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방황하거나 시름에 겨워한다면, 마음을 가만히 당신의 자리로 다시 데려와 주님의 현존 안에놓아두십시오. 그렇게 했다면 비록 당신이 마음을 하느님의현존 안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심지어 당신이 가져다 놓은 마음이 매번 다시 달아나 버린다 하더라도, 당신의 인생은 그것으로 이미충분히 완성되었습니다."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의 수사들은 베네딕토 성인이말했듯, "하느님보다 아무것도 중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각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기 위해서 매일 세 시간정도 성당에서 보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렇게 묻겠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게 생산적인 일일까요? 그 많은 시간이면 못 해낼 게 없겠네요." 하느님과 내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으로 향하는 마음을세상이 칭찬해 주기를 바랄 수도 없고, 이성적 사고방식으로 따지고 드는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매일의 급여나 시장 가치로 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전체가 도무지 시장 경제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능하니까요. 비용과 효용의 논리는 하느님의 범주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늘 똑같은 상황에 놓이거나 같은 유형의일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럴 때 이렇게 자문하고는 합니다. "난 늘 왜 이러지? 왜 나에겐 항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하지만 난관에 부딪혀 돌아가는 길에서도 의미를찾을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경험에서 마침내 올바른 분기점을 발견하고 내 인생 길을 굳건히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또 다른 측면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우회로에는 어떤 과제가 담겨 있을까요? 이 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그곳엔 어떤 깨달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갈망과 깊이 만나고자 하며, 갈망을 밝게 비추는 표징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징을 감지하고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표징과 갈망이 현재의 내 삶을 흔들어 놓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혹은 ‘내가갈망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질문의 귀결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질문에 대한답에 따라 내 일상의 삶에 생겨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별의 표징들은 안락하게 잘 조율되어 있는 삶에서 자주 우리를 불러내고 돌려세우기도 합니다.
... 시작점에 나타난 것이 길을 걸을 때 역시나타납니다. 과감하게 길을 떠나는 자세, 시급하고 긴요한 변화에 열려 있는 자세,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기획하기 위한내적 준비 등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새로시작할 때 나에게 갈 길을 언제나 다시금 새로 시작하며, 나에게 갈 길을 가리키는 가장 깊은 내면의 갈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금 우리의 별을 향하는 것이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 별이 내 위에 떠 있는가? 나의 일상 안에 여전히 떠 있는가? 나는 그 별을 여전히 바라보는가? 아니면 나는 별과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말았는가? 길을 교정하는 것이 필요할까? 1
몇 년 전 93세의 나이로 선종하신저의 대모님(서양은 대부, 대모 양쪽을 세우는 것이 관습이다. - 옮긴이)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인생의 기쁨을 아셨고 의욕에 차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매일 매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셨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삶을 향유하셨으며, 자신이 인생에서 얻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셔서 그것에 대해 즐거워할 줄 아셨습니다. 인생의 끝이 다가온것이 확실해지자, 그녀는 생명 연장 수단을 거절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구나. 이제 모든 게 좋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이 계신 하늘로 가고 싶단다."
변화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 현자들이 배우고 익힌 것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구유 앞에서, 귀환의 여정에서, 그리고 다시 시작된 그들의 일상에서 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