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공감하는 존재. 같은 일을 겪고도 별개의 고통을 느끼지만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면서 같은 결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고통은빼닮게 마련이고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다. 저자는 마음이 삶을 괴롭힌다면 차라리 함께 그 고통을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심연 속에서 고통이 말하는 진실에 눈을 떠보라고 말한다. 나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은 그 사건보다, 내가 지지해온 희생자라는 믿음이다. 가치 없는 존재라고 누군가 나에게 내린 평가가 아니라 내가 그 평가를온전히 믿고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더 위대한 진실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고, 이미 잃은 것에 관심을 기울일지, 아니면 지금 지닌 사랑에힘을 보탤지 당장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그들은 나와 상담을 시작하고 싶은 것일까? 왜 오늘은 어제, 혹so은 지난주, 혹은 작년과 다른가? 왜 오늘은 내일과 다른가? 때때로 우리의 고통이 뒤에서 우리를 밀어붙이기도 하고 때때로 우리의 희망이앞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기도 한다. "왜 지금인가요?"라고 묻는 것은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것을 묻는 것이다. 그그의 한쪽 눈이 잠시 씰룩거리다 감겼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과거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나, 육중한발걸음 소리나, 소리 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나는 이것이 ‘트라우마(Trauma‘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트라우마는 어떤 일이 잘못됐다거나 어떤 끔찍한 일이 곧 발생할 것이라고 직감으로 거의 항상 느끼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자동적 공포반응이 내게 도망치고 피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 트라우마는 여전히 일상적인 만남으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풍경, 특정한 냄새는 나를 과거로송환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비참할 수도, 희망찰 수도 있다. 나는 우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선택권을 가지고있다. 통제를 위한 기회 말이다. ‘나는 여기에 있어. 바로 지금. 나는공황 상태에 빠진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까지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나의 침묵과 나의 인정욕구(둘 다 두려움에 기반하고있다)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 그리고 나 자신과 똑바로 대면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실제감옥생활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기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나를 가졌다. -

자유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놓여 있다.
자유는 우리가 용기를 모아 감옥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벽돌 하나씩 하나씩 말이다.

희생되는 것Victimization과 희생자 의식Victimhood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삶의 과정에서 어떤식으로든 희생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재앙, 학대를 겪을 것이다. 우리가 통제권을 거의 혹은 전혀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람이나 제도에 의해 말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이것은 ‘희생되는 것‘의 예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발생한다. 이웃의 괴롭힘, 분노하는 상사, 폭력을 행사하는 배우자, 바람을 피우는 연인, 차별적인 법률, 뜻밖의 사고 등이 이런 경우이다.

이에 반해, 희생자 의식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를 희생자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희생된 사실에 집착하기로 선택할 때 희생자가 된다. 우리는 희생자의 사고방식을 키운다. 완고하고, 남을 탓하고, 비관적이고, 과거에 갇혀 있고,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가혹하고, 건강한 한계나 경계가 없는 사고방식과 존재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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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환자가(그것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아버지가) 과자를먹고 싶다고 하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매점을 털 기세로 사지 않나. 몸에 좋고 안 좋고,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다 사 주고 싶은 게 자식의 마음. 그녀가 고민하던 과자는 170엔짜리와 178엔짜리였다. 우리나라 과자로 치자면에이스와 하비스트를 놓고 고민하는 정도, 당연히 돈이 아까워서 한 개만 산 건 아닐 터. 새삼 느꼈다. 일본은 부족한것을, 우리는 넘치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의 차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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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어서 행복해졌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미국 가수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는 돈 때문에 자신의 삶에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고 답했다. "돈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뭘더 하겠어요? 점심을 두 번 먹을까요?"

남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선생 또는 작가라거나, 습관이나 외모를 설명하거나, 가족이나 내가 사는 동네, 고향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런 것들은 내가 누군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나 자신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나는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누가 아닌지로 시선을 돌린다. 만약 과거에 뭔가가 달랐더라면 내가 살았을 삶들에 대해, 내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과거의 순간들이 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코네티컷주를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다른 대학교에 갔다면….

우리는 한순간 우리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온전한 인간이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될수도 있었을 모든 것, 우리가 놓친 모든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한순간 다른 사람의 몫을 아까워했다. 마치 케이크를 자를 때처럼,
단 하나뿐인 케이크를 자를 때 자신의 몫이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처럼. (버지니아 울프)

이해를 돕기 위해 일화를 하나 들겠다. 1913년 어느 여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날 릴케가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
움이 모두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에 우울해했다고 전한다. "모두사라지겠지." 릴케는 말했다. "겨울이 오면, 인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렇듯" 릴케다운, 지극히 비관적인 지적이었다. 몇 년뒤 릴케는 행복이란 "곧 겪게 될 상실에서 지나치게 성급하게 취한 이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장 덧없는,
모든 사람이 한때, 오직 한때, 그것이 전부,
그리고 우리도 또한 한때, 다시 없는.

삶은 배타적이다. 삶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야기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삶과 이야기 모두를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대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이자 사회비평가인폴 굿맨 Paul Goodman은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가 "시작할 때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중반 정도 되면 가능한 것들이 있다. 끝날 때는모든 것이 필연이다." 성장은 배제하고 확정한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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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나약한 이들을 위한 목발일 뿐이죠. 나는 하느님이 필요치않아요. 내가 나의 하느님이니까요." 어느 공개 토론에 갔더니 한 젊은이가 이렇게 결연히 선언했다.
혼자 생각했다. 젊은이, 나는 자네를 알지 못하지만 나 같으면 하느님 역할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를 조롱하거나 모욕하고 싶지는 않아서 살짝만 비꼬는 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지겹지 않은가요? 나는 이 나이쯤 되니 이제 나에 대해 예측 가능한 것들을 너무 잘 알게 되어 걱정인데, 나의 하느님께서는 여전히나를 놀라게 하시지요. 나라면 꽉 닫힌 창문보다는 확 트인 전망이 있는 곳들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을 택할 텐데요."

인간에게 ‘너‘란 자신이 조종할수 없는 것,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것, 자신이 존중해야 하는것, 전혀 다름을 간직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해야 하는 것을말한다. 부버에게 ‘절대적 너는 하느님이며 오직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것‘에서 ‘너‘로 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평이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풍경,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책 한 권도 ‘너‘가 될 수 있으며, 나에게 조건 없이 말을 걸 수 있다.
모든 ‘타자‘가 그 ‘너‘가 될 수 있고, 그런 것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부버는 단호히 거부했다. 부버에 따르면, 나는 아무 타자와 나와 너의 관계를 영구적이고 배타적으로 맺을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모든 타자가 나에게 그것이 되고, 그렇기에 나는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고 때로는 반드시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내가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이다.

순간 내 느낌은 뭐랄까, 카프카의 소설 『심판 마지막 장면, 요제프K가 스트라호프의 채석장에서 심장이 칼에 찔렸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다. "치욕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나는 의심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신앙을 갖게 된 경우다. 나로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같은 현수막들과 참기 힘든가식적 미소를 띤 치어리더들이 있는 대형 집회에서 갑자기 집단 신심에 전염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내가 회심하던 때는경기장과 서커스단이 본연의 목적에 쓰였지, 종교적 광대놀이에 동원되지는 않던 시절이다. 물론 자기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비슷한 마음을 지닌 군중 속에 섞여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나 내 신앙은 그런 인파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얄팍한 종교적 열정에 치우치는 것을 늘 경계하고바로잡기 위해서 약간의 회의론과 반어법과 비판적 이성을 갖추는것은 정신 건강과 영적 건강의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함성과 외침으로 하느님의 참된 목소리를 덮어 버리지 않기 위해 꼭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텅 빈 깜깜한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으면서 잡았다, 잡았다‘ 하고 조급하게 외치기만 한다는 일화가떠오른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들은 얕은 개천이 아니라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은 참으로 ‘깊이‘ 이시다. 얕은 개천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신앙과 ‘하느님을 아는 길은 어떤 과목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이아니다. 학문이나 기술의 목적은 그것에 통달하는 데 있고, 그렇다면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피아노를 배울 때동요에서 시작해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하느님은 어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실재의 깊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기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설교와 종교적 논문들과 강좌들은 깊이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지 못하고 계속 동요만 뚱땅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점점 음이삐걱거려서 들어 주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물리학자 친구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과학은 하느님의 현존을 절대 입증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 신은 우상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이 책에서 이미 몇 번 인용한,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이아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과 유사하게, 부버도 우리가 ‘대상‘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온전히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고, 그런 관계의 원형이 기도이다.
하느님은 가까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첫째, 그분께서는 ‘것‘이 아니고, 둘째, 그분께서는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객관화할 수 없는 그분 본성 안에서 무한히 멀리 계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까움 그 자체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성경의 잘 알려진 구절을 끌어와서 하느님은 빛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볼 때는 ‘빛‘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을 세상으로, 또는 세상을 하느님으로 착각하지 않으면서,우리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 토론 막바지에 이르자, "내가 나의 하느님" 이라고 말했던 젊은이가 어느 모로는 옳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 인간은 ‘하느님의 지위에 있는 자신‘을 본다. 살아 있는 신앙의 시작이며 토대인회개, 참된 회심(메타노이아)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나‘는 그 지위에서 면직‘된다. 물론 그 회심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세상을 절대적 너에게 열어 본 적도 결코 없어서,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자기도 모르는 채 영원히 그 ‘하느님 같은 지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 여기는 이들이 그렇고, 나와그것‘의 세계에서 ‘나와 너의 세계로의 존재론적 전환이자 자기 세계의 재구성인 ‘회심‘을 거치지 못한 채 종교적 믿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다. 덧붙이자면, 그들은 그들 자신과 또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큰 해를 끼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듣고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의 삶을 보내고,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 삶을 보낸다.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기시작한다면, 우리의 온 삶은 우리 나름의 개념들과 시도들과 야망들과 환상들과 계획들에서, 또한 하느님의 친절한 손길이 그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해낼 수 있었을 것만 같은 온갖 ‘또 다른 시나리오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오른훌륭한 정치인, 외교관, 주교, 배우, 법률가, 심리치료사, 언론인,대가족의 아버지를 보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 이런 일을 하고 있고 그것도 아주 잘해 내고 있다면, 더 이상 나까지 그런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확신과 함께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직접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거나아마 나도 꽤 잘해 냈을 것이라는 생각과 환상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나는 기쁘게 내려놓는 법, 사람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느님 홀로 당신의 모든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실 수 있는 존재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길을 좁혀 주시고, 당신께서 나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것, 내가 다른 이에게 떠넘길 수 없는것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저 토마시 할리크, 내가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어 있을유일한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삼손이 되지 못했다고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다. 이 젊은 재개종자가 적어도 지금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잘 돌아왔네." 내가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가 어떤 생각에 영감을 받았을지 퍼뜩 떠올라 나 혼자 다시 미소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내가 자네를 환영하는 것은 자네가 우리 양 떼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어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 여정에 선禪의 지혜까지 더한 사람에게 내가 축하를 건넬 수 있어서이기도 해." 나는 어느 선禪 지도자가 자신의 여정과 깨달음의 열매를 훌륭하게 요약한 유명한 문장을들려주었다. "처음에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라 생각했고, 그러다 산은 산이 아니고 숲은 숲이 아니라 생각했지. 이제 나는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인 것을 다시 알게 되었네."

깨달음이란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걸 잊은 것을 깨닫고는 선글라스를 벗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다른 일본인 선승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많은 서양 사람들은불교도들이 윤회를 믿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윤회의 본질은 윤회 신화가 환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지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다시 부는 바람인 그리스도교‘
가 되어야지, 몇 해 전 집에 벗어 놓고 간 신발을 다시 신으려 해서는안 된다. (신발이 너무 작아졌을 테니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여기네요"라는 그의 말은 귀환을 뜻하지만, 단순히 과거로의회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돌아오려 하는 그 신앙은 똑같다. 주제도 ‘내용‘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를 이해하고 살아 내는 방식과 깊이는달라야 한다. 다시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진다.

그 어느 해보다 이번 부활절에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복음 이야기들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여러 번 되풀이되며 두드러지는 주제가 있다.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사람‘으로 여겼다. 그들이 마침내 그분을 알아보았을 때는 그분의 겉모습이 아닌 표징들을통해서였다. 그분이 빵을 떼시는 모습에서,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그분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알아본 것이다.
어쩌면 복음사가들은 이를 통해 부활 신비의 특성을 강조하려고하는지도 모른다. 부활은 소생이나 원상 복귀, 아무 변화 없이 그저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체험을 통해 변화하시고 다른 분, 낯선 분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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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얻은 최고의 교훈은, 재활 과정에 있을 때 나를 돌보는 사람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내 소관이었다. 나와 교감을 나누고, 부드럽고 적절하게 나를 만져주고, 눈을 마주보며 차분하게 말을 건네면서 에너지를 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었다. 긍정적인 대우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반면 나와 교감하지 않고 기운을 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신을 보호했다.

내가 외상으로 고통받는 동안 어머니가 가장 즐겨 한 말은 "더 나쁠 수도 있었어!"였다. 정말 그랬다. 표면에 드러난 상황은 참혹했지만 훨씬 더 나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이 과정에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었다. 나는 막내였고, 그녀는 내가 걸음마를 뗄때부터 무척 바쁘게 일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어머니에게 의지하며 보살핌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 기뻤다. 그녀는 포기할 줄 몰랐고 끝까지 친절했다.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내가 잘하든 못하는 상관하지않았다. 우리는 회복 과정을 함께했으며, 모든 순간이 새로운 희망과가능성으로 빛났다.

뇌졸중 환자 중에는 더 이상 회복이 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이루고 있는 작은 성취에주목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없는 것을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다음에 무엇을 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절망이 회복을 가로막는다.

나는 방문객들이 내게 자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눠주기를 바랐다.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나는 그저 사람들이 몇 분의 시간을 내서 내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안부를 전하거나, 내가 회복되리라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불안한 에너지를 잔뜩 갖고 오는 사람을 상대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사람들이 내게 올 때는 자기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오는지 확인하기를바랐다. 모두가 눈살을 펴고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눠주기를 원했다.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거나 화가 난 사람들의 방문은 내 회복에 역효과를 냈다.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내 안에 있었다. 새로운 감정이 밀려들어 나를 해방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 감각 경험에 어울리는 새 단어를 배워야 했다. 아울러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 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나가게 해야 하는지 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런 감정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신경 고리에 접속하고 싶지 않다고 뇌에게 말했다. 언어를 통해 왼쪽 뇌를 사용하면 뇌에게 직접 말을어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예전의 내 성격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감정적 치유는 지루하리만치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노력할 가치가있었다. 왼쪽 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회복과정에서 나는 양측 반구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생각을 좌우하는 성격을 내가 직접 선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 우뇌 성격의 밑바탕에는 깊은 마음의 평화와 공감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뇌의이런 성격을 담당하는 회로를 가동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내는 평화와 공감의 메시지도 많아지고, 그만큼..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 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오른쪽우뇌의 타고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낡은 정보가 담긴 파일을 새롭게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매 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나는 유년기 내내 호박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우뇌 덕분에 기꺼이 호박에 재도전할 수 있었고, 지금은 호박을 아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좌뇌로 판단을 내린 후에는 파일 업데이트를 위해 선뜻오른쪽으로(우뇌의 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을 한번내리고 나면 그 결정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깨닫기로지배욕이 강한 좌뇌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제한적인 두개골 공간을개방적인 우뇌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 뇌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틀에서 벗어나 사고한다. 틀을 만든 장본인인 좌뇌가 세운 규칙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 혼란이창의적 과정의 첫 단계임을 잘 안다. 근운동 감각이 뛰어나고 기민하며, 육체가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사랑한다. 내 세포들이 직감이라는 통로을 통해 보내는 미묘한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며, 촉감과경험을 통해 배운다.

뇌가 아주 단정적이거나 비생산적이거나 통제 불능으로 느껴지는회로를 가동할 때면, 나는 정서적·생리적 반응이 사라질 때까지 90초를 기다린다. 이어 아이를 대하듯 뇌에게 차분하고 거짓 없이 말한다. ‘생각하고 느끼는 네 능력은 높이 사지만 나는 더 이상 이런 생각이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어. 그러니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지 마’.

세포들이 말을 듣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나는 진정한 목소리를 이용해 언어 중추의 훼방꾼을 엄격한 스케줄로 관리한다. 이야기꾼에게 오전 9시부터 9시 반, 그리고 오후 9시부터 9시 반까지는마음대로 푸념해도 좋다고 허락한다. 뜻하지 않게 푸념 시간을 놓치면 다음 약속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그 행동을 재개할 수 없다. 내가이런 부정적인 사고의 회로에 정말로 엮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메시지를 세포들은 금세 알아듣는다. 따라서 지금 뇌에서 어떤 회로가 돌아가고 있는지 끈질기고 확고한 태도로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 생각에는 내부의 언어적 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마음의 깊은 평화를 발견하는 첫걸음이다. 나는 뇌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꾼의 비중이 고작 땅콩 크기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엄청난 힘을 깨달았다.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마음의 정원을 착실하게 가꾸고, 하루에도 수천 번 긍정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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