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아일린의 기개와 시퍼런 직감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 P32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P36

펄롱은 네드가 오전 크리스마스에 선물해 주었던 보온 물주머니를 생각했다. 그 선물을 받고 실망하긴 했으나 그것 덕분에 밤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꼈다. 다음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펄롱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끝까지 읽었다. 미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큰 사전을 이용해서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라며,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펄롱은 그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어희‘가 아니라 ‘어휘‘였다. 이듬해 펄롱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밀어서 여는 뚜껑을 자로도 쓸 수 있는 나무 필통을 받았을 때,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 - P36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P43

뜬금없이, 기술학교에서 나와 여름에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출근 첫날,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버섯을 땄음에도 손이 더뎌 다른 사람들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침내 라인 끝에 다다랐을 때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서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 P44

강 건너 언덕 위에 있는 수녀원은 위풍당당한 건물이었다. 활짝 열린 검은색 대문 안에서 길고 반짝이는 창문 여러 개가 마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앞쪽 정원은 연중 관리가 잘되어 잔디는 바싹 깎여 있고 관상용 관목이 깔끔하게 줄지어 자라고 키 큰 산울타리는 사각형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가끔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는데 그러면 기이한 녹색 연기가 솟아 바람 방향에 따라 강을 건너 시내를 가로지르거나 워터퍼드 쪽으로 흘러갔다.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자 사람들은 수녀원이 자아내는 모습이 그림 같다고,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고 말했다. 주목과 상록수에 서리가 곱게 내려앉은 데다가, 어째서인지 수녀원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새들이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늙은 정원사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 P47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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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9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 P9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부질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국수 그릇처럼 여기,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P10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 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 P11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P12

곤경에 처한 소장이 이따금 갈퀴로 폐지 사이에 길을 내고는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뚜껑 문 안으로 들이밀며 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탸. 거기 있나? 맙소사, 책에 한눈팔지 말고 좀 움직여봐! 마당이 종이로 뒤덮였는데 자넨 밑에서 바보 같은 짓거리에나 빠져 있긴가!"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P16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 P16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릎을 스치는 축축한 내 입술이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만 나는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자정까지 몸을 웅크린 채 있기도 한다. 잠에서 깨어 머리를 들면 바지의 무릎 부위가 침에 축축이 젖어 있다.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의자 나무를 같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 P18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열차의 차량들에도 화물을 실었고, 수많은 열차가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짐을 싣고 서방으로 떠나갔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마지막 차량의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기마상을 산산조각내려고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순간의 나처럼 다빈치 역시 거기 남아 그 끔찍한 광경을 주의깊고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겠지.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23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차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굉장한 화물을 싣고 떠났을 때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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