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닛은 일주일에 엿새를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학교에 가 있다. 말하는 속도만큼이나 빨리 쓰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읽고 숫자 계산도 한다. 펜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꼭 암탉이 발톱으로 흙을 헤집는 소리 같다. 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자기가 죽은 뒤에 장갑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은 햄닛이라고, 햄닛은 머리가 좋고 문리가 트였고 타고난 사업가고 식구 중 유일하게 분별이 있다고. 햄닛은 들은 기색도 않고 교과서 위에 고개를 숙이고 숙제를 한다. 불가에 모여 앉은 식구들 쪽으로 정수리를 향하고 있어 시내처럼 구불구불한 가르마가 보인다. - P96

라틴어 선생은 휼랜즈에 가지 않는 날이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버지한테 당장 안 일어나면 가죽을 벗기겠다는 소리를 듣는다. 일어나더라도 축 처져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푹푹 쉬고,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하고, 멍하니 빵 껍질을 씹고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작업장에서는 작업대 앞에 몸을 숙이고 여자용 장갑의 봉제선과 힘없는 텅 빈 손가락에서 무슨 감춰진 의미라도 찾듯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장갑을 원래 있던 상자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넣는다. 매잡이 허리띠를 꿰매는 도제 네드한테 하도 바싹 붙어 구경하는 바람에 네드는 신경쓰느라 일을 잘 못하고, 존에게 문만 열면 길바닥인데 쫓겨나고 싶냐고 한소리 듣는다. - P99

일라이자는 침묵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빠가 도무지 배우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 P107

필요하면 100피트 멀리에 있는 쥐의 심장박 동도, 숲속에서 돌아다니는 담비의 발소리도, 들판 위를 나는 굴뚝새의 날갯짓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황조롱이의 귀가 이런 소리를 쫓는다. 사백여 개의 사과가 놓인 자리에서 밀리고 흔들리고 움직이는 소리. 너무 커서 구미가 동하지 않는 크기의 포유동물이 내는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 손바닥이 근육과 뼈에 가볍게 놓이는 소리. 혀가 이를 차고 핥는 소리. 다른 재질의 천을 맞대고 비비는 소리. - P114

그리고 이제 이렇게 된다—이렇게 들어맞는 느낌.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느낌. 손에 장갑을 낄 때, 암양 몸에서 젖은 새끼 양이 미끄러져 나올 때, 도끼로 통나무를 쪼갤 때, 열쇠로 기름칠한 자물쇠를 돌릴 때가 떠오른다. 애그니스는 라틴어 선생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잘, 이렇게 딱, 이렇게 옳은 듯이 맞을 수 있지?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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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충격을 받고 따라 한다. 입에서 그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기묘하게 울린다. 여동생의 이름, 죽은 지 이 년도 채 안 된 동생의 이름이다. 동생이 흙에 묻힌 날 이후로 그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른다. 언뜻 비에 젖은 교회 묘지, 물방울을 떨구는 주목나무, 어두운 구덩이, 흰 천에 싸인 너무 작고 여린 몸뚱이를 받아들이려고 벌어진 틈을 본다. 그렇게 홀로 땅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조그마한 몸이었다. - P67

마을 여자들이 와서 죽은 여자를 씻기고 염해서 다음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은 울었다. 죽은 사람, 숲에서 나와 자기들 중 한 명과 결혼한 사람, 나무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 자기들에게 말을 걸지 않던 사람, 벗이 되어주겠다는데도 거부했던 사람을 아껴서가 아니라, 여자의 죽음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기 때문에 울었다. 여자들은 시신을 씻기고 머리를 빗기면서 같이 울었다. 손톱 밑 때를 빼내고 머리 위로 흰 천을 덮고, 죽은 채 태어난 작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시신의 팔에 안기며 울었다. - P75

너희 어머니는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었지. 네 엄마의 새끼손가락에 든—그러면서 노인은 옹이 진 손을 들어올렸다—사랑만 해도 다른 사람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컸어. - P82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숲으로 가서 나무에, 잎에, 가지에 대고 외친다. 나무딸기의 가시투성이 줄기를 손이 찢기도록 쥐고는, 일요일마다 단정한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가는 교회, 연기도 향로도 주문 같은 말도 없는 교회의 신에게 외친다. 신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내지른다. 당신, 당신, 내 말 들려요, 이제 당신하고는 끝이에요. 당신 교회에 가야 하니까 가긴 갈 테지만 지금부터는 거기에 있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흙이고 시신이고 전부 다 없어지니까. - P85

자라면서 애그니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마음을 뺏기고 그 손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특히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을 만지고 싶다. 새의 부리처럼 닫혔다 퍼졌다 하고 아귀힘이 집중된 곳이다. 거기서 사람의 재주, 능력, 본성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이 지니고 지켜온 모든 것, 붙잡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를 눌러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다는 걸 애그니스는 알게 된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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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나는 장갑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 뒤를 따라가며 입을 삐죽거린다. 잘린 손 같아, 수재나는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한숨소리로, 높은 건물 사이를 가르는 잘린 하늘 조각의 모습으로 밀어낸다. - P39

그래서 존은 혼자 술집에 간다. 일단은.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존은 해질녘처럼 어둑한 구석자리에 앉아 짧은 양초가 하나 놓인 탁자를 마주하고, 길 잃은 파리 한 마리가 불빛 안에서 맴도는 걸 지켜볼 것이다. - P41

햄닛의 아버지는 남자의 말을 듣는 대신 해가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사다리처럼 내려앉으며 비로 촉촉이 젖은 거리를 밝히는 모습,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케이크, 머리 위쪽에서 비누 냄새를 풍기며 펄럭이는 빨래, 그리고 잠시 아내의—묵직한 머리채를 틀어올릴 때 어깨뼈가 모였다가 다시 벌어지는—모습, 바늘땀이 풀린 자기 부츠의 앞코를 생각한다. - P46

휼랜즈의 창가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면 숲의 가장자리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숲이 가만있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는 신록의 광경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무성한 잎을 어루만지고 훑고 흩뜨린다. 나무는 바람의 손길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박자로 반응하며 가지를 굽히거나 떨거나 흔든다. 바람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양분을 공급해주는 땅을 훌훌 떠나려는 듯이. - P48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큰아들의 어떤 점 때문에, 말편자가 자석에 끌리듯 아버지의 분노와 실망감은 늘 큰아들을 향했다. 아버지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위팔 무른 살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더 힘센 다른 쪽 손으로 쏟아지듯 강타를 날릴 때의 느낌이 늘 그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위쪽에서 급작스럽고 매섭게 날아오는 손바닥의 충격, 나무연장으로 좋아리를 후려칠 때 거죽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어른 손의 뼈는 얼마나 단단하고 어린아이의 살은 어찌나 여리고 무른지. 덜 여물고 덜 자란 뼈를 꺾고 누르기는 어찌나 쉬운지. 온몸을 흠뻑 적시는 분노와 무기력한 굴욕감,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는 매질. - P53

휼랜즈의 창가에 서 있는 그는 떠나고, 들고 일어서고,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렬해 터질 것 같은 심정이다.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두고 간 접시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다. 떠나고, 달아나고, 다리를 놀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은 충동으로 뱃속이 가득차 있으므로.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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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대꾸도 없다. 햇볕을 받은 서까래가 살살 부풀어오르며 삐걱거리는 소리, 문 아래로 방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한숨소리, 아마포 커튼이 휘날리는 소리,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텅 비어 고요히 쉬고 있는 집의 뭐라 말하기 어려운 소리뿐. - P17

하늘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도 아이는 말하던 도중에 말을 멈춘다.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맞고 순간 벙어리가 되기라도 한 듯 정지해버린다. 곁눈으로 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먹던 중이든 읽던 중이든 숙제하던 중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중요한 일로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을 보듯 빤히 쳐다본다. 아이는 현실의 테두리, 주변 물질세계의 반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버릇이 있다. 몸은 방안에 앉아 있는데 정신은 자기만 아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정신 차려, 할머니는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탁 튕기며 소리친다. 뭐하니, 누나 수재나는 귀를 당기며 쏘아붙인다. 집중해, 선생님들은 호통을 친다. 어디 갔었어? 마침내 햄닛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집에, 식탁에, 식구들 사이에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주디스가 이렇게 속삭인다. 어머니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마치 햄닛이 어디에 갔다 왔는지 훤히 아는 것처럼 바라본다. - P19

삶에는 어떤 알맹이, 핵심, 중심이 있어서 모든 게 거기서 비롯되고 다시 거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 순간은 부재한 어머니의 순간이다. 아이, 빈집, 텅 빈 마당, 듣는 사람 없는 외침. 아이는 뒷마당에 서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얼러 재우고 첫걸음을 뗄 때 손을 잡아주고, 숟가락을 어떻게 쓰라고, 먹기 전에 수프를 후후 불라고, 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잠자는 개를 깨우지 말라고, 물을 마시기 전에 컵을 헹구라고, 깊은 물가에 가지 말라고 일러주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이 순간은 어머니의 중심 바로 그 자리에, 평생 남을 것이다. - P22

할아버지는 계속 종이를 훔치며 말한다. 종이가 젖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가느다란 검처럼 칼집에서 빠져나와 날카롭게 뻗는다. 햄닛은 분노의 칼끝이 방안을 더듬으며 상대를 찾고 있음을 느낀다. 수맥이 있는 쪽으로 뻗치는 어머니의 개암나무 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햄닛은 땅속 수맥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분노도 파르르 떨리는 수맥 탐지봉이 아니지만. 날카롭고 뾰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분노가 다가온다. 햄닛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 P27

애그니스는 연기를 내며 타는 로즈메리 한 다발을 벌집 위에서 살살 흔든다. 고요한 8월의 대기에 연기가 꼬리를 남긴다. 벌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애그니스의 머리 위에서 맴돈다. 가장자리가 없는 구름처럼, 계속해서 허공에 던져지고 또 던져지는 그물처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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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차르트 기념비의 그림자가 조용히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졌고, 페스트에 대한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에게는 빈이 그리운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오후 3시가 지나면, 이 도시에는 마르기트가 없을 것이고, 12월의 소심한 채광이 더 큰 슬픔에 잠길 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60

빈 중앙 묘지에 내리는 비는 후두둑 졸탄의 우산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꼼짝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넌 이십오 년 전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었단 말이니?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캐나다에 산다면? 졸탄은 그녀가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해 그곳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264

불쌍한 안나, 나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위해 울었다.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남은 자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듯, 안나는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그를 사랑했으며, 그의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복잡한 설명, 어쩌면 불가능한 설명 들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그저 존중한, 그런 여인의 소리 없는 퇴장이었다. - P267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가곡 「유럽 칼새」의 미출관본을 간접적으로라도 언급하지 않을까 책의 페이지를 대충 뒤적었을 때. 누런색을 띠고 너탈너덜해진, 동물 형상이 새겨진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꽂혀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갈피는 마침 슈베르트의 무덤이 나온 세피아색 사진이 들어 있는 페이지에 꽂혀 있있다. 그 즉시, 수술용 거즈가 풀어지며, 그의 모든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 P271

그는 주춧돌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려, 슈베르트의 비석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예져, 그러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 속을 헤매이며 걸었네,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저곳의 푸른 풀밭을 함께 거닐었을 때 남긴 발자국을 찾아." 그는 생각했다. 그가 노래를 알았다면,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의 징표가 하나라도 없을까?
내 고통마저 침묵할 때면,
무엇이 나에게 그녀를 기억토록 해 줄까?

라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노래를 불렀을 테지만, 마르기트만이 부여할 수 있는 생명력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 P273

그제야 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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