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나약한 이들을 위한 목발일 뿐이죠. 나는 하느님이 필요치않아요. 내가 나의 하느님이니까요." 어느 공개 토론에 갔더니 한 젊은이가 이렇게 결연히 선언했다. 혼자 생각했다. 젊은이, 나는 자네를 알지 못하지만 나 같으면 하느님 역할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를 조롱하거나 모욕하고 싶지는 않아서 살짝만 비꼬는 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지겹지 않은가요? 나는 이 나이쯤 되니 이제 나에 대해 예측 가능한 것들을 너무 잘 알게 되어 걱정인데, 나의 하느님께서는 여전히나를 놀라게 하시지요. 나라면 꽉 닫힌 창문보다는 확 트인 전망이 있는 곳들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을 택할 텐데요."
인간에게 ‘너‘란 자신이 조종할수 없는 것,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것, 자신이 존중해야 하는것, 전혀 다름을 간직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해야 하는 것을말한다. 부버에게 ‘절대적 너는 하느님이며 오직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것‘에서 ‘너‘로 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평이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풍경,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책 한 권도 ‘너‘가 될 수 있으며, 나에게 조건 없이 말을 걸 수 있다. 모든 ‘타자‘가 그 ‘너‘가 될 수 있고, 그런 것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부버는 단호히 거부했다. 부버에 따르면, 나는 아무 타자와 나와 너의 관계를 영구적이고 배타적으로 맺을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모든 타자가 나에게 그것이 되고, 그렇기에 나는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고 때로는 반드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내가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이다.
순간 내 느낌은 뭐랄까, 카프카의 소설 『심판 마지막 장면, 요제프K가 스트라호프의 채석장에서 심장이 칼에 찔렸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다. "치욕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나는 의심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신앙을 갖게 된 경우다. 나로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같은 현수막들과 참기 힘든가식적 미소를 띤 치어리더들이 있는 대형 집회에서 갑자기 집단 신심에 전염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내가 회심하던 때는경기장과 서커스단이 본연의 목적에 쓰였지, 종교적 광대놀이에 동원되지는 않던 시절이다. 물론 자기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비슷한 마음을 지닌 군중 속에 섞여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나 내 신앙은 그런 인파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얄팍한 종교적 열정에 치우치는 것을 늘 경계하고바로잡기 위해서 약간의 회의론과 반어법과 비판적 이성을 갖추는것은 정신 건강과 영적 건강의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함성과 외침으로 하느님의 참된 목소리를 덮어 버리지 않기 위해 꼭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텅 빈 깜깜한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으면서 잡았다, 잡았다‘ 하고 조급하게 외치기만 한다는 일화가떠오른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들은 얕은 개천이 아니라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은 참으로 ‘깊이‘ 이시다. 얕은 개천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신앙과 ‘하느님을 아는 길은 어떤 과목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이아니다. 학문이나 기술의 목적은 그것에 통달하는 데 있고, 그렇다면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피아노를 배울 때동요에서 시작해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하느님은 어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실재의 깊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기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설교와 종교적 논문들과 강좌들은 깊이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지 못하고 계속 동요만 뚱땅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점점 음이삐걱거려서 들어 주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물리학자 친구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과학은 하느님의 현존을 절대 입증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 신은 우상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이 책에서 이미 몇 번 인용한,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이아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과 유사하게, 부버도 우리가 ‘대상‘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온전히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고, 그런 관계의 원형이 기도이다. 하느님은 가까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첫째, 그분께서는 ‘것‘이 아니고, 둘째, 그분께서는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객관화할 수 없는 그분 본성 안에서 무한히 멀리 계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까움 그 자체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성경의 잘 알려진 구절을 끌어와서 하느님은 빛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볼 때는 ‘빛‘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을 세상으로, 또는 세상을 하느님으로 착각하지 않으면서,우리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 토론 막바지에 이르자, "내가 나의 하느님" 이라고 말했던 젊은이가 어느 모로는 옳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 인간은 ‘하느님의 지위에 있는 자신‘을 본다. 살아 있는 신앙의 시작이며 토대인회개, 참된 회심(메타노이아)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나‘는 그 지위에서 면직‘된다. 물론 그 회심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세상을 절대적 너에게 열어 본 적도 결코 없어서,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자기도 모르는 채 영원히 그 ‘하느님 같은 지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 여기는 이들이 그렇고, 나와그것‘의 세계에서 ‘나와 너의 세계로의 존재론적 전환이자 자기 세계의 재구성인 ‘회심‘을 거치지 못한 채 종교적 믿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다. 덧붙이자면, 그들은 그들 자신과 또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큰 해를 끼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듣고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의 삶을 보내고,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 삶을 보낸다.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기시작한다면, 우리의 온 삶은 우리 나름의 개념들과 시도들과 야망들과 환상들과 계획들에서, 또한 하느님의 친절한 손길이 그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해낼 수 있었을 것만 같은 온갖 ‘또 다른 시나리오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오른훌륭한 정치인, 외교관, 주교, 배우, 법률가, 심리치료사, 언론인,대가족의 아버지를 보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 이런 일을 하고 있고 그것도 아주 잘해 내고 있다면, 더 이상 나까지 그런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확신과 함께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직접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거나아마 나도 꽤 잘해 냈을 것이라는 생각과 환상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나는 기쁘게 내려놓는 법, 사람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느님 홀로 당신의 모든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실 수 있는 존재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길을 좁혀 주시고, 당신께서 나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것, 내가 다른 이에게 떠넘길 수 없는것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저 토마시 할리크, 내가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어 있을유일한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삼손이 되지 못했다고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다. 이 젊은 재개종자가 적어도 지금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잘 돌아왔네." 내가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가 어떤 생각에 영감을 받았을지 퍼뜩 떠올라 나 혼자 다시 미소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내가 자네를 환영하는 것은 자네가 우리 양 떼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어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 여정에 선禪의 지혜까지 더한 사람에게 내가 축하를 건넬 수 있어서이기도 해." 나는 어느 선禪 지도자가 자신의 여정과 깨달음의 열매를 훌륭하게 요약한 유명한 문장을들려주었다. "처음에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라 생각했고, 그러다 산은 산이 아니고 숲은 숲이 아니라 생각했지. 이제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인 것을 다시 알게 되었네."
깨달음이란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걸 잊은 것을 깨닫고는 선글라스를 벗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다른 일본인 선승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많은 서양 사람들은불교도들이 윤회를 믿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윤회의 본질은 윤회 신화가 환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지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다시 부는 바람인 그리스도교‘ 가 되어야지, 몇 해 전 집에 벗어 놓고 간 신발을 다시 신으려 해서는안 된다. (신발이 너무 작아졌을 테니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여기네요"라는 그의 말은 귀환을 뜻하지만, 단순히 과거로의회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돌아오려 하는 그 신앙은 똑같다. 주제도 ‘내용‘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를 이해하고 살아 내는 방식과 깊이는달라야 한다. 다시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진다.
그 어느 해보다 이번 부활절에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 이야기들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되며 두드러지는 주제가 있다.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사람‘으로 여겼다. 그들이 마침내 그분을 알아보았을 때는 그분의 겉모습이 아닌 표징들을통해서였다. 그분이 빵을 떼시는 모습에서,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그분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알아본 것이다. 어쩌면 복음사가들은 이를 통해 부활 신비의 특성을 강조하려고하는지도 모른다. 부활은 소생이나 원상 복귀, 아무 변화 없이 그저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체험을 통해 변화하시고 다른 분, 낯선 분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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