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는 게 마라의 역할이다. ‘오래 살아야 공부도 오래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마라의 정체는곧 내 욕망의 다른 소리다. 이 욕망 앞에서 흔들렸던 내 마음. 그순간의 마음은 참으로 황량한 바람이 부는 황무지 같았다. 그것이 언제이든 언젠가 죽음은 실제 상황이 될 터이다. 정말 죽음을이렇게 정신없이 휩쓸려 가듯 맞닥뜨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건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백 살을 산다고 죽음 앞에서 저절로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붓다는 이런 나의 마음을 법구경法句經에서 정확하게 표현하고있었다.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게송 34)
니체는 내가 사회가 제시하는 도덕적 가치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도덕은 원래부터 주어져서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보편적도덕이란 존재하지 않고,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면 도덕 또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얽매이는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도덕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연암은 자신이 만나는 세상 자체가 글 쓸 거리였다. 연암의 시선은 언제나 남들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은커녕,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움켜쥘 생각만 하고 있지 않았던가.
유식에서는 의지작용이 생기기 바로 전 단계인올라오는 감정에 집중하라고 한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자아‘에서 분리시켜 바라보라는 것이다. 요동치는 감정들은 집착하면 할수록 그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자신을 더 세게옭아맨다. 그러나 감정에서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감정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사라진다. 사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모든 욕망이나 그 욕망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다 없앤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요동치는 감정을 없애며 통제하기보다는 자아에서 감정들을 분리시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감정을 제어하기가 수월해
화가 나는 마음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아상我相이 버티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원하는 간호사의 올바른상은 접수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접수도 제대로못하고 일을 대하는 태도도 내 생각我相과 다르니 그녀만 보면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접수를 잘해야 한다는 간호사에 대
붓다를 금욕적 스승으로 보는 한 수행자에게 붓다가 자신이때로는 발우 한가득 식사하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기도하며, 좋은 처소에 머물기도 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요한 것은 붓다가 그 어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도 집착하지않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오히려 붓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고 듣고 맛보고 감각하며 욕망을 일으수밖에 없는 신체와 마음의 조건을 역으로 이용하라고 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상태를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함으로써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방향의 전환을 유도한다.
『전습록은 꽉 막혀 있는 마음을 시원하게, 확 트이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아니 그렇게 시원하고 확 트인 마음이, 우리가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는것이 옳고 그른지 아는 명쾌한 마음, ‘양지‘良知를 갖고 있다고. 그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달려가 붙잡게 되는 것처럼, 배우지 않아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본래 그러하다면, 어째서 우리에게는 명쾌하지않은 순간들이 종종 생기는 걸까? 양명에 따르면 그것은 양지가 ‘사심心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욕심에 본래의 마음이 가려져, 막상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정도의 큰일이 아니면 양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 경우처럼 상대의 힘을 받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못하는 수동적 상태에서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불만이 생기게마련이다. 이때 우리는 힘을 쓰는 상대를 ‘악한 사람‘으로, 그에대립하는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설정한다. 이 구도에서는 선한사람이 악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그래야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림으로써 복수하는 쾌감을 맛보고, 자신에 대한 불만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불안정한 기질을 지닌 남비콰라족의 환심을 사려고 열기구를 띄웠다가 그 집단을 혼란에 빠뜨렸다. 당황한 그는 원주민들과 면담하며 과학적 원리 너머에있는 그들의 인식, 즉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은 재앙과 종말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이 ‘천국 복음을 전하는기독교 선교단을 학살한 사건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이 사건을 두고 영예로운 싸움인 것처럼 명랑하게 떠드는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남비콰라족의 세계관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차이를 서구사회와 동등한 차원에 두고 닮은 차이를 찾으려 했다. 나는 이런 그의 눈이 놀라웠다. 현상에 머물지 않고, 심층을꿰뚫는 눈, 차이 너머에 있는 구조‘를 발견하는 눈 말이다. 이제그의 질문을 따라가며 탈북민들과 충돌을 일으킨 내 마음의 심층 구조를 밝히는 통찰력을 배워 보고자 한다.
루쉰의 소설집 『외침』喊에 수록된 작은 사건을 읽게 되었다. 중국 근대혁명기에 베이징에 사는 주인공은 자신이 탄 인력거꾼이 허름한 차림의 노파를 치는 사건과 맞닥뜨린다. 노파가 일부러 인력거가 가는 길을 방해했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고 때문에 자신의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맘이 앞선다. 다친노파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 주인공인 ‘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사이 인력거꾼은 노파를 부축해 일으킨다. 그녀의 몸을 살피고자신의 잘못을 직접 주재소에 찾아가 알리기까지 한다.
어느 날, 양명陽明의 제자가 공무와 송사로 바빠 공부에 매진할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양명은 내가 언제 평소 하던 일을때려치우고 공부하라고 한 적이 있냐고 따끔하게 말한다. 지금맡고 있는 업무를 하는 동안 공부할 수 있다고, 아니, 공부는 지금 그 자리에서 하는 거라고 말이다. 송사에 임할 때 사사롭지 않게 마음을 쓰고, 한순간이라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너의공부라고, 이것이 바로 ‘사상마련‘事上練이라고! 공부는 고요할때 하는 마음수양이 아니라 부딪히는 일상 속에서 하는 거라고말이다.
무엇이 이 책을 악으로 들끓게 만들었을까? 니체는악이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하나하나의 덕德(virtue)들이벌이는 전쟁과 싸움(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15, 58쪽)이라고 말했다. 선에 대비되는 성질로서의 악이 아니라, 존재를 뒤흔들고 정신의 전부를 차지하길 원하는 이 들개 같은 힘이 바로 악이다. 이 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덤
게 변화시켰을까? 니체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너의 공부와 노력에는 자기 극복‘이 없었다. 너는 언제나 너의 ‘정의로움‘을 앞세워 남을 탓하고, 제도를 바꾸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일찍이 그러한 너의 ‘정의로움‘이 얼마나 궁핍하고,추하며, 가엾기 짝이 없는 자기만족인지를 알고 있었다. 특히 너는 제도를 앞세워 스스로를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으로 생각하고있었지 않느냐?"(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감이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4개의 구호 "도심에서 유목하기", "세속에서 출가하기", "일상에서 혁명하기", "글쓰기로 수련하기" 를 볼 수 있다. 유목을 초원이 아닌 도심에서, 출가를 산속이 아닌 세속에서, 혁명을 아스팔트가 아닌 일상에서, 글쓰기를 숙제하기가 아닌 수련하기라고…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면 상식적 생각을 뒤집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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