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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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이성애 남성을 뭐라고 부르나?
보통 ‘바람둥이‘, ‘카사노바‘ 정도의 표현을 쓴다. 여자가 이 남자저 남자를 만나고 다니면 뭐라고 부를까? 바로 ‘창녀‘라는 험한 말이 튀어나온다. 성과학자 에르빈 헤베를레 (Erwin J. Haeberle)는 파트너를 자주 바꾸는 남녀에 대한 이런 식의 다른 평가가 부권 사회시스템의 증거라고 주장한다.20 그런 식의 평가가 독립적인 라이스타일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수치와 불명예를 안긴다고 말이다. 이런 사실은 역으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이 사회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 한다.

그 말은 여성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이 사회문화적 요인탓이라는 뜻이다. 요즘 여성들은 달라진 사회 환경으로 인해 목소리를 다르게 사용한다. 저음의 목소리는 여성 인권 수준이 향상된결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사회가 여성을 조금 더 진지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물론 문화에 따라 차이는 있다. 가령 일본여성들의 목소리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거기선 아직도 고음의 목소리가 미의 이상으로 꼽힌다. 반대로 남녀평등 성적이 좋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여성들의 목소리가 세계에서 가장 저음이다.

주제를 아이로 옮겨 오면, 여전히 육아와 가사 노동, 돌봄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그러니까 무보수에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지못하는 노동은 여성에게 돌아간다. 어린이집 교사, 간병인, 간호사 등 직업이 여성적‘일수록 사회적 인정과 임금은 낮다. 이런 일에 뭐 하러 돈을 들인단 말인가? 집에서 엄마가 돈 안 받고 하는일이 비쌀 수가 없다. 흔히 여자는 남자보다 돈을 적게 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돈을 적게 버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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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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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맘‘ 이라는 말부터가 차별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워킹 대디‘나 ‘워킹 페어런츠‘라는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성역할 고정관념이 육아를 여성의 몫이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혼자 아이를 키우는 10대 싱글 맘은 무책임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말이다. 그럼 자식의 양육을 거부한 아빠는 어떻게 되는가? 똑같이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고 심지어 그 아이를 버린 아빠는 전혀비난받지 않는다. 같이 낳은 아이를 혼자 키우느라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구하고 능력 계발도 못 하는 여성에게 더 가혹한 도덕적비난을 퍼붓는 것이 과연 올바른 짓인가?

키처럼 어쩔 수 없는 신체 조건도 그렇지만, 공식적인 공간에서신체를 사용하는 방법도 성별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는다. 버스나전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 공간을 독점하는 습관은 특히남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런 쩍벌남 현상은 남성의 신체 구조나 자기만 편하겠다는 이기심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조건이나 이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공간이내 차지인가?‘라는 질문이다. 공간을 최대한 사용하는 남성들의습관은 유전자나 호르몬 탓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다. 그런데 한집단이 공간을 더 많이 사용하면 남은 집단의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몸을 웅크리거나 다리를 모으는 식으로 공간을더 적게 쓰려는 경향이 있다.

누가 공간을 차지하는지, 누가 공간을 차지해도 되거나 마땅히차지하는지는 성범죄와 관련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성범죄가 일어나면 여학생들한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방을 하려면 남자들을 집에 묶어두는 편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논리적인 지시일 터이다. 하지만 성범죄가 늘어나면 여자들에게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논쟁의 초점이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위험이 존재할 경우 잠재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리를 피해야 한다. 이런 식의 해결안은 당연하지도 않을뿐더러 교육적인 효과도 없다. 반대로 해야제재 조치가 진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반경이 줄어든 남성들이 범죄에 더 예민해질 것이고 그럼 지금처럼 범죄를묵과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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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무술림 테러 사건으로 인해 테러는 대부분 무슬림의 소행이라는 쪽으로 대중의 의견은 너무 빨리 움직인다. 하지만 이는 테러리즘의 정의 자체가 모호하고 논란이 많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없는 주장이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정신적 오류가 있다. 테러는 대부분 무슬림의 소행이라는 생각에서 도출된 무슬림 대부분이 테러리스트, 혹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결론은 명백한 오류다. 무슬람의 테러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얻는 유용한 방법 한가지는 지역의 무슬림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정보를 공유하는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이란 무엇인가? 호주와 폴란드를 포함하고, 서양에 속한 몇몇 나라보다 더 서쪽에 있는 이집트와 모로코 같은 나라는 제외하기 때문에 지리적 개념은 아니다. 베이나트가 지적했듯이일본, 대한민국, 인도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정치적·경제적 용어 또한 아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인종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약간의 유대교인이 포함된) 기독교인들이자 (라틴 아메리카는 제외되었으므로) 백인들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살펴보면 트럼프의 연설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는 내부에서 전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집단이나 가장 적대적인 조직도 유럽의 최약체 나라조차 무력으로 위협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연설은 정치적 분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에 대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온 이민자들대한 두려움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트럼프의 연설에 대해 베이나트가 내린 결론에 나도 동의한다. 트럼프의 관점으로 보면 미국은 본질적으로 서양 국가, 즉 백인과 기독교의 (잘해야 유대 기독교의)나라다. 미국에서 백인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 가면을 쓴 위협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사랑은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또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희망은 사랑에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분리하는 일이 이 사랑을 돕는다. 악한 행동을 비난할 수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다.
정치에서의 희망은 혐오를 멈추는 것부터 시작된다. 물론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상대의 온전한 인간성을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행동과 그 행동 뒤의 인간성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협력과 인류애를 가능하게할 사랑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 경험이 없는내성적이고 허약한 철학자가 아닌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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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고 동시에 인간을 만든 역사는 생물학적 진화 속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인간은 안경을 만든다. 안경으로 본 세상과 안경을 벗고 본 세상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세상인가? 안경만이 아니다. 역사를 구성하는 매 시기는우리의 생각이나 사유에 영향을 주어 우리의 ‘봄‘을 결정한다. 조선시대 여성이 본 세계와 21세기를 사는 여성이 보는 세계는 확연히다르지 않은가. 거대한 역사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개별 인생사도마찬가지다. 젊었을 때 본 세계와 나이 들어 본 세계가 다르다는 건누구나 알게 된다. 어쨌든 보여진 세계에 이미 보는 자의 흔적이 짙게 드리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선글라스를 통해 본 세상은선글라스 렌즈의 색깔을 품고 있듯이.

문제는 불이 났을 때 붉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우리가 인문학적 반성과 성찰을 거듭해야 이유는 자명하다. ‘보는 자‘의 생각이나 관념이 그의 봄에 영향을 주어 그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삶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 수도있기 때문이다. 참나라니, 참나!」라는 시에서 김선우 시인은 이야기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나’, ‘죽어서도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생각은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선글라스와 같다고

맑고 차가운 계곡 물이나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수행도 빼놓지 않았으리라. 마치 다이아몬드를 감싸고 굳어버린 딱딱한 진흙을 물로 녹여 떼어내려 하는 것처럼. 비루한 나를 닦으면
‘참나‘, 즉 ‘진짜 나‘가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찾다 찾다 구도자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런 것은 없다는 사실을, 참나와 같은 것은 단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 만든 환상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구도자의 마지막 깨달음을 김선우 시인은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참나의 환영에 속았음을 알게 됐습죠, 참나라니, 나참." 참나라는 유령에 속아 그걸 찾으려 했으니, ‘참나‘에대해 ‘나참‘ 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먹기도 하고 잠도 자야 참나를 찾는 수행도 할 수 있다. 먹지도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면 수행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참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구도자가 찾았던 참나는 먹지도 자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삶에 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 출발은, 먹어야하고 자야 하고 매번 훼손되는 삶이다. 그러니 꿈꾼다. 먹지도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움직여도병들지 않는 삶을, 불행히도 그는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혹은 섬에서 여전히 먹어야 했고, 자야 했고, 질병과 아픔을 치유해야만 했다. 간혹 ‘참나‘를 찾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훼손되지도 않는 영롱한 참나!"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아무리 바깥에서,
저잣거리에서 비루해졌다 할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 하는 존재다. 사실 자기 마음에 계속 침잠하거나 죽어서도 불변하는 영혼을꿈꾸거나, 참나를 찾는 과정은 자신에 집중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이 외면에 집중하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벚꽃의 아름다움, 고양이의 배고픔, 이웃의 고독,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 등등이 참나의 구도자에게 관조의 대상에 지나지 않게나 그의 마음에서는 아예 증발하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행스럽게도 참나의 구도자는 참나의 환영, 혹은 참나라는 선글라스를 벗어던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김선우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는 "이슬의 역설"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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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 - 인간은 어떻게 미지의 세상을 탐색하고 방랑하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홍경탁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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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장소와 맺은 관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이었다. 1장에서 보겠지만, 선사시대에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는 길을 찾아내는 능력 덕분에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인류보다 지구라는 행성의 구석구석까지 탐험할 수 있었다.
그러한 능력 덕분에 우리는 길잡이wayfinder라는 정체성을 획득했을 뿐아니라 추상적 사고, 상상력, 기억의 여러 측면, 그리고 언어까지 포함한 필수적인 인지 기능이 생겼다. 우리의 몸은 물론 마음도 공간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준다. 알츠하이머병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한 가지 이유는 알츠하이머병이 공격하는 뇌의 부위가 인지 지도가 형성되는 곳과 같은 곳이어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집에 있어도길을 잃어버리는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같은 부위에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우울증 및 정신이상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들은 흔히 ‘정신적으로 길을 잃은 기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심리학자들은 길 찾기가 그러한 환자들의 병든부위에 있는 뉴런의 성장을 촉진하여 증상을 완화할 것이라 믿고 있다. 길 찾기와 공간 인지 능력은 우리가 길을 찾고 주변 환경을 파악하게 도와줄 뿐 아니라, 정신을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

GPS 덕분에 여행자들은 전통적인 경로를 따르기보다는 직통으로 이어진 경로를 선택한다. 오래된 길은 사라지고 있다. 이따금 자연은 오래된 길이 여전히 쓸모가 있는 이유를 일깨워준다. 이누이트족 문화 전문가 존 맥도널드는 《북극의 하늘 The AreticSk)》에서 1990년대 이누이트족 출신의 젊은 사냥꾼 무리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한다. 그들은 연료가 바닥나자날씨가 갤 때까지 해빙 위에서 야영을 해야 했다. 단파 라디오로 도움을 청했지만, 주변에 몇몇 랜드마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구조대에게 그 이름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발견되었지만, 많은고난을 겪고 난 뒤였고, 집에 돌아와 마을 어르신들의 엄중한 훈계를들어야만 했다.

지명은 설명적인 표지나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지명에는 땅에 대한 애착심과 그곳에 사는 사람의 흔적이 담겨 있다. 아포르타는 이누이트 지명이 기억하기 쉬운 까닭은 단지 알아들을 수 있는 지명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지명이 특정지역에 소속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수의 서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24 배핀섬에는 피가아르비트 rigavit라는 곳이 있는데, (긴봄날을 즐기기 위해) 늦게까지 깨어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푸캄말루탈릭 Puukammalutalik이라는 곳에는 누군가가 주머니를 놓고 간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런 식으로 특성이 부여되면 밋밋하고 특징 없던 얼음 지역이 불현듯 집처럼 익숙해질 수 있다.

우리의 선조가 정착했던 수많은 풍경도 처음에는 생활하기에 불편하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장소를 친근하게 느껴야 하고,상징적으로 체계화하려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이것이 의미 있는소에 이름을 붙여서 보상하려는 열정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누이트식 표현을 따르자면, 그들의 "주변에 자신의 냄새가가득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지명에 부여하는 의미는 우리가 주변공간을 알고, 접근하고, 만지고 싶은 우리의 필요를 반영한다. 지명은우리가 현재를 탐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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