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아오고 나서 몇 주, 어쩌면 몇 달이 지나자 무기력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은 아니고 아주 오래전에 부모님이 나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지만, 그전에는 정말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 간에지구상에서의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의미 있다는 생각을나 자신에게 계속 각인했다. 그리고 만약 삶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삶이 더는 소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언젠가는틀림없이 죽을 테지만 지금은 살아 있고 그게 매우 운좋은일임을 되새겼다. 서서히 이런 생각들이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은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행복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이유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게 나에게는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 같았다.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것 사이의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정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 정보를 계속 머리에서 밀어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덜 밀어내게 되었다. 그게나에게는 성장을 향한 큰 걸음이었다. 그러려면 환상을 버려야 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덕에 더 깊은 현실감을 얻었으니 잘된 일이다. 사람은 살아남으려면반드시 나름의 방법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애착담요를 버리고, 세상의 무시무시한 경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란 얼마나 놀라운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납작하고잘 휘어지는 물건인데 그 안에 검은색 선이 꼬물꼬물우스운 모양으로 찍혀 있다. 그런데 그 물건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람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저자가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당신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다. 글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일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멀리 떨어진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책은 시간의굴레를 벗어난다. 책은 인간이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증거다.

내가 아버지한테로 시간여행을 하는 방법이 한 가지 더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대기 중의 공기 입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공기로 호흡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새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이 공기 입자 중 일부가 아버지가 들이마시고 내쉬었던 공기일 수도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공기를 들이마신다니얼마나 친밀한 행위인가.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자동으로, 불수의운동으로 숨쉬는 공기가 예수나 무함마드나 클레오파트라가 숨쉬었던 옛 공기일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세대가 마실 공기인 것이다.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지구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아직 진화하지 않아 생기지 않은생명체의 숨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의 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먼 미래이자 누군가의 오래된 과거이니까.

영어에서는 누군가 죽은 날이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을 뜻하는 간단한 단어가 없다. 이디시어로는 있다. 야르제이트ahrea라고 한다. 유대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야르제이트가 되면 24시간 동안 타고 꺼지는 특별한 초에 불을 밝히는 의식을 한다. 바로 불어서 끄는 생일 초와 역설적인 대비를 이루는 셈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야르제이트 초에 불을 붙여서 레이철 할머니, 틸리 할머니, 벤저민 할아버지와또 내가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서만 아는 다른 조상들을 기리는 전통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자라면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게 되자 나는 스스로 야르제이트 초를 밝히게 되었다. 이 전통이 특히 내 마음에 와닿는 까닭은 촛불이 오래전에 소멸한 뒤에도 빛이 남아서 반짝이는 죽은 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작은 불빛을 밝히면 마치 그들이 아직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별자리 때문에 피부색, 젠더, 인종, 성정체성, 종교 등에따라 차별받듯 차별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한 가지를 알므로 당신이 어떤사람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에서 여러 차별주의에 내재한게으르고 섣부른 가정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방에는 여러 언어로 이런 문구가 적힌 액자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이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당신의 미래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domesticate‘라는 단어는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 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집에 사는 것이 누구인가? 밀은 아니다." 하라리는 ‘농업‘이라고 하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에게 불리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제비뽑기에서짧은 쪽 막대를 뽑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물에게 속아 쉴새없이 농사를 지어 식물이 온 지구에 널리 퍼지고 번성하게 돕고 있는 것이다. 그냥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았으면더 낫지 않았을까?

캐런 암스트롱은 『신화의 짧은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화는 과거에일어났던 일이지만 또 항상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역사를 엄밀히 시간 순서로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신화는 역사를 넘어서는, 인간 존재에서영구한 것을 가리키며 우리가 무작위적 사건의 혼란스러운흐름 너머를 이해하고 현실의 핵심을 언뜻 볼 수 있게 하는예술의 형태다."

또한 『피의 장: 종교와 폭력의 역사』라는책에서는 "신화는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건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의 일상적 실존에 내포된 영구한 진실을 표현한다. 신화는 언제나 현재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축하하는 모든 명절, 생일, 독립기념일 등은 과거에대한 것인 만큼 현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 동시에 가장 오래된 패턴을 지속해서 반복한다.

대니얼 데닛이 『주문을 깨다』에서 "그리움에 이끌리고혐오감에 되밀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 앞에서갈등에 휩싸인다. 이 갈등이 도처에서 종교가 생겨나는 데핵심적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