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고 동시에 인간을 만든 역사는 생물학적 진화 속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인간은 안경을 만든다. 안경으로 본 세상과 안경을 벗고 본 세상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세상인가? 안경만이 아니다. 역사를 구성하는 매 시기는우리의 생각이나 사유에 영향을 주어 우리의 ‘봄‘을 결정한다. 조선시대 여성이 본 세계와 21세기를 사는 여성이 보는 세계는 확연히다르지 않은가. 거대한 역사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개별 인생사도마찬가지다. 젊었을 때 본 세계와 나이 들어 본 세계가 다르다는 건누구나 알게 된다. 어쨌든 보여진 세계에 이미 보는 자의 흔적이 짙게 드리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선글라스를 통해 본 세상은선글라스 렌즈의 색깔을 품고 있듯이.
문제는 불이 났을 때 붉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우리가 인문학적 반성과 성찰을 거듭해야 이유는 자명하다. ‘보는 자‘의 생각이나 관념이 그의 봄에 영향을 주어 그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삶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 수도있기 때문이다. 참나라니, 참나!」라는 시에서 김선우 시인은 이야기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나’, ‘죽어서도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생각은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선글라스와 같다고
맑고 차가운 계곡 물이나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수행도 빼놓지 않았으리라. 마치 다이아몬드를 감싸고 굳어버린 딱딱한 진흙을 물로 녹여 떼어내려 하는 것처럼. 비루한 나를 닦으면 ‘참나‘, 즉 ‘진짜 나‘가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찾다 찾다 구도자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런 것은 없다는 사실을, 참나와 같은 것은 단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 만든 환상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구도자의 마지막 깨달음을 김선우 시인은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참나의 환영에 속았음을 알게 됐습죠, 참나라니, 나참." 참나라는 유령에 속아 그걸 찾으려 했으니, ‘참나‘에대해 ‘나참‘ 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먹기도 하고 잠도 자야 참나를 찾는 수행도 할 수 있다. 먹지도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면 수행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참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구도자가 찾았던 참나는 먹지도 자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삶에 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 출발은, 먹어야하고 자야 하고 매번 훼손되는 삶이다. 그러니 꿈꾼다. 먹지도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움직여도병들지 않는 삶을, 불행히도 그는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혹은 섬에서 여전히 먹어야 했고, 자야 했고, 질병과 아픔을 치유해야만 했다. 간혹 ‘참나‘를 찾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훼손되지도 않는 영롱한 참나!"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아무리 바깥에서, 저잣거리에서 비루해졌다 할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 하는 존재다. 사실 자기 마음에 계속 침잠하거나 죽어서도 불변하는 영혼을꿈꾸거나, 참나를 찾는 과정은 자신에 집중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이 외면에 집중하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벚꽃의 아름다움, 고양이의 배고픔, 이웃의 고독,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 등등이 참나의 구도자에게 관조의 대상에 지나지 않게나 그의 마음에서는 아예 증발하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행스럽게도 참나의 구도자는 참나의 환영, 혹은 참나라는 선글라스를 벗어던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김선우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는 "이슬의 역설"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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