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하고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고 해서 삼무(三無)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제주에는 삼보(三寶)가 따로 있다. 그것은 자연, 민속, 언어이다. 이 세 가지를 모르면제주도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이 세 가지를 쓰지 않으면 그것은 제주도답사기일 수 없다.

"본향당이란 제주사람들, 특히 제주 여인네들 영혼의 동사무소, 요즘말로 하면 주민센터예요. 제주 여인네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본향당에 와서 신고한답니다. 아기를 낳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가 났다, 돈을 벌었다, 농사를 망쳤다, 육지에 갔다 왔다, 자동차를 샀다, 우리 애 이번에 수능시험 본다, 우리 남편 바람난 것 같다, 이런모든 것을 신고하고 고해바칩니다.

할망(할머니)이라고 해요. 할머니에게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자애로움이 있잖아요. 어머니만 해도 다소 엄격한 데가 있죠. 여성은 소문 내지 않고 자기 얘기와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심리가 있거든요. 답을 몰라서가 아니죠. 그런 하소연을 함으로써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겁니다.

"이 흰 백지를 여기서는 소지라고 해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하얀한지죠. 본향당에서 소원을 빌 때 이 소지를 가슴에 대고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빌고서 저 나뭇가지에 걸어두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 모든사연이 소지에 찍혀 할망이 다 읽어본다고 해요."

사연이 많은 사람은 소지를 몇십 장 겹쳐서 가슴에 대고 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차원의 발원 형식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보냐. 본래는 글모르는 할머니들을 위해 생겨난 의식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글을 써넣은것보다 진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일본의 사찰에 가면 소원을 써서 절 마당에 걸어놓는 강까께(願)가 있고,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선 소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넣는다고하는데 우리 제주도에선 백지에 소원을 전사(轉寫)해서 걸어놓는 것이다. 팽나무 신목에 흰 소지가 나부끼는 와흘 본향당은 제주인의 전통과정체성을 웅변해주는 살아 있는 민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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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수업을 하는 참목표는학생에게 모든 시대와 실존"까지는 몰라도 그중 태반을 유람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관점을벗어 버리게 하는 것이다.

동화 나라는 손닿지 않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아련한의식을 자극하면서 아이를 동요시키며(평생 풍요롭게 해 준다),
현실 세계에 무디어지거나 눈감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세계에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더해 준다. 아이가 마법의 숲이야기를 읽었다 해서 진짜 숲을 멸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서 덕분에 모든 진짜 숲에 약간의 마법이 걸린다. 이것은 특별한 동경이다.

앞서 말한 부류의 학교 소설을 읽는 아이는 성공을 갈망하지만 (책이 끝나면) 불행하다. 자기는 그 성공을 얻을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화를 읽는 아이는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하다. 대개 사실주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생각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를 직접 대면하기가 내심 두렵다.
자신이 부족해서 플라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현대 해설자보다 이 위인을 이해하기 훨씬 더 쉽다. 괜히 위대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무지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몰라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지만, 플라톤 철학을 다룬 일부 현대 서적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늘 교수로서 각별히 후학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직접 지식이 간접 지식보다. 습득 가치가 높을뿐더러 대개 습득하기도 훨씬 쉽고 즐겁다는 것이다.

시대마다 특유의 관점이 있다. 특히 잘 포착하는 진리가 있고 특히 범하기 쉬운 과오가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시대 특유의 과오를 바로잡아 줄 책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고서다.

요즘 시대 책들은 그 내용이 옳은 경우에는 우리에게이미 어설프게 알던 진리를 줄 뿐이고, 틀린 경우에는 이미중병 수준인 우리의 과오를 가중시킬 뿐이다. 유일한 완화제는 우리 머릿속에 ‘역사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계속 쓰는것인데, 그러려면 고서를 읽어야만 한다.

물론 과거라고 무슨 마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인간은 지금만큼밖에 똑똑하지 못했고, 우리처럼 많은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지금과 똑같은 실수는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범한 과오와 관련해 아첨하지 않으며, 그들의 과오는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기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못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어느 한쪽이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둘이 똑같은 길로 잘못 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쉰 살 때도 똑같이 (종종 훨씬 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니라면열 살 때도 아예 읽을 가치가 없다.
허구의 작품 가운데나이가 들었다고 그만 읽어야 할 책이라면애초에 읽지 않는 편이 낫다.

"정상적인 하루란 곧 부컴의 원형대로 사는 날을 뜻한다.
(애석하게도 그런 날은 아주 드물다).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늘나는 거기서 살던 대로 살 것이다. 늘 정각 8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책상에 앉아 오후 1시까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겠다. 11시쯤 좋은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정각 1시에는 점심이 차려져 있어야 한다. 늦어도 2시에는 산책을 나가는데, 가끔 친구와 동행할 때를 빼고는 혼자 가겠다. 산책과 대화는 각기 아주 즐거운 일이지만 둘을섞는 것은 잘못이다. 야외 세계의 소리와 정적을 말소리가.....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함께 산책해도 되는 친구는 전원의 수많은 풍경을 느끼는 취향이 나와 똑같아서 눈빛을교환하거나 걸음을 멈추거나 끽해야 팔꿈치로 살짝 치는정도만으로도 서로 기쁨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만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단어를 죽이는 가장 큰 원인은 대다수 사람이그 단어로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찬반을 표현하려는욕심이 단연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는 점점 묘사에서 멀어져 평가에 가까워진다. 한동안은 그 평가에 왜 좋거나 나쁜지가 아직 살짝 암시되어 있지만, 결국은 순전히 평가만 남는다. "좋다"나 "나쁘다" 의 무익한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여행법과 다른 독서법도 있다. 현지 음식을 먹고 그 지방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외국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그곳을 관광객 눈에 비치는 타국이아니라 현지 주민의 나라로 볼 수 있다. 돌아올 때는 생각과 느낌이 이전과 달라져 있을 수 있다.

해외로 떠나는 휴가를 관광객으로서만 보내는 일은 내게는 유럽을 낭비하는것으로 보인다. 얻을 것이 그보다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지난 시대의 문학에 우리 자신의 얼굴만 비추어보고 만다면 그것은 과거를 낭비하는 것 아닐까?

아름다움이 책이나 음악 속에 있는 줄 알고 거기에 의지하면 돌아오는 것은 배반이다. 아름다움은 그 속에 있지않고 이를 통해 올 뿐이다. 결국 책이나 음악을 통해 오는것은 그리움이다.

친구가 아주 많다 해서 내가 인간의 탁월한 진가를 폭넓게 인정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내 서재에 있는 책을 다즐길 수 있다 해서 내 문학적 취향이 폭넓다는 증거가 아닌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답은 똑같다. "그 책들은 당신이선택했고 친구들도 당신이 선택했다. 그러니 당신에게 맞을 수밖에 없다."

폭넓은 취향의 독서란 헌책방 바깥에 내놓은 책에서도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낼 줄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인간에 대한 취향도 참으로 폭이 넓다면, 날마다 마주치는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낸다.

단언하는데, 모든 좋은 책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다시 읽어야 하네.

좋은 신발은 신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신발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독서는 시력이나 조명이나 인쇄 상태나 맞춤법따위를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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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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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고 나서 몇 주, 어쩌면 몇 달이 지나자 무기력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은 아니고 아주 오래전에 부모님이 나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지만, 그전에는 정말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 간에지구상에서의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의미 있다는 생각을나 자신에게 계속 각인했다. 그리고 만약 삶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삶이 더는 소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언젠가는틀림없이 죽을 테지만 지금은 살아 있고 그게 매우 운좋은일임을 되새겼다. 서서히 이런 생각들이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은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행복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이유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게 나에게는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 같았다.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것 사이의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정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 정보를 계속 머리에서 밀어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덜 밀어내게 되었다. 그게나에게는 성장을 향한 큰 걸음이었다. 그러려면 환상을 버려야 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덕에 더 깊은 현실감을 얻었으니 잘된 일이다. 사람은 살아남으려면반드시 나름의 방법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애착담요를 버리고, 세상의 무시무시한 경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란 얼마나 놀라운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납작하고잘 휘어지는 물건인데 그 안에 검은색 선이 꼬물꼬물우스운 모양으로 찍혀 있다. 그런데 그 물건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람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저자가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당신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다. 글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일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멀리 떨어진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책은 시간의굴레를 벗어난다. 책은 인간이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증거다.

내가 아버지한테로 시간여행을 하는 방법이 한 가지 더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대기 중의 공기 입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공기로 호흡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새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이 공기 입자 중 일부가 아버지가 들이마시고 내쉬었던 공기일 수도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공기를 들이마신다니얼마나 친밀한 행위인가.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자동으로, 불수의운동으로 숨쉬는 공기가 예수나 무함마드나 클레오파트라가 숨쉬었던 옛 공기일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세대가 마실 공기인 것이다.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지구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아직 진화하지 않아 생기지 않은생명체의 숨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의 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먼 미래이자 누군가의 오래된 과거이니까.

영어에서는 누군가 죽은 날이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을 뜻하는 간단한 단어가 없다. 이디시어로는 있다. 야르제이트ahrea라고 한다. 유대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야르제이트가 되면 24시간 동안 타고 꺼지는 특별한 초에 불을 밝히는 의식을 한다. 바로 불어서 끄는 생일 초와 역설적인 대비를 이루는 셈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야르제이트 초에 불을 붙여서 레이철 할머니, 틸리 할머니, 벤저민 할아버지와또 내가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서만 아는 다른 조상들을 기리는 전통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자라면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게 되자 나는 스스로 야르제이트 초를 밝히게 되었다. 이 전통이 특히 내 마음에 와닿는 까닭은 촛불이 오래전에 소멸한 뒤에도 빛이 남아서 반짝이는 죽은 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작은 불빛을 밝히면 마치 그들이 아직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별자리 때문에 피부색, 젠더, 인종, 성정체성, 종교 등에따라 차별받듯 차별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한 가지를 알므로 당신이 어떤사람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에서 여러 차별주의에 내재한게으르고 섣부른 가정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방에는 여러 언어로 이런 문구가 적힌 액자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이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당신의 미래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domesticate‘라는 단어는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 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집에 사는 것이 누구인가? 밀은 아니다." 하라리는 ‘농업‘이라고 하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에게 불리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제비뽑기에서짧은 쪽 막대를 뽑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물에게 속아 쉴새없이 농사를 지어 식물이 온 지구에 널리 퍼지고 번성하게 돕고 있는 것이다. 그냥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았으면더 낫지 않았을까?

캐런 암스트롱은 『신화의 짧은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화는 과거에일어났던 일이지만 또 항상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역사를 엄밀히 시간 순서로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신화는 역사를 넘어서는, 인간 존재에서영구한 것을 가리키며 우리가 무작위적 사건의 혼란스러운흐름 너머를 이해하고 현실의 핵심을 언뜻 볼 수 있게 하는예술의 형태다."

또한 『피의 장: 종교와 폭력의 역사』라는책에서는 "신화는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건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의 일상적 실존에 내포된 영구한 진실을 표현한다. 신화는 언제나 현재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축하하는 모든 명절, 생일, 독립기념일 등은 과거에대한 것인 만큼 현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 동시에 가장 오래된 패턴을 지속해서 반복한다.

대니얼 데닛이 『주문을 깨다』에서 "그리움에 이끌리고혐오감에 되밀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 앞에서갈등에 휩싸인다. 이 갈등이 도처에서 종교가 생겨나는 데핵심적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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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관을 형성한 것은 학업이나직무, 전 세계 일곱 대륙을 두루 돌아다닌 여행보다도 바로 이 체험이아니었나 생각한다. 운명은 나를 여러 직업에 몸담게 이끌었다. 모든직업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의사, 화가, 판사, 언론인, 사업가, 관상 수도승은 모두 서로 다른 곳에 초점을 두고 다른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고해 사제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현실을 인식한다.

‘성사적 차원‘이 없는 고해의 대화는 한낱 심리치료에 그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께서 슬픔과 혼란에 빠진 제자들과 동행하셨을 때처럼, 대화와 복음 정신 안에서 벗이되어 주는 인간적 만남 없이 기계적으로 행해지는 성사는 마술 비슷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세속적 낙관주의 ‘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

우리의 위기를 감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깊은 확신이다. 위기를 회피하거나 비껴가서는 안 된다. 위기가 우리를 겁주게 해서도안 된다. 위기를 헤치고 나갈 때만 우리는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다시 형성될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위기와 종교의 위기‘ - 이 말의 의미를 전통 종교 제도의 영향력과 안정성의 하락으로 받아들이든, 또는 세상과 신앙에 관한 기존의 종교 해석 체계가 지닌 설득력의 약화나 개인의 ‘영성 생활‘의 위기로 받아들이든 간에 - 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거대한 기회의 창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이 위기들은 우리가 깊은 데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도전들이다.

위기를 회피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태도를 일깨우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이바지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교의 문서들의 체계‘가 아니라 ‘메토도스 (methodos), 곧 길이다. 겟세마니의 어둠과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저승으로 내려가심‘을 피하지 않았던 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고해 사제들에게 맡겨진 권한, 곧 매고 풀 수 있는 권한, 세상에서 악과 죄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권한의 원천은 바로 파스카 신비‘다. 사죄경을 외울 때마다 가장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부분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라는 대목이다. 이 부활의 권한이 없다면 고해는, 그리고 화해의 성사 전체는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속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덜어 내며, 응어리를 풀어내고, 조언을하는 기회 그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술사나 정신분석 전문가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실화해의 성사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보다 훨씬 깊다. 화해의성사는 부활 사건들에서 오는 치유의 열매다.

이 개념(하느님에 관하여이야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지나 은유에 기대기 마련이니 이미지 또는 은유라 해도좋겠다‘)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 즉 부활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도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의견을 형성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근본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기" 위해 우리도 깊숙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 부활 신앙이란 제 십자가를짊어지는 용기와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심을 뜻한다. 부활 이야기가 들려주는 사건은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때에만 우리에게 기쁜 소식‘, ‘생기 가득한‘ 말씀이 될 수 있다.

부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두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2막으로 된 연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제1막에서는 아무 죄 없는 의인이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고, 제2막에서는 그가 부활하여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다른 하나는, 두 버전의 이야기가 동시에 벌어지는 단막극으로 읽는 방법이다.
첫째 해석에 따르면, ‘부활‘은 행복한 결말이고 전체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 또는 행복한 동화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그런 식으로 사건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혼자 생각하거나(사람들은 이를 ‘신앙과 혼동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사람들은 이를 ‘신앙의 결핍과 혼동한다).그러나 실제로 신앙의 눈으로 읽는 방법은 둘째 해석인 평행‘ 해석이다

여기서 신앙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가 역설적이라는 깨달음(이야기의 다른 측면인 ‘부활‘ 사건은 앞 사건에 뒤따르는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그것의 재해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자기 삶의 이야기에 연결하려는 결심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으로들어가 그것에 비추어 자기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살아 내는 것, 그역설성을 간직하며 삶이 제시하는 역설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부활 이야기의 둘째 해석은 모든 것이 어떻게든 괜찮아지리라는견해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희망에 관한 것이다. 곧, ‘괜찮지 않다고드러나는 것들(결국, 삶 전체는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불치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과 그 무게를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버티며 시련을 견디면서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는 십자가의 신비를 취소하고 무효화하면서 우리 기분을 좋게 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하나인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부활 메시지를 선포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울부짖음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자칫하다가는 그리스도교 부활 신학 대신 얄팍한 "승리의 신화"를제시하게 될 것이다.
부활 신앙은 인간 삶의 비극적 측면들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포함한) 신비의 무게를 회피할수 있게 하거나, 희망을 붙잡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이들, 우리 세계

우리세계의 내적 · 외적 사막이라는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하는" (마태20,12) 이들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부활 신앙은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대신 일종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안일한 믿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사실 요즈음 사방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안일한 믿음은, 내가 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한전염병이다.

이 책의 한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개인이 참으로 세상을 신뢰하며 세상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 나름의 신‘이 되거나 불완전한 가치를 신격화(절대화)하는 ‘생활 방식‘은 ‘우상숭배‘ 이자 신앙의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다. 나는 신심이란 손대지 않은 삶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개인이 참으로 세상을 신뢰하며 세상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 나름의 신‘이 되거나 불완전한 가치를 신격화(절대화)하는 ‘생활 방식‘은 ‘우상숭배‘ 이자 신앙의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다. 나는 신심이란 손대지 않은 삶의 신비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가시적 세계의 날개 밑 어딘가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실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바탕이 되는 기초인 신비다. (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말하는하느님도 그러하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삶을 그분께로맞추어 나아간다면, 우리 삶 그리고 삶과 현실에 대한 우리 태도는 독백에서 대화로 변화되며,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해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불가능한 것들의 나라‘를 일컫는다. 그 나라는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이나 일상의 경험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삶의 여러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교활함과 이기심과 폭력의 세계인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 보면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 자기 몫을 챙겨 놓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내어놓기를,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이들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유쾌하고 안락한 무관심 속에서 거리를 둔 채 냉정하고차분하게 언제까지나 태평하게 지낼 수 있을 때도 우리에게 되갚을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다른 사람들처럼 ‘불가능한 묘기들’, 극적인 기적들, 매력적인 환시들, 파격적인 이론들로 우리를 사로잡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본받기를, 우리가 불가능한 것들의 주역이 되기를 바라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또한 하게 될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14,12).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인 믿음과 사랑과 희망만이 인간의 눈으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도 이런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그의 여러 역설 가운데 하나에서 말하듯,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희망이란 "희망할 수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로마 4,18)이다. 그바탕에는 (성경 전반에 스며 있는) 나자렛 예수께서 선포하신 위대한 역설, 곧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라는말씀이 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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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라이벌리즘 - 다섯 가지 대결 구도로 읽는 진짜 중동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57
이세형 지음 / 스리체어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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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시리아 출신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어제 여행 이야기가 나왔을 때 네가 계속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라고 했잖아? 팔레스타인 출신 앞에서는 가급적 이스라엘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 게 배려하는 방법이야. 가령 예루살렘, 텔아비브 식으로 그냥 도시 이름을 말하는 게 좋아.
물론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거나, 기사나 논문 같은 전문적인글을 쓸 때는 상관없어. 정치적, 외교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이란과 터키는 좋든 싫든 늘 중동의 일부였다. 원래 거기 있었던 나라고, 다양한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1948년 전에 존재했나? 절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나아가 아랍권의 감정은 좋아질 수 없다. (카타르 외교관)

간단히 비유를 해보겠다. 우리 몸에는 많은 장기가 있다. 그중하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기분이 안 좋고, 화도 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완전히 없애 버린다거나 적대시할 수 있나? 없을 것이다. 원래 몸에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원래 아예 없던 세포, 가령 종양 덩어리 같은 게 어느 날 갑자기생긴다고 해보자. 그 자리에 자꾸 염증이 생긴다면 당신은 그걸 없애려고 하지 않겠나? 이란, 터키와 이스라엘의 차이는바로 이런 것이다.

사우디는 아랍 국가에 속하지만, 이란은 아니다. 페르시아의후예인 이란은 언어, 문화, 역사 모두 아랍과는 다르다. 중동에 대해 잘 모를 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실수 중 하나가 이란을 아랍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랍과 중동을 혼동하지만, 아랍과 중동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중동은 지역적 의미다. 보통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모로코, 남쪽으로는 아라비아반도의 남단, 북쪽으로는 터키에 이르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란 동쪽의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들도 범중동권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지리적으로 중동과 가깝고, 각종 중동 이슈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아랍은 민족적 개념이다. 아랍어를 쓰는 문화권의 국가들, 통상 아랍 연맹Arab League에 가입한 22개국을 의미한다. 중동 국가 중 이란, 터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이란과 터키는 국민 다수가 이슬람을 믿지만 아랍어를 쓰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국민 다수가 유대교를 믿으며, 역시 아랍어가아닌 히브리어를 쓴다.

이스라엘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이집트와요르단뿐이었다. 이들도 이스라엘을 진정한 이웃 나라로 인정한다기보다는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측면이 크다. 그런 와중 사우디와 더불어 아랍 국가중 대표적인 산유국으로 꼽히며 국제 사회에서 ‘중동의 허브’로 인정받고 있는 UAE가 이스라엘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맺기로 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빅뉴스‘였다.

"이란의 영향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우디를 중심으로 친미 성향 수니파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비공식적으로 협력해 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제는 그런 협력관계를 본격적으로 공식화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인한 국민 여론과 아랍권 전반의 인식을 고려하면 맹주인 사우디가 직접 나서기는 부담스러우니 협력 관계가 두텁고, 외교 안보에서 방향을 같이하는 UAE와 바레인을 앞세웠다. 특히 바레인은 안보와 경제를 사실상 사우디에의존하고 있어서 사우디의 허락 없이는 독자적으로 이스라엘수교 같은 ‘큰일‘을 결정할 수 없다." 중동 외교가 관계자의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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