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는 군대 간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다. "때론 시련이 큰 그릇을 만든다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은 작은 그릇마저 찌그러뜨리기 일쑤란다." ‘찌그러진 작은 그릇으로 민주주의를 일굴 수는 없다.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는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어퓌르스텐담과 맞닿아 있는 중산층 거주 지역이다. 100미터 남짓한 이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거리에 황동판을 심는 일을 시작한 이는 군터 뎀니히라는 예술가다. 그의 목적은 "번호로 불리며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자유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거처에 그들의 이름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 10센티미터의 돌 위에 황동판을 붙여놓은이 작은 추모석을 그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는 ‘걸림돌이다. 아직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는사람은 없다. 땅을 파고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독일인도 없으리라. 그들의 끔찍한 과거를매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걸림돌을 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름답지 않아요? 이렇게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더욱이 희생자의 과거를 잊지 않고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걸림돌은 이제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6만 5천 개넘게 심어졌다. 공적 역사에 묻혀온 개인적 역사가 집 앞에 되살아나고, 익명의 희생자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있다. 독일인들은 아침마다 과거의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릴 테지만, 바로 그렇게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결국 과거를 넘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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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더 좋아요.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걸요." 저 역시 그런 시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괴로운 고립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누군가 내 편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혼자있을 때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던 불행과 걱정도, 친구나 연인과 수다를 떨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해결하기 힘들 것 같던 문제의 해결책을 너무 쉽게 찾기도 하죠. 인간은 결코 ‘개인‘ 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즉 ‘우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에게 사람이, 우리’ 에게 우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면서 둘도 없이 특별한 존재다. 세계의 모든 일은 그 안에서 오직 한 번씩만 교차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 판결문을 읽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욕을 하고 상처를 주는 일보다 그 사람이 혼잣말만 하도록, 즉 계속 고립된 상태에 있도록 방치하는 게 더 나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혼자가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사회와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라면, 그 고독은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나는 혼자여도 괜찮다‘는 자기 위안은소한의 사회적, 심리적 관계가 바탕이 되었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고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불과하다는 사실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항상 반대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둠과 빛, 빛과 어둠, 그림에는 이 둘이 있어야만 하죠. 빛에다 빛을 더해도 아무 의미가없습니다. 어둠에 어둠을 더해도 마찬가지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슬픔이 있어야 행복이 찾아올 때, 그걸느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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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승자의 발자취‘라는 역사가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깊은 의미에서역사는 잘 진 싸움의 궤적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을통해 발전해 온 것" 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는 싸움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완전한 지옥이 되지 않은 것은 지는 싸움을 해온 사람들 덕분이다. 진 싸움이 만든 역사가 희망을 지켜주었다.
이러한 믿음을 품고 우리는 함께 환멸의 땅을 건너가야 한다. 넘어지고 부서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꿈꾸던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세기 이 나라, 이민족은 너무도 큰 고통과 희생을 치렀다. 역사에 빚진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없다. 쉬이 희망을 말하지 않되 가벼이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 유토피아와 멜랑콜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 - 이것이 이 환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안이 극단적이고 편재적인 것은 그것이 실존적, 철학적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불안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불안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 권력이 무소불위의 전횡을 행사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졸지에 ‘구조조정‘, ‘정리해고, ‘노동의 유연화라는 경제적 테러를 일상적으로 겪게 되었고,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조정‘, ‘정리‘, 유연화의 대상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비정규직, 정규직에 이어 ‘엘리트 직장인까지도 생존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불안사회를 극복할 처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면한 과제는불안을 생산하고 지배의 도구로 악용하는 경제 권력을 제어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고용 관행을 변혁할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경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하여 ‘조정‘하고, 정리하고,유연화 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닌 경제라는 인식하에 인간적인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무례사회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인격 모독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인간을 경시하는 사회다. 성형 광고의 주체인 의사 선생님들의 경우에서 보듯,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

대중들 또한 무례에 둔감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대중이 이용하는 지하철에 저런 파렴치한 광고가 버젓이 걸릴 수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촘촘한 경쟁의 그물로 조직된 사회에서일상적으로 너무도 많은 모멸과 무례를 겪어온지라 대중에게 남아 있는 자존감의 영토는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때로 대중은경멸과 조롱에 모멸감을 느끼거나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자조적으로 즐기는 집단적 마조히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TV에서 방영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라, 소재의 절반 이상이 외모에 대한 조롱이다.

한국 사회는 방관사회다. 시민들은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다. 방관은 군대 내무반이나 세월호 선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그것은 우리네 일상이다.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것이 ‘나만 빼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공적 정의를 위해 참여하는 시민은 극소수다. 대학의 학생회든, 기업의 노조든, 시민단체든 공적 이해를 위한 기구에 참여하는 시민의 수가 우리처럼 적은 나라는 드물다.

특히 정치의 경우 시민들의 ‘방관은 극단적이다. 모두가 정치에관심을 보이지만, 아무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정치평론가는넘쳐나지만, 정치 활동가는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진보정당을 제외하면 한국 정당의 본색은 ‘당원 없는 정당‘이다. 이는 매력 없는정당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관하는 시민 탓이기도 하다. 모두 곁에서 훈수만 둘 뿐 참여하지 않는 사회, 정치 혐오를 좀 더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조장하는 방관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이념이 실현될 수는 없다.

광화문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의 현실은 변한 게 없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광장 민주주의가 현장 민주주의로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실천하고, 실현해야 한다. 내 마음속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촛불이 타올라야 한다. 촛불이 나를 변화시키고, 일상을 변화시키고, 현장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마침내국가를 변화시켜야 한다. ‘내 안의 최순실을 불태우고, ‘내 안의박근혜‘를 몰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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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으며) 내가 4·19 직전, 최인훈의 중편 「광장」을 전재했던『새벽』 잡지의 편집자문위원으로 일했을 때 얘기야. 그 회사가 명동에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유명한 명동극장이 있었어. 편집 끝내고나올 무렵이면 마지막회 영화를 상영 중이었지. 표를 파는 사람도문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어. 마지막회가 상영 중이니 누가 들어오겠나. 그때 불쑥 들어가서 중간부터 본 영화가 많았네.
인생도 다르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을 풀full로 보는 게 아니라 불현듯 뛰어들어가 후반부 영화만 보는 것 같지. 영화가 끝나고 the end‘ 마크가 찍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네. 나라면 저기에 꽃봉오리를 놓을 텐데, 그러면 끝이 난 줄 알았던 그 자리에 누군가와서 언제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 텐데. 그때의 라스트 인터뷰가 끝이 아니고, 다시 지금의 라스트 인터뷰로 이어지듯이, 인생이 그래."
"늘 애절한 거죠. 매 순간이 지금 이 순간과의 헤어짐이니까요."

얘들아, 내가 밭에 금은보화를 묻어뒀다. 열심히 파면 나온단다.
아무리 파봐도 돌멩이밖에는 안 나와. 나중에야 알았지. 과수원사과나무에 싱싱한 사과가 열리고 난 후에야. 밭을 끈기 있게 파는99것이 아버지가 물려주고 싶은 보물이었다는 걸. 그냥 풀 뽑으라고하면 그 귀찮은 걸 왜 해, 당장 금덩이나 주고 가지‘ 할 거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록새록 보게 돼. 거짓 유언이 진실로 열매를 맺는 과정을."
"그래서 헤아려 듣는 귀가 필요하다고……."
"그렇다. 진짜 전하고 싶은 유언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 듣는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로 한다네. 노름과 돈을 좇아 밤낮

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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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사색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
더 메마르고 더 외로운 시간들에 기대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윈터링‘의 지혜다.

윈터링(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 옮긴이)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이 시기는 질병으로 인해 찾아올 수도 있고, 사별이나 아이의 출생과 같은큰 사건으로 인해 찾아올 수도 있고, 또는 치욕이나 실패로 인해 찾아올 수도 있다. 겨울나기를 하는 사람은 과도기에 있는것일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현실 세계와 어딘가 다른 세계 사이에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겨울은 우리에게 아주 천천히 살금살금 다가오는데, 질질 끌어온 인간관계의 종결, 부모님이 나이 듦에 따라 점진적으로 늘어난 돌봄의 부담,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줄어드는 확신 따위와 함께 온다. 어떤 겨울은 몸서리쳐지도록 갑작스럽게 온다.

4식물과 동물은 겨울과 싸우지 않는다. 겨울이 오지 않을것처럼 행동하며 여름에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삶을 영위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준비하고 순응한다. 그들은 겨울을 보내기위해 놀라운 탈바꿈을 감행한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침잠하여 빈약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냉혹한 효율의 법칙을 따르면서 시야에서 사라지는 시기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변신의 출발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겨울은 생명 주기에서죽음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호된 시련의 장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름을 바라며 한탄하기를 멈추는 순간,
겨울은 보기 드문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거리마저도 반짝반짝빛나는 영광의 계절이 될 수 있다. 겨울은 느긋한 충전과 집 안정돈을 위한 숙고와 회복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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