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은 핵가족과 냄새와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삶은 계급이나 학연, 지연 따위로 구별되지 않는다.
욕망도 외모도 능력도 ‘초균질화되었다. 오직 냄새로만 구별된다.
코로나 역시 그렇다. 계급도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개의치 않는다.
오직 신체상태(혹은 면역력)만이 최종심급‘이다.
이 지점에서도 기생충과 코로나는 대칭적이다.
둘이 전하는 메시지도 서로 통한다. 사방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이 이런 미증유의 시간대를 건너가는
‘소박한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괴물」이나 「설국열차에 비하면 완전 정상가족이에요. 당연히 월세겠죠. 창문으로 보이는 세상이 바깥 세상의 전부입니다. 전봇대에 오줌 싸는 술주정뱅이랑 소독차. 그러고 보니 ‘오줌’하고 ‘소독’, 이것도 다 위생적 코드잖아요. 반지하는 더럽다, 다시 말해 가난을 ‘위생적으로 불결하다’, 이렇게 설정하는 거죠. 그 불결의 상징적 코드가 바로 꼽등이와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고요.
그 다음 박사장네. 이선균이 연기했던 박사장 집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창문이 있죠. 대저택은 창문이 큰걸로 구분이 되죠. 집을 지은 사람이 남궁현자 씨죠. 이름도 참 의미심장한 거 같은데. 어떤 ‘현자’가 만든 집입니다. 특징이 창문이 무지하게 넓은 거죠. 반지하와의차이가 딱 느껴지죠? 햇볕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그 창바깥에 뭐가 있어요? 정원에 나무와 잔디밭이 근사하게조성돼 있습니다. 그러니깐 부자라는 건 뭐예요? 집안에 자연물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거죠. ‘모던’과 ‘생태’의 조화를 꾀한다는 거죠. 이것도 사실 되게 어이가 없어요. 자연을 그렇게 무시하고 착취하면서, 부자는 집안에 숲이 있거나 정원이 있어야 하는거죠....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사라졌구나,
그걸 느꼈습니다. 정보는 너무 공평하고, 욕망도 동일해요. 그래서 구별하기 힘들어요. 딸 기정이가 대저택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그 쾌적함을 즐기는 걸 보고 오빠 기우가 말하죠. "넌 정말 여기서 살았던 사람 같애." 너무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정말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이미 인스타그램 이런 데서다 본 거예요. 어색할 수가 없지.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에 가면 일단 눈이 돌아가서, 바로 촌티를 풀풀 날릴 수밖에 없어요. 음식까지 얻어먹으면 마치 천상의 맛을 보았다는 듯이 거의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죠..
하지만 디지털 문명의 도래와 함께 정보의 공평화와 감각의 균질화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옷만 딱 갈아입고 나면 전혀 구별이 안 돼. 이게 너무너무 놀라운 거예요. 반지하에 살던 네 사람이 그 대저택에 다 잠입을 해서, 다 일자리를 거뜬히 점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기사를 쫓아낸다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느냐가 관건인데,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밀어내는 순간 바로 그걸 채울 수 있는 거죠. 그야말로 데칼코마니라 할 수 있죠

이게 참 세련된 거죠. 그러니까 절대 타자와 내가 직접적으로 섞이고 싶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인데,이거야말로 ‘니들’과 ‘우리’는 급이 다른 부류야, 라고선을 긋는 거죠. ‘절대 저들과 나는 섞일 수 없어. 그래서 싸우는 것조차 싫어. 싸우면 침 튀기고, 침 이쪽으로올지도 모르고, 악수도 하기 싫어’, 이런 사고방식인 거죠. 박사장 부인이 송강호랑 악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손은 씻으셨죠?"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게 디지털시대의 부자겠죠. 말 그대로 신흥 부르주아들. 세련되고, 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후하기까지 하죠. 그리고절대 상처 주는 말 같은 건 안 합니다. 왜? 신경쓰기 싫으니까. 신경쓸 가치도 없으니까. 아니, 이런 점도 작용한 거 같아요. 난 부자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휴머니즘도 있고 세련된 매너도 있다니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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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환상과 기도라는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일상사에 정신없이 빠져서 ‘기도‘ 라는 말
이 성가시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가 쉽고 당연해서 삶이라는 말과 거의 똑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그 중간 어디쯤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한 손으로는 우리의 귀중한 소유물을 잡은 채 기도하면서 그것이 지닌 미혹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겨우 의식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 우리는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깬 흐리멍텅한상태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나게 됩니다. 전쟁의 위기나 급작스런 가난, 병, 죽음 속에서 ‘인생의 부조리들‘ 에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중립적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고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많은 경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눈에 띄는 반응은 우리의 당황스러움에서 터져나오는 반발심입니다. 자신의 환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우리의 반항심을 기도로 바꾸라는 요구를 받는 때가 바로 인생의 힘겨운 순간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지만 우리를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일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에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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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그 사람이 이미 우리의 삶을 참으로 가득 채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들에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이 멀리 떠나 있을 때 더 깊어질 수 있듯이, 자녀는 집을 떠났을 때에야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을 배울 수있듯이, 또 연인들이 서로 오래 떨어져 있을 때 서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는 하나님의 부재라는 정결한 체험을 통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갈망에 귀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이 그 갈망을 지으신 분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자기 고독을 접하면서 자신이 이미 사랑의 손길로 만져졌음을 느낍니다. 사랑하고 싶은 끝없는 욕망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과 친밀함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친밀함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점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길을 끈기 있고 공손하게 기다리기 위해 마음을 계속 열어두기란 아주어렵습니다. 그 물음들의 타당성을 묻기보다는 빠른 해결책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손쉬운 치유를 약속하는 제안이라면 무조건 거기에 믿음을 두려는 경향이 너무나 강해서, 영적인 체험들이 아무데서나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으며 또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상품인 양 가지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하나님은 사람이 꾸며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와 ‘아직‘ 사이, 부재와 임재 사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의 심리적인 구별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기다리는 중에만 환상에서 서서히벗어나 시편 기자가 기도했듯이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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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 자신의 불길로 너 자신을 태워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먼저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거듭나길 바랄 수 있겠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말처럼 스스로를 불태워 없애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결단이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판단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반복적인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일들, 하찮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주변을 관찰해야 주위를 넘어서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못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223쪽). 가장 사소한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에 무지하고 예리한 안목이없다는 것, -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재앙의 초원으로만드는 것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사소한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일상을 비상하게 만드는 사건을 만들 수없다. "우리가 이 작은 잡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때문에 몰락한다(341쪽)." 《아침놀》의 435절에 나오는 말이다. 전복과 파괴는 일상에 대한 비상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무조건 뒤집어엎고 파괴하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건축과 시작이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은 왜 사물들을 보지 못하는가? 이는 인간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들을 은폐한다(342쪽)." 《아침놀》 438절에 나오는 니체의 말, 통찰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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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뛰어든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제 생각, 그제 생각, 내일 생각, 모레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오늘이라는 짐승은 자신을 잡으라고 다양한 헤르메스를 우리에게 보낸다. 그것은 태양일 수도, 바람일 수도, 꽃일 수도,계곡일 수도, 애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뛰어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알몸의 무게"를 감당한다면, 우리는 다른어느 날도 아닌 바로 오늘을 향유할 수 있다. 카르페 디엠‘ 혹은 ‘무상을 잡는 일은 이렇게 완성된다. 김선우 시인의 시 제목처럼 근사한 아침은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만들거나 커피를 마시려고 불을 켜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건 잠을 깨기 위해서이거나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이는 쓸데없이 성냥을 켠다. 불을 가지고놀거나 장난치기 위해서다. 불놀이나 불장난으로 불을 켜는 것에다른 목적은 있을 수 없다. 불을 켜는 행위 자체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의 성냥 켜기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다면 아이의 성냥 켜기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호모루덴스(Homo Ludens)』(연암서가, 2010)에서 노동과 놀이를 구분한 것도이런 이유에서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지 않으면 ‘노동‘이고, 반대로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면 ‘놀이‘라는 것이다.
휴가철이면 해변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삽이나 바가지를 들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해변에다양한 모래성을 진지하게 만들며 즐거워한다. 바로 이것이 ‘놀이‘
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모래성을 만들 뿐이다. 아이가 ‘놀이‘로 즐기던 모래성 만들기를
‘노동‘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엄마가 아이에게 "모래성다섯 개를 만들면 밥을 줄게"라고 명령하면 아이의 ‘놀이‘는 그 즉시 ‘노동‘으로 바뀐다. ‘모래성 만들기‘는 이제 ‘수단‘이 되고, 밥 먹기‘가 목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모래성 만들기‘는 더 이상 아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고, 아이가 마음대로 그만할 수 없는 ‘노동‘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북한산 꼭대기에서 출석을 부른다고 하면 학생들은 출석 체크를 위해 힘들게 산을 오를 것이다. 이들에게 ‘산행‘은 출석 체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곤혹스런 노동이다. 반면 이 학생들과 나란히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있다. 그들은 즐거워서 산행을 시작한 것이기에 힘이 들면 언제든그만둘 수 있는 ‘놀이‘로서 산행을 즐기는 것이다. ‘놀이 자유명랑‘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노동 의무 우울‘은 또 다른 계열을이룬다. 우리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삶을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는 삶을 지향할 것인가? 혹은 놀이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키팅 선생의 가르침대로 ‘오들을 잡은 것이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오늘을 잡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카르페 디엠!" 의 가르침은 오늘 하루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령인 셈이다.

"아름답다!" 하고 감탄하는 순간이 사랑이 싹트는 순간이라는사실도 중요하다. 벚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면, 벚꽃이 지는 순간 어떻게 애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고개 돌리지 않고 무상에 직면해야 자비의 마음이 싹트는 법이다. 그러니 매너리즘에서탈출하는 첫걸음은 세상의 무상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변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일 최소한 세 가지씩 변한 것을 찾아내자. 기온이나 바람이어도좋고, 흘러가는 뭉게구름이어도 좋고, 화려하게 꽃이 핀 나무여도좋고, 길에서 만난 고양이여도 좋고, 녹음이 짙어진 가로수여도 좋다. 아니면 아내의 얼굴빛이어도 좋고, 아이가 밥 먹는 모습이어도좋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여도 좋고, 직장 후배의 멍한 표정이어도 좋다. 어제와 달라진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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