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관심을 둘 만한 얘깃거리를 가진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디스는 늘 다른 이들이 따분함을 느끼는 일들 속에서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찾아냈다. 가끔은 그 재능이 선물처럼 느껴졌다.외로운 삶을 달래 주는 커다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선물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관심을 끌 만한 화젯거리를 늘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혼 여성들은 늘 육아나 쇼핑, 살림하는 얘기를 나눴다. 게다가 그들의 남편들도 귀가 솔깃해질 만한 얘기들을 들려줄 터였다. 하지만 미혼 여성은 처지가 달랐다. 사람들은 주디스가 집세나 생활비 등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 내용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 주변에서 전해 들은 사람들, 거리에서 봤던 사람들, 신문이 나 잡지에서 읽은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한데 모은 다음, 그 뭉텅이를 마치 한 바구니 속에 담긴 실타래들처 럼 꼼꼼히 살펴야 했다. 그렇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골라내고, 다시 그걸 잘 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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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뚱보는 분명 적어도 서른 살일걸. 주디스는 생각했다. 저 남자한테는 뭔가가 있어. 술고래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몇몇 엄마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 같은 것.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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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의 얼굴이 다가올 때 눈을 감았다. 똑같은 걸 먹었지만 그래도 나는 맞닿은 입술에서 오이 맛도 양상추 맛도 구별할 수 있다. 젊은 남자의 육체는 단단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부드러운가. 어쩌면 나는 이 녀석을 약간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밤 공기가 효모처럼 감정을 부풀렸는지도 몰라. 입술을 떼고 말없이 눈 아래 펼쳐진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얘와 헤어진다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이 순간의 느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 P168

내가 한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도 내게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반항과 너그러움의 대비로 본다면 틀렸다. 투쟁 없는 관계가 좋은 관계일까. 그건 평화가 아니라 결핍에 가까운 풍경이다. 정상적인 가족이란, 너무 많은 감정들이 원형을 찾을 수 없이 촘촘히 얽힌 낡디낡은 담요 같은 게 아닐까. 화를 내고 미워하다 후회하는, 상처 주고 후련해하다 후회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 담요는 차가운 유리섬유처럼 몸을 찌를 것이다. 뭐랄까, 나는 아버지의 화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감정의 균형이 너무 싫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한번쯤 뺨을 때렸다면 지금쯤은 지친 다리를 얼기설기 뻗을 수 있는 담요 같은 관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새삼스레 낡은 담요를 만들기엔 너무 늦었다. - P169

사랑의 비동시성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 P174

외로움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외로움이란 고독과는 달리 취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이는 느낌일 텐데. - P178

강아, 사람들은 인생을 통계 내기 좋아하지. 일생 동안 웃는 시간 얼마, 잠 자는 시간 얼마, 먹는 시간 얼마……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걸 알려주는 통계는 없어. 그건 각자의 몫이겠지. 일생 동안 행복했던 순간, 사랑 때문에 가슴 조였던 순간, 혼자 눈물 흘렸던 시 간, 그런 거. 강아, 그러고 보면 내가 나인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 무언가에 휘둘려 그것마저 놓쳐버린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도대체 뭐가 남을까…… 그리고 지금 네게 가장 중요한 건 이 리포트를 제대로 완성하는 일이야, 이 바보야.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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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혹시 베이킹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즐기고 있다는 게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루하다면 지루한 남은 인생에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늘어났다는 건 또 얼마나 좋은가. 밥 하는 건 의무지만 빵은 곁두리가 아닌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래서 여유가 있다. 게다가 부엌에 버터와 치즈와 초콜릿과 레몬 냄새가 풍기면 김치와 된장과 젓갈 같은 음식 냄새를 상쇄해주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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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까요?
질문을 하면서도 나 역시 그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막연히 내가 알고 있던 현규, 이전의 현규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까, 그런 마음과 동시에 이전의 현규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을 뿐이다. 이전의 현규, 원래 현규, 진짜 현규, 그런 게 있을까. 현규와 같이 살게 되면 그걸 알 수 있을까. 스물여섯 이전의 현규를 모르듯 지금의 현규 역시 나는 모르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의사들은 확정적인 대답을 잘 하지 않아요. 저 역시 기다려보자는 말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네요. MRI다, CT다, 환자들은 대단한 건 줄 알지만 결국 그것들이 찍어낸 영상은 그림자일 뿐이에요. 왜 판독이란 말을 쓰겠어요. 그림자를 더듬어 실체를 추측해보는 거죠. 명백한 실체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요. - P145

현규의 차 위로 농익은 버찌가 몇개 떨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이파리만이 검게 보일 뿐 버찌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도 저렇게 가려놓지 않으면 세상은 검은 비명으로 가득 차버리겠지. 우린 모두 바닥에 떨어져 터져버리기 전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시고 떫은 덩어리를 속에 품고 서 있는 나무 같은 거겠지. 말하지 않은 것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46

"어느 선승이 있었어. 도에 이르기 위해 금식을 하며 정진하다 가 사흘째 되는 날 그만 허기를 참지 못하고 죽을 먹어버렸대. 옆에 있던 그의 스승이 그걸 보고는, 숟가락을 들고 같이 죽을 떠 먹기 시작했어. 아무 말 없이. 한 사람의 번뇌와 고통은 몸속 어딘가 에 너무도 교묘히 감추어져 있어서, 꺼내서 보여줄 수도 누가 어루 만져줄 수도 없다는 걸 알았던 거지. 어린 제자가 그만 죽을 허겁지겁 떠 먹기 시작했을 때 옆에서 같이 죽을 떠 먹어주는 것, 그걸 해줄 수 있을 뿐이지." - P147

올려다본 하늘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 모르핀 앰플 때문인지, 성공적인 수술 끝에 숨을 거둔 쉰 세살 남자 때문인지, 꽃구경을 끝내 가지 않겠다던 게으른 연인 때문인지, 그 무렵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남교수 때문인지, 그날 내가 입었던 푸른 줄무늬 셔츠 때문인지, 꽃그늘 아래를 흘러다니던 인파 때문인지, 미정의 전화 때문인지, 어둑한 화면을 가득 채우던 만월 때문인지, 차창에 들러붙던 꽃잎 한장 때문인지 현규인들 알 수 있을까. 옆에 서 있는 현규의 등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 손바닥이 무얼 말하는지 읽어내는 건 현규의 몫이겠다. - P147

"하은아, 난 저 불빛들이 무섭다. 주차 관리, 자판기 관리, 말이 좋아 근로장학생.….. 여기서 이렇게 바스러지지 말고 떠나자, 하루에도 몇번 그런 생각 하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니란 것도 알아. 알바 뛰다보니 성적은 엉망, 이 성적으로 취직은 난망. 멀리서 볼 땐 이 도시가 화려한 유혹 그 자체였는데 들어와보니 슈퍼컴처럼 내 초라한 견적서를 뽑아주네. 내가 뭘 하는지 어디서 온 촌놈 인지 나란 인간의 값은 얼마인지…… 꿈은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유한 자의 아들은 권세 있는 자가 되고 권세 있는 자의 아들은 명예로운 자가 되는 거라고, 가난한 자의 자식은 더 가난하게 되어 먼지처럼 이 도시를 떠돌게 될 거라고 자상하게 가르쳐주네." - P165

"낮에 그 문자 받고 얼마나 네 생각 많이 했는데. 말해줘? 이제 식당 가서 두가지 메뉴 시켜서 나눠 먹는 즐거움은 끝이구나. 물냉 면과 비빔냉면 주문해서 매운 것 먼저 먹고 시원한 육수 마실 때의 그 행복감, 짜장면과 짬뽕을 나눠 먹던 풍요로움, 치즈김밥과 떡볶이, 라떼와 프라뿌치노. 둘이 나누어 먹던 그 맛있는 것들. 결국 이 인간하고 헤어지는 것 자체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는 존재론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 거지."
으, 흐흐. 유강의 웃음은 잘게 토막 난다. 차가운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휘저어놓은 것처럼, 웃음 끝에 쓸쓸함이 부유물처럼 떠올랐다가 얼마간 녹아들고는 다시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 느낌도 나쁘지 않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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