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단호히 거절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게다가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도 다른 사람들을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마음에 그들을 받아들이고 의심 없이 완전히 터놓고 그들을 대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에들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자비롭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어떤 냉담함과 의심, 그리고심지어 경멸조차도 감추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애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냉혹한 거부로 인해 응징을 받는다.
행복은 우리가 거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어떠한 형태의 행복이든 거부하는 방어적 거부 논리에얽매이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삶을 복잡하게 한다. 만일 사람이몹시 편협하면 결국에는 그것이 모든 행복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늘 ‘가치‘라는(누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누구는그럴 가치가 없다는 잣대를 쓰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누구는 의롭다고 하고 누구는 받아들일 가치가 있고 누구는 신자들에 의해 묵인될 수 있는지에 대한(그것은 얼마나 가당찮은 생각인가!) 간접적인 질문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의미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유다인들,흑인들, 신앙이 없는 자들, 이단자들, 공산주의자들, 이교도들, 광신자들 같은, 자신들이 거의 묵인할 수 없는 사람들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음을 아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하느님께서는 하잘것없는 사람인 나에게, 나의 하찮음과 내 형제들의 하찮음을 잊어버리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고 우리 모두를 당신의 모상으로 새로 나게 하신 그 사랑으로 감히 전진하라고당부하신다. 그리고 결국은 ‘가치‘라는 가당찮은 생각을 무시하라고 당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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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편지를 받은 샹탈의 변화에 장마르크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누군가가 찬양하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샹탈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진주목걸이가 아름답다고 쓰자 장마르크의 선물이지만 너무화려하다며 자주 착용하지 않았던 진주목걸이를 자랑스럽게 걸고외출하는 것이다. 빨간 옷을 언급했더니 샹탈은 빨간 잠옷을 입고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자로 변신한다. 지금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진주목걸이를 싫어하던 여자에서 좋아하는 여자로, 붉은색 옷을 경멸하던여자에서 붉은색을 좋아하는 여자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샹탈을 찬양하는 스토커의 편지 내용이 전적으로 그녀와무관한 것은 아니다. 찬양과 숭배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장마르크는예전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샹탈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샹탈로 하여금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에 지나지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샹탈에게 엄청난 자기만족,혹은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보석이 있는지를 알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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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실에서 많은 실수를 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그 실수를바로잡아줄 때마다 기뻐요. 왜냐하면 학생들이 그 주제에 대해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학생을 원해요. 또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학생을 원하죠. 직장에서도 바로 그런 동료, 그런 경영진을 원하지 않을까요?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내 실수를 지적해줄 때가 있어요.
나는 수학과 물리를 잘하지만 칠판에 필기할 때 철자를 틀리는일이 종종 있거든요. 어떤 학생이 내 실수를 지적하면 나는 아이들과 같은 수준이 됩니다. 평가하는 사람과 평가받는 사람의거리가 좁혀지죠. 그 거리 좁히기는 수학 같은 과목에서 매우필요합니다. 학생들에게 학습 동기를 부여하는 데 효과적이고정말 중요하죠."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해요. ‘점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일이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평가와 시험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시험은 유용할 수도 있어요. 학생들 개개인의 학습 단계나실력을 측정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특별히 그룹 시험을 선호합니다. 학생들이 그룹별로 토론을 해서 함께 답을 찾아가는 방법이죠.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대해 과학적인 조사를 한 뒤 그 결과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과학시험을 보기도 합니다. 수업 시간에 가르쳐준 다양한 과학적인방법들을 학생들이 얼마나 잘 습득했는지 확인할 수 있죠. 중요한 것은 그 과학적인 방법을 어디서 어떻게 이용할지 학생들이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혼자 책을 읽고 시험을 치르는 것만으로는 배움에 대한의욕과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수 없어요.

수학이나 과학도 그렇고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른 사람에게 말하고 토론할 때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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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의 핵심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태도를 경계한다. 행복의 핵심은 ‘좋은 경험‘에 있다. 그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고, 기쁨과 같은 좋은 감정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말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좋은 경험을 찾아내고 이를 늘려가는게 중요하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기쁘고, 기다려지고, 하고 싶은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경험이란 놀이와 유사하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행복한 건 잘 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더라도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발달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잘 놀아야만 활기가 생기고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잘 놀때 행복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오티움은 ‘무위無爲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 말한다.

낮은 단계의 무위는 억지로 무언가를 안 하는 것이지만 높은 단계의 무위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하는 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채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억지로 애를 쓰지 않는 것,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우리를 짓누르는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늘 따라다니는 보상이나 결과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현대인의 여가에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에있다. 자, 이제 오티움을 정의해보자. 오티움은 ‘내 영혼에 기쁨을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말한다.

1994년 이후 스탠퍼드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센Laura L.Castenscen과 동료들은 수백 명의 노던 캘리포니아 거주민들의 정서상태를 평가했다. 그 결과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든 이들은당면한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흥분을 해도 재빨리 균형의상태로 돌아왔다. 카스텐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은 남아 있는 시간이 적어질 때, 즉 인생의 끝에 점점 더 가까워질때 감정적으로 의미 있는 목표에 초점을 두려고 한다. 반면 남아있는 시간이 많을 때는 지식 획득에 초점을 둔다." 즉,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두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나이든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지만 그 자체가 삶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도록 돕는다. 질병, 상실, 죽음, 수입과 역할의 감소 등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마냥 우울하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 집중하고 남은 시간을 더욱 깊이 있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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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재회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치유란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활기를 되찾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능동적 여가 활동은 그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은 녹슨다. 행복을 미루는 것이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애초에 생각했던 어떤 조건이나 기준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행복을 미루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오늘을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과 놀이 중에 노는 것부터 한다면 그 사람은 철이 없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우화에서 개미는 정상적 인간이고 베짱이는 비정상적 인간이다. 물론언제 어디서든 주류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기꺼이 베짱이로 살아갈 것을 선택한다. 골수 베짱이들은 당장 굶어죽더라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개미인가? 베짱이인가? 둘 중에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든다. 그러나 의문을 품어보자. 우리는 왜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자. 하루는 개미로 살고, 또 하루는 베짱이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반나절은 베짱이로 살고 반나절은 개미로 살 순 없을까? 혹은 평일은 개미로 살고, 주말은 베짱이로 살 수는 없을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은퇴 후 시간을 쪼개서 미리 앞당겨 쓸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은퇴 후 시간이 20년이라면 그시간 중에 1~2년을 미리 쓰고 조금 더 은퇴를 늦추면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물론 이는 일반적인 직장인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가능한 생각이었음을 양해드리고 싶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 될 게도 내가 그린어 말리려고 해도 제대로 쉬고 싶다는없었다.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제대로 쉬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이분법에서 벗어나니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삶의 큰 변화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값진 것은 안식년 동안 몸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삶의 현재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행복을 미루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일 일은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행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숙제처럼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뛸 수밖에 없다. 지금 일이싫다는 이유로 당장 사표를 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다닐 수는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낮에는 개미에서밤에는 베짱이로, 혹은 평일은 개미에서 주말은 베짱이로 이중의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몇 시간 혹은 주말의 한나절은 자유 시간이 있다. 이 시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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