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관을 형성한 것은 학업이나직무, 전 세계 일곱 대륙을 두루 돌아다닌 여행보다도 바로 이 체험이아니었나 생각한다. 운명은 나를 여러 직업에 몸담게 이끌었다. 모든직업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의사, 화가, 판사, 언론인, 사업가, 관상 수도승은 모두 서로 다른 곳에 초점을 두고 다른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고해 사제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현실을 인식한다.
‘성사적 차원‘이 없는 고해의 대화는 한낱 심리치료에 그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께서 슬픔과 혼란에 빠진 제자들과 동행하셨을 때처럼, 대화와 복음 정신 안에서 벗이되어 주는 인간적 만남 없이 기계적으로 행해지는 성사는 마술 비슷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세속적 낙관주의 ‘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
우리의 위기를 감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깊은 확신이다. 위기를 회피하거나 비껴가서는 안 된다. 위기가 우리를 겁주게 해서도안 된다. 위기를 헤치고 나갈 때만 우리는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다시 형성될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위기와 종교의 위기‘ - 이 말의 의미를 전통 종교 제도의 영향력과 안정성의 하락으로 받아들이든, 또는 세상과 신앙에 관한 기존의 종교 해석 체계가 지닌 설득력의 약화나 개인의 ‘영성 생활‘의 위기로 받아들이든 간에 - 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거대한 기회의 창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이 위기들은 우리가 깊은 데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도전들이다.
위기를 회피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태도를 일깨우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이바지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교의 문서들의 체계‘가 아니라 ‘메토도스 (methodos), 곧 길이다. 겟세마니의 어둠과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저승으로 내려가심‘을 피하지 않았던 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고해 사제들에게 맡겨진 권한, 곧 매고 풀 수 있는 권한, 세상에서 악과 죄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권한의 원천은 바로 파스카 신비‘다. 사죄경을 외울 때마다 가장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부분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라는 대목이다. 이 부활의 권한이 없다면 고해는, 그리고 화해의 성사 전체는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속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덜어 내며, 응어리를 풀어내고, 조언을하는 기회 그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술사나 정신분석 전문가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실화해의 성사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보다 훨씬 깊다. 화해의성사는 부활 사건들에서 오는 치유의 열매다.
이 개념(하느님에 관하여이야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지나 은유에 기대기 마련이니 이미지 또는 은유라 해도좋겠다‘)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 즉 부활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도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의견을 형성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근본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기" 위해 우리도 깊숙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 부활 신앙이란 제 십자가를짊어지는 용기와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심을 뜻한다. 부활 이야기가 들려주는 사건은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때에만 우리에게 기쁜 소식‘, ‘생기 가득한‘ 말씀이 될 수 있다.
부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두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2막으로 된 연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제1막에서는 아무 죄 없는 의인이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고, 제2막에서는 그가 부활하여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다른 하나는, 두 버전의 이야기가 동시에 벌어지는 단막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첫째 해석에 따르면, ‘부활‘은 행복한 결말이고 전체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 또는 행복한 동화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그런 식으로 사건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혼자 생각하거나(사람들은 이를 ‘신앙과 혼동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사람들은 이를 ‘신앙의 결핍과 혼동한다).그러나 실제로 신앙의 눈으로 읽는 방법은 둘째 해석인 평행‘ 해석이다
여기서 신앙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가 역설적이라는 깨달음(이야기의 다른 측면인 ‘부활‘ 사건은 앞 사건에 뒤따르는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그것의 재해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자기 삶의 이야기에 연결하려는 결심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으로들어가 그것에 비추어 자기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살아 내는 것, 그역설성을 간직하며 삶이 제시하는 역설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부활 이야기의 둘째 해석은 모든 것이 어떻게든 괜찮아지리라는견해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희망에 관한 것이다. 곧, ‘괜찮지 않다고드러나는 것들(결국, 삶 전체는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불치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과 그 무게를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버티며 시련을 견디면서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는 십자가의 신비를 취소하고 무효화하면서 우리 기분을 좋게 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하나인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부활 메시지를 선포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울부짖음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자칫하다가는 그리스도교 부활 신학 대신 얄팍한 "승리의 신화"를제시하게 될 것이다. 부활 신앙은 인간 삶의 비극적 측면들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포함한) 신비의 무게를 회피할수 있게 하거나, 희망을 붙잡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이들, 우리 세계
우리세계의 내적 · 외적 사막이라는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하는" (마태20,12) 이들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부활 신앙은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대신 일종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안일한 믿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사실 요즈음 사방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안일한 믿음은, 내가 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한전염병이다.
이 책의 한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개인이 참으로 세상을 신뢰하며 세상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 나름의 신‘이 되거나 불완전한 가치를 신격화(절대화)하는 ‘생활 방식‘은 ‘우상숭배‘ 이자 신앙의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다. 나는 신심이란 손대지 않은 삶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개인이 참으로 세상을 신뢰하며 세상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 나름의 신‘이 되거나 불완전한 가치를 신격화(절대화)하는 ‘생활 방식‘은 ‘우상숭배‘ 이자 신앙의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다. 나는 신심이란 손대지 않은 삶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가시적 세계의 날개 밑 어딘가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실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바탕이 되는 기초인 신비다. (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말하는하느님도 그러하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삶을 그분께로맞추어 나아간다면, 우리 삶 그리고 삶과 현실에 대한 우리 태도는 독백에서 대화로 변화되며,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해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를 일컫는다. 그 나라는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이나 일상의 경험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삶의 여러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교활함과 이기심과 폭력의 세계인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 보면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 자기 몫을 챙겨 놓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내어놓기를,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이들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유쾌하고 안락한 무관심 속에서 거리를 둔 채 냉정하고차분하게 언제까지나 태평하게 지낼 수 있을 때도 우리에게 되갚을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다른 사람들처럼 ‘불가능한 묘기들’, 극적인 기적들, 매력적인 환시들, 파격적인 이론들로 우리를 사로잡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본받기를, 우리가 불가능한 것들의 주역이 되기를 바라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또한 하게 될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14,12).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인 믿음과 사랑과 희망만이 인간의 눈으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도 이런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그의 여러 역설 가운데 하나에서 말하듯,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희망이란 "희망할 수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로마 4,18)이다. 그바탕에는 (성경 전반에 스며 있는) 나자렛 예수께서 선포하신 위대한 역설, 곧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라는말씀이 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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