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초등학생 남자 조카가 둘 있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그 아이들은내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고진짜 내 모습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손주들을 위해 장수풍뎅이를 키우는 아빠.
맛있는 음식을 내 친구 몫까지 만들어 주는 엄마.
늘 옆에서 나를 챙겨주는 언니와 남동생.
‘가족이 있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할 일은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자주 함께 있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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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 선비의 독서법, 연암의 산문미학 정민의 연암독본 2
정민 지음 / 태학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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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이른바 도술이나 문장이란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지난날 하나를 듣고 하나도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앞서 아득히천리만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전에는 뻑뻑하여 어렵기만 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여겨진다. 옛날에 천 권, 만 권의 책 속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한두 권만 보면너끈하게 된다. 이전에 방법이 어떻고, 요령이 어떻고, 말하던 것이 이른바 방법이니 요령이니 하던 것이 필요 없게 된다.

하지만 깨달음의 방법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잡을 수도없고 묶어둘 수도 없다. 옛날에 성련成連이란 사람은 바다의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보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 가령 다시 어떤 사람이 성련의일을 부러워해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파도가 일렁이는 물가에 섰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대개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동안 깊이 생각한 힘으로 된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어쩌다 .
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권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낫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집으로 가서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도술과 문장을 사모하기보다, 우러러 한 번 생각해 보는것만 못하다.

부지런한 노력이 정밀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정밀함도 소용이 없다. 오성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난날 암중모색하며 헤매던 길을 활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막상 깨달음의 길은 방법도 없고 방향도 없다. 깨달음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어느순간 문득 열린다. 하지만 노력의 뒷받침 없이는 깨달음도 있을수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60~70쪽쯤 된다고 치자. 그중 정화精華로운것만 추려 낸다면 십수 쪽에 불과할 것이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정작 그 핵심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한다. 오직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손 가는 대로 펼쳐 봐도 핵심이 되는것에 저절로 눈이 가 멎는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단지 십수 쪽만 따져 보고 그만둘 뿐인데도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전부 읽은 사람의 배나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두세 권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백 권을 읽고, 효과를 보는 것 또한 남보다 배가 되는 것이다.

허공을 울며 나는 새를 새‘라는 단어 속에 가두는 순간, 그 새는 더 이상 날갯짓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는 지팡이 위에 조각해놓은 새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문자로 가두어진 지식이란 지팡이위에 새겨진 새의 조각과 같다. 그러니 ‘나는 그런 죽은 새보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우짖는 저 새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읽겠노라고 연암은 말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점은 「소완정기素玩亭記」에서도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라고 하여 거듭 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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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세계는 가없고, 가야 할 길은 끝없다. 갈림길을 만날때마다 다른 한 길을 그저 지나치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궤적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면, 그래도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인연들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지 싶다. 이제 한 시절을 털고 다시 나서는 길에서 어떤 숲과 오솔길을 지나 어떤 뜻하지 않은 인연과 마주하
게 될는지 궁금하다

예전의 책 읽기는 큰 소리로 리듬을 맞춰 되풀이해 읽는 성독聲讀이 기본이었다. 소리 내서 읽는 것을 ‘독서讀書‘라 했고, 그저 눈으로만 읽는 것은 ‘간서看書’로 따로 구분했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어 아예 입에 붙고 귀에 젖도록 읽었다. 어찌 보면 매우 소모적으로 보일 법한 이 같은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독서법이었다.
이 경우 독서는 의미보다 소리로 먼저 왔다. 배움을 처음 시9
작하는 아이들은 뜻도 모른 채 읽기부터 시작했다. 서당에서 배운 글을 집에서 마저 다 외우고, 아침에 서당에 가서는 책을 앞에두고 돌아앉아 외웠다. 이것이 배송背이다. 이렇게 무조건 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가 들어왔다. 한자는 일종의 외국어였으므로 반복해서 읽어 아예 통째로 외우는 방식은 나름대로 효과적인 측면이 있었다.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에 미쳐서 그 풀이와 해석을 살펴 말의 뿌리를 캐고, 그 지엽적 의미까지 모아야 한다. 여기에 더해 『통전通典』이나 『통지通志』, 『통고通考』같은 책에서 ‘조제‘의 예법을 살펴 차례대로 모아 책을 만들면 길이 남을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전에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네가 이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에 대해 완전히 능통한 사람이 되겠지. 비록 큰 학자라 하더라도 조제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너와 다투지 못하게 될 터이니 어찌 큰 즐거움이 아니겠느냐?
주자朱子의 격물 공부도 다만 이 같을 뿐이었다. 오늘 한 가지사물에 대해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캐는 사람도또한 이렇게 시작했다. 격格이란 말은 밑바닥까지 다 캐낸다.
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다 캐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보탬이 없을 것이다.

책은 많은데 읽은 것은 적다. 예전 배운 것은 몸에 익지 않았고, 새로 배운 것은 성글다. 눈이 한번 책 위를 지나기만 하면게으른 마음이 생겨난다.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배움은 점점더 거칠어져서 마침내는 새것과 옛것이 모두 없어지기에 이른다. 이것은 진실로 배움을 시작하는 젊은이의 일반적인 병통이다. 한 글자마다 한 글자의 뜻을 찾아보고, 한 구절마다한 구절의 의미를 따져 본다. 한 단락을 이같이 하고, 한 권을이같이 한다. 많기를 탐내거나 적음을 부끄러워 않는다. 다만정밀함에 힘써 절로 익숙해진 뒤에는, 한 책을 쓰면 나의 소유가 되고, 두 책을 베껴도 나의 소유가 된다. 이처럼 해 나가면열 권, 백 권, 천 권, 만 권의 많음에 이르더라도 나의 소유가아님이 없게 되고, 책과 내가 하나가 된다.

붕우 간에 모여 성인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서로 살펴 돕는것은 후학이 반드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혹 한가롭게 지내며혼자 있을 때는 논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고 의문 나는 것도 몹시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엄한 스승이나 좋은 벗과 맞닥뜨리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지 않아 꺽꺽하여 어느 한 가지도 궁금한 점을 펴지 못하고 만다.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근심이다. 마땅히 일마다 메모를 남겨, 이해하기 힘든 곳에는 그 의문 나는 점을 적어 놓고, 나름대로 얻은 바가 있는 곳은 그 말을 기록해 두어, 혹 훗날 강학의 거리로 삼는다. 혹 서찰로 질문하여 더불어 밝게 살핀다면 깊고 잘 드러나지 않는뜻을 얻는 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으로 집게 모양을 해서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글만 읽고 글쓴이의 마음과 만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독서라 할 수 없다. 사마천의 「자객 열전」이나 「항우 본기를 읽고서그 글 속에 담긴 사마천의 정신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그 문장력에 찬탄만 하는 것은 부뚜막 아래서 숟가락을 주워 놓고 무슨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숟가락 주웠다!"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숨죽여살금살금 다가가 잡았다 싶었는데 막상 나비는 날아가 버린 순간의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그 마음을 읽어야만 사마천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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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다는 거죠. 덕은 자기 문제를 극복하려고 만들어낸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덕은우리 삶의 조건이고,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들어야 하며, 강요된 덕성은 삶을 해친다는 뜻이에요. 이 문제는 요즘 우리가 여러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겪는 어려움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해요.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거나 유교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것이 덕성이 아니라면, 본래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래 덕성은 선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은 우리를 종종 현혹해요. 선이라고 하면 흔히 ‘도덕적 선‘이 먼저 떠오를 거예요. 하지만 선을 의미하는영어 good‘은 그저 ‘좋음‘입니다. 니체는 아주 간단하게 좋은 것은선, 나쁜 것은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실행하는 능력을 덕성(virtue)이라고 이야기해요.

세 번째 덕성은 절제(temperance) 입니다.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이죠.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절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대부분 환장하잖아요. 참기가 너무 힘들어요. 저는 요즘 오래된 습관을 끊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는데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실 때 케이크를 꼭 함께 먹는 습관이에요. 케이크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방법을바꿔서 케이크를 넷으로 등분해서 먹는 것만큼은 지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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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초인의 길동무일까요? 니체는 길동무를 함께 창조하고, 함께 수확하며, 함께 축제를 벌일 자‘라고 합니다. 똑같은 길을 간다는 뜻은 아니죠. 너는 너의 길을 창조하고 나는 나의 길을창조하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는 친구, 함께 고난을 겪은 후에 수확하고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리고 함께 축제를 벌이며즐길 수 있는 친구. 이게 정말 좋은 친구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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