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긴, 정답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 P19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 P36
"일반 학교에 다녀 보니까, 그 아이들도 부모들과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활하고 있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아가 다시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귀찮다나?" "귀찮아?" 되묻자, 녀석이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데 좀 짜증이 났어." "왜?" 허공을 바라보던 노아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 P41
그래, 노아의 말처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 과는 없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상대를 원망하 기 전에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인과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 P42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 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 P42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 P51
"나는 네가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 P51
부모 면접을 보고 싶다면서 아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니. 개인적인 사정은 또 뭘까? 돈 문제겠지. 두 사람은 보정하지 않은 홀로그램처럼 말과 행동 또한 거침이 없었다. 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프리 포스터들이 정부의 혜택을 원하는 것과 결국은 같은 목적일 테지만,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진실을 애써 감추느냐 솔직히 털어놓느냐였다. - P57
누군가가 나를 꿰뚫고 있다는 기분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가 전부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진짜 상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인간들인데. - P61
"가끔 생각하고는 해요. 유전자를 무시할 수 없다면······ 저를 낳은 부모도 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아이가 생기자 그분들은 제가 자신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해 봤을 거예요. 결국 필요 없다고 판단한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지나지 않아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나라는 존재는 깨끗이 잊었겠죠. 저는 가시처럼 뾰족한 성격을 물려받았고요.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제 삶도 썩 편하지는 않았겠네요." - P75
바깥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과연 몇 명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몇 개라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궁금증인 걸까. 헬퍼는 기능도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헬퍼를 고르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이곳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처럼. 그런데 과연 완벽하게 딱 맞는다는 것이 존재할까? - P77
아무리 강한 힘으로 권력을 얻었다고 해도, 전 우두머리의 새끼를 물리치고 약한 상대를 짓밟는다고 해도, 승리의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 P89
"그럼 이곳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됐고요?" 나는 박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한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니까. - P91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 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 P91
때로는 부모이기에 나약하고, 부모이기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겠지. 거짓말도 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겠지. 노아의 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길을 안내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깨를 빌려줘야 하는 상황도 생기겠지. - P92
"네가 만약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 에드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너도 던컨이 그랬듯 공격적인 수컷이 되어 지금의 우두머리를 처단할 것 같니?" 박의 질문을 듣자 나는 문득 이 책의 저자가 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에게 ‘에드거(Edga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의 이름이 에드거잖아요. 에드거라는 이름의 어원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 뭐 그런 거래요. 이 녀석이 영리하다면 복수심 때문에 아론이나 던컨처럼 평생 불안해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에드거의 행복은 그야말로 녀석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 P94
자꾸 박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환영처럼, 빛의 잔상처럼······ 그래, 박도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 P99
진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쓸모가 있다. 그게 진실의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NC 출신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이득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곧 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104
"반가웠어. 너는 되게 어른스럽다. 어른인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이것 역시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모든 어른의 가슴속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의 가슴속에 발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열 살 아이가 살고 있는 것처럼. - P109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 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P111
우리는 양 떼가 아니기에,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 대로 우르르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P112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 P113
박은 꼭 노아에게 걸맞은 부모를 찾아 줄 것이다. 좀 욱하는 성격이 문제지만, 그 나름 생각이 깊은 녀석이다. 노아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가젤이나 얼룩말, 기린인지도 몰랐다. 부모를 만남과 동시에 뛰고 걷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 그럼에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기 버거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만약 진짜 인간이 그렇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어릴 적 상처나 아픔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가젤이라······. - P122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물학적 부모가 누군지 모를 뿐, 나는 상처 받은 어린 시절도 없다. 나는 감히 박의 아픔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박이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박과 최, 아키와 노아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떠들곤 했던 나 자신이······. - P142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를 결정하는 선택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닌가요?‘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NC 센터를 오해하듯이 나도 나만의 틀 속에 세상을 가둬 놓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그 너머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시선으로 무엇이든 멋대로 평가해 온 것이다. - P142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 P158
어쩌면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대리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문득 일전에 하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 에 만들어진 것들이잖아. ······그럼 기억이 형성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키워졌을까?‘ - P159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 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P159
"엄마와 나를 분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더 이상 엄마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어. 그럴수록 나는 엄마가 아닌 내 삶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겼어.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뭔데요?" "내가 엄마에게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듯이······." "······."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 P160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 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 P160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 P163
나는 테이블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걸 그리기 위해 해오름은 꽤 시간을 들였겠지. 재능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재능 같았다. 싸우고 다투고 매일같이 상처를 입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는 가족처럼 말이다. 아니,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무엇 아닐까. - P167
"사실은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저도 저를 모르는걸요." 나도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나에게 시간을 더 주는구나." 문득 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 - P169
일 년 내내 맑은 날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름과 비바람이 없다면 살아남을 식물이 있을까. 이 세상은 사막이 될지도 모른다. - P174
우리는 더 좋은 부모, 더 능력 있는 부모를 기다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나와 인연이 닿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탯줄처럼, 신비한 끈처럼 이어진 누군가를 말이야. - P175
부모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날 부모만큼은 진심으로 아이를 아껴 주고 경제적으로 풍족 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완벽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몇 번의 페인트를 거치면서 알게 된다. 우리도, 그들도, 조금씩 문턱을 낮추고 어느 정도 타협하는 심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 P184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박의 용기가 과연 그 자신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했다. 박이 없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했다.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 P185
박의 말처럼 어떤 시대든 차별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차별과 억압을 조금씩 부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발전이기도 하다. - P194
잘 닦인 고속도로를 놔두고 좁고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면 언젠가는 좁고 험한 길도 넓고 평평해질 것이다. 시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일일 것이다. 벌써 누군가는 돌멩이를 멀리 풀숲으로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 오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 P194
물론, 나도 앞날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러나 분명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 P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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