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는 때가 되면 초록색 토마토가 붉게 익듯이 전남편도 철이 들기를 기다렸다. - P133

"네가 나를 버려서 슬픈 것이 아니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다."라는 옛 노랫말이 있다. 사람들은 짐승처럼 잔인하다. 친분이 있는 의사가 병이 난 유럽밍크를 건강한 밍크들이 있는 우리에 넣은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건강한 개체들은 병든 녀석에게 달려들어 실컷 괴롭혔다. 사람은 어떤가······. 사람의 본능도 동물과 다르지 않다. 잘나가는 친구들은 내가 너보다 행복하다는 우월감에 젖곤 했다. 한편 패배주의 자들은 자신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걸 반기는 눈치였다. ‘내가 힘드니 너도 힘들면 좋겠어.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이런 식이었다. - P137

"인간은 암 앞에서 평등하지요. 젊고 예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에요."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아직은 그렇습니다." 의사가 슬프게 대답했다.
"신은 뭘 하시는 걸까요?"
의사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신은 이때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녀가 고통받는 걸 놓쳤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신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뿐 그 이후에는 혼자 바동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39

레나는 고급 미용실과 마사지 숍에 다니고 식료품은 스웨덴 매장인 스토크만에서 사며 옷은 에스카다에서 고른다. 세르게이는 아내에게 사랑밖에 줄 게 없었다. 반면 레나는 사랑 빼고 모든 걸 다 가졌다. 결과적으로 어떤가? 사랑 없는 부와 명예는 무의미하다. 사랑이라는 빛으로 비추지 않는 삶은 추위와 어둠 속에서 동요하는 잠수함과 다를 게 없다. - P140

UFO처럼 동그란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반짝거렸다. 현대식 전등갓이었다. 전등갓은 식탁 위에 매달려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중년의 남녀. 시간은 멈춰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 P141

불현듯 노벨라 마트베예바의 시가 떠올랐다.

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수탉은 마당에서 소리를 지르는구나
금방 잘라 낸 통나무의 절단면은 치즈 같구나
건조한 포플러스의 솜털이 영혼처럼 춤을 추는구나 - P146

그때부터 니콜라이는 돈을 물 쓰듯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지은 죄를 덮고 싶었다. 누가 돈을 달라고 부탁하면 오히려 좋아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손을 벌렸는데, 특히 예술 쪽 사람들이 심했다. 이를테면 가수들은 앨범 내는 데 필요한 돈을 부탁했고, 시인들은 생일 파티 비용을 원했으며, 연예인들은 이를 치료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손을 벌리곤 했다.
니콜라이는 단 한 번도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은 사라졌다. - P148

그녀가 떠난 이유는 사브라스킨과 있는 것이 좋고, 그가 없는 삶은 텅 빈 삶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들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각자 외눈 이었고, 둘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독립된 개체가 완성되었다. 한 쪽 눈만 있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시야가 제한된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미관상 안 좋다. - P155

그녀가 떠난 이유는 사브라스킨과 있는 것이 좋고, 그가 없는 삶은 텅 빈 삶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들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각자 외눈 이었고, 둘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독립된 개체가 완성되었다. 한 쪽 눈만 있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시야가 제한된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미관상 안 좋다. - P155

사브라스킨은 안젤라를 성장시켰다. 그는 ‘존재하기‘와 ‘소유하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존재해야‘ 한다. 반면 모든 것을 가졌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안젤라는 사브라스킨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브라스킨의 날개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의 작품을 조각했고,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 P155

"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안녕히 계세요."
짧고 명료하다. 니콜라이는 그 말을 읽자마자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부정했다.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불멸한다. - P156

"속상해요, 아님 참을 만해요?"
"당연히 속상하지.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
"그럼 이렇게 하시죠. 다섯 장은 킬러에게 주고 열 장은 이 사건을 수사하지 않도록 수사관에게 주는 거예요."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니콜라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알면서 그러시네. 배신자는 응당 벌을 받아야죠."
"벌이라니? 난 기독교도라고."
"그럼 교도답게 사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P157

심장과 팔이 아팠다. 삶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짧았다. 그는 자신이 젊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구세대 사 람이었다. 태양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단어를 만들어 썼다. 앞으로는 늙는 일만 남았으니 아등바등 애쓰면서 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자리를 비워 줄 때가 된 거야.‘라고 생각했다. - P158

니콜라이는 아내 레나에게 칼을 댔다. 그는 그래도 되고 안젤라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모두가 할 수 있거나 그 누구도 할 수 없어야 공평한 법이다. - P159

호텔 복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친다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물론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얼굴을 잃는 거였다. 남편을 잃을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잃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 P160

"나는 아직 건재해. 젊고 재능 있고 게다가 부자라고. 돈 많은 남자는 늙는 법이 없어. 난 아직 짱짱해."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나이는 못 속여." - P162

니콜라이는 가사를 알아보았다. 레르몬토프의 시였다.

거대한 절벽의 가슴속에서
황금빛 먹구름이 하룻밤을 청했다네
먹구름은 화창한 날 이른 아침
신나게 떠났다네

하지만 늙은 절벽의 주름에
축축한 흔적이 남았고
절벽은 홀로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텅 빈 사막에서 조용히 흐느낀다네 - P162

니콜라이는 울기 시작했다.
레나가 문지방에 서서 말했다. "당신 지금 안 멈추면 죽을 수도 있어······."
니콜라이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저세상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등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사실 그의 삶은 빈곤, 부, 사랑, 미움 그리고 무관심 등 다채로운 편이었다. 앞으로도 일, 돈 그리고 여자 등 지금껏 해 온 대로 반복될 터였다. 거대한 절벽의 가슴에 또 다른 먹구름이 하룻밤을 청하고 떠날 것이다······. - P163

니콜라이는 찬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서 몸에 끼얹으며 샤워했다. 그리고 물기를 닦았다. 몸은 뜨거웠고 그는 몸속 세포 하나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인은 도망갔지만 불알은 붙어 있지 않은가.‘ 사지도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돈 많은 남자는 늙는 법이 없다. 재능 많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돈도 많고 재능도 많았다. - P164

주치의 타이르 바흘룰로비치가 이런 병을 앓는 환자는 공격적이며 자기중심적이라고 설명했다. "뇌졸중으로 인한 신경과적 문제입니다. 곧 익숙해질 겁니다. 덤덤해지도록 노력해 보세요."
"혹시나 위험한 물건을 던지면 어떻게 하죠?"
"잘 피해야죠."
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맙소사, 이게 전문가의 조언이라니.‘ - P166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랬다. 니콜라이는 하늘과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색에 휘어지고 울퉁불퉁한 소나무의 팔다리가 일본 회화를 연상시켰다. 니콜라이는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이런저런 생각을 조금씩 하면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인생에서 오십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다. 그는 돈이라는 돌을 던지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아끼기도 하고, 물 쓰듯 쓰기도 했다. 그가 사랑한 사람도 있었고, 그를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배신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버림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흘러갔고,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 P169

지금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 그리고 여기 분홍색 줄기를 가진 소나무 한 그루······. 이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니콜라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데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멧돼지처럼 앞과 아래만 보고 살았다. - P170

"쉽게 얻은 돈은 쉽게 사라지는 법이지." - P172

"열정과 악이겠죠. 열정 없는 악은 없으니까요." 스타스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안젤라는 순간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바닷가가 떠올랐다. 해변이 파헤쳐질 것이다. 허름한 흰색 집도 철거될 테고 마당도 사라질 것이다. 대신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속상해할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는 달에 의해서만 동요될 뿐이니까······.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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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녹색으로 빛나는 원형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보는 순간 습관적인 다급함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 집요하고 불합리한 의무감에 나는 몹시 씁쓸해졌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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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지금까지 이루어낸 것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됐지만 말이죠. 오래 전부터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금 현재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나였을 때 선택했던 삶을 계속 살 수밖에 없죠. 나는 평생을 일했습니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삼십 년을 바쳤어요. 그런데 정작 지금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 P219

날짜를 쓰면서, 문득 봄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아침의 정적을 뚫고 정원으로부터 들려오는 새들의 수줍은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녹음의 미로 속에서 헤맸던 학창 시절처럼 높고 낮은 새들의 지저귐에 빠져들었다. 일에 집중하기 위해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사람의 기분은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기분도 제대로 설명할 줄 모르는 노인들이나 사용하는 격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 P240

나는 과연 미켈레에게 살아 있는 여자인지, 아니면 그의 어머니처럼 벽에 걸린 초상화에 지나지 않은지 궁금했다. 아이들에게 나는 분명 벽에 걸린 초상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 초상화의 사악한 마력에서 절박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두렵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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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아이의 가능성을 눈으로 본 적이 없잖소."
"보이니까요. 재능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죠." 사브라스킨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니콜라이가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재능이라는 복사열은 사람 머리 위에 수증기처럼 올라가죠."
"제 머리 위에 그게 있는 것이 보이나요?" 니콜라이가 다시 질문했다.
"선생님이 배우의 재능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재능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입니다." - P126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바보가 찍는 영화에서 주연을 하는 것 보다 천재가 찍는 영화에 3분 출연하는 게 낫잖아."
"그럼 누가 바보죠?"
"여기저기 다. 안 보여?"
"그럼 천재는 누구죠?"
"누구긴 누구야, 나지······."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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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열정이 필요했다. 열정이 있으면 멀리 가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빨리 갈 수는 있는 법이다. - P102

니콜라이는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캄무날카는 젊은 사람들한테나 어울리지. 그들은 어디에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구랑 사느냐일 테니까. 젊은 시절이란 참 쉽게 행복해지는 때로군.‘
니콜라이는 안락한 삶에 익숙해져 버렸다. 가난은 생각만으로도 우울해졌다. 그의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캄무날 카의 기다란 복도를 걸을 때마다 이웃들이 자신을 향해 던질 ‘오, 늙은 사내가 나왔군······.‘ 따위의 시선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 P105

나타샤는 니콜라이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돈 많은 사람이니 그 정도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그게 뭐가 대수라고······. 돈이 뭔가? 종이 아닌가? 하지만 아파트는 부동산이고, 아파트는 테러의 위협만 아니라면 파괴될 염려가 없었다. 게다가 테러리스트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동네까지 찾아올 리 만무했다. 무슨 꿀단지라도 두고 갔거나 그들이 찾는 누군가가 숨어 있다면 모를까······. - P107

"새들은 뭐 아무 목적도 없이 노래하는 줄 아니? 걔들도 수컷을 부르거나 영역을 표시하려고 노래하는 거야. 사람들이 새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하긴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 들었으면 정말 끔찍했을 것 같긴 하다." - P114

나타샤는 아침부터 밤까지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를 안 볼 때는 양말을 떠서 좋은 가격에 팔곤 했다. 드라마에 등 장하는 인물들이 지인이라도 된 것처럼 낯이 익었다. 옆집 사람들 같았다. 드라마가 추구하는 점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염탐한다. 물론 가상의 삶이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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