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뛰어든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제 생각, 그제 생각, 내일 생각, 모레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오늘이라는 짐승은 자신을 잡으라고 다양한 헤르메스를 우리에게 보낸다. 그것은 태양일 수도, 바람일 수도, 꽃일 수도,계곡일 수도, 애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뛰어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알몸의 무게"를 감당한다면, 우리는 다른어느 날도 아닌 바로 오늘을 향유할 수 있다. 카르페 디엠‘ 혹은 ‘무상을 잡는 일은 이렇게 완성된다. 김선우 시인의 시 제목처럼 근사한 아침은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만들거나 커피를 마시려고 불을 켜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건 잠을 깨기 위해서이거나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이는 쓸데없이 성냥을 켠다. 불을 가지고놀거나 장난치기 위해서다. 불놀이나 불장난으로 불을 켜는 것에다른 목적은 있을 수 없다. 불을 켜는 행위 자체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의 성냥 켜기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다면 아이의 성냥 켜기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호모루덴스(Homo Ludens)』(연암서가, 2010)에서 노동과 놀이를 구분한 것도이런 이유에서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지 않으면 ‘노동‘이고, 반대로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면 ‘놀이‘라는 것이다. 휴가철이면 해변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삽이나 바가지를 들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해변에다양한 모래성을 진지하게 만들며 즐거워한다. 바로 이것이 ‘놀이‘ 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모래성을 만들 뿐이다. 아이가 ‘놀이‘로 즐기던 모래성 만들기를 ‘노동‘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엄마가 아이에게 "모래성다섯 개를 만들면 밥을 줄게"라고 명령하면 아이의 ‘놀이‘는 그 즉시 ‘노동‘으로 바뀐다. ‘모래성 만들기‘는 이제 ‘수단‘이 되고, 밥 먹기‘가 목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모래성 만들기‘는 더 이상 아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고, 아이가 마음대로 그만할 수 없는 ‘노동‘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북한산 꼭대기에서 출석을 부른다고 하면 학생들은 출석 체크를 위해 힘들게 산을 오를 것이다. 이들에게 ‘산행‘은 출석 체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곤혹스런 노동이다. 반면 이 학생들과 나란히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있다. 그들은 즐거워서 산행을 시작한 것이기에 힘이 들면 언제든그만둘 수 있는 ‘놀이‘로서 산행을 즐기는 것이다. ‘놀이 자유명랑‘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노동 의무 우울‘은 또 다른 계열을이룬다. 우리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삶을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는 삶을 지향할 것인가? 혹은 놀이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키팅 선생의 가르침대로 ‘오들을 잡은 것이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오늘을 잡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카르페 디엠!" 의 가르침은 오늘 하루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는 명령인 셈이다.
"아름답다!" 하고 감탄하는 순간이 사랑이 싹트는 순간이라는사실도 중요하다. 벚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면, 벚꽃이 지는 순간 어떻게 애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고개 돌리지 않고 무상에 직면해야 자비의 마음이 싹트는 법이다. 그러니 매너리즘에서탈출하는 첫걸음은 세상의 무상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변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일 최소한 세 가지씩 변한 것을 찾아내자. 기온이나 바람이어도좋고, 흘러가는 뭉게구름이어도 좋고, 화려하게 꽃이 핀 나무여도좋고, 길에서 만난 고양이여도 좋고, 녹음이 짙어진 가로수여도 좋다. 아니면 아내의 얼굴빛이어도 좋고, 아이가 밥 먹는 모습이어도좋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여도 좋고, 직장 후배의 멍한 표정이어도 좋다. 어제와 달라진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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