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며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의궤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고군분투한 그의 삶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의궤들을 되찾았습니다. 그에게 의궤는 일생을 바쳐 되찾아야 할 ‘가슴 뛰는 무엇’이었습니다. 신라의 킹메이커인 김유신도 그렇습니다. 그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야 출신이라는 한계였죠. 그는 ‘약점과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고민했을 겁니다. 그리고 결국 김춘추라는 파트너를 선택해 원하던 바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뿐일까요? 불평등과 차별을 이겨내고자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품은 동학 운동의 농민들, ‘다음 세대에게는 다른 세상을 물려주려 했던’ 3ㆍ1운동의 이름 모를 남녀노소들, 그리고 ‘민족의 힘과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캐물으며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회원들까지. 우리 역사는 이렇게 삶의 화두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자신만의 질문을 던졌던 작은 용기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입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볼 때도 이토록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궤적의 집합이라 할 수 있는 역사는 오죽하겠습니까.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나만의 시선, 바로 ‘관점’입니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물살에 떠밀리듯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상처투성이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책에는 사건과 인물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수험생을 위한 강의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 강의는 시험 문제를 잘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요. 하지만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본질이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본질에 충실하고자 수험서에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자 애를 써왔습니다. 가끔 ‘왜 시험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투정 어린 댓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늘 수험생들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수정하거나 양보하고 싶지 않더군요. 역사를 향한 ‘시선’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귀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그는 탁월한 생태주의자가 되었고,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의 개념을 적극 제안한 사람들 중의 하나도 바로 소로다. 그는 ‘국립공원’이라는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공존의 모델을 주장했으며,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소로는 단지 『월든』의 작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시인이자 다정한 생태주의자이자 열정적인 시민운동가였다. 그 이면에는 생계를 위해 뛰어들어야 했던 측량기사의 일, 가업으로 이어받아야 했던 연필 제조업도 있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캐릭터 속에 늘 숨어 있는 소로의 가장 결정적인 본성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한없이 따스한 사랑과 공감의 눈길이었다.

진정 중요한 것들은 험악한 환경에서도 그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소로는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소로에게는 희망을 가질 이유보다 절망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는 평생 가난했으며, 그의 재능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소로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힘없고 소외받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 멈추지 않는 희망과 사랑이야말로 팬데믹 시대 우리가 소로에게서 배워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닐까.

모두가 월든처럼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 수는 없지만, 월든처럼 ‘복닥이는 삶과의 결별’을 추구할 수는 있다. 우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 매일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가슴 찢어지는 감정노동을 반복하는 삶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뼈에 가까운 삶이 가장 달콤하다
"자기계발을 하겠다며 온갖 것들에 기웃거리지 말라. 다 쓸모없는 짓이다.
뼈에 가까운 삶이 가장 달콤하다. 영혼의 필수품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

월든을 일상 속으로 초대하는 법
"우리는 기계의 도움 없이 이른 새벽에 새로운 하루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깨어나서,
하루 종일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가장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도, 새벽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일상 자체를 최고로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하루하루 완전히 깨어 있는 삶. 자신의 가장 빛나는 천성을 저버리지 않는 삶. 자기 안의 최고의 빛을 매일 이끌어내는 삶. 그 어떤 안락함이나 쾌락에도 중독되지 않는 삶을 찾아야 한다. 새벽에 대한 무한한 설렘으로부터 깨어나, 그 깨어 있음을 하루 종일 유지하는 기술은 삶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든다.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삶에는 그 어떤 방해물도 끼어들지 못한다.

더 오래, 더 깊이 바라보기
"잠시만 우리가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커다란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정한 무관심 - 함께 살기 위한 개인주의 연습
한승혜 지음 / 사우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이 여성성을 상징하는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성별 고정관념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의도치 않게 강화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성주의에서 탈코르셋을 응원하고 권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무조건 어때야 한다’는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여성이 진정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일부 극단적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이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이들을 비난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탈코르셋’은 어디까지나 여성 개개인이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는 데 의의가 있을 뿐, ‘여성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기표를 전면 부정하고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획일화를 거부하고자 시작된 운동이 또 다른 획일화의 강요로 이어지는 것은 곤란하다. ‘긴 생머리’에 대한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거꾸로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없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딸이 공주 이야기를 들려달라거나 공주 의상을 입고 싶다고 할 때 고민하다가 결국 보여주거나 입혀주는 경우가 많다. 아이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기도 한다. 흔히 우리가 보고 들어왔던 공주 이야기 속 공주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 이 세상에 더 재미있고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그러한 말들이 향후 딸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아이가 다양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자신의 취향을 갖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타인의 취향도 존중할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별에 지배받지 않는, 한 명의 개인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여성으로 구성된 여대에서는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 중 성별이라는 기준이 아예 사라져버린다. 살면서 무수히 경험하고 들었던 "여자가 어떻게", "여자라서" 혹은 "여자니까"의 이유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레 스스로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된다. 마치 《어둠의 왼손》에 등장하는 게센인들과도 같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여대는 여성들 스스로가 가진 다양한 층위를 깨닫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흔히 성차가 사라지면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이라는 장막을 한꺼풀 걷어낸 뒤에도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여전히 다양한 차별이 남는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를 경험한 여성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매우 복합적인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자신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는 있으나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정한 무관심 - 함께 살기 위한 개인주의 연습
한승혜 지음 / 사우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상벌이 그가 속한 집단에게 공동으로 부여되는 것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국가, 성별, 인종, 가족, 학교와 같은 ‘반강제적’ 집단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으로 그의 부모나 자식이 함께 비난을 들어야 마땅한가? 범죄자의 자식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나? 재미동포가 저지른 범죄는 한국인 전체의 잘못인가? 아시아인이 저지른 과오는 아시아인 모두의 공동책임인가?

물론 누군가의 과오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단 전체에게 추궁하는 것은 매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표적을 필요로 하며, ‘집단’은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압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이며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여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류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은 대개 어떤 혐오의 감정이나 개인의 잘못을 특정 집단에게 덧씌우려 해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시대에 성별 갈등이 심해서 큰일이라고. 역시 페미니즘이 문제라고. 인터넷에 득실거리는 흥분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해악을 좀 보라고. 글쎄,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 때문일까? 페미니즘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어떠한 이념 안에서 극단적으로 변한 개인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단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라 지역, 인종 등 온갖 지표를 둘러싼 모든 갈등 안에 ‘광신적인’ 움직임이 있다. 이 세상 모든 남성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극렬 페미니스트의 발언이 문제라면, 지금의 모든 갈등이 페미니즘 때문에 일어난다는 주장 역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은 본래 불안한 존재이며, 불안한 개인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에너지와 충동을 잊기 위해 몰두할 대상을 찾아 자주 헤맨다. 그리고 대상을 찾아낸 이후에는 불안과 번뇌를 잊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거나 헌신적으로 돌변한다. 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불안한 자아를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예술이나 학업일 때는 긍정적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종교나 정치, 어떠한 이념이 되었을 때는 종종 큰 문제가 생겨나기도 한다. 과잉된 신념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며,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는 자주 밖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고 집단에 의탁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는 맹목적인 충성심을, 타 집단에는 격렬한 배척과 혐오감을 갖기 쉽다.

결국 집단과 무리에 기대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 전체의 갈등과 분열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된다면, 불안과 결핍을 잊고자 무언가에 의탁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 우뚝 선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좀 더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은 복잡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우리가 사는 이곳을 무결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지금보다 애쓴다면, 그러한 세상에 조금 더 근접해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간섭과 참견을 하지 않는, 나와 다른 타인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당한 무관심의 사회. 그러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을 잊지 않는, 서로에게 다정한 사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다정한 무관심’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효자동 구텐 백
백경학 지음 / 푸르메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내의 교통사고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 새삼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 주위에는 선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는 소식은 대부분 어두운 것들이었고 나 역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기사보다는 어두운 문제점을 파헤치는 기사를 주로 썼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잠만 깨면 접하는 무서운 소식으로 눈뜨기가 겁나는데, 네가 쓴 기사도 그 못지않게 무섭더구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재단 활동을 하면서 세상에 악한 사람보다는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매일매일 절감하게 되었다.

총장님은 "절대로 부자가 앞장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겨우 먹고 살 만한 사람이나 살기 어려운 사람이 오히려 흔쾌히 이웃을 돕는 법입니다. 거절당했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다섯 번은 두드려야 마음이 움직이는 법입니다" 라며 나를 위로하셨다. 그날 나는 총장님께 마음속으로 큰절을 올렸다.

자네 이름이 뭔가? 무엇을 하기에 앞서 자네 자세부터 고치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곧추세우게. 늘 바른 자세로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게!" 많은 문답이 오갔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함석헌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거목이 지적하셨던 ‘바른 자세로 바른 생각을 하라’는 말씀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함석헌 옹을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날 하신 말씀은 이후 내 삶의 좌표가 되었다. 소련 쿠데타 때 파견돼 내전 상황을 기사로 쓸 때, 강원도 백담사에 은둔했던 전두환 씨를 취재하기 위해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벌벌 떨 때, 국내 최초로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를 만들기 위해 투자 설명회를 하러 다닐 때, 푸르메재단 설립허가를 위해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닐 때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곧추세우라"는 그 말씀이 화두처럼 내 가슴을 때렸다. 넘어질 때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나는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와의 향기 나는 만남을 되새기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