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려 하기보다 스스로 ‘배우려는‘ 태도를 간직할 때 정말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 이런 기본 태도가 학생에게 옮아가기때문이다. 학생들이 계속 경탄하게 하고 질문으로 이끈다는 것도뮐러 선생님의 강점이었다. 그와 더불어 탐구하며, 궁금했던 질문에 ‘아하‘ 하고 깨닫는 경험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다. 깨닫는 기쁨을 누리는 건 상당히 소중했다. 학생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유머없이 거의 주입식으로 떠먹여주는 수업이 아니었다. 언젠가 뮐러가 교사는 사실 학생보다 단 한 시간만 앞서면 된다며, 그거면 충분할거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그의 연구소의 물리학자들, 엔지니어들과 함께하는 금요일 오후의 토론회에서 나는물론 그때 나는 지적으로 토론을따라가기조차 버거웠다-그동안 몰랐던 훌륭한 학자로서 뮐러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질문자의 눈높이에 맞춰 답변했다. 한번은 그에게 우리같이 전문지식이 없는 바이올린 제작학교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약간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떤내용을 ‘쉽게‘ 표현할 수 없으면 기본적으로 그 내용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그에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강요했던 셈이라고 할까?
무력함과 권능은 공명을 이룬다. 체념만 있거나 능력만 있는곳에서 상호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힘겨운 시간들을 오히려 기회로 보고자 한다.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예수의 무력함을닮는 기회로 말이다. 그런 시간에 나는 받는 자로서 하늘을 향해손바닥을 열고자 한다. 그렇게 성령의 탄식에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자 한다.
정말로 영리한 사람은 삶이 방해받고 빗나갈 수 있는 여지를허락한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만 고집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 뜻밖의 일을 통해서도 좋은 일이 일어날 수있다. 우리는 때때로 커다란 지혜가 뜻밖의 길로 인도하는 것에놀라곤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돌아보며 ‘아, 정말 좋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이 종종 불운해 보이는 일을 통해적어도 예기치 않았던 일을 통해 당장은 참고 견뎌야 하는형태로 다가온다 해도 말이다.
뜻밖의 것에 놀라거나 방해받거나 때로 좌절할 용기가 없을때, 우리는 가능성에 못 미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럴 때 큰 지혜는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의 최대 실수는 네가 그르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시도한 일이 너무 적었음을 보여준다." 용기가 없는 자는 은혜의 길을 갈 수 없다. 우리는 확실한것만 취한다는 말로 우리의 용기 없음을 변호한다. 하지만 자신이확신하는 것만 부여잡고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을 때 진리에는 얼마나 많은 먼지가 앉을까. 막스 프리슈Max Frisch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선조들이 당대의 문제에 맞섰던 그용기로 자기 시대의 과제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그 외 모든 것은 모방이요, 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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