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SNS로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모양인데 난 그게 못마땅해요. 외로움은 사람만이 느끼는 일종의 천형 같은 건데, 그걸 감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발칙해요. 감히 휴대폰 하나로외로움이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가소로워요.
외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데 말이에요. 나는 거짓으로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 ‘한현우의 커튼 콜: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인간 김창완‘, 「조선일보 (2012. 5. 5.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신은 하나의 덫이지만, 그 덫은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깊게 만들어 주고, 동시에 가볍게 만들어 줄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온 힘을 바치는 일은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파괴하는 일이 되어선 안 됩니다. 헌신은 먼 훗날 언젠가 현재의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나를 잠시 포기하는 이 시간이언젠가 더 큰 나와 만나는 길이었음을 확신하는 전망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밝고도 기쁜 약속의 목소리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데까지 몰아붙이는 헌신은, 이미 헌신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가까울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헌신이라는 말의 무게감, 그 말을 실천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한다면,
언어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언어를 배반할 뿐입니다. 헌신은 세상에서 지극히 오염되기 쉬운 관념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가치를 품고 있는 미덕이라 믿고 있어요.
오직 그것이 한 사람을 무겁게 만들지 않을 때에만, 한 사람의영혼을 공기처럼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을 때에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는 설령 내가 좀 더 아프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가를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착한 마음을 믿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크리스티안 생제르는 "타인은 나를 가둔 덫으로부터나를 해방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헌신이란 어떤 순간 나에게소중한 타인을 위하여 나를 자발적으로 덫에 가두어 두는 일이며, 그것이 더 넓은 차원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믿는 미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전히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놀라운 측면인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끼어드는 바로 그 순간에 으레 생겨나게 마련인 저 거칠고 조악한 면모들이, 혹은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계기들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그 반대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이 지니고 있는 가장 뛰어난 능력일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악에 물든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악은 어디에서나 찾아오고, 또 어디로든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마법이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서로를 보며 경악해야만 했을지도모릅니다. 그랬다면 모두가 이미 "악한 상태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하나의 사실, 즉 우리 모두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비밀입니다. 악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법이며, 따라서 누구도 무언가를 가리켜 악에 물든 "상태에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려는 순간, 거기에는 이미 더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가 거쳐 왔던 경험들을또 저는 삶의 진정한 진일보는 결코 급작스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일보의 순간이란 늘 소리 없이 나타나는 법이며, 저 자신이 고요하면서도 절실하게, 지난날 제가 가장 내밀한 의미에서 스스로의 과제로 삼았던 여러 사물들에 천착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셈입니다.

"만약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우리로서는 끝내 붙잡을 수없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면,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만약 우리가 결코 사랑에 이를 수 없고,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죽음 앞에 무력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릴케의 모든 작품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시도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그의 답변은 언제나 명료합니다. 모든 삶은 (릴케의 초기작에 제시된 표현을 빌자면) "살아지는 것이며, 따라서 삶은 숙고와 성찰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되거나 측량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릴케가1915년 11월 8일에 로테 헤프너Lotte Hepner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인류가 지난 수천 년 동안 몰두해 왔던 질문에 대한 간결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릴케는 한편으로, 그토록 간단한 답변에조차 다다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여러 어려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며, 의식과 성찰 없이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데에 관심을 쏟고, 개개의 상황이나 감정에 굴복하며, 무언가가 일어나게끔 놓아두기 보다는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과 사람들에 일일이 반응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요?
여러 보잘것없는, 불안한, 작디작은, 그리고 부끄러운 하나하나가 마지막에가서는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 거듭나는 것 말입니다. 삶이란 아마 우리가 이해하거나 의도할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과 실패가 한데 뒤섞여 만들어 내는무언가일 것입니다."

릴케는 1913년 12월 9일 시도니 나드헤르니 폰 보루틴Sidonie Nádhermy von Boru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삶이 드러내는 저 이해 불가능성을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거리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삶이란 언제나 계속해서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이고, 또한 이따금 우리가 삶을 이해했다고 착각할 때마다, 삶은 오히려 그 거리를 더욱 벌리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던 모든 것이 별안간 멈추고 틀어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삶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섰다는 것을, 이질적인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릴케가 이해하고자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삶의 이중성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삶은우리 앞에 완전히 열린 채 주어져 있으며, 그저 그것을 살아가는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완전한 열림 속에서, 삶은 도리어 매 순간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각각의 순간속에서 삶이 제공하는 완전히 새롭고 생경한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붙들고 있었던 허망한 이해를 과감히 던져 버릴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양승권 지음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사를 자기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에 몰두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마취제라고 말했다. 기계적인 계획에 따른구속이 서서히 신체에 퍼져나가 각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고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해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한다. 그 결과 인간은스스로 순종적인 존재가 되어 조직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걸어둔다. 기계적인 활동, 규칙에 대한 생각 없는 복종, 그리고 시간의 분할을 통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개인을 개별화하고 기계적인 신체처럼 움직이도록 하여 조직에 더욱 순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간다.
노동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이라는 외투를 뒤집어 써 신성함을 가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신성해진 노동 앞에서 현대인들은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까워하며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조소에한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자기의 발견을 위한 시간은 내지는다. 니체는 사람들이 노동에 쓸 에너지를 정신의 성숙과 독립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같은 조직의 그물코‘ 안에서
자기 주도적인 사유는 진행되기 어렵고, 동일한 규격제품에 대한 동일한 욕망을 재생산 하는 좀비만 늘어날 뿐이다.

"고생해서 열심히 재물을 모으지만 다 쓰고 죽는 자는 없다.
그렇다면 굳이 고생해가며 재물을 모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노력하는데,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직위가 무슨 소용이있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따라다닌다.
오래 살면 살수록 근심과 걱정은 많아지는데, 장수하게 된다면그 고통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지락」

장자가 말한 유희의 경지는 자신을 억압하는 잘못된 현실 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것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고통이라는 걸림돌을 다른 방향의 디딤돌로 만든 것이다. 이런 유희의 경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지침을 준다.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을 때 이것을 내면으로부터 몰아내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밀어내면 낼수록 다른 원하지 않는 것들이 나에게 몰려올 수 있다. 왜냐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자체가 고통을 생각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잠이 더 안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벗어나려는 생각 대신 다른 성격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유희를 중시한다는 것은 절대 자유와조화의 세계를 자기 내면에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고통을 가라앉게 하면서 자기 내면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니체

모든 것은 가고 또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돈다. 모든 것은 죽고 또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흐른다. 모든 것은 꺾이며 다시 이어간다. 영원히 똑같은존재의 집이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만나 인사한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莊子
천지의 사시四時에는 소멸과 생장이 있고 만물에는 가득 참과텅 빔이 있으며, 밤과 낮은 서로 교대한다. 생명은 형체가 없는작용에서 싹터 나오고 죽음은 이 형체가 없는 작용으로 다시돌아간다. 처음과 끝은 마치 둥근 고리와도 같이 서로 영원히되풀이 되어 그 끝을 알 수 없다.
「전자방」

니체에 의하면,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생겨나고 또한첫거된다. 장자에게도 처음과 끝은 마치 둥근 고리와도영원히간이 순환하고, 만물의 변화는 예로부터 영원히 진행한다. 여기에서 존재는 매순간 다시 시작되며, 복귀의 목적도 복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매순간‘ 의 창조에 있다.
겨울이 긴 북유럽이나 북미 지역에는 아이스 호텔이라는관광 사업이 있다. 해마다 겨울이면 조각가들이 여행자들을 위해 강가의 얼음으로 호텔을 만든다. 봄이 되면 이 호텔은 물이되어 본래 있던 곳인 강으로 되돌아가지만 다시 이듬해가 되면새로운 아이스 호텔이 세워진다. 매년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다른 ‘힘에의 의지‘에 의해 매번 다른 모양의 아이스 호텔이 만들어지고, 이 호텔은 봄과 함께 모두 자신의 근원지인 강으로 다시 흘러간다. 영어에서는 ‘끝‘을 의미하는 ‘End’와 ‘그리고‘라는 의미를 지닌 ‘And‘의 발음이 같다. 똑같은 소리값을 지니지만, 하나는 끝을 의미하고, 다른 것은 계속을 의미한다. 우주에ind‘이란 없다. 계속 이어지는 ‘그리고 And‘의 연속이다. 우주에서 만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옛날의 진인眞人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아도 무너지는 일이 없고,
모자라는 듯하나 남에게서 무엇을 받는 일이 없고, 한가로이홀로 서 있지만 고집스럽지 않았다. 환한 웃음 기쁜 듯하고,
일은 어쩔 수 없을 때만 한다. 덕이 가득 차서 얼굴빛이밝게 빛나고, 한가로이 그 덕에 머문다. 넓어서 큰 듯하고,
초연하였으니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줄곧 입 다물기좋아하는 것 같고, 멍하니 할 말을 잊은 듯했다.
「대종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