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에게 진짜로 일어난 일은, 그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며 하느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코미디언은 이를 그냥 알게 된 겁니다.
제가 한 주간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낸 한 여학생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그 반에서 가장 골칫거리 학생이었고, 공동체로 가는 길에서도 도무지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밤에 교회 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함께 간 보좌 신부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다만 이렇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분이정말로 계세요. 그리고 그분이 나를 생각하세요." 이건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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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난다 - 대림과 성탄 시기를 동반하는 묵상집
자카리아스 하이에스 지음, 최대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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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하는 것은 사람은 모름지기 ‘죽음의 기예‘를 수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물들을 떠나보내는 것, 내 삶에 있어서피상적인 것들과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또한 매일 같이 죽음이 찾아올 수 있으며, 누구도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알 수 없고, 우리가 내일 또 다시 새로운 날을 맞아 살게 되리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는 인식입니다. 몰약은 이런 맥락에서 매일의 삶의 기예를 가리킵니다.
곧 나의 삶이 오늘 끝난다 하더라도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 내 인생은 좋았다. 나는내 인생을 잘 살아 냈다!‘

사실 삶이 바로 이 순간 지나가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삶의 기쁨을 덜어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사람이 끝을 생각할 수 있을 때에야 매일 매일이 매우 소중해지고 다시 오지않는 선물이 됩니다.

어느 날 그에게 진짜로 일어난 일은, 그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며 하느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코미디언은 이를 그냥 알게 된 겁니다.
제가 한 주간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낸 한 여학생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그 반에서 가장 골칫거리 학생이었고, 공동체로 가는 길에서도 도무지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밤에 교회 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함께 간 보좌 신부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다만 이렇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분이정말로 계세요. 그리고 그분이 나를 생각하세요." 이건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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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음악서재, C# - 혼돈의 시대, 사색이 음악을 만나 삶을 어루만지다
최대환 지음 / 책밥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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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의 조건‘ 아래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유한함이자 유약함이며 이런 인간 존재를 살피고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데 종교와 인문학과 예술은 열쇠와도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필연적 법칙, 이성적 계획, 주체적 의지에 의해서만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시대의 흐름이, 타인과의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알지 못했고 원치 않았던 자리로 이끌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새로운 현실이 삶에 나타날 때, 이를 부정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그 현실이 마음에 드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것이든, 우리는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슬픈 일에 연주되는 경우가 많은이유는 첼로라는 악기의 어둡고 서글픈 음색과 더불어 이 곡이외롭게 하나의 악기만 요구한다는 사실로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라서 암울한소리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장조로 쓰인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경쾌하고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는 태평한 태도와 황홀한 유희 역시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그 뿌리는 춤이다.
P.19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찾아서》

오히려 나 자신의 조화로운 내면이 행복한 삶을해 더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측면입니다. 내면의 조화를 만들어갈 줄 모르는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동료들과 맺는 관계가 조화롭게 흘러갈 때야비로소 내 안에 조화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역시 정당합니다. 우리는 조화로운 내면과 조화로운 관계는 서로 ‘순환적‘ 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논리학이라면 이를 순환논법의 오류‘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사에· 서는 이 두 가지가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와 서로 엉켜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칼로 자르듯 구분해 선후나 인과관계를 따질 것이 아니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두 측면을 함께 아우르면서 가만히 바라보며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조화로운 인생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인간사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를 자주 순환논법의 상황에처하게 합니다.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알기 어려운 이런 난제들을 ‘아포리아‘라고 합니다. ‘난제‘를 뜻하는 아포리아는 길이 없음 (a-poria)라는 고대 그리스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아포리아‘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삶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지않습니다. 자신 안에 자리한 편향과 맹목성을 끊임없이 주시합니다.
사려와 신중을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진정 ‘아포리아‘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순환적으로 보이는 인생의 큰 문제를 만날 때 피하지 않고 정면대결을 감행합니다. 참된 철학자들은 ‘큰 문제‘ 와 씨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회적 환경과 타인들에게서 오는 외적인 요구들을 회피하거나수동적으로 끌려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동시에 눈앞의 일들에만 빠져서 소진되기 전에 자기 자신 안에 조화로운 내면이 자리하도록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배려를 위한 조화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나의 일상에 ‘조화의 영감‘이 때때로 찾아오는지 가만히 살펴봅니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 책들에서 얻는 지혜, 격조 있고 감동적인 예술, 사람들의 아름다운 선행의 마음, 무엇보다 가족과 벗들의배려와 사랑이 우리 안에 조화가 피어나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이런 질문으로 요약될지 모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화의 영감" 이 되고 있는가?‘

에라스뮈스는 ‘사계절의 사나이(Omnium horarumhomo)‘라는 이전부터 쓰이던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진지하면서 동시에 재미있는 사람이면서 다른 이들이 그와 기꺼이 어울려 지내길 바라는 사람을 두고 옛사람들은 사계절의 인물이라고 불렀다.

보에티우스는 스스로를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해 바다의 은유를 들고 있습니다. 바다는 때로는 잔잔하다가도 폭풍을 받으면 분노한 듯 말할 수 없이 요동하는데, 인생 역시 잠시 평탄함과 행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라도 뒤엎어질 수 있고, 사라져갈 수 있는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참된 평온함과 행복은 오직신이 보증하는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있는 ‘항구‘에서만 찾을 수있는 것이고, 인생은 그때까지는 위태로운 항해이기에 철학을 통해도야되어야 우리의 마음이 ‘잔잔한 바다‘가 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종교적 사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평온을 향한 갈망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 생각에 종교인이라면 평온이나 평화를인간이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여길거야. 자네의 환자들을 고통에 빠진 인간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많은 이들에게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를 할 기회를 더 많이누리게. 이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하늘이 내린 선물을 갖게 되는 거야.
- P158-159 《비트겐슈타인 회상록》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사랑의 자취를 소중하게 돌아보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고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처음 사랑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연인이든, 가족이든, 벗이든, 누군가 어떤 사람‘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사랑했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가진 사람은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이어갈 수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사랑 역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사랑을 선사하고,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이 향하게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사랑을 지키고 꽃피우는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좋은 삶이었는가는 우리의 사랑이 결정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 입니다.

진리의 준엄함을 직시하되 그 진리를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이해하고 그로부터 생기는 슬픔을 그려내는 것이 문학이라고요.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들이 알려주듯이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되,
슬픔과 아픔과 약함에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결벽하고 가혹한 마음이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약한 존재가 바로 나이고, 그대이고, 그녀이며, 그입니다. 문학이 그러한 인간 존재의 슬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듯 우리의 마음도 스스로를 품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와 겸손에서 힘을 얻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감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향하고 자신 안의 깊은 어둠을 직시하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합니다.

사실 힘든 시기엔 너나할 것 없이 자신만을 돌보게 되기 쉽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불행의 더 큰 이유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말없이 깨우쳐주며 그러한 불행의 길 대신에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됨을 지켜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시대는 그래도 희망이 남아있다 하겠지요. 자비로운 이들만이 세상의 희망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이남아있다면 그 시대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역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만큼 인생에서 위대한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세상의 허명에서 마음을 돌릴 줄 아는 ‘회심’을 필요로 합니다. 자비는 천성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헛된 욕심 들에서 마음을 지키려는 끈기 있는 투쟁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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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방황하거나 시름에 겨워한다면, 마음을 가만히 당신의 자리로 다시 데려와 주님의 현존 안에놓아두십시오. 그렇게 했다면 비록 당신이 마음을 하느님의현존 안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심지어 당신이 가져다 놓은 마음이 매번 다시 달아나 버린다 하더라도, 당신의 인생은 그것으로 이미충분히 완성되었습니다."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의 수사들은 베네딕토 성인이말했듯, "하느님보다 아무것도 중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각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기 위해서 매일 세 시간정도 성당에서 보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렇게 묻겠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게 생산적인 일일까요? 그 많은 시간이면 못 해낼 게 없겠네요."
하느님과 내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으로 향하는 마음을세상이 칭찬해 주기를 바랄 수도 없고, 이성적 사고방식으로 따지고 드는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매일의 급여나 시장 가치로 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전체가 도무지 시장 경제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하니까요.
비용과 효용의 논리는 하느님의 범주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늘 똑같은 상황에 놓이거나 같은 유형의일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럴 때 이렇게 자문하고는 합니다. "난 늘 왜 이러지? 왜 나에겐 항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하지만 난관에 부딪혀 돌아가는 길에서도 의미를찾을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경험에서 마침내 올바른 분기점을 발견하고 내 인생 길을 굳건히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또 다른 측면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우회로에는 어떤 과제가 담겨 있을까요? 이 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그곳엔 어떤 깨달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갈망과 깊이 만나고자 하며, 갈망을 밝게 비추는 표징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징을 감지하고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표징과 갈망이 현재의 내 삶을 흔들어 놓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혹은 ‘내가갈망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질문의 귀결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질문에 대한답에 따라 내 일상의 삶에 생겨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별의 표징들은 안락하게 잘 조율되어 있는 삶에서 자주 우리를 불러내고 돌려세우기도 합니다.

... 시작점에 나타난 것이 길을 걸을 때 역시나타납니다. 과감하게 길을 떠나는 자세, 시급하고 긴요한 변화에 열려 있는 자세,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기획하기 위한내적 준비 등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새로시작할 때 나에게 갈 길을 언제나 다시금 새로 시작하며, 나에게 갈 길을 가리키는 가장 깊은 내면의 갈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금 우리의 별을 향하는 것이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 별이 내 위에 떠 있는가? 나의 일상 안에 여전히 떠 있는가? 나는 그 별을 여전히 바라보는가? 아니면 나는 별과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말았는가? 길을 교정하는 것이 필요할까?
1

몇 년 전 93세의 나이로 선종하신저의 대모님(서양은 대부, 대모 양쪽을 세우는 것이 관습이다. - 옮긴이)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인생의 기쁨을 아셨고 의욕에 차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매일 매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셨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삶을 향유하셨으며, 자신이 인생에서 얻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셔서 그것에 대해 즐거워할 줄 아셨습니다. 인생의 끝이 다가온것이 확실해지자, 그녀는 생명 연장 수단을 거절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구나. 이제 모든 게 좋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이 계신 하늘로 가고 싶단다."

변화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 현자들이 배우고 익힌 것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구유 앞에서,
귀환의 여정에서, 그리고 다시 시작된 그들의 일상에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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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른징어는 방문한 집의 문에 흰색 분필로 새해를 맞이하는 축복의 말을 적어 준다. 그해의 연도를 나타내는 숫자를 앞의 두 자리와 끝의 두 자리로 나눠 시작과 끝에 적고, 앞의 두 자리 숫자 바로 뒤에 별을 상징하는 기호 ‘*‘를 적는다.
이 기호는 지방에 따라 ‘‘ 혹은 ‘-‘로 대치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뒤에 C,M,B를적는다. 이는 세 동방 박사의 이름 첫 글자인 카스파르, 멜히오르, 발타사르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이 집을 축복합니다" 라는 뜻의 라틴어 문장인 "Christus mansionem benedicat의 약자이다. 완성된 문장을 예로 들면, 2019년의 경우는 ‘20*C+M+B+19‘가 된다. 이러한 가정축복은 가톨릭 신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원칙적으로 사제나 부제가 향 또는 성수를 가지고 수행한다.

갈망은 어떤 길로 저를 이끌기 원하며 이끌 수 있는지를압니다. 갈망은 제가 추구했고 찾아낸 모든 외적인 요소들을 제가 분명하게 인식할 때까지, 그 여정 속에서 저에게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새로 출발하거나 크게 변하는 일들은 언제나 더‘라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더 정확하게는 삶 자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충만한 삶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의 본모습을 밖으로 피어나게 하고픈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비밀과 접촉하고 말을 거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하느님은 다시금 한 인간 안으로 개입하시고 그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분의다양함 안의 한 측면을 지니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신적인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저는 제 배낭을 짊어지고 걸었던 첫 번째 구간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날은 주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천천히 저의 첫 번째 순례길인 떼제 공동체에서 출발해 클뤼니 수도원에 이르는 12킬로미터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초반부터제 배낭이 얼마나 무거운지, 더 많은 시간을 걷게 되면 얼마나 더 무겁게 느껴질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집에서 체음 들어 봤을 때는 거뜬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웠던 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길은 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배낭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끼

저는 무게가 12킬로그램이 될 때까지 짐을 덜어 내 여러 박스에 넣어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겨우 딱알맞은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순례 여정에서 많은 것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가 매일 입는 옷외에 여벌 바지 하나, 수건 하나, 샌들 한 켤레, 속옷 두 장,
성서, 2리터들이 물통, 침낭, 비옷, 그리고 일기장. 1 은꼭 필요한 것들은 사실 순례 여정 중에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인도하고 이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배낭을 꾸릴 때, 길 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게 무엇인지 떠올려 봅니다.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빈자리는 어디일지, 인생의 배낭에서 무엇을 덜어 냄으로써 자유롭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빼놓을 수 없거나 빼놓고 싶지 않은 것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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